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9 글/시]치킨게임(Chicken game)-따뜻한 하루[192]/서럽게 통곡해야 (김수환 추기경)
[2023년 9월9일(토) 오늘의 글/시]
치킨게임(Chicken game) / 따뜻한 하루[192]
치킨(chicken)은 우리가 알고 있는 '닭'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겁쟁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오래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의 제임스 딘의 트레이드마크는 붉은 재킷과 청바지입니다.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인 그는 절벽을 향해 자동차로 돌진하는 치킨게임을 하게 됩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값비싼 자동차를 몰고 절벽을 향해 최고의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때 자동차와 함께 절벽에 떨어지는 것이 무서워 먼저 뛰어내리는 이가 지게 되는 겁니다.
또 평지에서는 친구 두 명의 운전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서로를 향해 빠르게 돌진하는데,
이때 충돌하기 전에 핸들을 꺾어 피하는 쪽이 치킨이 되는 즉, 겁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참가자는 모두 상대방에게 자신이 겁쟁이가 안 될 거라면서, 큰 소리로 장담합니다.
그렇게 어느 한쪽도 양보하지 않을 경우 양쪽 모두 파국으로 치닫는 결과를 만듭니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다칠 것을 각오하고 상대의 차를 피하지 않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이득을 보기 위해 손해를 각오하고 상대방과 거칠게 경쟁하는 상황은 매우 비슷합니다.
어리석음은 오직 한쪽만 보기에, 단지 그 하나가지려는 마음, 경계하고 반성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탐욕에 찬 부자의 ‘어리석음’을 비유로 예를 드십니다(루카 12,20-21).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 네 목숨을 되찾아 갈 테니, 네가 마련해 둔 것은 누구 차지냐?’
자신을 위해서는 재화를 모으면서 하느님 앞에서는 부유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 이러하리라.”
그렇습니다.
나눌 줄 모르고 곳간에다 채우기만 하는 부자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봅니다.
겁쟁이의 모습만 피하려는 속셈인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치킨게임을 봅니다.
인생의 삶에서 이러한 어리석은 짓을 삼가는 것만이 지혜의 입문입니다.
감사합니다. ^^+
진솔한 삶의 내음 서럽게 통곡해야 (김수환 추기경) 어느 날인가 율리안나 비서수녀님이 "어떤 분이 기도와 미사를 요청했다" 며 이름과 세례명을 적은 쪽지를 건네줬다. 임신 중인 유치원 교사인데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져 최악의 경우 뱃속 아기와 임산부 생명 중 택일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아는 수녀님을 통해 기도 부탁이 들어왔다고 하는데 얼마나 다급했으면 내게 기도를 요청 했을까 싶었다. 미사를 봉헌하면서 두 생명을 모두 구해 달라고 한참 기도했다. 그리고 기도 말미에 "하느님, 사실 그 자매님과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제 체면을 봐서라도 꼭 들어주십시오. 사람들은 추기경이 기도해주면 뭔가 다를 거라 고 믿습니다" 며 떼를 썼다. 내 나이 어느새 85살이다. 기력도 쇠하고 여기저기 아프다 보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밖에 없는 것 같다. 아니, 기도를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요즘도 본당이나 단체에서 행사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 이 간간이 들어온다. 나를 잊지 않고 찾아 주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행사 당일의 건강 상태를 장담할 수가 없어 참석하겠다고 선뜻 약속을 하지 못한다. 날이 갈수록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다. 잠이 안 와 뒤척이다 새벽녘에 잠 깐 깊은 잠에 빠지곤 하는데 미사 시각에 맞춰 놓은 자명종 소리에 몸을 일으키면 손발이 아프고, 정신이 몽롱하다. 류머티즘 관절염 탓에 손발 통증 이 심하다. 정신이 들면 "오늘 하루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기도 부터 바치게 된다. ('그런데 이 통증만 덜어 주시면 더 감사하겠는데…' 라고 하느님께 꾀를 내보기도 하지만...) 밤새 잠을 설치면 목소리마저 시원치 않아 공식 석상에 나가는 것을 머뭇거리게 된다. 지난해 연말에도 몇 군데 본당에서 견진성사와 설립 30주년 기념미사 등의 주례를 부탁했다. 그 때마다 "그 날 아침에 일어나 봐야 참석 여부를 얘기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추기경이 온다고 소문내지 말고 행사를 준비하라" 고 말했다. 미사가 오전 11시에 시작되는데 두 시간 전인 9시나 돼서야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화하고 찾아가는 형편이다. 어느 성당인가 초대를 받아 갔는데 마당에 나와 박수를 치며 환영하던 교우들이 깜짝 놀라면서 박수를 멈추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이유를 얼추 짐작한다. 사람들 뇌리 속에 있는 내 모습과 옷이 헐렁해 보일 정도로 야윈 지금의 모습에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자매에게 "왜 박수를 치다 마세요?" 라고 넌지시 물었더니 "너무 마르셔서 딴 사람인 줄 알았 어요" 라며 야윈 노구(老軀)의 내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세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어 죽는다. 선후배 사제나 아는 분들 병문안을 가면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입니다. 그분께 맡기세요" 라고 위로한다. 나 역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산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 와 '내 것'은 적어지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려는 마음이 강해진다. 내 기도는 하느님 안에서 남은 시간을 잘 살다가 하느님 품에서 잠들게 해 달라는 것이다. 시간이 그다지 많이 남지는 않았을 게다. 1998년 5월, 서울대교구장 직에서 물러나니까 사람들이 "섭섭하지 않냐?" 고 많이 물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시원 섭섭하다" 는 것 외에 달리 할 말이 없는데, 문제는 홀가분해서 덩실덩실 춤을 출 만큼 시원한 것도 아니고 눈물이 날 만큼 섭섭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아무리 무뚝뚝한 남자도 오랫동안 몸담은 직장을 떠날 때는 눈물을 흘리 건만 난 30년 동안 살았던 명동에서 혜화동으로 거처를 옮기는 날에도 무덤덤하기만 했다. 그러고 보면 어머님 말씀이 맞다. 어릴 때 어머니와 어디를 가더라도 난 나대로 앞서 걷고 어머니는 뒤에서 따라 오셨는데 언젠가 "네 형(김동한 신부)하고 가면 심심찮게 말도 붙이고, 재미난 얘기도 들려주건만 너는 어찌 그리 돌부처 같느냐"고 불평하셨다. 나처럼 감정이 둔한 사람이 세상 천지에 또 있을까 싶다. 가슴 벅차게 기쁜 일이 생겨도, 억장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픈 일이 닥쳐도 도통 눈물이 나질 않는다. 오죽했으면 성령기도회에 참석해 작심하고 눈물의 은사를 청했겠는가! 난 오래 전부터 사도 베드로처럼 통한의 눈물을 쏟고 싶다는 원의(願意)를 갖고 있었는데 여태껏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던 날, 두려움에 떨며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세 번째 부인할 때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말했다. 곧 이어 닭이 두 번째 울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예수님 말씀 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했다.(마르 15, 66-72)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눈이 짓무를 정도로 평생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울었다고 한다. 또 체포됐을 때는 자신 같은 배신자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바로 매달릴 수 있겠느냐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길 원했다고 한다. 나 역시 베드로와 다를 것이 없다. 인간적 의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 께 전적으로 의탁하지 못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그분 뜻이 아니라 내뜻 을 앞세우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했다. 내 얄팍한 생각을 하느님의 뜻 인양 떠벌린 적은 왜 없었겠는가. 그 동안 주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린 것을 생각하면, 그럼에도 내게 넘치는 사랑을 베풀어 주신 것을 헤아린다면 베드로보다 더 서럽게 통곡해야 마땅하다. 어떨 때는 내 마음이 사막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은수자들이 절대 고독과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사막이 아니라 그저 모래바람만 불어대는 황량한 사막 같기만 하다. 내 뉘우침과 성찰이 부족함을 탓할 수 밖에 없다. 여러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