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9월 16일 토요일[(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9. 16. 04:20

[매묵]2023년 9월 16일 토요일[(홍)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고르넬리오 성인은 251년에 로마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그는 박해 시기에 배교한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공동체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로마의 사제 노바티아누스 이단에 맞섰고, 카르타고의 주교 치프리아노의 도움으로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였다. 갈루스 황제가 252년 6월 다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면서 그에게 유배형을 내렸고, 253년 6월 치비타베키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로마로 옮겨져 갈리스토 묘지에 묻혔다.
치프리아노 성인은 210년 무렵 카르타고의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났다. 246년 무렵 체칠리아노 사제의 영향으로 세례를 받고, 자신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세례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제품을 받고, 249년 카르타고의 주교가 되어 어렵고 힘든 시대에 모범적인 덕행과 저술로써 교회를 훌륭히 다스렸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유배당하고, 신임 총독 갈레리우스 막시무스에게 재판받다가, 258년 9월 14일 카르타고 근교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입당송

성인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기뻐하네.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 그분을 사랑하여 피를 흘렸으니, 그리스도와 함께 끝없이 기뻐 춤추네.
<또는>
이 성인들은 주님을 위하여 영광스럽게 피를 흘렸네. 살아서는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분 따라 죽어서는 승리의 월계관을 받았네.

본기도

하느님,
헌신적인 목자 복된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불굴의 순교자가 되게 하셨으니
그들의 전구로 한결같은 믿음을 길러 주시어
저희가 교회의 일치를 위하여 열심히 노력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1,15-17
사랑하는 그대여, 15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16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먼저 나를 당신의 한없는 인내로 대해 주시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당신을 믿게 될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고자 하신 것입니다.
17 영원한 임금이시며 불사불멸하시고
눈에 보이지 않으시며 한 분뿐이신 하느님께
영예와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3(112),1ㄴㄷ-2.3-4.5ㄱ과 6-7(◎ 2 참조)
◎ 주님의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 찬양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양하여라, 주님의 이름을. 주님의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까지, 주님의 이름은 찬양받으소서. 주님은 모든 민족들 위에 높으시고, 그분의 영광은 하늘 위에 높으시네. ◎
○ 누가 우리 하느님이신 주님 같으랴? 하늘과 땅을 굽어보시는 분, 억눌린 이를 흙먼지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불쌍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올리시는 분. ◎

복음 환호송

요한 14,23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43-4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3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
44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따지 못하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46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47 나에게 와서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실행하는 이가
어떤 사람과 같은지 너희에게 보여 주겠다.
48 그는 땅을 깊이 파서 반석 위에 기초를 놓고 집을 짓는 사람과 같다.
홍수가 나서 강물이 집에 들이닥쳐도,
그 집은 잘 지어졌기 때문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49 그러나 내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자는,
기초도 없이 맨땅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
강물이 들이닥치자 그 집은 곧 무너져 버렸다.
그 집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2코린 4,7-15)와 복음(요한 17,11ㄷ-1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거룩한 순교자들의 수난을 기념하여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일찍이 복된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에게
박해를 이겨 내는 용기를 주셨듯이
저희에게도 온갖 시련을 이겨 내는 힘을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루카 22,28-3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는 내가 시련을 겪는 동안 나와 함께 있었으니, 나는 너희에게 나라를 준다. 너희는 내 나라에서 내 식탁에 앉아 먹고 마시리라.
<또는>
보라, 하느님 앞에 성인들이 받을 큰 상이 쌓여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으니 영원히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양식을 받아 모시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순교자 고르넬리오와 치프리아노를 본받아
성령의 힘으로 굳세어져 복음의 진리를 증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LA에서 교우 분들과 함께 2 3일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외식보다는 집 밥이 좋다고 하시면서 음식은 모두 준비해서 갔습니다. 점심은 주로 공원에서 먹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벗하며 식사를 하니 좋았습니다. 아침과 저녁은 숙소에서 먹었습니다. 교우 분들은 저를 위해서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주셨고, 저는 함께 미사를 봉헌하면서 주님의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2 3일 여행 중에 운전은 한 자매님이 해 주었습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자매님은 고생은요, 수고한 것은 맞네요.’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고생과 수고의 차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수고(受苦)는 고통을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동반된다고 하겠습니다. 고생(苦生)은 어렵고 힘든 일을 겪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본인의 능동적인 의지가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고생 앞에 생이나 개를 넣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수고했습니다. 본인이 자발적으로 여행을 위해서 운전을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2023년도에 LA 3번 왔고, 앞으로 1번 더 올 예정입니다. 모두 신문 홍보를 위해입니다. 신문에는 교회의 보물이 있습니다. 교회의 보물을 나누어 주는 것은 고생이 아니라, 수고라고 생각합니다. LA에 올 때마다 잠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따뜻하게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더욱 감사할 일입니다. 2023년도에 성지순례를 5번 다녀왔고, 앞으로 1번 더 갈 예정입니다. 성지순례는 일상의 삶을 잠시 멈추고 예수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을 만났다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5번의 순례를 통해서 150명 이상의 교우 분들을 만났습니다. 매일 잠자리를 옮겨야 하고, 늘 새로운 분들을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길이니 결코 고생이 아닙니다. 모두들 자발적으로 순례에 함께 하였으니 모두들 수고하였습니다. 10월에는 한국 성지순례가 있습니다. 10월에 한국으로 휴가를 갈 계획이 있었는데 성지순례를 하게 되었으니 더욱 잘 된 일입니다. 저의 수고가 열매 맺어 성지순례에 함께 한 교우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 또한 기쁨입니다. 산모의 고통은 고생이 아닙니다. 고통을 넘어 한 생명이 태어나기 때문에 당연히 수고입니다.

 

교회는 며칠 전에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소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서 3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자에게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에게는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고생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고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튼튼한 반석위에 집을 지은 것 같아서 삶의 풍랑이 다가와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우리의 신앙은 주기적으로 순환을 합니다. ‘대림, 성탄, 사순, 부활, 연중, 그리스도 왕 대축일을 기준으로 순환합니다. 저는 60년을 순환하였습니다. ‘기도, 희생, 단식, 나눔의 생활을 충실히 하면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성장하는 순환입니다. 마치 대나무는 마디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나무는 나이테를 이루면서 자라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매년 순환은 하지만 헛바퀴를 도는 것처럼 살기도 합니다.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시련의 파도가 오면 곧 무너지는 신앙입니다. 원망, 불신, 근심, 분노가 자리 잡고 있어서 하느님께로 향하지 못 하게합니다. 가진 능력과 재물을 하느님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봉헌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지은 것과 같아서 하느님의 은총을 늘 함께 할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23주간 토요일,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 

루카  6,43-49

 

나는 왜 결과만 보는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좋은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지 않는다. 또 나쁜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라고 하십니다. 과정보다는 지극히 ‘결과’만 보려는 마음이십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과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라고도 하십니다. 

 

얼마 전에 청년들과 이야기하다가 한 청년이 이러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 만약 누군가 신부님 설거지를 도와주려고 하다가 접시 열 장을 깬 사람이 있고

또 누군가 몰래 신부님 접시를 하나 훔치려다 한 장을 깨 먹은 사람이 있다면

신부님 생각에 누가 더 잘못한 거예요?”

 

이 질문은 MBTI 성격유형 검사에서 목적과 결과를 중시하는 사람인지, 상황과 과정에 중점을 두는

사람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저는 가차 없이 “열 장 깬 놈이 더 잘 못한 거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확실히 ‘TJ’라는 것입니다.

 

성격유형이라는 것이 어떤 성격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아니라지만,

저는 어쨌거나 저의 성격을 고수할 생각입니다. 아무리 그 감정이 어떠했던지, 그 과정이 어떠했던지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빌 게이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태어날 때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 아니다. 하지만 죽을 때도 가난한 것은 너의 잘못이다.”

정말 짜증 나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반박하기도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예외는 분명히 있을 수 있겠지만, 평생 열심히 일했다면 죽을 때 가난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욕을 먹더라도 결과에 중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핑계나 변명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핑계나 변명이 들어오면 발전이 없습니다. 저는 억지로라도 결과만을 중시하려 합니다.

성당의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결과만 봅니다.”

 

만약 자연재해가 발생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그것도 인간 행위의 결과일까요?

저는 그렇게 봅니다. 지금 시리아에 홍수가 나서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과연 인간의 잘못이 없을까요? 인간의 무분별한 탐욕에 더불어 시리아가 무정부 상태로

두 세력이 싸움만 하며 민생은 신경 쓰지 않는 상황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성경에도 성적인 타락으로 인해 “그 땅도 부정하게 되었다. 나는 그 죄 때문에 그 땅을 벌하였고,

그 땅은 주민들을 토해 내었다”(레위 18,25)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땅이 인간을 버리는 것 같지만, 성경도 그 원인이 인간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안 좋은 결과가 일어나면 반드시 안 좋은 결과가 생기게 되는 원인이 존재합니다.

그 원인을 밝히기 어렵다고 결과의 중요성을 간과한다면 끝까지 그 원인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변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주님께 핑계를 대었습니다. 결과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하느님도 결과만 보십니다.

거기에는 핑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냥 잘못했다고 하면 무엇을 고쳐야 할지 알게 됩니다.

핑계는 고치지 않겠다는 뜻도 됩니다. 

 

영화 ‘어 퓨 굿 맨’은 1992년에 개봉한 법정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미국 해병대 기지에서 일어난 한 병사의 죽음을 조사하는 과정을 따릅니다.

병사 죽음의 경우는 두 명의 해병이 다른 한 명의 해병을 괴롭히는 ‘코드 레드’라는 불명예스러운

훈련 방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두 해병은 살인 혐의로 재판에 넘겨지며, 미군 상사인 네이던 제서프 대령이 지시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증명해 낼 방법이 없습니다. 대니얼 카피, 조앤 갤로웨이,

그리고 샘 와인버그로 이루어진 변호사팀이 이 사건의 변호를 맡게 됩니다. 

 

굳이 사건이 커지는 것을 원치 않던 카피는 처음의 적정선에서 검사 측과 합의하고 마치려 합니다.

그러나 갤로웨이의 격려와 진실을 찾으려는 의지로 인해 점차 사건에 몰입하게 됩니다.

카피와 그의 팀은 군사 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합니다.

 

재판 과정에서, 카피는 다소 독특하고 위험한 전략을 세우며, 재판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서프 중사를 증인으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대면을 통해 그가 ‘코드 레드’를 지시한 사실을

밝혀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서프 대령은 유명한 “당신은 진실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문장을 외치며 자기 행동이 당연하고 필요했다고 주장합니다.

그 변명이 당연히 받아들여질 것이라 믿습니다.

 

군 기강이 바로 서야 나라가 지켜질 수 있고 자신은 나라를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살인은 살인입니다. 무엇으로도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카피는 그의 거짓말과 책임 회피를 폭로함으로써 두 젊은 병사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음란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의 속이 건전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결과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 결과를 합리화하는 수많은 핑계와 거짓말에 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발전도 없고 계속 자존심만 세우게 됩니다. 속에 있는 것이 말로 드러나고 행동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그 결과를 뒤집을 아무런 핑계도 없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입시다.

그래야 고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에서 이상한 면이 드러난다면 그것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들이 안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발전을 위해 먼저 자기 열매를 보고 지금 자신이 어떤 나무인지를 받아들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15.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오늘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기념해야 할 일일까요?’ 어쩌면, 고통은 저주요 재앙일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없는 고통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고통, 사랑으로 생기는 고통, 사랑하기에 받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참된 기쁨을 배우게 하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마치 우리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으로 건너감이듯이, 바로 그 죽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넘어가듯이, 사랑에서 피어난 고통은 고통이 아니라 기쁨으로 건너감이요, 바로 그 고통을 통하여 기쁨으로 넘어감입니다. 우리는 바로 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현양’을 통해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성모님의 고통은 예수님과 함께 벌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매 맞으시면, 성모님도 매 맞으시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참여하는 성모님의 “통고, 통애”(compassio)를 말합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고통에 함께 “참여”(partitipatio)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아파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아파하는 것에 참여하신 사랑입니다. 이를 제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마리아께서는 당신 외아드님과 함께 심한 고통을 당하셨고, 아드님의 제사를 모성애로써 함께 바치셨으며 당신이 낳으신 희생자의 봉헌을 사랑으로 동의하셨다.”(교회헌장 58항) 
 
또 바오로 6세 교종의 문헌 <마리아 공경>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마리아는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원의 신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계시며, 야훼의 고난 받는 종의 어머니로서 고통을 당하셨다."(마리아 공경 7)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처참해진 모습을 애끓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장면과 예수님께서 모친 마리아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시는 장면입니다. 아들의 죽음과 함께 있는 성모님의 이 광경은 인간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굳셈이 함께 연출되면서, 그지없이 비장하면서도 동시에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
 
성모님과 함께 오늘 우리도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바칩니다.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당신 아드님 서서, 성모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함께 나누게 하셨으니,
저희도 그리스도와 함께 수난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하소서."

하오니 어머니, 고통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고통을 통하여 기도하고, 고통과 함께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 안에서도 희망하고, 고통 안에서 믿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는 그분의 어머니께서 서 계셨습니다.”(요한 19,25) 
 
어머니!
당신과 함께 십자가 밑에 있게 하소서. 믿음으로 서 있게 하소서.
십자가 밑이 저의 자리가 되게 하시고, 

당신과 함께 아들의 남은 고통에 참여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그리스도 예수님 중심의 삶

-성모님과 함께-

  

"주님,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해 간직하신 그 선하심,

 얼마나 크시옵니까?

 주님은 당신께 피신하는 이들에게 그 선을 베푸시나이다."(시편31,20)

 

새벽부터 내리는 가을비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시는 고통의 성모님 눈물같습니다. 어제 모처럼 따뜻하고 반가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책입니다. 책표지도 따뜻했고 편안했습니다. 힘들고 복잡한 세상 속에서도 평범한 일상을 참으로 성실히, 따뜻하게 소박한 꿈을 펼치며 살아가는, 우리 한 수도형제도 참여한 여덟분의 젊은이들의 글모음집, “요즘 잘 지내나요?”라는 책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이런 글을 쓰는 영혼들은 꽃같이 아름다운 영원한 청춘입니다. 서서히 음미하며 읽을 계획입니다. 책 서두에 “들어가며”중 일부 대목을 인용합니다.

 

“편하게 안부조차 묻기 어려운 요즘 시대에 8명의 작가가 모여 <요즘 잘 지내나요?>를 출간합니다. 서로 다른 지역, 삶, 경험이지만 글을 쓰며 좀 더 가까워지고, 깊어졌습니다. 이 깊이는 바다처럼 서로 연결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돌아올리 없는, 바쁘게 흘러간 당시의 나는 잘 지냈는지 묻고 싶기도 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분께도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요즘 잘 지내시나요?”

 

새삼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습니다.’라는 말마디도 생각났습니다. 윗 여덟분의 젊은이들 참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잘 지내십니까? 잘 들여다 보면 바다처럼 깊이 하나로 연결된 삶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로 하면 예수님 중심으로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바다같은 깊이의 삶입니다. 

 

오늘은 9월15일,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어제 9월14일 아드님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이은 어머님의 기념일입니다. 이왕이면 기념일이 아니라 “고통의 성모 마리아 축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모자분의 축일이 참 상징성이 깊습니다. 바로 우리의 순교적 삶 중심에 언제나 살아 계신 모자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어도 성모 마리아 어머님은 영원히 함께 계시다는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은 산책시 어머님 대신 성모님을 넣어 어머님 은혜 동요를 부르곤 합니다. 얼마전에는 피정온 자매님들과도 함께 불렀습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 것 같애.”

 

언제나 여전히 우리를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새로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부르면 마음은 동심이 되고 참 편안해집니다. 세상의 무수한 고통중의 어머니들 역시 고통의 성모 마리아 어머님을 생각하면 큰 위로와 힘을 받으리라 생각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성모 마리아가 생애 동안 겪었던 일곱가지 슬프고 아픈 사건을 가리키는 성모칠고가 생각납니다. 성모칠고는 가톨릭 교회의 대중적 신심입니다. 고통의 성모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고,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오늘로 옮겨 기념하게 했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모칠고를 열거해 봅니다.

 

1.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고통.

5.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본 고통,

6.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은 고통.

 

참으로 고난과 시련의 슬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성모님의 삶이었지만 믿음으로 이 모두를 이겨낸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성모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전 20절까지 계속되는 부속가는 얼마나 애절하고 깊은지 성모신심의 절정을 대하는듯 합니다.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성모님처럼 강합니다.  오늘 복음 장면도 바로 성모님의 고통스런 모습의 절정이자 철저한 케노시스 자기비움의 극치입니다. 흡사 예수님 중심으로한 이등변 삼각형의 모습같습니다. 

 

저절로 우리 삶의 자리도 계시됩니다. 바로 우리 믿는 이들을 대변하는 어머니 곁에 선 애제자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성모님의 자녀가 되어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신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의 중심에 모신 예수님의 모습이 히브리서에 은혜롭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셨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아마도 성모님 역시 아드님의 수난과 고통을 함께 겪으면서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도 한없이 깊어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수님으로부터 귀한 가르침을 얻습니다. 바로 우리의 삶은 고난을 겪음으로 순종을 배워가는 “순종의 학교, 순종의 여정”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마지막 순종은 죽음입니다.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신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이자 희망이요, 우리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런 예수님을 중심에 모신 삶보다 행복한 삶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인 우리를 보며 어머님께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 어머님의 아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애제자, 이 사람이 가리키는 바, 바로 우리 믿는 모두입니다. 성모님의 자녀인 우리들, 바로 우리의 복된 신원입니다. 과연 마리아 성모님의 자녀다운 삶인지 뒤돌아보게 합니다. 이어 애제자에게 하는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평생 언제나 모시고 살아야 할 성모님, 얼마나 행복한 우리들인지요! 육친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셨어도 마리아 성모님께서 늘 우리를 사랑으로 기르시고 타이르시고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니 말입니다. 흡사 오늘 복음 장면이 미사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멜키체덱과 같은 영원한 대사제 예수님을 중심으로 성모님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 같습니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묵주기도 잘 바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효성깊은 성모님의 자녀로 살게 하십니다. 아침성무일도 즈가르야 후렴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비통의 어머니시여, 기뻐하소서.

 당신은 큰 고통을 겪으신 후, 천상 영광으로 구원되시고,

 온 누리의 여왕으로서 당신 아드님 곁에 좌정하셨나이다." 아멘.

 


[9/16(토)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되새김 구절]

 

1. 교회는 며칠 전에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님 경배하며 찬송하나이다. 주님의 십자가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나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시면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하였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소서.”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겪으신 고통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서 3번이나 무참히 넘어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아버지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제자에게 이 분이 너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에게는 이 사람이 아들입니다.’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고생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수고였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시고, 또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주님, 주님!’ 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라고도 하십니다. (전삼용 신부)

 

3.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과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동시에 드러나고 있듯이, 십자가 밑에 서 계시는 성모님의 모습에서도 고통과 믿음이 동시에 드러납니다. 이토록,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면서, 나아가 동의만하고 의탁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성원하면서 예수님의 고통과 믿음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시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깊이 참여하십니다.(이영근 신부)

 

4. 성모칠고는 가톨릭 교회의 대중적 신심입니다. 고통의 성모 신심은 오래전부터 널리 퍼져 있었으며, 1688년 인노첸시오 11세 교황이 이 기념일을 정하였고, 1908년 성 비오 10세 교황이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다음날인 오늘로 옮겨 기념하게 했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성모칠고를 열거해 봅니다.

 

1.시메온이 아기 예수를 보면서 훗날 마리아가 예리한 칼에 찔리듯 마음이 아플 것이라고 예언한 일.

2.헤로데의 눈을 피해 온갖 고생을 하며 이집트로 피난 간 일.

3.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소년 예수를 잃어버린 일.

4.십자가 지고 가는 예수를 만난 고통.

5.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본 고통,

6.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린 고통.

7.아들 예수를 무덤에 묻은 고통.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고 언제나 성모님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이수철 신부)

 

9/16(토)  성 고르넬리오 교황과 성 치프리아노 주교 순교자 기념일...제266일 기도]

 

복음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주님, 주님!”하고 부르면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행하지 않느냐?>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선한 마음으로 선한 말을 내놓게 하소서.

악한 마음로 선한 말을 내놓지않게 하소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9월16일(토) 4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