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8월 28일 월요일[(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8. 28. 08:49

[매묵]2023년 8월 28일 월요일[(백)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354년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의 타가스테(현재 알제리의 수크아라스)에서 모니카 성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하며 마니교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끊임없는 기도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으로 회개하고 입교하였다. 391년에 사제가 된 그는 5년 뒤 히포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아우구스티노 주교는 이단을 물리치고 교회를 수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며 참회의 자서전인 「고백록」 등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430년에 선종한 그는 중세 초기부터 ‘교회 학자’로 존경받고 있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주님이 그를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충만하게 하시어, 회중 가운데에서 그의 입을 열어 주시고, 영광의 옷을 입혀 주셨네.

본기도

주님,
일찍이 복된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부어 주신 그 정신을
주님의 교회 안에서 새롭게 일깨우시어
저희도 그 정신을 따라 참된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을 그리워하고
영원한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을 찾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섰습니다. 다시 일으키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여러분이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시작입니다.1,1-5.8ㄴ-10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2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3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4 하느님께 사랑받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이 선택되었음을 압니다.
5 그것은 우리 복음이 말로만이 아니라
힘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여러분에게 전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위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어떻게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8 하느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이 곳곳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9 사실 그곳 사람들이 우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여러분이 우리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여러분이 어떻게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10 그리고 여러분이 어떻게
하느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그분의 아드님,
곧 닥쳐오는 진노에서 우리를 구해 주실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오실 것을 기다리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9,1ㄴㄷ-2.3-4.5-6ㄱ과 9ㄴ(◎ 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신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충실한 이들의 모임에서 찬양 노래 불러라.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분을 모시고 기뻐하고, 시온의 아들들은 임금님을 모시고 즐거워하여라. ◎
○ 춤추며 그분 이름을 찬양하고, 손북 치고 비파 타며 찬미 노래 드려라. 주님은 당신 백성을 좋아하시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여 높이신다. ◎
○ 충실한 이들은 영광 속에 기뻐 뛰며, 그 자리에서 환호하여라. 그들은 목청껏 하느님을 찬송하리라. 그분께 충실한 모든 이에게 영광이어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요한 4,7-16)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구원의 제사를 거행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오니
이 자비의 성사가 저희에게 일치의 표지가 되고
사랑의 끈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마태 23,10.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 스승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그리스도의 잔치에 참여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성녀 모니카의 아들인 아우구스티누스는 방탕한 삶과 이단인 마니교에 빠졌다고 회심하여 기도와 학문에 매진하였습니다. 로마제국의 멸망과 반달족의 침입으로 어려운 시대에 사회, 사상, 신학 저술을 통해 중세 철학과 신학의 뼈대를 세운 교부 철학자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 눈먼 인도자: 규칙만을 강조하는 자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법 체계 안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 법인지, 무엇이 덜 중요한 법인지를 헷갈리게 만들어 사람들이 작은 계명에 에너지를 집중하게 합니다. 그러며 정작 더 중요한 사랑과 정의, 자비와 의로움 같은 법은 잊게 만듭니다. 

 

    그들은 바로 옆에 사람에게 충실하지도 못하며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며,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성전의 황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전의 황금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 성전에 거하시는 하느님이신데도 말입니다. 또 제단 위의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하지만,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하느님보다 황금을 더 섬기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이전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이러한 일은 여전히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은 성전보다 황금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는 않나요? 성당을 굳이 그렇게 많은 돈을 들여 지을 필요가 있을까요? 요즘은 조립식으로 지어도 20~30년은 거뜬합니다. 사실 건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은 건물이 아닌 사람들 안에 사십니다. 

제단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단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그 자리가 거룩해져서 하느님께서 오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보다 더 큰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거기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해 성사를 한다고 할 때 우리가 보속을 하지 않으면 마치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죄가 씻기는 것은 우리가 하는 보속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값 때문입니다. 

 

    소 신부와 호랑이 신랑이 결혼하였습니다. 소 신부는 호랑이 신랑에게 샐러드만을 주었습니다. 샐러드는 몸에 좋습니다. 그러나 호랑이 신랑은 샐러드만 먹으며 점점 인내력에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고기를 물어옵니다. 하지만 소 신부는 자꾸 고기만 물어오는 호랑이 신랑이 밉습니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있습니다. 서로 상대를 위해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많은 법에 매몰되어 정작 상대의 마음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마음을 알아주면 모든 법은 저절로 지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법만을 강조하면 마음을 잃습니다. 

 

    영화 ‘위플래시’(2014)에서 플레처는 자신의 음악적 위대함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가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학생들을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것을 믿는 매우 존경 받고 동시에 두려운 음악 강사입니다. 앤드류는 음악, 특히 재즈에 대한 열정을 지닌 젊은 드러머입니다. 그는 최고가 되고자 열망하며 플래처 밑에서 학생이 됩니다. 플래처의 극도의 규율과 완벽함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앤드류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하지만 자기 행복과 개인적인 관계를 위험에 빠뜨리게 만듭니다. 플래처의 기대에 부응하려는 앤드류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고로 몸이 아픈데도 연주에 참여합니다. 결국 앤드류도 학교에서 퇴학 당합니다. 

    플래처는 법과 같습니다. 그 법을 지키면 분명 위대한 드러머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위대한 드러머가 되려는 이유는 행복 때문입니다. 플래처는 그 사랑과 행복을 포기하게 하면서 길을 잃게 만드는 못된 선생입니다. 언제나 목적을 위해 법 만을 강요하는 이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사들은 율법의 디테일만을 강조합니다. 그러다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운전을 배운다고 합시다. 운전을 잘하기 위해 차의 조작법과 스킬을 열심히 배웁니다. 그래서 운전을 잘하게 됩니다. 하지만 너무 잘해서 사고가 나는 수가 있습니다. 운전의 정신은 안전입니다. 세세한 규정이나 규칙에 집중하다 보면 그 정신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 가게에 찾아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어떤 때 그 사람들이 속이는 것 같기도 하고 돈을 주면 술을 사 마시기 때문에 돈을 갚으라고 하며 주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제대로 한 것인지 걱정을 합니다. 이런 때는 이렇게 하고 저런 때는 저렇게 하라는 식으로는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물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의 정신입니다. 

 

    모든 법은 그 만든 당사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법을 통해 당사자의 마음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잘못된 인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치중하게 하여 그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어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율법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은 지금 나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자주 자신 안에 계신 성체께 여쭈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학자


  •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오늘 독서는 테살로니카 전서의 시작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테살로니카 서간은 신약의 27권 중에 가장 먼저 기록된 것이라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교여행을 하였고,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공동체에 문제가 생기면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먼저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최초의 편지가 테살로니카 전서입니다. 저는 지난번 그리스와 터키를 순례하면서 테살로니카를 방문하였습니다. 바닷가에 위치한 큰 도시였습니다. 2000년 전 테살로니카 공동체는 3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첫 번째는 이방인들의 박해입니다. 테살로니카 교우들이 혈연관계, 사회적 관계를 끊어 버리고 자기들만의 배타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아가자 주위 이방인들은 미풍양속을 해치는 행위로 보아 박해하였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를 모내어 박해 중에 동요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굳건히 살 수 있도록 격려하였습니다. 제가 운영하는 신문사도 어려움이 있습니다. 구독자의 수는 줄고, 인쇄비용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은 전자신문을 발행할 수 있도록 준비하려 합니다.

 

두 번째는 재림 지연 문제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심판관으로서 재림 할 것임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을 보기도 전에 주변의 동료 교우들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떠오른 질문은 죽어버린 형제들은 어떻게 되는가?’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죽어 버린 형제들이 언제가 주님이 다시 오신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고 보고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또 살아 있는 자기들도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지금의 이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쯤일까?’라는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죽은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재림 시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합니다. 재림 시기는 결정되지 않았기에 깨어 기다려야 한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날이 언제 올지 모르니 너희는 깨어 기다려라.” 많은 이단들이 주님의 재림을 특정하였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특정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방탕한 생활 문제입니다. 종말이 꼭 올 것이라고 믿었던 종말론 열광론자들은 현실의 책임과 윤리를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임박한 재림 안에서 테살로니카 교우들 중 일부는 일상적 삶에 성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올 것이기에 일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면서 남의 도움에 의존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 손으로 일해 충당하며, 조용히 살고, 자기 자신의 일에나 신경 쓰도록 권고 합니다. 또한 하느님의 뜻은 음탕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군대 있을 때입니다. 제대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을 마침표로 만들면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예전에 어른들은 유종의 미를 거두라고 하였습니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지 말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도 교구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신문을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사목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오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이 땅의 사제들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27. 연중 제21주일.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연중 제 21 주일입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극성스런 태풍과 장마비도 지나갔습니다. 가을의 길목입니다. 결실이 영글어 갈 때입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무엇이 영글어가고 있을까요?
 
오늘 [말씀전례]의 핵심단어는 “열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1독서>는 예언자 이사야의 이방민족들에 대한 신탁 중에서 세브나에 내린 심판의 끝부분입니다. 세브나는 앞 절에 따르면, 히즈키야 임금 시대에 궁궐을 관리하는 시종장이었는데,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우선시 하는 권력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관직에서 내쫓으시고, 힐키야의 아들인 엘야킴에게 권력을 넘겨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이사 22,22). 바로 이 말씀이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9)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이, 진실한 이, 다윗의 열쇠를 가진 이,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는 이”(3,7-8)로 표현됩니다.

<제2독서>는 바오로 사도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들의 구원문제를 다루는 <로마서> 9-11장의 마무리 부분 ‘하느님 찬미가’입니다.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로마 11,36). 여기에서는 세 개의 전치사, 곧 (그분) ‘에게서’.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를 사용하여, 하느님께서는 만물의 근원이시고, 만물의 길이시며, 만물의 목적이심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만 속한 것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노래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행동하고,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를 바라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생각하느냐?”(마태 16,13)라는 질문으로 시작 됩니다. 그리고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하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 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 당시 제 2성전 유다이즘에서 메시아는 ‘하느님으로부터 보내진 임금이나 사제 혹은 예언자로서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마태 16,16)으로 표현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메시아인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느님과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권한을 부여하십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놀라운 신비, 곧 교회의 신비가 있습니다. 교회는 이 계시의 ‘신앙 위’에 세워질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가 주어지고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이 부여됩니다.
 
이는 그가 행한 것을 “하늘에서” 그대로 인정해준다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사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오늘,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이신가?”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를 따라 살고 있는가?” 하고 다시 물어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묻는 것은 하나의 도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관심과 기준이 아닌, 아니 오히려 반대되는 관심과 기준을 지니신 예수님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의한 인간의 사고방식과 행동양식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체제와 구조에 대한 도전이었듯이 바로 지금 우리 시대의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질서를 허물어뜨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섬김으로서 서로를 먹여 살리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대안으로 제시하시고 실천하셨기에, 우리도 또한 이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그렇게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질문은 나는 지금 기존의 질서와 가치와 행동양식에 여전히 머물러 살고 있지는 않는지, 또 예수님이 제시하시는 새로운 질서와 가치에 따라 행동하고 있는지를 액면 그대로를 보게 하고, 마치 부자청년에게서처럼 우리의 민낯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오! 하느님”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하느님,

 제 마음이 당신을 향하여 있사오니

 주여 이 종의 영혼에게 기쁨을 주소서.”(시편86,6)

 

"어서와 하느님께 노래부르세.

 구원의 바위 앞에 목청 돋우세. 알렐루야."

 

독서의 기도 초대송 후렴의 하느님 찬미로 하루를 활짝 연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제 참 좋아하는 성가 둘은 둘 다 “오!”로 시작됩니다. “오! 아름다워라”와 “오, 감미로워라”로 시작되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성가입니다. 만일 언젠가의 제 장례미사 때에는 입장성가와 퇴장성가는 이 두곡을 부탁해 두고 싶습니다. 강론과 또 묘비명이 가능하다면,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제 애송 좌우명 고백기도시로 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입니다.

 

어제 오랜만에 4개 본당 꾸리아 간부들 40여명의 하루 수도원 피정을 지도했습니다. 모두가 참 아름답고 성실해 보이는 밝고 환한 모습들이었습니다. 파견미사전 잠시 둘을 공지했습니다. 

 

“입당성가는 못했고 퇴장성가로는 애국가를 부릅시다.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가사가 들어있어 성가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그리고 함께 주님의 제대앞에서 기념촬영을 합시다.”

 

지난 주일 미사 강론 때 애국가를 부른 이후 두차례의 단체피정때마다 애국가를 부른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가사를 들을 때는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얼마나 숙연한 분위기인지 모두가 한마음, 한사랑의 애국자처럼 느껴졌습니다. 1절까지 기대했는데 무려 2절까지 불렀고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나라도 국민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중 동해는 일본해로 바뀌었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애국가 가사는 어떻게 되고, 독도는 어떻게 되나 하는 언짢은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제 일간지 둘은 1면 톱기사와 첫째 사설은 둘 다 “독립영웅 흉상 철거하는 육사”라는 제하에 이념이나 정파를 떠나 올바른 역사관으로 볼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립영웅은 누구나 아는 일제치하에서 나라독립에 몸바쳤던 홍범도 장군, 지청전 장군, 이회영 선생, 이범석 장군, 김좌진 장군의 다섯분 애국자분들입니다. 요즘 몇 번 미사중 이런저런 착잡한 마음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라와 국민의 안위를 위해 애국가를 부르며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피정대표자가 보내준 사진도 참 아름다워 즉시 답신을 보냈습니다. 

 

“모두 활짝 웃는 모습이 활짝 피어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오늘 사진처럼 사세요!”

 

답신을 보냈습니다. 웃으면 꽃같은 참사람 얼굴인데, 똑같은 얼굴도 분노나 두려움, 걱정으로 이그러져있으면 괴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고백성사 보속시 말씀처방전에는 꼭 “웃어요!”라는 스탬프도 찍어 드립니다. 얼마전 주고 받은 덕담의 메시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언제나 그곳 그 자리에서 누구나 환대하시는 울 신부님! 신부님의 사랑과 겸손, 넉넉한 성품은 그 자체가 저희에게는 위로와 치유가 됩니다.”

“사랑하는 자매님 존재자체가 저에게도 위로가 치유가 됩니다. 감사합니다!”

 

서로서로에게 위로와 치유가 되도록 합시다. 그러나 궁극의 위로자요, 치유자는 삼위일체 하느님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는 성사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 제목은 “오, 하느님!-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로 정했습니다.

 

첫째, 성부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살아 있는 하느님과의 만남보다 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은 없습니다. 어제 피정중 참 많이 강조한 하느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바로 이를 위한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가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의 의무임을 강조했습니다.

 

수도원은 하느님의 집이고, 수도자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수도자의 기도는 하느님의 일이니 하느님은 수도자의 존재이유임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하느님을 빼버리면 말그대로 허무와 무지의 어둠입니다. 제2독서 바오로의 하느님 찬미가는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감동인지요!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적이 있습니까? 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존엄한 품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은 주일이라 기념미사는 생략되지만 성녀 모니카(331-387)의 기념일이고, 내일은 성녀의 아드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마지막 아드님에게 주신 유언도 감동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신비에 젖어 살았던 성녀 모니카입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선 세상 낙이라곤 인제 아무것도 없다. 현세의 희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인지,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했던 것은 한가지 일 때문이다. 내가 죽기전에 네가 기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천주께서 과람하게 나한테 베풀어 주셨다.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그분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내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느냐?”

 

자식 걱정에 노심초사하는 성녀를 위로한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어머니가 많은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한 자녀는 잘못되는 법이 없습니다.”라는 만고불변의  조언도 우리에겐 감동입니다.

 

둘째, 성자 그리스도 예수님을 고백합시다.

믿음의 고백, 희망의 고백,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백기도와 함께 가는 믿음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 너희와 언제나 함께 있겠다.” 확약하신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스승이요 도반이 되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알아야 참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음이라면 성자 예수님은 답입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만이 성자 아버지께 이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고백을 대변한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의 믿음이 고맙습니다. 예수님의 단도직입적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통쾌한 답변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감격에 벅찬 예수님의 축복을 가득 받은 베드로이지만 이후의 행적 또한 우리에겐 분발의 노력과 더불어 믿음의 여정에 더욱 충실하겠다는 각오를 지니게 합니다. 곧장 주님의 길을 막음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호된 질책에 또 후에는 세 번씩이나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였고, 부활후 발현하신 주님은 세 번 연거푸 베드로에게 약속을 받아 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주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믿음의 고백에 이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성부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성자 예수님 사랑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의 두 가르침도 잊지 못합니다. “그 무엇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 무엇도 하느님의 일보다 앞세우지 마라.”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하느님께 바치는 기도보다 그 무엇도 앞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셋째. 교회를 사랑합시다.

성령께서 도와 주십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바로 우리의 삼중신원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고백후 주님의 격찬이 우리에게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참으로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의 반석이라 불리게 된 베드로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님께 실현되었고 예수님은 자신의 절대적 권능을 베드로에 위임함으로 당신의 권능에 합류시킵니다.

 

“나는 다윗 집안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메어 주리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으리라.”

 

여기 그가 가리키는 바 예수님이요, 이런 예수님의 엄청난 일을 그대로 베드로에게 위임하여 자신의 구원섭리에 동참하게 하셨으니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우리 역시 또 하나의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께 합류하여 주님의 교회가 된 우리들입니다. 교황님의 호소가 절절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교회를 수호하십시오.”

 

더욱 하느님을 사랑하듯 예수님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교회를 이루는 성체성사 미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교회사랑, 미사사랑이었습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친교를 깊이 하시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람, 그리스도의 사람, 교회의 사람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하느님,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시고, 제 마음을 이끌어 주사,

 당신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시편86,11). 아멘.


[8/28(월)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잘못된 인도자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에만 치중하게 하여 그 정신을 잃게 만듭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게 되어 길을 잃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율법 가운데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하느님은 지금 나에게 이럴 때 어떻게 하기를 원하실까?’를 자주 자신 안에 계신 성체께 여쭈어야 합니다.(전삼용 신부)

 

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나무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2000년이 지난 오늘의 사목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오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였던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이 땅의 사제들과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사랑하게 하시어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 

 당신의 길을 내게 가르치시어,

 그 진리 안에서 걷게 하시고, 제 마음을 이끌어 주사,

 당신 이름을 두려워하게 하소서.”(시편86,11). 아멘.(이수철 신부)

 

[8/28(월)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제 247일 기도]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사제들아! 

자기들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개종자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눈 먼 인도자들, 위선자 사제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성부 성자 성령의 말씀에 오직 예, 아니오 답할 수 있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28일(월)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