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9월 20일 수요일[(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9월 20일 수요일[(녹)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소서. 당신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시고, 당신 종과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기도를 들어 주소서.
본기도
저희를 굽어보시어
저희가 하느님의 자비를 깨닫고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티모테오 1서 말씀입니다.3,14-16
사랑하는 그대여, 14 나는 그대에게 곧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라면서도 이 글을 씁니다.
15 내가 늦어지게 될 경우, 그대가 하느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교회로서, 진리의 기둥이며 기초입니다.
16 우리 신앙의 신비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그분께서는 사람으로 나타나시고, 그 옳으심이 성령으로 입증되셨으며
천사들에게 당신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시어 온 세상이 믿게 된 그분께서는
영광 속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 주님을 찬송하리라. 올곧은 이들의 모임, 그 집회에서, 내 마음 다하여 찬송하리라. 주님이 하신 일들 크기도 하여라. 그 일 좋아하는 이들이 모두 깨치네. ◎
○ 그분 업적은 엄위롭고 존귀하네. 그분 의로움은 영원히 이어지네.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
○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언제나 당신 계약을 기억하시네. 위대하신 그 일들 당신 백성에게 알리시고, 민족들의 소유를 그들에게 주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31-35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31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33 사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4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35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지혜의 모든 자녀가 드러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저희가 드리는 이 제사가
모든 이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하느님, 당신 자애가 얼마나 존귀하옵니까! 모든 사람들이 당신 날개 그늘에 피신하나이다.
<또는>
1코린 10,16 참조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며, 우리가 나누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먹는 것이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 은총으로 저희 몸과 마음을 이끄시어
저희가 제 생각대로 살지 않고
그 은총의 힘으로 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09월 20일 수요일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정천 사도요한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7,30 참조)을
“이 세대 사람들”이라 일컬으시며 장터에서 놀이하는 아이들에 비유하십니다.
장터의 아이들은 두 편으로 나누어져 있는 듯합니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피리를 불며 춤을 추는 것은 혼례식과 관련된 놀이이고, 곡을 하며 우는 것은 장례식 놀이입니다.
문제는 한쪽에서는 놀자고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 전혀 호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혼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피리를 불어 대도 춤을 추어 주지 않고,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아무리 곡을 하여도 우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에서 비유의 뜻은 더욱 명확하여집니다.
놀이를 제안하는 이들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이시고,
그 제안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 이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을 먹지도 않고 포도주를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였던 요한은 마치 장례식 놀이를 제안한 격이지만,
그들은 요한의 금욕주의적 태도를 비난하며 그를 마귀 들린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너희는 말한다.”
먹고 마시는 일에 비교적 자유로우셨던 예수님께서는 혼인식 놀이를 제안하신 격이나,
그들은 예수님을 방종한 생활을 일삼는 먹보나 술꾼으로 취급하여 버립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그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지 않고 모두 배척하여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 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일상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초대에 혹시 무관심하지는 않은지,
응답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수요일]
현지인들이 즐겨 찾지만 관광객들은 쉽게 가지 못하는 곳들이 있습니다. 잘 모르기도 하지만, 여행 중에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LA에 신문 홍보와 모임 때문에 10번 넘게 왔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할리우드 볼(Hollywood Bowl)’에 다녀왔습니다. 1922년에 개장한 야외 음악당입니다. “할리우드 볼에서 공연을 보기 전까지는 로스앤젤레스를 경험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LA 시민들이 아끼고 사랑하는 공연장이라고 합니다. 공연은 8시에 시작하는데 대부분의 관객들은 5시 쯤 미리 도착해서 준비해온 음식을 먹으며 공연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저와 같이 간 분들도 6시 쯤 도착해서 김밥과 과일을 먹으면서 공연을 기다렸습니다. 그날 공연의 주제는 ‘Beethoven at the Bowl’이었습니다. 베토벤에게 영감을 준 영웅은 프랑스 혁명을 이끌었던 ‘나폴레옹’과 인류에게 불을 가져다주고 끝없는 형벌을 겪어야 하는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였다고 합니다. 지휘자는 ‘영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영웅이란 특별한 힘과 능력을 가진 사람 일 수 있습니다. 영웅이란 시대를 변화시킨 사람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웅은 자신의 희생과 헌신으로 이웃에게 사랑을 준 사람입니다.” 지휘자의 설명을 듣고 베토벤 교향곡 3번 ‘영웅’을 감상했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이분들은 열정과 땀으로 한국의 초대교회를 이끌었습니다. 이분들은 박해를 받아 순교함으로써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진정한 ‘영웅’들입니다. 오늘은 한국교회의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관악산 줄기에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 주교, 성 베드로 모방 나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 신부님’의 묘소가 있는 성지입니다. 이분들은 박해의 시기에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조선의 정부는 외국인들이 선교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신자들에게 외국인 신부의 거처를 밝히라고 고문을 하고, 죽였습니다. 범 주교님은 신자들의 고난이 큰 사실을 알았고, 다른 두 신부님에게도 신자들의 고통을 줄일 수 있도록 자수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이렇게 외국의 사제들은 1839년 새남터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서울 가회동에는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발자취가 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에서 온 선교사 주문모 신부님을 보호하기 위해서 신부님을 대신해서 관원들에게 잡혀갔습니다. 최인길 마티아는 중국말을 잘하는 역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최인길 마티아가 중국인 사제가 아닌 것을 알게 된 관원들은 더욱 가혹하게 고문을 하였고, 결국 최인길 마티아는 1795년에 순교하게 됩니다.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최인길 마티아의 뜨거운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사제들은 신자들을 위해서 순교를 하고, 신자들은 사제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고, 감동스럽습니다. 이분들이 한국교회의 영웅들입니다.
신자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작은 허물을 크게 부풀려서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강론 준비에 소홀한 신부, 성사를 정성껏 준비하지 않는 신부,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과 함께 하지 않는 신부,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두는 신부들은 삼성산 성지에 계신 외국인 신부님들의 마음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려하지 않는 신자,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지 않는 신자, 자기의 십자가를 남에게 지우려는 신자, 불평과 불만을 입에 달고 다니는 신자들은 복자 최인길 마티아의 헌신적인 삶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높은 곳도, 천사도, 권세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 깊은 존경을 드립니다. 한국 최초의 사제이기도 하지만 순교로써 신앙의 모범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을 사랑합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였고, 길 위에서 순직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역시 자랑스러운 신앙의 선조들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그와 같은 삶이 현재의 제도와 불의한 세력에 의해 탄압과 고통을 받는다 할지라도 신앙인들은 자신이 져야할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0919.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7,16)
오늘 <복음>인 ‘나인의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신 이야기’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루가 8,40-56)와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이야기’(요한 11,17-44)와 함께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물론 죽은 이를 살리신 이야기는 다른 곳에서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엘리야가 사렙다의 과부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1열왕 17,17-24)라든지, 엘리사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린 이야기(2열왕 4,32-37), 베드로가 도르가를 살린 이야기(사도 9,36-43)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은 그들이 하느님께 간청해서 일어난 일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직접 “일어나라”는 한 마디의 말씀으로 죽은 이를 손수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누구의의 요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외아들을 잃은 과부에 대한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서 베풀어집니다.
이는 당신 자신이 생명과 죽음을 다스리시는 하느님이심, 곧 메시아임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당신의 큰 자비를 드러내줍니다. 곧 율법에 따르면, 시체에 손을 대는 것은 부정을 타는 행위이지만, 율법을 너머서는 그 자비의 힘으로 죽은 젊은이를 일으키셨습니다.
오늘,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보고 싶은 것은 이 광경을 ‘목격한 자들의 반응’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반응은 바로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우리들 자신의 반응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였다.”(루카 7,16)
우리는 여기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일”이 어떻게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지? 보고자 합니다. 하느님께 대한 체험에서 오는 “두려움”은 성서 안에서 두 가지의 반응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에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히자 베드로가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카 5,8)라고 했던 것처럼, 무서움과 공포, 거부와 배척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요, <또 다른 한 가지>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께 대한 찬양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단지 무서움이나 공포의 감정 안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내 감사와 찬양, 사랑과 예배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의 체험은 하느님의 거룩함과 전능함 그리고 위대하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왜소함과 무능함 그리고 죄를 발견하면서 오게 되는 회개와, 바로 그분이 자신의 주님임을 깨닫고 믿게 되면서 감사와 찬양, 예배와 사랑이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머물 자리를 준비합니다. ~두려움이 없다면 사랑이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두려움은 사랑이 들어오게 하는 입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끌고 들어갈 수 있도록 두려움이 그대 마음 안에 자리 잡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의로워질 수 없습니다.’(지혜 1,28)”(요한서간 강해 9,4)
이처럼, “두려움”이라는 바늘을 통해, “사랑”이라는 실이 꿰매진다는 것입니다.
또한 베네딕도는 <규칙서>에서 다른 어떤 것 때문에가 아닌, “하느님을 사랑으로 두려워할 것”(규칙서 72,9)을 말합니다. 곧 “두려움”과 “사랑”이 동일한 것으로 다루어집니다. 또한 그는 <규칙서>의 머리말에서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아이들아 와서 듣거라. 하느님 두려워함을 가르쳐 주겠노라”(머리말 12)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루카 7,16)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4주간 화요일.
인간미(人間味) 넘치는 예수님 닮기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도 밤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나서며 하늘의 별들을 보고 불암산 정상을 확인한후 집무실에 들어와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아래 태극기를 바라보며 “만세육창”후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돌아오면 맨먼저 찾는 어머니요, 어머니 앞에서 이런저런일을 털어 놓던 일이 생각납니다. 얼른 일어나 속생각을 주님께 쏟아놓고 싶은 마음에 저절로 잠깨게 됩니다. 끝기도후는 너무 피곤하여 잠자리에 들었다가 일어나면 어머니 앞에 털어 놓는 아이처럼 어제 하루 있었던 모든 일을 하느님께 털어 놓으며 시작하는 하루요,기도하는 마음으로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밤마다 외딴곳에서의 시간도 이런 시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예수님파 ‘주님의 전사(戰士)’이다.”
요즘 새롭게 정의한 제 신원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예수님 닮기”
-인간미 넘치는 사람-,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인간미 넘치는 사람, 매력 만점입니다. 사전에서 찾아 봤습니다.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정답고 따뜻한 느낌” 이런 이들이 진짜 살아 있는 인간입니다. 예수님이 그 빛나는 모범입니다. 신적일수록 인간적이고 인간적일수록 신적인 진리를 보여주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자 인간이 예수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닮아갈수록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웁니다.
루가복음에서 예수님의 평지설교 끝날 무렵 복음이 두 소주제는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와 “내 말을 실행하여라”였습니다. 참으로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듯이 표정이나 언행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열정적으로 선택하고 훈련하여 습관화할 때 비로소 좋은나무에 좋은열매의 사람들임을 말해 주는 복음입니다.
요즘 자주 보는 유투버에서 무수한 공직자들의 표정이나 언행을 보면서 너무 실망하게 됩니다. 사제나 수도자뿐 아니라 그 무슨 직위든 “사람이 먼저 되라”는 말을 실감합니다. 지식공부는 뛰어나고 권모술수나 처세술이 뛰어나 높은 직위에 올랐을지 몰라도 사람되는 공부는 정말 엉망진창 수준이하들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인성이나 품성이 말이 아닙니다. 지성, 감성, 영성도 전무하고 인간에 대한 공감능력, 존중심도 없고 상식이하인 경우 너무 많습니다.
도대체 젊은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워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희망을 주는 어른들이 없기에 20대 자살율이 세계 제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주 가톨릭평화신문 제1면 톱기사, "가족돌봄에 지치는 청년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싶어요." 제목을 잊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훌륭한 인품의 사람이 되는 것을 첫째 목표로 두고 공부에 전념했으면 좋겠습니다.
새삼 사람되는 공부가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평생공부인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주 하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광야인생 제대로 미치면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괴물이나 폐인도 많다고 말입니다. 각자도생各自圖生, 비정非情의 야만시대, 사람이라 하지만 괴물, 악마, 폐인같은 사람도 세상 도처에 널려 있고 영육이 아픈 병든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영육의 건강을 위해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깨어 살아야 할 위기의 시대입니다. 지옥은 텅비어 있고 악마들이 활개치는 세상이라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반면 평지설교후 예수님의 인간미 넘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집니까! 어제 예수님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백인대장의 노예를 치유하시며 그의 믿음에 감탄하셨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불쌍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려 주십니다. 예수님의 인간미에 매혹된 사람들은 세상 역사상 얼마나 많았는지요!
교회는 싫어도 예수님은 좋아했다는 간디, 복음의 산상설교와 참행복 선언은 종파를 초월해 대부분 영성가들이 얼마나 많은 영감을 받았는지 찬탄을 금하지 못합니다. 불가의 성철 스님도 예외가 아닙니다. 얼마전 불교학의 석학碩學이라 할 수 있는 심도학사를 이끌던 개신교 신자인 길희성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지병으로 9월8일 80세에 선종했습니다. 신문에서 읽은 일부 기사를 인용합니다.
-“선생님은 초종교적 영성을 추구하시면서 왜 그리스도교를 떠나지 않으세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어느 햇살 따사로운 오후의 대화였다. 길희성 선생님은 경계없이 종교를 연구하고 불교학자로서 명성을 떨치셨지만, 당신의 영적 뿌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교였다. 종교학자로서 이웃 종교를 탐구하시면서 당신의 그리스도교 신앙을 더 깊고 풍요롭게 하셨다고 해도 좋겠고, 그리스도교 영성의 가장 중심으로 들어가 이웃 종교와 벽없이 소통하셨다고 해도 좋겠다.-
오늘 복음의 장면은 얼마나 아름답고 극적인지요! 그대로 파스카 신비가 펼쳐지는 장면입니다. 예수님 일행과 외아들을 잃은 과부의 일행 행렬이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조우遭遇합니다. 빛과 어둠, 생명과 죽음,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의 대조입니다. 예수님의 개입으로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외아들을 잃고 울며 가는 과부를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울지 마라”이르시고는 관에 손을 대시며 죽은 젊은이에게 명하십니다.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이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부활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군중이 하느님을 찬양하며 외치는 다음 고백이 진리입니다.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났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다.”
둘의 고백 다 맞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찾아오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참으로 이런 예수님을 만나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인 우리 삶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예수님을 닮은 교회지도자의 자격과 봉사자의 자격을 갖출수 있다면 얼마나 이상적일까요. 비단 교회뿐 아니라 정치, 사회지도자도 이런 자질을 갖추면 얼마나 이상적이겠는지요!
“그러므로 감독은 나무랄데가 없어야 하고,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절제할 줄 알고, 신중하고, 단정하며, 손님을 잘 대접하고, 또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관대하고 온순하고 돈 욕심이 없으며, 자기 집안을 잘 이끌고 아주 품위있게 자녀들을 순종시키는 사람이어야 하고, 바깥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대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사람들입니다. 비단 교회지도자의 자질일뿐 아니라 이런 정치, 사회지도자의 자질이자 우리 인간이 갖춰야 할 자질이요 품성이겠습니다. 이어지는 봉사자의 자격도 우리 자신의 됨됨이를 살펴보게 합니다.
“봉사자들도 품위가 있어야 하고, 한입으로 두말하지 않으며. 술에 빠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도 안되고, 깨끗한 양심으로 믿음의 신비를 간직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역시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고, 자녀들과 집안을 잘 이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에서 훈련되고 습득된 좋은 인품과 자질의 사람들이 경제, 사회, 교육, 정치 등 모든 각 분야에 배치되어 업무를 수행한다면 얼마나 멋진 사회요 국가가 되겠나 생각해 봅니다. 새삼 가정교육, 교회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얼마나 중요하고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의 총체적 난국이자 위기의 시대를 개탄하며 지니는 생각입니다. 그나마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예수님을 닮은 참사람이 되어 살게 하시니 위로와 힘을 받습니다. 아멘.
[9/20(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되새김 구절]
1.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에, 곧 하느님의 제안과 부르심에 잘 호응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는 모두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이며,
그분의 지혜가 옳다는 것을 이 세상에 드러내는 ‘지혜의 자녀’들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부르심이 단 한 번 일어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분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정청 신부)
2.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뚫고 부활하여 하느님의 오른편에 계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역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과 환난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십자가를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 우리도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배우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루카 7,16)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젊은이야, 일어나라.”(루카 7,14)
주님!
관에 손을 대시고 죽은 이를 일으켜 세우시듯,
당신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리는 열차에 누워 잠들어 있는
저를 일으켜 세우소서!
죽음의 길 벗어나 생명의 길 걷게 하소서!
쪼개어 나누며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상처도 축복이 되게 하시고, 아픔도 기쁨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젊은이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
그대로 미사에 참석한 우리의 잠든 영혼을 일깨우는 죽비소리와도 같이 은혜롭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화두로 삼아 사시기 바랍니다. 여기 “일어나라.”는 부활을 뜻하는 말마디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다시 파스카의 삶을 시작하라는 말씀입니다.(이수철 신부)
[9/20(수) 연중 제24주간 수요일...제270일 기도]
복음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언제나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기도합니다.
- 2023년 9월20일(수) 6시5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