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3일 화요일[(녹) 연중 제26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10. 3. 06:13

[매묵]2023년 10월 3일 화요일[(녹) 연중 제26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다니 3,29.30.31.43.42 참조
주님,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짓고 당신 계명을 따르지 않았기에, 당신은 진실한 판결에 따라 저희에게 그 모든 것을 하셨나이다. 당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소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크신 자비와 용서를 베푸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내려 주시어
약속하신 그곳으로 저희가 달려가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많은 민족들이 주님을 찾으러 예루살렘에 오리라.>
▥ 즈카르야 예언서의 말씀입니다.8,20-23
20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21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 하고 말하리라.
22 많은 민족들과 강한 나라들이
예루살렘에서 만군의 주님을 찾고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러 오리라.
23 만군의 주님이 이렇게 말한다.
그때에 저마다 말이 다른 민족 열 사람이 유다 사람 하나의 옷자락을 붙잡고,
“우리도 여러분과 함께 가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하느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고
말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7(86),1-3.4-5.6-7(◎ 즈카 8,23 참조)
◎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 거룩한 산 위에 세운 그 터전, 주님이 야곱의 어느 거처보다, 시온의 성문들을 사랑하시니, 하느님의 도성아, 너를 두고 영광을 이야기하는구나. ◎
○ 나는 라합과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 보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 시온을 두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여기서 태어났으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몸소 이를 굳게 세우셨다.” ◎
○ 주님이 백성들을 적어 가며 헤아리신다. “이자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노래하는 이도 춤추는 이도 말하는구나. “나의 샘은 모두 네 안에 있네.” ◎

복음 환호송

마르 10,45 참조
◎ 알렐루야.
○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51-56
51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52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5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54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55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56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저희가 드리는 예물을 받아들이시어
이 제사로 저희에게 온갖 복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19(118),49-50 참조
주님, 당신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저는 그 말씀에 희망을 두었나이다. 당신 말씀 고통 속에서도 위로가 되나이다.
<또는>
1요한 3,16 참조
그리스도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시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네.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천상 신비로 저희 몸과 마음을 새롭게 하시어
저희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전하며 그 수난에 참여하고
그 영광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결심;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마음을 굳히십니다. 십자가에 달리려는 마음을 굳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위해 달려오셨습니다. 이것이 그분의 삶의 목표이자 꿈이었습니다. 삶의 목표가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길을 선택하면 그저 생존하려는 이들에게 비난 받습니다. 그냥 살면 되지 왜 꿈이니 목표니 하면서 괴롭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예수님은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당신은 그 길을 가야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가끔 힘들고 어려울 때 살아도 사는 게 아니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삶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목적이 없어서 하는 소리입니다. 사람이 꿈이 없으면 그건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거나 생존하는 것입니다. 동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꿈은 나의 생명의 에너지를 소진할 수 있는 대상입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게 목적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사마리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말은 참 생명이 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랜트 카돈은 스물다섯 살까지 술과 마약에 찌들어 살았습니다. 그는 부자였다가 가난하게 되어 돈이 행복이라 믿을 수밖에 없는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자신은 큰 부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야 가족도 돌보고 세상에 좋은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만족을 알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바랐던 어머니에게 상처였습니다. 그리고 돈을 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현실을 잊기 위해 마약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큰 선물을 준 사람은 마약을 끊는 기관에서 일하는 상담사였습니다. 그는 그랜트 카돈은 마약에 워낙 찌들었기 때문에 그것을 끊을 수는 없을 것이라 단정하였습니다. 그랜트 카돈은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성공에 집착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마약은 저절로 끊어졌습니다. 6개월 만에 자동차 판매왕이 되었고 지금은 부동산 재벌이 되었습니다. 
    그가 마약을 할 때는 모두 마약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성공에 집착할 때는 그것도 마약인 것처럼 뜯어 말렸습니다. 자신들이 꿈 없이 노력하지 않는 것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랜트 카돈은 성공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마약의 삶으로 가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냥 생존하기 위해 마약을 하는 삶과 꿈을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삶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 안에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에너지를 생존하는 데 쓰느냐, 꿈을 이루는 데 쓰느냐를 선택하는 것은 본인이 할 일입니다. 에너지는 어디엔가는 쓰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 생명을 이 세상을 구하려는 꿈에 쏟아부으셨습니다. 피곤한 하루를 살면 잠이 잘 오는 것처럼 그렇게 다시 깨어나셨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원리입니다. 하루에 자신의 에너지를 꿈을 위해 쏟아붓지 않으면 아침이 괴롭습니다. 마지막 때도 그럴 것입니다. 꿈은 처음부터 명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이웃, 그리고 세상에 유익한 무언가를 하도록 태어났음을 믿고 나아가다 보면 조금씩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거절만 당하던 루저에서 62조 자산가가 된 알리바바의 창업자 마윈 전 회장의 인터뷰를 들어봅시다. 
    “대학 입학 시험에 세 번이나 떨어졌었나요?”
    “네, 대학 시험에 3번이나 떨어졌어요. 저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우스꽝스러운 실패들도 많았죠. 전 중요한 초등학교 시험을 2번 낙제했어요. 전 중학교 입학도 3번이나 실패했습니다. 실패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으니까요. 오늘날에도 저희는 여전히 거절 당합니다. 대학교 졸업 후 3년 동안 취업을 준비했어요. 거의 30번 넘게 지원했지만, 모두 실패했죠. 
    저는 경찰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제가 적합하지 않다고 하더군요. 저는 심지어 KFC에 들어가려 했어요. KFC가 처음으로 중국에 들어왔을 때였어요. 총 24명이 KFC에 지원했는데 23명만이 합격했어요. 제가 떨어진 단 한 사람이었어요. 경찰을 지원했을 때는 총 5명이었는데, 저는 여기서도 유일하게 떨어진 한 사람이었어요. 저에게 ‘실패’는 익숙한 거였어요. 그리고 제가 말했죠. 저는 하버드에 10번을 지원해서 10번 모두 떨어졌어요.
    저는 매우 낙담해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친구가 ‘포레스트 검프’라는 영화를 추천해줬죠. 그리고 그를 본 순간 ‘바로 이 남자다. 우리가 배워야 할 사람이.’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을 믿으세요. 그 일을 사랑하세요. 다른 사람이 좋아하든 말든.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아요. 당신이 어떤 것을 얻게 될지 결코 알 수 없어요.’ 나는 절대 몰랐어요. 여기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당신과 이렇게 인터뷰하고 있을 거라는 걸요. 나는 결코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만들어냈어요. 15년 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했었어요. ‘여러분 우리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약 우리가 성공한다면 80%의 중국 젊은이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자 아버지도, 막강한 권력의 삼촌도 없습니다. 은행에서 1달러, 정부로부터 1센트도 못 받았어요. 단지 팀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럼 걱정되는 것이 있나요?”
    “요즘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어가는 것이 걱정입니다. 그리고 꿈을 잃고 불평불만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꿈이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는 사람은 꿈을 포기한 사람들을 가장 불쌍하게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차갑거나 뜨거우면 삼키겠지만, 미지근하면 뱉어버리겠다고 하십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생존에 집착하든, 진정한 삶에 집착하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소명과 성공에 집착하지 않으면 중간밖에 못 간다고 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만큼 생존 욕구에 집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은 생명을 바칠 나의 소명을 찾고 그 길로 나아가는 것 뿐입니다. 꿈을 포기하면 무엇이 남을까요? 죄를 짓는 일만 남습니다. 인생은 오르막 아니면 내리막입니다. 매일매일 예루살렘으로 오를 결심을 합시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한국에서 오신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교구 인사이동으로 지난 8 16일에 왔습니다. 낯선 곳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미국 사회에서 지내려면 SSN(사회보장 번호)를 받아야 합니다. 운전면허증을 취득해야 합니다. 은행 계좌를 개설해야 합니다. 신부님은 사회보장 번호와 은행 계좌는 만들었다고 합니다. 뉴욕은 한국의 운전면허를 인정하지 않기에 운전면허 시험을 준비 중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을 보니 4년 전 저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저와 다른 점은 스스로 알아서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직원들이 도와주었습니다. 뉴욕의 시스템도 몰랐지만 스스로 해 본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와 있던 신부님들의 도움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신부님도 많은 사제들을 만날 것입니다. 가깝게는 본당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동북부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미주 한인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교구 사제 모임이 있습니다. 이렇게 사제들을 만나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낼 것입니다. 무엇보다 신부님과 함께 지내는 본당 공동체가 있습니다. 본당 공동체와 기쁨과 슬픔도 같이 나눌 것입니다. 그렇게 추억이 쌓이면 타향도 고향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지냈습니다.

 

라틴어로 사람을 뜻하는 ‘Homo'는 그 어원이 땅을 뜻한다고 합니다. 땅은 아래에 있고, 땅은 모든 것을 받아 줍니다. 그래서 땅은 겸손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강생도 겸손의 표징입니다.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도 겸손의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한문으로 사람을 뜻하는 人間은 서로 의지한다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이 찬란한 문화와 문명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서로 의지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말하는 황금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시작을 전하는 단군신화 弘益人間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은 이웃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로운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말 사람의 어원은 살다와 암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사는 의미를 아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이웃의 마음을 아는 존재입니다. 삶의 의미를 모른다면 사람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말 사람은 철학적이며, 종교적인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은 하느님을 믿고 알아 구원받는 것입니다. 잠시의 삶을 마친 후에는 하느님과 함께 지복직관을 누리며 영원한 삶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야 할 때를 알았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갈 뜻을 굳히셨습니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겸손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뽑으셨고, 제자들에게 3가지 권한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권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주셨고, 갇힌 이들을 풀어 주셨고, 억눌린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운 이들은 모두 나에게 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멍에는 편하고 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십자가를 지셔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의 겸손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은 이 세상에 태어난 목적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참 사람입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 낙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02. 수호천사 기념일.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께서는 ‘작은이들’ 하나라도 그지없이 존귀하게 여기신지라 그들의 수호천사들을 두어 당신과 함께 있도록 하셨음을 말해줍니다. 곧 천사들이 존귀한 존재인 것이라기보다 천사들을 붙여 보호해야 할 만큼 인간이 존귀한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서로 송사하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1코린 6,2-3)

그렇습니다.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천사들을 심판할 것입니다. 이토록 인간은 존귀합니다.
 
이는 <시편> 8편을 떠올려줍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시 8.5-6)
 
그렇습니다. 영광과 존귀의 관이 천사에게 씌워진 것이 아니라, 우리네 인간에게 씌워진 것입니다. 결국, 천사는 하느님이 되지 못하지만 인간은 하느님이 되는 하느님 되는 영광과 존귀의 관이 씌워졌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참으로 존엄합니다. 그지없이 존귀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이 존귀함을 잘 보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존귀함도 잘 보호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인간의 존귀함은 개인의 능력이나 재능에서 오는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인간의 존귀함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그 누구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인간의 존엄을 평가하거나 도구로 전락시키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존귀한 존재로 존중되어야 할뿐만 아니라, 이를 지켜나가야 할 사명도 부여받고 있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혹 우리의 관심이 ‘큰 사람’에게 있지는 않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볼 줄 아는 눈입니다. 곧 우리가 “큰 사람이냐 작은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느님께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이냐?”를 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곁에 있는 내 형제가 나에게 ‘얼마나 귀중하고 소중한 존재인지’, 또 내가 내 형제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되어주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태 18,5)
 
주님!
무엇을 하든 당신을 지향하여 일하게 하시고,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게 하소서!
모든 주어진 것을 당신의 이름으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드리는 감사가 되게 하소서!

오늘, 나의 모든 삶이 당신께 바치는 기도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수호천사 기념일

 

-침묵이 가르쳐 주는 진리-

침묵 예찬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수호천사 기념일이지만 우리 성 베네딕도 수도회 전례력에서는 수호천사 기념미사가 아닌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침묵중에 저절로 떠오르는 수호천사께 바치는 기도로 오늘 강론을,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어제 세계 전 그리스도교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종교일치에 관한 시노드 저녁기도시 교황님의 ‘침묵’을 주제로 한 강론을 들으면서 새삼 침묵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침묵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예전 수도자들은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만나고자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우선적 타고난 특징은, 영성가들의 특징은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와 풍요로움과 자유를 위해 침묵과 고독은 필수입니다.

 

침묵은 현존입니다. 침묵은 영원입니다. 침묵은 찬미입니다. 침묵은 부요입니다. 침묵은 자유입니다. 침묵은 정화입니다. 침묵은 성화입니다. 침묵은 탄생입니다. 침묵은 생명입니다. 침묵은 빛입니다. 침묵은 휴식이자 안식입니다. 침묵은 아름다움입니다. 침묵은 진리입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침묵은 기도입니다. 침묵은 경배입니다. 침묵은 일치입니다. 침묵은 분별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경청입니다. 침묵은 비움입니다. 침묵은 깨달음입니다. 침묵은 은총입니다. 

 

침묵은 치유입니다. 침묵은 위로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깨어있음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침묵은 응시입니다. 침묵은 친교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감사입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침묵은 연대입니다. 침묵은 순수입니다. 침묵은 기쁨입니다. 침묵은 지혜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기다림입니다. 침묵은 수용입니다. 침묵은 관대함입니다. 침묵은 희망입니다. 침묵은 선물입니다. 침묵의 힘입니다. 침묵 역시 선택이자 공부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결국은 침묵은 모두라는 말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침묵에 대한 진리를 열거해 봤습니다. 말이 막혔을 때, 표현을 찾지 못했을 때 저절로 침묵입니다. 이밖에도 침묵의 유익함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깊이 깨닫고 이해하기위해 침묵은 필수입니다. 제가 한밤중 일어나서 강론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밤의 침묵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잊고, 잃고 지내기에 우리는 너무 소중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모두가 깊은 침묵중에 나오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진리는 침묵중에 자신을 계시합니다. 교황님의 강론중 일부를 나눕니다.

 

“침묵은 그리스도의 지상 현존의 시작과 끝에 자리잡고 있다.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은 태어나던 밤 구유에서, 수난의 밤 십자가상에서 ‘침묵’이 되었다. 실로 하느님은 소리침, 잡담, 시끄러움보다는 침묵을 선호하신다. 그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나타나실 때, 바람, 지진, 불 속이 아닌 ‘작고 고요한 소리중에(a small still voice)’ 나타나셨다. 

결국 진리는 사람들 마음속에 도달하기 위해 큰 소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믿는 이들인 우리 역시 그분의 음성을 듣기위해 온갖 시끄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의 침묵에서 만이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질수 있다.”

 

뜻밖에 나누고 싶은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추석 다음 파공날 아침 산책기도중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앞에서 잠시 뜻밖에 좋은 자매님들과의 만남시간이 있었고, 저에게 오늘 영화 관람하지 않느냐 물었고 유쾌한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저에게 가을 햇살 아름다운 아침의 자연, 아름다운 자매님들과 함께 함이 살아있는 영화입니다. 이보다 생생한 영화가 좋지 극장안에서의 영화는 너무 답답합니다.”

“아, 신부님은 시인이시네요!”-

 

또 잠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제 프란치스코 영명축일 10월4일에 훨씬 앞서 어제 오후 늦게 축하 꽃다발을 선물차 들고 온 한 자매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 꽃바구니에 가을이 가득 담겼네요.”

 

정말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온갖 가을 꽃들이 가득하니 가을을 통째로 선물받는 황홀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즉흥적인 시적 감성과 표현 역시 침묵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말끔히 정리하십니다. 세속화된, 침묵을 잃은 제자공동체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신 다음 제자들에게 물으니 주님의 실물 교육이 참 멋집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정말 침묵에서 솟아난 주님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같은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기존관념을 완전히 깨는 역설적 진리를 설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겸손하고 가난하고 작은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가장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가장 큰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모두의 사랑의 관심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요 세상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이런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더 나아가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니 예수님의 깊은 침묵에서 나온 참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 진리를 잊지 마시고 주변의 힘없고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을 때, 나 또한 참 작은 그러나 내면은 한없이 너그러운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편협한 마음을 넓혀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고맙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구존동이求存同異의 사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군자같은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큰 관점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조그만 차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라는 말씀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씀으로 결국은 같은 뜻입니다. 참으로 깊은 침묵의 대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즈가르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그 미래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가장 작은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 되어 사람 대우 받는 그 아름다운 공동체의 미래상입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차리라.”

 

바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세상 공동체에서 가장 작은 이들로 상징되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큰 이들로 대우 받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닌 주님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뜨는 땅과 해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의 이런 원대한 꿈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 모두 ‘작은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하는’ 하느님 중심의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10/3(화)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 되새김 구절]

 

10/3(화) [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  제283일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