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8월 29일 화요일[(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8월 29일 화요일[(홍)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임금들 앞에서 당신 법을 말하며, 저는 부끄러워하지 않으오리다. 당신 계명을 되새기며 끝없이 사랑하나이다.
본기도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복된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성자의 탄생과 죽음을 미리 알려 주셨으니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그를 본받아
저희도 끝까지 하느님의 진리를 믿고 증언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17-19
그 무렵 주님의 말씀이 나에게 내렸다.
17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
18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19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입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이야기하리이다.
○ 주님, 제가 당신께 피신하오니,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 의로움으로 저를 건져 구하소서. 제게 귀를 기울이소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이 몸 보호할 반석 되시고, 저를 구할 산성 되소서. 당신은 저의 바위, 저의 보루시옵니다. 저의 하느님, 악인의 손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
○ 주 하느님, 당신은 저의 희망, 어릴 적부터 당신만을 믿었나이다. 저는 태중에서부터 당신께 의지해 왔나이다. 어미 배 속에서부터 당신은 저의 보호자시옵니다. ◎
○ 당신 의로움, 당신 구원의 행적을, 저의 입은 온종일 이야기하리이다. 하느님, 당신은 저를 어릴 때부터 가르치셨고, 저는 이제껏 당신의 기적을 전하여 왔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7-29
그때에 17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18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19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20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21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22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23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24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25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26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27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28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29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광야에서 외치는 복된 세례자 요한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라고 가르치며 용감하게 피를 흘렸으니
이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도 그 길을 올바로 걸어가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에서
복된 요한을 뽑으시어
주님의 길을 준비하는 특별한 영예를 주셨으니
그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송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선구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인류 구원이 다가왔음을 기뻐하였고
태어날 때에 구원의 큰 기쁨을 알렸으며
모든 예언자 가운데에서 그 홀로
속죄의 어린양을 보여 주었나이다.
또한 그는
흐르는 물을 거룩하게 하시는 세례의 제정자 주님께 세례를 베풀었으며
피를 흘려 주님을 드높이 증언하였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능품천사들과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위엄을 찬미하며 끝없이 외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이 대답하였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복된 세례자 요한의 천상 탄일을 기리며
저희가 모신 구원의 성체를 믿고 공경하오니
그 구원의 열매를 미리 맛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저는 이 말을 신학생 때 들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니던 80년대는 저항과 탄압의 시대였습니다. 학생들과 시민들의 요구는 ‘직선제 개헌’이었습니다. 우리의 대통령은 우리의 손으로 뽑아야 한다는 의지였습니다. 이런 저항의 과정에서 꽃잎처럼 많은 젊은이들이 산화하였습니다. ‘박종철, 이한열, 강경대’는 공권력에 의해서 사망하였습니다. 공권력은 강하고, 저항의 힘은 약해 보였지만 깨어 있는 시민들은 ‘직선제 개헌’을 성취하였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까이 오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자유와 민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당시 신학교에도 ‘쇄신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매주 식당의 게시판에는 ‘대자보’가 붙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을 연구하였고, 교회가 나가야 할 방향을 진지하게 토론하였습니다. 교수 신부님들은 신학생들의 열정을 이해하셨고, 후원해 주셨습니다. 어느덧 40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신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잘 알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앞서 구원의 길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도 공권력은 강하였고, 세례자 요한은 약해 보였습니다. 그리고 공권력에 의해서 세례자 요한은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예수님에 의해서 선포되는 하느님나라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칫 뜨거운 불에 다칠 수도 있습니다. 누가 그런 일을 하였을까요? 예언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나라를 이야기 하셨습니다. ‘섬김, 봉사, 희생, 나눔,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고 있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도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으로 보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이루고하 하는 구원의 역사로 볼 수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수난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마르코 6,17-29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확신 속의 순교!
하느님 움직임의 특징은 철저하게도 하향성(下向性) 그냥 계셔도 좋으련만, 굳이 밑으로 밑으로 내려오셔서,
작고 보잘 것 없는 인간과 어울리십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대체로 반대입니다. 철저하게도 상향성(上向性)입니다.
보란 듯이 한번 높이 높이 솟구쳐보고 싶은 욕구,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싶은 욕구, 주전선수가 되고 싶은 욕구,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욕구, 주역, 주인공이 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 조역으로서의 삶, 조력자로서의 삶, 주변인으로서의 삶, 선구자로서의 삶,
예언자로서의 삶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의미 있는지를 알게 되면 생각이 바뀔 것입니다.
오늘 기념일을 맞이하시는 세례자 요한의 삶이 그랬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의 삶은 감독, 또는 작가로서의 삶이었습니다.
감독이나 작가가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 드러내는 것 보셨습니까?
그들은 자신의 작품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들의 역할은 무대의 한 가운데서 화려한 조명을 받는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렌즈의 초점이 맞춰지는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이 확실히 뜨도록, 작품이 잘 나오도록, 무대 아래서 열심히 뛰는 것입니다.
그는 단 한 번도 영화나 드라마에 얼굴을 나타내지는 않습니다만, 작품이 잘 되기만을 바라며 묵묵히 헌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일,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선포하는 일, 그리고 마침내 임무를 완수하고는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는 일이 세례자 요한에게 맡겨진 일이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세례자 요한은 그야말로 완벽했습니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습니다.
예언자로서의 삶이 조금도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조금도 우쭐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선구자로서 지녀야할 본연의 자세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세례자 요한은 자신의 삶에 진지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충실했습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지속적인 의미부여가 계속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신구약을 통틀어 예언자치고 고통이나 십자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늘 세상으로부터 반대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수시로 끔찍한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과 흡사한 방법으로 수난을 당했습니다.
그들의 삶에서 안정이나 평화라는 단어는 꽤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왕의 치부를 신랄하게 지적한다는 것은 죽음과 직결되는 일이었습니다.
왕을 향해 쓴소리를 수시로 남발한다는 것은 간땡이가 부어도 단단히 부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828.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마태 23,17-18)
우리는 살아가면서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우선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사이에서 우선순위를 깜박 놓쳐버리곤 합니다. 물론 더러는 방법상에서 최선이 아닌 차선을 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또는 한 발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 발을 뒤로 물러나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 무엇이 체(몸)이고, 무엇이 용(활용)인지는 알아야 합니다. 자칫 그렇지 못하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위선자요 눈 먼 인도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마태 6,33)
그것은 누가 옳으냐? 누가 잘하느냐? 하고, 서로를 따지고 계산하고 심판하는 삶으로부터 벗어나, 나는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받아들이고 있는가? 라는 인격적인 관계에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일이나 능력 중심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이나 사랑 중심으로의 회귀입니다. 그것은 본질로의 삶, 곧 “실상 필요한 한 가지”를 향하여 달려가는 삶입니다. 그것은 대체, 무엇이 더 중요한가를 묻게 합니다. 곧 금인가?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인가? 예물인가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인가?” 하느님이 계신 곳인가? 아니면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인가? 일을 잘 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을 사랑으로 하는 것인가?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뜻이 실현되는 것인가? 나 자신인가? 아니면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인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하고 기도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처럼, “십자가에 처형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로 작정하였습니다.”(1코린 2,2)라고 할 수 있는 본질을 위한 투신의 삶을 위해서는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을 온전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 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배움의 여정
-"우리는 주님의 평생 학인이다"-
공부해야 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참으로 참삶을 추구하는 자라면 공부는, 배움은 필수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갈망, 배움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궁극의 희망은 하느님께 두고 결코 절망하지 말고 힘차게 하루하루 주님의 평생 학인이 되어 공부해야 삽니다. 배워야 삽니다. 너나할 것 없이 삶의 배움터에서 초보자의 정신으로, 경청과 겸손, 용기와 실행의 정신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해야 합니다.
죽어야 졸업인, 살아 있는 한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이 되어 배우는 것입니다. 요즘은 시국에, 나라에 대한 걱정 때문에 동요부르기 보다는 침묵중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흐르는 강이되어 시냇물 소리 들으며 시냇가를 걷습니다.
“꼭 하늘 비 내려야
흐르는 맑은 물인가?
하늘 비 없어도
늘 깨어 끊임없이, 한결같이
찬미 노래 부르며
맑게 흐르는 시냇물이고 싶다
찬미는 저렇게 하는 거다."
참으로 좌절이나 실망이나 절망함이 없이 한결같이, 끊임없이 주님의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믿는 이들 누구나의 진정한 소망일 것입니다. 참으로 배우는 겸손의 자세로 마음을 열면 배울 것은 무궁무진합니다. 매일 강론 쓰는 이 거룩하고 은혜로운 밤시간은 저에게는 참 좋은 배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어제 주일 바티칸에서 삼종기도후 복음을 바탕한 교황님의 강론도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삶의 행로에서 혼자가 아니다. 살아서 우리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는 현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우리 곁에 예수님이 계시니 불가능한 것은 없다.”
위 요지와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어 8.31-9.4일 까지 몽골 사목 방문에 즈음하여 “나는 모두에게 한 형제로서 몽골을 방문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는 소감을 피력했습니다. “더불어 희망하기(Hoping Together)”란 여정의 모토도 멋졌습니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교회공동체로 부터도 많은 것을 배웁니다. 제1독서 테살로니카 교회는 예수님 사후 20년후 바오로의 열심한 선교로 시작한 50년대 교회의 순수한 모습을 보여주는 반면, 이보다 훨씬 뒤인 80년대에 세워진 유대개종자들을 주로 대상으로 한 마태복음의 마태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눈먼 자들아!”
저주라기 보다는 예수님 삶과 너무나 동떨어진 위선적 행태에 대한 주님의 탄식입니다. "행복하여라", 그 좋은 행복선언이 아니라 불행선언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참으로 무지에 눈먼,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당대는 물론 작금의 교회지도자들, 신자들의 회개와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분별력의 지혜를 상실한, 주객전도, 본말전도의 어리석은 지도자들은 물론 신자들에 대한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에 앞서 테살로니카 초대 교회의 모습은 참 순수하고 아름답고 이상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그 일행의 증언이 이를 입증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여러분을 모두 기억하며 늘 하느님께 감사들 드립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노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기억합니다.”
신망애와 인내의 참 복음적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마지막 대목도 우리에겐 귀한 가르침이 됩니다. 바로 우리는 바오로와 그 일행이 테살로니카 교회가 우상들을 버리고 하느님께 돌아서서 살아 계신 참하느님을 섬기는 신도들의 환대와 또 이들이 부활하시어 곧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한 갈망에 감동된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순수한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의 테살로니카 교회 공동체인지요! 마태복음의 교회 공동체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아마도 위선자들 같은 지도자도 꽤 많았던 마태복음의 교회같습니다.
오늘은 어제 성녀 모니카에 이어 그 아들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참 배울것이 무궁무진합니다. 참 길다 싶지만 배우는 마음으로 나눕니다. 성인은 암브로시오, 예로니모, 대 그레고리오 1세 교황과 더불어 서방의 4대 교부에 속합니다. 약1600년전 분으로 향년 75세로 선종하셨지만 성인의 가르침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은총의 박사(Doctor Gratiae)”로 일컫는 교회학자이며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창설자인 성인은 플라톤, 칸트와 더불어 근원에서 사유하는 철학자로 진리의 연인이라 불립니다. 현재까지 성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철학자나 신학자는 거의 없습니다. 성인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불타는 사랑”이었습니다. 쾌락이든, 여성이든, 학문이든 진리든 그야말로 불꽃처럼 사랑한 성인으로 그의 생애는 “진리를 향한 구원(久遠)의 불꽃”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자신도 성인을 자신의 첫 스승으로 인정했습니다. 토마스 성인이 집필한 내용은 위대하고 온전한 교과서나 어딘가 비인격적입니다. 그러나 성인은 자기 자신과 싸웠으며, 회심한 후에도 싸웠습니다. 이래서 성인의 작품은 극적이고 아름답고 살아있습니다. 성인의 획기적 전환점은 성 암브로시오 주교와의 만남이요 이어진 회심입니다. “집어서 읽어라(Tolle,lege)!”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펴 읽은 로마서 23장13-14절 말씀에 회심한 성인은 나이 32세, 아들 아데오다투스와 세례를 받습니다.
그 이후 시편 7장을 읊으며 선종까지 참 가열찬 분투의 노력을 다한 삶이었고 성인의 업적은 불가사의입니다. 진리에 대한 열애의 성인이었습니다. 성인에게 진리는 학습하는 무엇이 아니라 날마다 먹는 음식이었으며 온 삶 전부를 바쳐 진리를 사랑했습니다. 진리의 관상가가 아니라 진리의 연인이었습니다. 그는 진리를 임이라 부르고 “임위해 우리를 내시었기에 임안에 쉬기까지는 안식이 없다.”고백하면서 고백록을 시작합니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스런 사랑이여, 사랑스런 영원이여! 그대 내 하느님이시니 그대로 향해 밤낮으로 한숨짓노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그 진리를 만나자 “이제 당신만을 사랑하니, 저는 당신만을 섬길 각오가 되어 있나이다.” 고백했고 수도자로서 성직자로서 헌신의 여정을 살았습니다. 성인의 철학적 유언에 해당되는 고백도 감동자체입니다.
“오, 진리여, 늦게야 임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옥에 티도 있듯이 프랑스 신학계의 거두, 하느님의 종 한스 우리스 폰 발타사르의 성인에 대한 객관적인 비평입니다.
“위대하고 거룩한 아우구스티노의 결함이라면 구원역사의 형평성을 깨트렸다는 것이다. 인간의 구원에서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아담에 집중함으로 은총신학이 원죄신학에 짓눌려 버린 것이다. 성인의 심판개념이란 오롯이 원죄로 정향되어 있어서 장차 오실 구원자의 존재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성부께서 모든 심판 권한을 넘겨주신 바로 그 구원자 말이다.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아우구스티노가 지옥에 대해서 단언한 그 모든 지식이 어디에서 왔을까? 신국론은 상선벌악의 원칙에 따라 구원받을 이의 수보다 멸망할 이의 수가 훨씬 많다고 한말은 무책임한 하나의 신학적 타락이다.”
이런 부정적이 면도 참고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의 위대함은 영원합니다.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 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의 각주라 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주옥같은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바로 이에 근거히여 제가 늘 강조해온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란 영적도식의 진리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온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
여기서 연상되는 제가 참 좋아하는 영어 말마디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의 정도도 그러하다).”
삶은 배움의 여정입니다. 겸손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듣고 배워야 할 삶의 스승들을 만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끊임없이 한결같이 듣고 배워 용기있게 실행하는데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은혜를 청합시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의 평생 학인으로 배움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힘을 주십니다. 아멘.
[8/29(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 이 말은 신약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 시작은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광야에 나타난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따랐습니다.
뜨거운 솥을 식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솥을 뜨겁게 하는 아궁이의 불을 빼는 것입니다. 아궁이의 불을 빼내지 않고서는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어쩌면 뜨거워진 솥과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쟁, 이익, 성공, 권력, 욕망, 이기심, 원망,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때문입니다. 제도를 변경하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사람을 바꾸어서 일시적인 효과를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욕망의 불을 빼내야만 새로운 사회가 시작될 수 있을 것입니다. ‘양보, 희생, 사랑, 희망’이 있어야 뜨거워진 솥을 식힐 수 있습니다. 불을 빼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인내가 필요하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조재형 신부)
2.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하느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신과 동행하신다는 확신을 배경으로 한 참 평화가 있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 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서양철학을 플라톤의 각주라 한다면 가톨릭 신학은 아우구스티노의 각주라 하기도 합니다. 성인의 주옥같은 어록중 일부를 나눕니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바로 이에 근거히여 제가 늘 강조해온 '좋은 선택-훈련-습관'이란 영적도식의 진리입니다.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이다.”
“부정의한 법은 법이 아니다.”
“타인의 많은 것을 용서하라. 그리고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마라.”
“참다운 행복이란, 당신으로부터 오는, 당신을 향한, 그리고 당신을 위한 기쁨이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정의가 없다면, 권력이란 강도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우리의 삶을 좋게 하라. 그러면 좋은 시대가 온다.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만든다. 우리의 형편이 달라지는데 따라 시대도 달라진다.”(이수철 신부)
[8/29(화)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제248일 기도]
복음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거듭되는 고통과 시련, 수난과 십자가 앞에서도 예언자들은 흔들림 없이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렸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의연했습니다.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입니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바꾸려는 용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확신 속에서...
하느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확신 속에서...
현실을 바꾸려는 용기를 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8월29일(화)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