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9월 5일 화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9. 5. 08:29

[매묵]2023년 9월 5일 화요일[(녹) 연중 제22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86(85),3.5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5,1-6.9-11
1 형제 여러분,
그 시간과 그 때에 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습니다.
2 주님의 날이 마치 밤도둑처럼 온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잘 알고 있습니다.
3 사람들이 “평화롭다, 안전하다.” 할 때,
아기를 밴 여자에게 진통이 오는 것처럼
갑자기 그들에게 파멸이 닥치는데, 아무도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4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으므로,
그날이 여러분을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5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6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9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
10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1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7(26),1.4.13-14(◎ 13)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1-37
그때에 3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32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3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34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3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36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37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1(30),20 참조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오늘의 묵상

1. 2023년 09월 05일 화요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설교에서(어제 복음앞으로 펼치실 구원 사업의 성격을 미리 드러내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본격적으로 공생활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으로 구마(驅魔)를 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의 직무를 더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도록다시 말해 초자연적이고 종말론적인 배경에서 그분의 활동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세상의 권세를 휘어잡던 사탄의 세력은 큰 위기에 부딪습니다.

더러운 마귀에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보고 이렇게 소리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과 자신이 적대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당신’(예수님)과 저희’(마귀들사이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마귀의 더러움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느님의 고유한 특성으로 이해됩니다.

이야기 속 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특성을 공유하시는 분(‘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자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심을 알고 극도로 경계하며 그분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구마 행위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리라.’(4,18 참조)는 나자렛 설교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얼룩진 더러움의 세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어 거룩한 나라곧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거룩하신 예수님과 더러운 악령들 사이에 어떠한 접점도 찾을 수 없듯이그분의 제자들인 우리도 악의 세계와 어떠한 것도 공유하지 않도록 노력하여야 합니다.

육과 영의 모든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이 하여하느님을 경외하며 온전히 거룩하게 됩시다”(2코린 7,1).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백범 김구 선생님은 한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 소원(所願)이 무엇이냐 하고 하느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大韓獨立)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自主獨立)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武力)으로 정복(征服)하거나 경제력(經濟力)으로 지배(支配)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우리 국조(國祖) 단군(檀君)의 이상이 이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다시 읽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명문입니다.

 

우리는 이완용을 매국노라고 부릅니다. 그가 우리의 외교권, 군사권, 행정권을 일본에 넘기는 일에 주도적으로 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완용이 처음부터 매국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관리였습니다. 지금의 문화체육부 장관, 외교 통상부 장관, 행정 자치부 장관을 하였습니다. 그는 교육이 우리나라를 근대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알고 독립협회를 주도적으로 만들었고, 독립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고종의 방침에 따라서 미국으로 가서 미국과 협력하였습니다. 고종이 일본의 감시를 피해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이 밀약을 맺어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고, 일본은 조선을 차지한다는 역사적인 현실을 보았습니다. 일본이 청나라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일본에게 외교권을 내주고, 일본에게 군대를 내주고, 일본에게 나라를 내주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일본에 협력한 대가로 그는 엄청난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일본으로부터 후작의 작위도 받았습니다. 당시 국제정세를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완용은 독립운동은 하지 않고 대한제국을 일본에 넘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역사는 그를 매국노라고 부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마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귀도 하느님이 누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세상에 온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마귀는 나름대로 국제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함께 할 수 있는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간을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데 마귀의 능력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유혹한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마귀는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미끼로 인간이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기쁜 소식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계명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가식을 비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간디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존경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존경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은 때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지식은 때로 악의 세력과 타협합니다. 실천은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실천은 박해를 받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교회의 제도와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할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자유의 여정

-만남, 회개, 자유-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시편42,2-3)

 

아침 성무일도 시작 시편이 마음을 울립니다. 불철주야(不撤晝夜), 온 힘을 다해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사람, 복음의 일꾼, 현재 몽골을 사목 방문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신자들의 믿음은 사랑의 갈망에 대한 답이다.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킬 수 있다.” 어제 몽골에서의 주일미사시 강론 주제입니다.

“교황, 중국 가톨릭인들에게 좋은 시민이 될 것을 촉구하다.”

“몽골에서 ‘더불어 평화를 위한’ 기도”

“종교들이 대화, 조화, 희망을 육성(育成)하게 하소서.”

“여러분들은 내 마음 안에 있습니다.”

교황님에 관한 기사로 가득한 교황청 홈페이지 중요 뉴스 제목 하나하가 참 좋은 묵상감입니다. 몽골에 희망의 순례자로 여정중인 교황이 참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말그대로 예수님처럼 희망의 순례자, 우애의 순례자로 자유의 여정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아주 오래전 21년전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도형제 엘리야 수사의 모친 레나타 자매가 좋아했던 시이기도 합니다.

 

“수도원 정문옆 수녀원 담장안 

 쓸모없는 땅이라 관심도 없다

 욕심없으면 어디나 천국 참 넉넉한 자리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이 행복이구나

 볼품이 뭐 대수랴

 너와 나 편안하면 그만 아닌가

 내 맘껏 가지들 뻗어 하늘 자유 맘껏 누리니 만족이다

 열매 탐내는 나무 아님이 천만다행이구나

 하늘 나는 새들의 쉼터 됨이 기쁨이다

 흐르는 구름, 은은한 별빛, 부드러운 미풍 가슴 떨리는 감동이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나를 끌어낼 수 없다

 내 이름은 참나무”-2001.3.23.

 

전지와 전정으로 꼴 잡혀진 분재(盆栽)처럼 열매를 목적으로한 배나무들과는 머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참나무입니다. 내적자유의 상징같은 그 참나무는 지금도 울창한 거목으로 여전합니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그대로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통합니다. 

 

참으로 자유자체이신 하느님께 파견 받은 주님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입니다. 갈릴래아 전도와 더불어 공생애가 펼쳐지기전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참 장엄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바로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이웃을 위한 주님의 섬김의 종, 대 자유인 예수님이신지요! 예수님의 평생 사명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아, 이런 예수님만이 인간 무지와 허무, 자유에 대한 근본적 처방이자 답입니다. 참으로 이런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은총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과 더불어 자유입니다. 한두번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죽을 때까지 새롭게 만나야 날로 깊어지는 자유의 여정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에게 주어진 해방과 자유의 은총이 참으로 자유로운 해방의 기쁨을 살게 합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예수님 고향 나자렛 사람들은 무지의 불신으로 제대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우리에겐 반면교사가 됩니다. 공생애 시작부터 좌절을 안겨주는 고향 사람들, 이 또한 편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예수님의 고향인들을 향한 깊은 좌절과 환멸을 감지하게 됩니다. 주님은 이어 엘리야 시대의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 시대의 시리아 사람 나만, 즉 이교인들의 겸손한 믿음의 사례를 들면서 고향인들의 회개를 촉구하지만 마이동풍입니다. 참으로 회개가 절실한 편견의 무지에 눈먼 고향인들입니다. 이런 장면 모두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회개의 표지들입니다.

 

이들의 무지의 분노가 점입가경, 마침내 주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합니다. 마지막 이들을 유유히, 표표히, 홀가분하게 이들을 정면돌파하여 홀연히 떠나 당신의 길을 계속 가시는 대 자유인 예수님의 다음 장면은 얼마나 멋진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예수님의 이 자유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종으로서 파견받은 자의 파견의식입니다. 결코 우연한 허무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파견받은 존재요 언젠가는 돌아갈 하느님께 대한 희망이 바로 샘솟는 열정의 근원이었음을 봅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 똑같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불림 받은 성소자임과 동시에 파견받은 소중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를 깨달아 확신이 날로 깊어갈 때 정체성 또렷한 하느님 중심의 삶이겠습니다. 이를 깨닫지 못해 표류하고 방황하는 천박한 삶입니다. 이래서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폐인도 괴물도 되고 일상의 무기력과 허무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파견받은 자로서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유와 희망의 내적 여정을 살아갑니다. 돌아가시고 부활하시어 늘 함께 계시는 초월과 내재의 파스카 예수님이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 되고 영원한 도반이,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샘이 됩니다. 바로 제1독서 바오로가 전해 주는 주님의 재림을 통해 파스카 주님이 우리의 희망임을 새롭게 확인하게 됩니다.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

 

바오로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주님을 향한 자유의 여정, 희망의 여정이요 우리를 맞이하게 위해 마중나오는 천상의 주님이 바로 우리 모두 지칠줄 모르는 열정의 삶을 살게 합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고 희망의 여정, 자유의 여정에 항구하게 합니다. 끝으로 예전에 영원한 자유인을 꿈꾸며 썼던 제 좋아하는 또 하나의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밤하늘의 초롱초롱한 

 별빛 영혼으로 사는 이,

 푸른 하늘 흰구름이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떠오르는 태양, 황홀한 사랑 

 동녘 향해 마냥 걷다가 사라진 이,

 첫눈 내린 하얀길 마냥 걷다 사라져

 하얀 그리움이 된 이,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1999.2.28.- 아멘


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면 마음이 가난하단 증거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소명을 밝히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언자 이사야의 당신께 대한 예언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주님의 영이 내리면 분명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잡힌 이들을 해방시키며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재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 겸손하게 된 이들이란 뜻입니다. 

 

    2011년 제가 유학을 다녀와 오산 성당에서 처음으로 본당 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 마흔이 되어 처음으로 본당 신부를 하게 되었으니 그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때 레지오 훈화를 마치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커다란 교리실에 서른 명 가까이 되는 신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 것을 창문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레지오 회합치고는 인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구성원을 보니 연령 회장님도 있고 사목회 위원들도 있어서 그야말로 짬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다 성당에서 굵직한 봉사를 하시는 분들이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모두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뭐 하는 집단이냐고 물으니 ‘울뜨레야’를 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어디선가 들어보긴 했는데 그것이 무슨 단체인지는 잘 몰랐습니다. 열심히 하시라고 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사조직 같았습니다. 

얼마 있다가 저도 꾸르실료를 다녀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꾸르실료 이후를 울뜨레야라고 합니다. 저는 그 단체 분위기가 왠지 내가 다녀오지 않으면 제대로 통제가 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어차피 본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그분들이 다 받았다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기로 하였습니다. 

 

    3박 4일의 일정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그 내용은 비밀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갓 박사 학위를 따고 들어온 저로서는 그 가르침이란 것이 매우 유치해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빡빡한 일정 안에서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저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해 주셨던 분들에게 죄송하기는 하였습니다. 어쨌거나 그 교육을 받으니 사목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꾸르실리스따들도 저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습니다. 그거면 된 것입니다. 그 교육에 보니 신자들은 사제에게 순종 해야 하는 내용도 있어서 사목하기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그 교육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며 예수님을 다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는 배울 게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에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 교만이 부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겐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다 5년 뒤 제가 꾸르실료 회관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영성관으로 발령을 받게 됩니다. 그 이후 6년 간 꾸르실료 지도 신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교육을 통해 많은 분들이 그 짧은 시간에 회개하고 변화하고 새로운 봉사자로 태어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때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는지 모릅니다. 복음은 진정 와서 봐야 합니다. 그래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체험하는 것으로는 부족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꾸르실료 교육만큼 우리 신앙을 빠르게 성장 시키는 교육은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조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지도 신부를 맡았으니 모르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꾸르실료에 관한 모든 책을 읽고 공부를 하였습니다. 저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은 신학교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성체는 은총이고 말씀은 진리입니다. 이 은총과 진리가 한 데 버무려지면 사람이 새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꾸르실료 교육 안에 그 은총과 진리가 가득함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게 됩니다. 이 교육이 복음이고 새로운 자녀를 탄생 시키는 매우 좋은 교회의 모델이 될 수 있음을. 

 

    그 이후 저는 꾸르실료 재교육도 만들고 교육 내용도 나름대로 수정하며 더 나은 꾸르실료 교육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조금은 새로워진 교육으로 많은 분들이 새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더 많은 분이 교육 받으면 좋겠지만, 사정 상 선택된 몇 분들만 받게 되는 것이 마음 아플 뿐입니다. 이 교육이 분명 기름 부어진 교육이었는데 마음이 가난하지 못할 때는 저에게 복음이 되지 못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겸손이 지혜입니다. 지혜를 많이 쌓아서 어린이처럼 겸손해지면 복음이 나를 새로 태어나게 할 믿음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다른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전하는 사람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기쁘게 받아들인 가난한 이들의 삶입니다.

 


9/5(화) 연중 제22주간 화요일...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에 나타나는 첫 번째 기적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첫 번째 기적으로 구마(驅魔)를 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당신’(예수님)과 저희’(마귀들사이에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는데그것은 예수님의 거룩함과 마귀의 더러움입니다. 이야기 속 마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특성을 공유하시는 분(‘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시자 자기들을 멸망시키러 오신 분이심을 알고 극도로 경계하며 그분께 대항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무엇보다 더러운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정천 신부)

 

2.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지식은 때로 십자가를 외면합니다. 지식은 때로 악의 세력과 타협합니다. 실천은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실천은 박해를 받아들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교회의 제도와 직책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의 뜻을 따를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 몸으로 실천할 때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여러분이 이미 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남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조재형 신부)

 

3. “죽은 이들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은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늘 주님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서로 격려하십시오.”(이수철 신부)

 

4.   주님의 영이 내리면 분명 눈먼 이들을 보게 하고 잡힌 이들을 해방시키며 은혜로운 해가 선포됩니다. 그런데 그 기쁜 소식은 ‘가난한 이들’의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란 재물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자아가 죽어 겸손하게 된 이들이란 뜻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이 교만이 부자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고 그런 사람을 찾기 위해 더 알려고 노력합니다. 교만한 사람에겐 그래서 복음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에게 전해집니다. 

 

 저를 변하게 만들었던 것은 신학교 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음성이었습니다.(전삼용 신부)

 

 

9/5(화) 연중 제22주간 화요일...제255일 기도]

 

복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라고 말씀하시어 마귀가 나갑니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마귀의 더러움’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집요하게 인간을 육의 노예, 세속의 노예로 만들고자 합니다. 

 

더러운 악의 속박에서 인류를 해방하시고...

진정한 자유를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짊어지신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육의 노예, 세속의 노예로 나를 집어 삼키려는 마귀가 다가올 때...

화살기도로 "조용히 하여라. 나가라"  속엣말을 하게 하소서.

마귀의 공격에 한순간도 방심하지 않아...

즉시 일어나 삼십육계 줄행랑으로 멀리 피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9월5일(화) 8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