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6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9월 6일 수요일[(녹)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본기도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콜로새서 시작입니다.1,1-8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2 콜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형제 신자들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4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5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6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
7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8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저는 영원히 당신 자애에 의지하나이다.
○ 나는 하느님 집에서 자라는 푸른 올리브 나무. 길이길이 하느님 자애에 의지하리라. ◎
○ 주님이 하신 일, 저는 영원히 기리나이다. 당신께 충실한 이들 앞에서, 좋으신 당신 이름을 바라나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8-44
38 예수님께서는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39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41 마귀들도 많은 사람에게서 나가며,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꾸짖으시며
그들이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당신이 그리스도임을 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42 날이 새자 예수님께서는 밖으로 나가시어 외딴곳으로 가셨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다니다가 그분께서 계시는 곳까지 가서,
자기들을 떠나지 말아 주십사고 붙들었다.
4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44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유다의 여러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거룩하게 하시고
이 제사로 거행하는 구원의 신비가
성령의 힘으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마태 5,9-10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리라.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주님의 식탁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이 성사의 힘으로 형제들을 사랑하며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1998년 여름입니다. 보좌신부에게 여름 행사는 연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초등부, 중고등부, 청년 여름 캠프는 준비만 6개월 이상 걸리는 행사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입니다. 거리는 2시간 내외이면 좋습니다. 다음은 시설입니다. 숙소는 깨끗한지, 수영장은 안전한지, 음식은 적당한지를 살피게 됩니다. 답사를 3번 정도 가면서 꼼꼼하게 프로그램을 챙깁니다. 당시만 해도 아직 학생들이 많을 때이고, 교사들도 열정이 많았습니다. 공고를 내면 학생들은 신청하였고, 사목회를 비롯해서 어른들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트럭에 물품을 가득 실고 캠프장으로 떠나려 할 때입니다. 비가 오고 있었고, 태풍 소식도 있었습니다. 늘 그렇듯이 비가 올 때를 대비한 프로그램도 있고, 캠프장은 높은 지대에 있어서 비가 온다고 해도 안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저를 불렀습니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꼭 가야 하는지, 캠프장은 안전한지 물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께 캠프장은 안전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안전하게 잘 다녀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걱정하는 눈빛으로 저를 보셨지만 잘 다녀오라고 허락하였습니다. 저를 믿고 여름 캠프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신부님께 지금도 감사드립니다.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내리는 비는 결코 장애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리는 비도 한 여름밤의 추억이 되었습니다.
뉴욕에 살면서도 한국의 뉴스를 보곤 합니다. 한 군인의 기자회견을 보았습니다. 실종자 수색작업 중에 해병대 병사가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엄정하게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수사단장은 해병대 병사의 영정 앞에 철저한 수사를 다짐했다고 합니다. 군에서 발생한 사망사고는 군에서 조사를 하지만 수사는 경찰이 하도록 법이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군 자체만의 수사는 때로 은폐와 조작 그리고 축소가 있었고,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수사단장은 적법한 절차에 따라서 보고서를 작성했고, 결재를 받아서 경찰에 서류를 인계하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종결되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수사단장은 인계하는 과정에서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철저하고, 엄정하게 수사했던 수사단장은 ‘항명’ 죄가 적용되어서 보직 해임되었고, 오히려 군 검찰에 의해서 수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수사단장은 기자회견에서 군 검찰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제3의 기관에서 수사를 받게 해 달라고 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청원하였습니다. 만일 수사단장이 상부의 의견을 들어서 수사기록을 수정했다면, 경찰에 인계하지 않았다면 수사단장에게는 보직해임이라는 불이익은 없었을 것입니다. 군 검찰에 항명이라는 죄명으로 수사를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사단장은 왜 상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이제부터 시작되는 수사에 의해서 밝혀질 것입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억울한 군인이 없도록 공정한 수사가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저는 이번 뉴스를 보면서 문득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 그때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비록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 결과를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는다면 구심점을 잃어버린 제자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입니다. 제자들 또한 박해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라는 반석위에 세운 교회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저는 수사단장도 충분히 결과를 예상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군이라는 거대한 조직에 맞서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고난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군을 명예롭지 않게 떠나야 할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항명이라는 죄가 확정되면 감옥에서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 홀로 있었던 예수님처럼 인간관계도 단절되고 고독하게 지내야 하는 것도 알았을 것입니다. 가족들에게도 큰 시련이 닥칠 것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군인들이 사람의 일을 선택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에게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저 역시도 사람의 일을 선택했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사람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박해가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
-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붙잡는 우리, 떠나시는 주님
공생활 기간 동안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은 참으로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은 군중의 마음을 한껏 사로잡고 가슴 설레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몰려왔고, 그분이 선포하시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에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따라다니는 광경은 장관이었습니다.
그런 군중의 환호와 박수갈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절대 한곳에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았습니다. 군중을 뒤로하고 또 다시 길을 떠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분을 붙들려는 군중을 진정시킨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붙잡는 우리 인간, 그러나 길 떠나시는 주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뭐든 붙잡는데 이력이 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 대상이 재물이든 자식이든 배우자든 상관없습니다.
더 나아가서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조차 꼭 붙들어 내 울타리 안에 가두어놓으려고 기를 쓰는 우리 인간의 모습 앞에 씁쓸함을 금할 길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놓아주지 않고, 꼭 붙들어 새장 안에 가두어놓으려는 시도로 인한 부작용이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자녀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에 어떤 동물, 어떤 피조물이 자신의 새끼를 30년, 40년, 50년 동안 붙들고 있습니까? 사실 18년 세월이면 붙들어 놓는데 충분하고도 남는 긴 세월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놓아주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래야 그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어디 그런가요? 자녀들을 ‘어른 아이’로 전락할 때 까지 끝까지 붙들고 있는 부모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충분히 스스로 자신의 인생에 대해 결정권을 가질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진학할 대학교, 학과까지 부모가 나서서 다 결정해줍니다.
뭐 대단한 거라고 군부대 앞까지 따라가서 눈물을 닭똥 같은 눈물을 철철 흘립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 직장 상사들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려 듭니다. 자녀 대신 사직서까지 대신 써줍니다. 더한 것은 그런 치맛바람을 보면서도 당연한 듯 바라보는 자녀들입니다.
더 한 것은 이런 붙듬이 피조물을 넘어 하느님에게까지 연장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

- 3.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 22주간 화요일
참 권위의 사람이 됩시다
-예닮의 여정-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하랴."(시편27,1)
세상이 좋아지기는커녕 왜 이리 나빠지는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젊은이들이 보고, 듣고 배울 참 권위가, 참 권위를 지닌 어른이, 스승이, 정치지도자가 참으로 그리운 시절입니다. 이런 참 권위의 참 사람들 찾아 보기도, 만나보기도 참 힘든 세상입니다. 지옥은 텅 비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고 말들하는데 공감합니다. 참 총체적 난국, 비상 시국입니다.
국내외, 특히 국내 상황은 온전한 곳이 없습니다. 이러다가 대한민국호가 침몰하지는 않을지 위기의식도 듭니다. 참으로 심기일전 새롭게 시작해야 할 때인데 도대체 출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나라 걱정에 밤 12시 일어나 대략 이런저런 뉴스를 확인하고 쓰는 강론입니다. 아침 산책시 동요부르기를 멈추고 침묵기도에 돌입한지 이미 오래입니다. 어제 큰 뉴스는 국회대로에서 열린, 5만명이 모인 서이초 사망 교사의 49재 추모집회였습니다.
“선생님, 오늘은 무사하십니까?”
20년차 초등교사 A씨가 ‘안녕’ 대신 ‘무사’를 물으며 인사를 건네자 검은 옷의 교사들은 울부짖듯 소리를 높여 답합니다.
“아니오.”
아, 제가 초등학교 교사로 8년 동안 근무하던 때는 박정희 대통령 때의 엄혹하던 시절이었지만 이렇지는 않았습니다. 자살 교사는 하나도 없었고 대부분 순수한 열정에 불타던 교사들이었고, 이렇게 갑질의 천박한 학부모도 없었고, 아이들의 빈부의 차이도 거의 없어 평화로웠고, 동요도 끊이지 않았으며, 사교육으로 학원에 가는 아이들도 전무했으며, 학교 운동장에는 방과후 뛰노는 아이들로 가득한 참 역동적 살아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스승의 날에는 ‘스승의 은혜’ 노래도 울려 퍼졌으며 이때의 6학년때 제자들은 나이 60에 가까워지지만 해마다 스승의 날 전후에는 수도원을 방문하여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주곤 합니다. 하두 세상이 어수선하고 추락한 교육 현실이 너무 참담하여 46년전 누렇게 바랜 옛 일기장을 펼쳐 봤습니다. 그날 일기중 일부만 나눕니다.
“1977.3.9. 수요일
내 마음은 기쁨에 떨렸다. 6학년6반, 흥분된 가슴을 억제하고 교실에 가다. 갑자기 눈물이 나오려 했으나 아이들의 소란으로, 또 새아이들을 만난다는 기쁨에 곧 웃음으로 변하다. 새로 배정받은 반에서 애써 부드러운 표정, 말씨 보이려 노력하다. 얼마나 사랑스런 아이들인가. 꾸짖지 않고, 때리지 않고, 벌하지 않고, 좋은 점만 찾아 칭찬하고 꾸준히 어려운자, 열등아, 사랑에 굶주린 아이를 찾아 사랑하고 격려해주자. 일생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기억을 만들어 주자. 퇴근하여 이름 모두 외우고 교재연구하고 원지 긁고 나니 밤 1시가 넘었다. 내일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아이들한테 할 이야기를 정리하자.
1977.3.10. 목요일
일찍 출근하여 아이들 파악하기에 분주했다. 90여명에 달하는 출석번호 이름을 다 외웠다. 1,2교시 내내 내 교육관 이야기하고, 3교시 하고 싶은 말 다 써서 내게 하고, 4,5,6교시 열심히 수업하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기대를 대하면 두려운 생각도 든다. 참 바쁜 일과였다. 그러나 희망과 기쁨에 가슴이 뛴다. 정말 정도대로, 교육의 본질대로 열과 성으로서 힘을 다할 뿐이다. 여타 말에 구애될 필요없다.
1977.3.12. 토요일
아침 일찍 출근하여 가정학습 확인해주며 칭찬하다. 수업시간도 아연 활기를 띤다...24시간 항상 교육적인 것만 생각해도 무궁무진이다. 개척되지 않은 신천지도 무궁무진이며, 창조력과 개성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가장 보람있는 축복된 분야가 교사직이다. 오직 순수와 진실과 열정과 헌신과 사랑의 토양하에서! 오후 목욕후 또 학교에 가서 일을 하다. 할 일은 많고 그래서 살 의욕은 왕성해지고... 그런데 무사안일, 무능력자들은 통일과 평준화, 획일화를 기하려 하니 좌절될 때의 심정은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가능한 최선의 방향을 모색할 것이다.
장황하게 옛 일기장을 보며 인용했습니다. 과거가, 기억이, 역사가 없는 자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바로 이런 과거의 기억이 미래를 열어가는 힘이 됨을 깨닫습니다. 정말 이때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에게 존경과 사랑, 신뢰를 받는 참 권위의 선생님이 되는 것이 제 삶의 전부였습니다. 이때 매일 일기를 썻듯이 지금은 그 습관대로 매일 강론을 씁니다. 총체적, 비상한 시국에는 비상한 대책이 필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 하나만 치유해주는데 오늘날은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 참 많습니다.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아픈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극한의 이념들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분열과 증오, 혐오, 중독, 차별등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래서 광야 인생, 제대로 미치면 참권위를 지닌 참사람의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이 된다고 참 자주 강조합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입니다.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쳐야 제대로 미쳐 참 권위를 지닌 성인입니다. 답은 단 하나 예닮의 여정, 예수님을 닮아가는 여정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첫째, 예수님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늘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우리 삶의 중심이자 삶의 의미, 삶의 목표이자 삶의 방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히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바로 마귀도 주님을 고백하며 도주할 준비를 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이런 주님을 모실 때 천하무적이요, 영적전쟁에 백전백승의 승리입니다. 이래서 제가 즐겨 바치는 “예닮기도”중 한연입니다. 다음처럼 이렇게 기도할 때 온갖 악령들은 저절로 퇴치될뿐 아니라 가까이 범접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입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평화,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당신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둘째, 말씀 사랑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말씀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말씀의 권위, 말씀의 승리입니다. 참으로 말씀이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닮아 섬김의 삶에 올인합니다. 말씀의 권위는 자연스럽게 섬김의 권위로 전환됩니다. 우선 말씀의 권위에 주목해야 합니다. 참으로 말씀 공부와 말씀 실천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이런 권위는 말씀을 사랑하여 실천함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지면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내가 쟁취하는 권위가 아니라 한결같은 말씀사랑과 말씀실천으로 예수님을 닮아갈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선물로서의 권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혼비백산 도주하는 마귀들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마귀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가자, 사람들은 이구동성 탄성을 발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유비무환이 지혜입니다. 처방보다는 예방이 백배낫습니다. 평상시 항구한 말씀 사랑과 공부로 주님과의 일치를 깊이함으로 영혼을, 정신을, 마음을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영혼 최고의 식(食)이자 약(藥)이 희망과 기쁨, 찬미와 감사, 온유와 겸손, 섬김과 나눔, 돌봄과 살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랑할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위 덕목들의 훈련과 습관이 우리를 참 권위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셋째, 늘 깨어 있는 삶에 대한 사랑입니다.
총체적 비상한 시국에는 정말 늘 깨어 있어야, 깨어 살아야 합니다. 깨어 있음의 영성훈련과 습관에도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인생항해 여정중인 내 몸담고 있는 공동체라는 배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고 깨어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늘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200주년 성서).
“여러분은 어둠 속에 있지 않기에 그날이 도둑처럼 덮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상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대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머지 사람들처럼 잠자지 말고 깨어 있으며 정신을 차립시다.”
‘정신을 차립시다.’ 원문의 본뜻은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 곧 과음도 과식도 하지 않고 정신이 맑은 상태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런 깨어 있는 사랑의 사람들은 바오로의 말씀대로 서로 격려하고 저마다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습니다. 정말 맑게 깨어 살며 매사 최선을 다할 때 주님으로부터 선사되는 분별의 지혜로 분열과 대립을 부추기는 이념의 마귀들의 유혹에 빠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권위의 사람으로 변모시켜주십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 보는 것이라네."(시편27,13-14). 아멘.
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절대 가까이하면 안 되는 사람 1호는?
연중 제 22주간 화요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악령을 쫓아내십니다. 악령은 예수님을 보자 이렇게 소리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틀린 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알아보고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왜 쫓아내시는 것일까요? 사실 마귀의 신앙 고백과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악령의 신앙 고백을 봅시다.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을 해버립니다. 그리고 이 말이 악령들이 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한다고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분에게 영향을 받아야 그분을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악령은 그분에게 영향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괴롭히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신앙을 잘 고백하고 나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면 안 된다고 말했다가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을 자신의 틀 안에서 규정하려 들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규정한다는 말은 교만해졌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사람보다 크기 때문에 그 사람을 규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상대를 규정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조종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비행기를 운전할 때 그것들을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을 건드는 것은 자살행위입니다. 우리가 자동차는 일일이 규정할 수 있겠지만, 비행사가 아니라면 비행기는 규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화 ‘레베카’(2020)의 줄거리입니다. 여기서 여자 주인공은 이름도 나오지 않습니다. 레베카는 영화 제목이지만 사람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레베카란 이미 죽은 인물이 여자 주인공을 규정하는 도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젊은 여자 주인공은 몬테카를로의 부유한 반 호퍼 부인의 동반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최근에 상처 한 영국 부자 가문의 막심 드 윈터를 만나고 그들은 서로에게 반하게 됩니다. 짧은 친분에도 맥심은 청혼하고 주인공은 수락하여 영국에 있는 맥심의 조상 집인 맨덜리로 향합니다.
맨덜리는 맥심의 고인이 된 아내 레베카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은 이 거대한 재산을 관리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녀는 특히 레베카에게 여전히 헌신하고 있는 수석 가정부인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를 어렸을 때부터 키운 당사자로 새 주인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댄버스 부인은 모든 기회를 이용하여 새 신부를 폄훼하고 레베카의 우아함과 능력을 끊임없이 상기시킵니다. 특히 소름 끼치는 장면 중 하나는 댄버스 부인이 주인공인 레베카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창문에서 뛰어내리는 것뿐임을 말하는 장면입니다. 새로운 드 윈터 부인은 자신이 레베카를 대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남편 맥심도 레베카에 대한 기억에 사로잡혀 그녀를 냉소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납니다. 사실 레베카는 타살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인 사람은 남편 맥심이었습니다. 레베카는 다른 남자들을 집에 불러들여 불륜을 저질렀고 아기까지 임신했다며 자신과 이혼할 수 없는 착한 남편을 가스라이팅하였습니다. 새 아내가 자신을 떠나려 하자 맥심은 이 모든 사실을 고백합니다. 드 윈터 부인은 이제 남편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 해 그를 무죄로 풀려나게 합니다. 그러자 그들을 막다른 길로 이끌었던 레베카의 불륜남과 댄버스 부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비록 댄버스에 의해 맨덜리 저택은 불타버렸지만, 둘은 세계를 여행하며 사랑을 이어갑니다.
이 영화에서 이름 없는 새 신부 드 윈터 부인과 맥심 드 윈터는 각자 댄버스 부인과 레베카에 의해 심리적 지배를 당했습니다. 누군가 심리적 지배를 하려 할 때는 그 상대를 작게 만들어야 합니다.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란 이미 죽은 인물로 드 윈터 부인을 작게 만들었고 레베카는 자기 남편을 다른 남자들과 비교하며 기만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랑과 믿음으로 그 심리적 지배를 이겨냈습니다.
우리를 규정하고 작게 만들려는 이들이 우리가 멀리해야 할 가장 안 좋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영화 ‘사도’에서 보면 영조가 사도 세자에게 그러한 가스라이팅을 했습니다. 이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자기가 죽습니다.
오늘 악령은 예수님을 규정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당신보다 크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규정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마칠 때까지 그분은 우리를 지켜보십니다. 세례자 요한을 보며 사람들이 그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해 한 것과 같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규정한 범위를 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보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악령을 쫓아내시거나 그들을 뚫고 나가십니다.
우리도 조심합시다. 당신을 규정하는 사람을 예수님도 가까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멀리 해야 할 사람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돈을 꾸어서 갚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를 규정하여 가두고 자신 맘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입니다.
9/6(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되새김 구절
1. 교회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박해가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이 있을지라도,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지라도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일을 선택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느님의 그 은총을 우리가 사랑하는 동료 종 에파프라스에게 배웠습니다. 그는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일꾼이며, 성령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에게 알려 준 사람입니다.”(조재형 신부)
2. 하느님께서 지니신 가장 본질적인 측면이 어떤 것입니까? 그 어느 것에도, 그 어떤 혈연, 학연, 지연에도 묶이지 않는 자유로움입니다. 무한히 크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무한히 크신 하느님, 바람처럼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작은 울타리 안에 가둬놓으려 하니 그 얼마나 웃기는 일입니까?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으로 축소시켜 독차지하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님은 나만의 구원을 위해 강림하신 작은 하느님이 절대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작은 고을 나자렛, 작은 나라 이스라엘의 구원만을 위해 오신 메시아가 결코 아닙니다.
그분은 인류 전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다가오신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혹시라도 그 크신 하느님을 나만의 하느님, 내 틀 안의 하느님, 내 방식대로의 하느님으로 가둬놓으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봐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지옥은 텅 비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고 말들하는데 공감합니다. 참 총체적 난국, 비상 시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 하나만 치유해주는데 오늘날은 하나가 아니라 도처에 참 많습니다. 정신이, 마음이, 영혼이 아픈 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극한의 이념들의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분열과 증오, 혐오, 중독, 차별등 공동체를 파괴하는 악령에 사로잡힌 이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에 혼비백산 도주하는 마귀들입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이수철 신부)
4. 오늘 악령은 예수님을 규정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이것이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규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규정한 범위를 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 보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악령을 쫓아내시거나 그들을 뚫고 나가십니다.
우리도 조심합시다. 당신을 규정하는 사람을 예수님도 가까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멀리 해야 할 사람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도, 돈을 꾸어서 갚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나를 규정하여 가두고 자신 맘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입니다.(전삼용 신부)
9/6(수) 연중 제22주간 수요일...제 256일 기도
복음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사로잡힌 자 되지않게 하소서.
바람처럼 자유로워 군중 속을 뚫고 지나게 하소서.
악령은 예수님을 규정해서 자신들의 뜻대로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사탄이 하는 일입니다....
나를 규정하여 가두고 자신 맘대로 조종하려는 사람을 뚫고 지나게 하소서.
나에게 자유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나의 자유를 속박받지 않게 하소서. 아멘.
2023년 9월6일(수) 6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