[매묵]2023년 8월 23일 수요일[(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23일 수요일[(녹) 연중 제20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보소서, 저희 방패이신 하느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 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본기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이지 않는 보화를 마련하셨으니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일으키시어
언제나 어디서나 하느님을 오롯이 사랑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참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판관기의 말씀입니다.9,6-15
그 무렵 6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스켐에 있는 기념 기둥 곁 참나무 아래로 가서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
7 사람들이 이 소식을 요탐에게 전하자,
그는 그리짐 산 꼭대기에 가 서서 큰 소리로 이렇게 외쳤다.
“스켐의 지주들이여, 내 말을 들으시오.
그래야 하느님께서도 그대들의 말을 들어 주실 것이오.
8 기름을 부어 자기들의 임금을 세우려고 나무들이 길을 나섰다네.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고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였네.
9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 풍성한 기름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0 그래서 그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1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이 달콤한 것, 이 맛있는 과일을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2 그래서 그들은 포도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3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네.
‘신들과 사람들을 흥겹게 해 주는 이 포도주를 포기하고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
14 그래서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그대가 와서 우리 임금이 되어 주오.’ 하였네.
15 가시나무가 다른 나무들에게 대답하였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 당신 구원으로 얼마나 즐거워하나이까! 당신은 그 마음의 소원 이루어 주시고, 그 입술의 소망 내치지 않으셨나이다. ◎
○ 은혜로운 복으로 그를 맞이하시고, 그 머리에 순금 왕관을 씌우셨나이다. 그가 당신께 살려 달라 빌었더니, 영영 세세 긴긴날을 주셨나이다. ◎
○ 당신 구원으로 그 영광 크오며, 당신이 존귀와 영화를 내리시나이다. 그를 영원한 복이 되게 하시고, 당신 앞에서 기쁨이 넘치게 하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하느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또는>
요한 6,5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성사로 저희에게 그리스도의 생명을 주시니
저희가 세상에서 그분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늘에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2023년 가해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들이 덜 사랑 받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곧 구원이라는 같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들어가는 하늘 나라라면 첫째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값인 한 데나리온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그것에 충분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랄 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적어집니다. 우리의 바람이 오로지 구원, 하나로 모아질 때 하늘에서 그만큼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먼저 하루 종일 일한 종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이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하다고 여긴 이들입니다. 일찌감치 구원의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문제점은 더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한 가지 죄로라도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 대부분은 그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유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서야 부름을 받고 일하러 온 종들은 ‘이렇게 적게 일했는데도 과연 한 데나리온을 다 주실까?’라며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 열심히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호날두, 네이마르, 벤제마 등 유명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발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엄청난 연봉 때문입니다. 메시도 호날두 연봉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 6,000억에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봉 700억에 미국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를 잘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능력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메시는 현재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메시 덕분으로 미국 리그가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꼴찌팀 인터 마이애미를 일곱 경기만에 전승으로 창단 이래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하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할머니께, 그리고 성호경을 그으며 하느님께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바라고 안주하는 삶이 행복할까요?
만약 어떤 아이가 ‘나는 이미 자녀인데 뭐!’라며 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이제 집에서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평’입니다. 자녀인데 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진을 멈추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데 생각보다 보상이 적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보상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 신부님은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인 사제가 돼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결혼하기까지 고생한 것을 누리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생기고 그 탓을 상대에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합니다. 혹은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여러모로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는 편해 보여도 사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정진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거나(“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요한 1,1.2) 아버지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할 때(“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요한 1,18)라고 말할 때 전치사 ‘프로스’(pros)를 쓰거나 ‘에이스’(eis)를 씁니다. 이것은 사실 ‘함께’나 ‘가까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사물이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치사들입니다.
요한은 결코 아드님과 아버지를 이미 고정되어버린 관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는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당연히 구원된 사람들처럼 이제 누리려고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 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노사연의 노래 중에 ‘만남’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만남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나 영향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노사연의 노래는 그런 만남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편했고, 가르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고, 친구들의 영향도 있어서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느 조직보다 견고한 조직에 속해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갈릴래아의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 하혈하던 여인은 감히 말은 못하고 예수님이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절한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사울’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죄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만났던 그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 받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22.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아닌지요?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하늘 나라의 구원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다-
"영원토록 동정이신 마리아,
세상의 지극히 높으신 여왕이시여,
당신은 온 인류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낳으셨도다."
아침 성무일도 즈가리야의 후렴이 잔잔한 위로를 줍니다.
-“한미일 사실상 ‘군사동맹’....격랑 한복판 선 한반도”-
어제 어느 일간지 1면의 톱기사 제목에 마음이 참 착잡했고 이어 다른 칼럼 내용에 충격과 더불어 공감한 내용 일부를 나눕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서 퍼디낸드가 폭풍우 속에서 외친 말이다. “지옥이 비었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말은 다음과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여기가 지옥이다. 악마들은 모두 여기에 있다.”... 불길은 점점 거세져 지구 기온이 계속오르고 있다.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지구온난화 시대가 끝나고 지구가 들끓는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과학은 이미 악마편에 선 것 같다.
지구전체 인구의 2배가 먹을 만큼 식량이 생산되지만, 매일 최소 약1만4천명, 매년 약500백만명이 굶어 죽는 건 식량이나 첨단 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지난해 그 과학이 만든 전쟁무기로 사망한 사람이 4만3천명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어느새 무기 수출 세계 8위, 성장률 1위 국가가 됐다.
망각과 둔감은 지옥의 단어다. 잊으라, 용서를 강요하는 자가 악마다. 신곡의 입구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들어오는 그대들이여,” 희망을 가질수 없는 곳이 지옥이란 말이다. 지금 이곳이 지옥이다. 악마는 모두 여기에 있다.”
지옥은 텅비어 있으니 지옥에 있는 악마들이 모두 나와 활개치고 있는 세상이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이미 여기서 시작된 지옥입니다. 이미 그런 징후는 곳곳에 차고 넘칩니다. 반대로 이미 여기서 시작된 천국이요 하늘 나라입니다. 희망이 없는 지옥같은 세상에서 희망의 천국을 살아내야 할 우리 믿는 이들이요 그럴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처럼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 40장1절 말씀이 문득 떠오릅니다. “위로하여라,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어제 26년전 제 자작시 달개비꽃을 어느 좋은 분이 시화詩畫로 만들어 선물로 보내 주었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달개비꽃 시화를 나눴고 위로를 받았다는 감사인사도 받았습니다. 달개비꽃시 전문을 인용합니다. 요즘 아주 낮은 그늘진 곳에서 영롱하게 피었다 잠시후 지는 남보랏빛 작은 야생화 달개비꽃입니다.
“오!
하느님이 밤사이 쏟아놓은 남보랏빛
생명의 보석들!
아주 낮은
그늘 속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아무도
주워가지 않는
생명의 보석들!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져갈 수 없는 달개비꽃
생명의 보석들!”-1997.8.25
26전 요즘 여름철에 쓴 시입니다. 이때의 시적감성이 그립습니다. 이 시화 선물에 대한 어느 분의 답신입니다.
“요즘 한참이나 힘들었습니다. 신부님이 어떻게 아시고 생명의 보석꽃을 보내셨을까요. 제 마음 아시는 주님처럼 신부님이 참 신기합니다. 남보랏빛 진한 바다 물빛 작은 달개비꽃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참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얼마나 위로의 구원을 갈망하는지 모릅니다. 주변을 보면 예외없이 온통 아프고 위로 받아야 할 참 마음이 가난한, 쓸쓸한, 외로운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위로에 굶주려 있다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작은 시 하나에도 감격하여 고마워합니다.
어제 저녁식사후 세기시 수도원에 잠시 거주중인 젊은 몇분 형제들에게 “겸손의 수련”으로 여기며 잘 지내시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고 만족했습니다. 사실 많은 이들이 끊임없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 휴식의 구원을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수도원의 환대는 그대로 주님의 환대를 반영합니다.
오늘 복음은 부자의 구원 가능성에 대해 주님은 의미심장한 답을 주십니다. 부자가 구원받는 것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할 것이란 말씀은 부자의 구원은 불가능할뿐더러 이렇다면 모두의 구원 역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구원을 받을 것인가, 그것 역시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의 반문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눈여겨 보시며 최고의 명답을 주십니다. 결론하여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참으로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새로워질 때, 모든 삶의 어려움을 주님을 닮아가는 겸손의 수련, 겸손의 계기, 비움의 수련, 비움의 계기로 삼을 때, 그리하여 작은, 가난한, 겸손한 영혼으로 살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부자라도 하느님의 회개 은총으로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고 나눔에 항구하다면 이런 부자의 구원은 너무나 자연스러우니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가난하다 해도 마음이 탐욕이나 부자에 대한 질투로, 증오로 가득차 있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무일도시 힘차게 불렀던 몇 성구가 떠오릅니다.
“주께서 나의 빛 내 구원이시거늘 내 누구를 두려워하랴.”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하느님을 뵈오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바로 우리의 구원은 하느님께 달려 있음을 보여줍니다.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이라 하느님을 추호도 탓할 수 없습니다. 무지한 인간의 탐욕으로 자초한 재앙이요 불행의 연옥이요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참으로 주님의 회개 은총으로 지옥같은, 연옥같은 세상에서 날마다 거듭 새롭게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아 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파스카의 삶이요 이의 빛나는 모범이, 연옥같은, 지옥같은 세상에서 하늘 나라 천국을 살았던 분이 바로 오늘 기념하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입니다. 특히 잠자리에 들기전 성모찬송가는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요!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세상살이 끝날 그때 당신 아드님, 우리 주 예수를 뵙게 하소서. 너그러우시고, 자애로우시며, 오! 아름다우신 동정마리아!”
우리의 희망과 기쁨, 위로의 샘이신 동정마리아 성모님이 구원받은 자의 빛나는 모범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던 주님과 하나되어 살았던 주님의 천사로부터 격찬을 받았던 우리 어머니 성모님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참으로 회개로 깨끗해진 미사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언젠가 이 보속 말씀 처방전을 받고 환호하던 어느 수녀님의 탄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신부님! 보속이 아니라 보석입니다. 생명의 보석 말씀입니다!”
그 빛나는 모범이 동정마리아 성모님에 이어 제1독서 하느님께 불림 받아 주님의 천사를 통해 하느님을 만난 기드온 판관입니다. 기드온을 찾아 온 주님의 말씀에 이어지는 주고받은 대화입니다.
“힘센 용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너의 힘을 지니고 이스라엘을 미디안족의 손아귀에서 구원하여라. 바로 내가 너를 보낸다.”
“보십시오, 저의 씨족은 므나쎄 지파에서 가장 약합니다. 또 저는 제 아버지 집안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자입니다.”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겠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그대로 위로의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대목도 은혜롭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제가 이렇게 얼굴을 맞대고 주님의 천사를 뵈었군요!”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결코 죽지 않는다.”
기드온은 그곳에 주님을 위한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주님은 평화’라고 하였다.-
똑같은 위로와 격려의 주님께서 이 거룩한 제단의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우리 모두 하늘 나라 천국의 일꾼으로, 위로와 평화의 사도로, 희망과 기쁨의 사도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하십니다.
"당신 성자의 모친을 우리의 어머니와 여왕으로 모시게 해주신 하느님,
그의 전구로 보호를 받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서 당신 자녀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아멘.
[8/23(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 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전삼용 신부)
2.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에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눈여겨 보시며 최고의 명답을 주십니다. 결론하여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이수철 신부)
[8/23(수)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242 기도일]
복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라는 말씀.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과업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늘상 기쁘고 즐거우며 행복하게 수행하게 하소서.
남과 비교하며...
옳고 그름, 많고 적음, 좋고 나쁨을 분별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23일(수) 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