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19일 화요일[(녹) 연중 제24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9월 19일 화요일[(녹) 연중 제24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3,1-13
사랑하는 그대여, 1 이 말은 확실합니다.
어떤 사람이 감독 직분을 맡고 싶어 한다면 훌륭한 직무를 바라는 것입니다.
2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3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4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 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5 자기 집안을 이끌 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님의 교회를 돌볼 수 있겠습니까?
6 새로 입교한 사람도 안 됩니다.
교만해져서 악마가 받는 심판에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7 또한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방을 받거나 악마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습니다.
8 봉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 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 됩니다.
9 그리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10 또 그들을 먼저 시험해 보고 나서
흠잡을 데가 없는 경우에만 봉사직을 수행하게 해야 합니다.
11 여자들도 마찬가지로 품위가 있어야 하고,
남을 험담하지 않으며, 절제할 줄 알고 모든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12 봉사자들은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자기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13 사실 봉사직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들은 좋은 명성을 얻고,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저는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 자애와 정의를 제가 노래하오리다. 주님,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흠 없는 길에 뜻을 두리니, 저에게 언제 오시리이까? ◎
○ 저는 집 안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걸으오리다. 불의한 일을 제 눈앞에 두지 않으오리다. ◎
○ 제 이웃을 몰래 헐뜯는 자, 저는 없애 버리고, 거만한 눈 오만한 마음, 저는 참지 않으오리다. ◎
○ 제 눈은 이 땅의 진실한 이들에게 머물리니, 그들이 제 곁에 살고, 흠 없는 길을 걷는 이, 그런 이가 저에게 시중을 들리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11-17
그 무렵 11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고을에 가셨다.
제자들과 많은 군중도 그분과 함께 갔다.
12 예수님께서 그 고을 성문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마침 사람들이 죽은 이를 메고 나오는데,
그는 외아들이고 그 어머니는 과부였다.
고을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그 과부와 함께 가고 있었다.
13 주님께서는 그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 하고 이르시고는,
14 앞으로 나아가 관에 손을 대시자 메고 가던 이들이 멈추어 섰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15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16 사람들은 모두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또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하고 말하였다.
17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온 유다와 그 둘레 온 지방에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가
모든 이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
<또는>
1코린 10,16 참조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며,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이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1984년 103위 시성식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여의도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 3학년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시성식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많은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종’이라는 이름으로 신청을 하면 교회는 가경자라는 이름으로 조사를 시작합니다. 교회는 면밀한 검토와 표징을 토대로 ‘가경자’를 복자품에 올리게 됩니다. 이렇게 복자품에 오른 분들에 대해서도 시간을 두고 기도한 후에 비로소 ‘성인품’에 올리게 됩니다. 교회의 시성식은 시간도 오래 걸리고, 특별한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한번 시성된 성인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말하지 않고 공경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기에 시성식은 면밀히 검토되어야 하고, 증언을 들어야 하고,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2014년에 124위 시복식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광화문에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교황 방한 준비 위원회에서 일하였습니다. 124위의 복자가 성인품에 오를 때까지 우리는 기도하고, 기다립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일에 한 치의 오차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평생 독립운동을 하였습니다.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인 1943년 먼 타국에서 사망하였습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은 그분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려하였지만 북한의 반대로 무산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그분의 유해를 본국으로 송환하였고, 대한민국 공군이 우리의 영공으로 돌아오는 유해를 호위하였습니다. 그분의 유해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었고, 그분의 흉상은 다른 독립투사들과 함께 육군사관학교 교정에 설치되었습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싸웠던 독립군들의 정신을 육군사관학교 학생들이 따르자는 취지였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부는 홍범도 장군이 과거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흉상’을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고 합니다. 그분이 공산당에 가입했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있을 때였습니다. 당시 공산주의인 러시아와 민주주의인 미국은 연합국으로 같은 편이었습니다. 제국주의인 일본, 독일, 이탈리아와 전쟁 중이었습니다. 그때는 대한민국이 아직 해방되기 전이었고, 이념으로 세계가 양분되던 때도 아니었습니다. 홍범도 장군은 훈장을 바란 적도 없었고, 흉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같은 대한민국 정부가 정권에 따라서 훈장을 주었다가 취소한다면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흉상을 만들었다가 철거한다면 이 또한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역사 앞에서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마음을 이야기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행렬을 보셨습니다. 슬픔에 찬 가족들을 보았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어둠에 빛을 주시려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3년 가해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루카 7,11-17
나쁜 재료를 주며 좋은 물건으로 돌려받기를 바란다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인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십니다.
복음만 읽어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과부와 그 죽은 아들이 불쌍해서 과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살려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면 왜 불쌍하게 죽는 이들은 모두
살려주시지 않으실까요?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도 보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디에서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받을 마음이 없는데 선물을 주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어머니의 믿음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 같지만 예수님의 이 말에
어머니의 큰 믿음이 들어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
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인의 과부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사람은 맡길 줄 압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맡긴다는 말은 ‘죽여서 봉헌한다’라는 뜻과 같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이유는 자기 능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를 죽여서 맡기지 않고 살려서 맡기는 게 문제입니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교육이 이루어지고 변화될 수 있을까요?
요즘 선생님 신자들에게 엄마들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학교 그만두고 싶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사연도 있습니다. 어떤 엄마가 선생님에게 보낸 문자입니다.
“선생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제가 곰곰이 생각 좀 하다가 말씀드리는 건데요.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 내내 서 있게 한다’라고 아이가 말하더라고요.
‘엄마 근데 나 도덕책을 잃어버렸어.’ 그날 밤 아이는 경기를 일으켰는데,
경찰서에 문의해보니 아동학대라고 하는데, 편법으로 아이들을 조지시면 편법으로 선생님을
조질 수 있다는 것만 기억해 주시겠어요 ^^”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오늘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았는데요. 제가 도덕책을 안 가져온 사람은
수업 시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런 엄마들은 아이들이 이상해지는 것을 선생님 탓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맡기지 않는데 어떻게 좋은 교육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얼마 전에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20대 교사가 안타까운 선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구타당해도 선생님은 저항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편이 없어? 교사가 죽었는데!”
라고 울부짖는 동료 교사의 말은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일까?’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데 심지어 동료 교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프로필 사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학부모도 있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이른 아침에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고 선생님의 프로필 사진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이들 어린데 선생님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큰 영향을 준다는 거 아시죠? 아직 사실관계도 판명 나지 않은 일로 이렇게 추모한다는 걸
드러내는 건 아닌 것 같아 연락드립니다.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으니 언급 자제 부탁드려요.”
이 댓글 때문에 파문이 일자 또 이러한 댓글이 달렸습니다.
“선생님 제 문자를 여기서 볼 줄 몰랐어요. 너무 당황스럽네요. 개인적인 문자 내용을 유포하셨으니
각오는 되신 거죠? 학부모 회의안건으로 올릴게요. 너무 치욕스럽네요.”
어머니들이 이렇게 교육을 잘할 줄 안다면 왜 학교에 보내는 걸까요? 본인이 하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애 아빠가 지금 참고 있어요. 내가 말렸어요!”라는 등으로 협박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 선생님들보다 더 잘 안다고 하는 교만 때문입니다.
여러 교육 프로그램을 많이 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들에 대한 어머니와 선생님들을 위한
솔루션에서 “실제의 실천적인 변화가 오는 데에는 어떤 방법이 좋을까요?”라는 질문에
어느 유명 교육 전문가는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어주세요.”
예를 들어 놀이터에서 줄을 서지 않고 먼저 타려다가 다치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줄을 서지 않게
키웠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들은 선생님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한다고 합니다.
“우리 애 마음 얼마나 읽어주셨어요?”
교육은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변화시키게 만들려면 맡겨야 합니다.
맡긴다는 말은 봉헌한다는 말입니다. 봉헌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다시 스마트폰도 빼앗을 수 있고 아이를 돌려보낼 수도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주 정상적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을 믿지 못하면서 자녀를 맡긴다는 말은
학교 교육으로 내 자녀가 변화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변화시키고 싶다면 맡겨야 합니다.
『하.사.시.』 5권 25장 ‘코라진의 몸이 굽은 여인’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해 주신 예화를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어리석은 어떤 부자가 한 장인(匠人)에게 아주 질이 좋은 꿀과 같은 황금색 재료의 큰 덩어리를
가지고 와서, 그것을 가공해서 장식된 작은 병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재료는 가공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고 장인이 부자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이 재료는 무르고 잘 늘어납니다. 제가 어떻게 이것을 조각해서 모양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뭐라고요? 이 재료가 좋지 않다고요? 이것은 값진 수지(樹脂)이고, 내 친구 한 사람은 이것으로 만든
작은 항아리를 하나 가졌는데, 그 항아리에 넣은 포도주는 얻기 어려운 맛을 얻게 되오.
나는 더 큰 항아리 만들어 가져서, 그의 항아리를 자랑하는 내 친구의 자존심을 꺾어 주려고
이 재료를 아주 비싼 값을 주고 샀소. 항아리를 만들어주시오. 그것도 즉시.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능력 없는 장인이라는 말을 하겠소.”
“그러나 손님 친구의 항아리는 황금빛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질이 좋은 호박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아니오, 이 재료로 만든 거요.”
“혹 같은 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해둡시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른 결과로나 단단하게 만든
다른 재료들과 섞어서 치밀해지고 단단해졌을 것입니다. 그 친구분에게 가서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다시 오셔서 그분의 항아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아니오. 이 재료는 그 친구 자신이 내게 판 것이고, 그렇게 써야 한다고 확실히 말해 준 거요.”
“그러면 그 친구분이 자신의 아름다운 항아리에 대해 손님이 가지시는 욕망을 벌하려고
손님을 속인 것입니다.”
“말조심하시오! 일을 하오. 그렇지 않으면, 이 희귀한 수지(樹脂)의 가치와 비교할 만한 가치가
없는 이 작업장을 빼앗아서 당신을 벌하겠소.”
“장인은 슬퍼하며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반죽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반죽이 그의 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는 유향(乳香)과 가루를 써서 한 덩어리를 굳게 하려고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수지는 황금빛의 투명성을 잃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열로 단단하게 하기를 바라면서 도가니 가까이 가져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용해(溶解)되기 때문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면서 그것을 꺼내야 했습니다.
그는 사람을 헤르몬산 꼭대기에 보내서 얼어붙은 눈을 가져오게 해서 그 물질을 눈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 물질은 단단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형(成形)이 되지 않았습니다.
‘끌로 모양을 만들어야지’ 하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끌을 대자마자 수지가 산산조각이 낮습니다.
장인은 완전히 실망하고, 벌써 그 재료를 가공할 수 있게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고
마지막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그는 조각들을 주워서 화덕의 열기로 다시 액체가 되게 한 다음,
그것을 다시 눈으로 가볍게 얼렸습니다. 그리고 가까스로 말랑말랑해진 재료를
끌과 칼 모양의 주걱으로 가공해 보았습니다. 그 재료가 성형되기는 했습니다. 암! 성형됐지요!
그러나 끌과 혀 모양의 주걱을 떼자마자, 마치 반죽 통에서 부풀어 오른 빵 반죽인 것처럼
처음 형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쳤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부자의 보복을 피하고 파산을 면하기 위해서
밤사이에 아내와 아이들을 마차에 태우고, 물건들과 일하는 연장들을 싣고,
빈 채로 남겨둔 작업장 한가운데에 수지의 황금 빛나는 재료를 놓아두고,
그 위에는 ‘가공할 수 없음’이라는 쪽지를 남기고, 국경 밖으로 도망쳤습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주면서 변화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맡기려면 완전히 맡기십시오.
완전히 맡겼다는 말은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믿는다는 말입니다.
사제에게 성당을 맡겼는데 교구가 사제가 아닌 신자들의 목소리에 휘둘리면 어떨까요?
사제는 그 성당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됩니다.
사제가 봉사자를 뽑았다면 그 봉사자가 자신의 범주 안에서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하도록 해야 합니다.
책임은 그 봉사자를 뽑은 사제에게 있습니다.
물론 사고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맡기려면 제대로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봉헌하여 좋은 것으로 돌려받으려면 죽은 제물을 바쳐야 함을 잊지 맙시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18.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오늘 <복음>은 <루카복음>에서 이방인을 위한 최초의 이적으로서,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지설교를 마치시고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을 때, 병들은 노예를 위한 백인대장의 청을 전하는 유다인 원로들의 말을 듣고 백인대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백인대장의 친구들이 와서 백인대장의 말을 이렇게 전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루카 7,6-8)
이 말씀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감탄하시며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그는 자신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자격이 없는” 이방인임을 알았으며, 또한 자신이 군사력을 지닌 백인대장이지만 왕에게 속해 있듯이, “상관 밑에 매인 사람”, 자신이 누구에 속해 있는 지를 철저히 깨닫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깨달음, 곧 자신의 부족과 한계와 무능함과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 존재인가를 깨달은 데서 한편으로는 ‘겸손’이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 ‘밑에 매인 사람’인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에게 매여 있고 속해 있는 종을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이 속한 분께서 자신을 소중히 여기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에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가 청한 것은 오로지 한 마디의 “말씀”뿐 이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7)
그는 말씀의 권능을 믿었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시어 은총을 입은’ 성모님처럼, 그도 은총을 입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 속해 있는 존재임과 우리의 무능과 나약함을! 그러나 그분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존재임을! 그러기에 우리 또한 주님께서 소중하게 여기시는 이들을 소중하게 여겨야 함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믿고 의탁해야 함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루카 7,8)
주님!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아래에 있게 하소서!
당신을 믿게 하소서. 제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함은
매여 있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월요일
-참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주님, 새벽부터 넘치도록 자비를 베푸시어,
우리 한생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시편90,14)
얼마전 어느 자매로부터 오랜만에 받은 박카스 선물이 참 반가웠습니다. 70년대 초등학교 교편시절 가난하고 순박한 어머니들이 가장 많이 사들고 온 선물이 박카스였습니다.
“이념전쟁”
이번주 ‘시사IN’ 주간지 표지 제목 글자입니다. 정말 무서운 것이 이념전쟁에 이념중독입니다. 극단의 이념에 중독되어 광신(狂信)이 되면 약이, 답이 없습니다. 정말 무서운 악령같은 것이 이념입니다. 좌우 이념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념전쟁으로 한반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는지요! 그래서 어제 집무실 태극기 아래 제 신원의식을 분명히 하는 글귀를 써서 붙였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이다.”
예수님의 복음만이 이념중독의 병의 치유제입니다. 이념중독을 치유해주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때로 이념전쟁의 전쟁터와도 같은 인터넷에 들어가보면 양 진영 서로간의 증오와 멸시의 댓글들이 난무합니다. 똑같은 사실에도 반응은 얼마나 극단인지 인간성 상실을 목도합니다. 참으로 냉정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이념이 아닌 민생이, 복음적 삶이 참으로 절실하고 절박합니다. 참으로 이념에 중독되지 않은 참사람이, 예수님파 참 복음의 사람이 그리운 시절입니다. 참고로 오늘 강론 제목은 “예수님파 사람-참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입니다.
바로 14년전 2009년도에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이 그런 분입니다. 추기경이기 이전에 참사람, 예수님파 복음의 사람 김수환 추기경이었습니다. 어제 뜻밖에 14년전 당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의 추도사를 읽으며 공감했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나누고 싶습니다.
-“추기경님은 젊은 시절부터 간직하신 한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복음을 말로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 곁에서 그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함께 사시는 것이었습니다. 주교직에 오르고 추기경직에 오르시며 그것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래서 당신 영혼의 밑바닥에서 누구보다도 당신 자신에게 큰 빚을 지고 사셨습니다. 연세가 높아지신 다음에는 도저히 그 빚을 갚을 길이 없다는 것을 아시고, ‘요모양 요꼴’이라 탄식하시고, 당신 자신에게 ‘바보야!’라고 읊으셨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추기경님, 저는 믿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어서 오너라, 내 사랑하는 바보야! 그만하면 다 이루었다!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평안히 가십시오, 추기경님. 그리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시면 당신께서 불쌍히 여기시고 애틋하게 사랑하셨던 우리 백성을 위하여 주님께 간구하여 주십시오. 많이 아껴주셨던 강우일이 인사 올립니다. 2009년 2월20일”-
김수환 추기경님은 좌우 이념에 물들지 않은 참 복음의 사람이자 참 자유로운 영혼이었습니다. 푸른 하늘에 흰구름 같은 영혼이었습니다. 저에게 자주 사진을 보내 주는 분의 사진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한결같이 푸른 하늘에 흰구름이 있는 사진들입니다. 부단히 푸른 하늘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순수한 영혼입니다. 어제는 예전 글이 생각나 답글로 대신했습니다.
“하늘
보면
마음은
훨훨 날아
흰구름 되네!”
또 하나 이런 글도 생각납니다.
“나, 이런 이를 알고 있다
푸른 하늘 안
흰구름이 되어
임의 품안에 노니는 이”
분명 참사람, 복음의 예수님파 사람, 김수환 추기경님 영혼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반갑게도 이런 순수한 영혼을, 겸손한 믿음의 참사람을 만나니 바로 이방인 백인대장입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후 등장하는 첫 인물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순수한 영혼의 참사람은 종파를 초월하여 곳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을 찾고 만나는 과정 전체에서 백인대장의 고결한 인품이 잘 드러납니다. 감동적인 것은 자기가 아끼던 노예가 죽어갈 때 자존심을 내려 놓고 겸손히 주님을 찾는 모습입니다. 백인대장의 진면목을 증언하는 유다인 원로들입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
백인대장의 진면목의 절정은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께서 백인대장의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인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주님의 방문을 만류합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
바로 여기서 유래된 우리가 이 거룩한 미사전례중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이어 백인대장의 믿음에 감탄하시는 예수님이요 곧장 백인대장 노예는 치유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일이 없다.”
참으로 이런 진실하고 겸손한 믿음이 주님은 물론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도 바로 이런 믿음의 표현입니다. 겸손한 믿음의 사람, 백인대장이야말로 참 예수님파 사람이라 할 수 있겠고 이후 그의 예수님께 대한 신뢰와 사랑도 날로 깊어졌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참으로 예수님파 참사람이 되어 신심깊고 품위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물론이고 모두를 위해 기도하라는 권고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좋아하시고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도, 한 분이시니,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모두를 위한 끊임없는 감사 기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가 깊어질수록 예수님파 참사람의 실현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고백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파 바오로의 신원의식과 이어 우리를 위한 기도의 권고에 감동하게 됩니다.
“나는 이 증거의 선포자요 사도로,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과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진실을 말할 뿐,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남자들이 성을 내거나 말다툼을 하는 일 없이, 어디서나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이념에 중독되지 않고 참사람 예수님파로 살기위해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백인대장같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몸 둘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
[9/19(화) 연중 제24주간 화요일...되새김 구절]
1. 우리가 자비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첫째는 나 자신이 중심이 되려는 교만함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많은 죄악들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욕심을 먼저 생각한 교만에서 시작됩니다. 둘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지 못하다는 열등감입니다. 지난날의 잘못과 죄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열등감은 우리를 영성생활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흥같이 붉어도,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비의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러자 죽은 이가 일어나 앉아서 말을 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셨다.’”
“돌려주셨다”라는 말 안에는 어머니가 예수님께 먼저 “맡겨드렸다”, 혹은 “봉헌하였다”
라는 말이 전제됩니다. 맡겨드렸다는 말은 어머니의 능력으로는 안 되기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루카 7,8)
주님!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아래에 있게 하소서!
당신을 믿게 하소서. 제가 아직도 자유롭지 못함은
매여 있어서가 아니라 믿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은 속박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이념에 중독되지 않고 참사람 예수님파로 살기위해 진실하고 항구한 기도가 얼마나 절대적인지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백인대장같은 겸손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내게는 행복,
이몸 둘곳 하느님 나는 좋으니,
하신 일들 낱낱이 이야기하오리다."(시편73,28), 아멘.(이수철 신부)
[9/19(화) 연중 제24주간 화요일...제269일 기도]
복음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나인의 과부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께서 죽은 아들을 살리십니다.
하느님! 죽은이를 살리시는 하느님!
나와 함께 동행하시니 행복합니다.
내가 할 일 낱낱이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장서 인도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멘.
- 2023년 9월19일(화) 6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