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0월 11일 수요일[(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0월 11일 수요일[(녹) 연중 제2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권능 안에 있어, 당신 뜻을 거스를 자 없나이다. 당신이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만드셨으니, 당신은 만물의 주님이시옵니다.
본기도
저희 공로와 소망보다 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양심의 가책을 받은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감히 청하지 못하는 은혜도 내려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당신께 제 영혼을 들어 올리오니, 주님, 이 종의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
○ 주님, 당신은 어질고 용서하시는 분,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나이다. 주님,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애원하는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
○ 주님, 당신이 만드신 민족들이 모두 모여 와,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 이름에 영광을 바치리이다. 당신은 위대하시며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 당신 홀로 하느님이시옵니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는 성령을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네.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정성을 다하여 마땅히 거행하는 이 거룩한 신비로
저희를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구원을 이루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당신을 바라는 이에게, 당신을 찾는 영혼에게 주님은 좋으신 분.
<또는>
1코린 10,17 참조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이어도 한 몸이네. 우리 모두 같은 빵과 같은 잔을 함께 나누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이 성사의 힘으로 자라나
마침내 그리스도와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 기도를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법: 어린이처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알려주십니다. 그들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그러면 그 기도를 바치면 되는데 왜 예수님께 또 기도를 배우려 할까요? 세례자 요한보다 예수님이 더 높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각자가 바치는 각자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이 결국 자신이 누구인지를 증명합니다. 옆집 아이가 할 수 있는 말과 내 자녀가 나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곧 기도문 자체가 내가 누구인지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기도만큼 높은 기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기도를 바치신 분은 하느님의 외아드님이었습니다. 그 말을 가르쳐주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정체성의 확립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기도의 목적은 나의 의로움과 하느님 나라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해야 합니다. 이를 가장 잘하는 존재가 아기들입니다. 아기들은 같은 말을 반복함으로써 부모가 누구인지, 자기가 누구인지 확신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목적입니다.
어떤 할아버지가 저녁마다 성당에 기도하러 들르십니다. 그런데 10초도 안 돼 다시 나오십니다. 본당 신부님은 매일 너무도 짧게 기도하시는 할아버지를 ‘기도할 줄 모르시는 분’으로 여깁니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마지막 때가 온 것입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할아버지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병원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사제는 “할아버지, 뭐가 그리 좋으세요?”라고 묻습니다. 할아버지는 대답하십니다.
“예, 신부님. 저는 기도할 줄 몰라서 매일 성당에 들러 ‘예수님, 저 왔어요!’라고 인사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께서 매일 오셔서 ‘요셉아, 내가 왔다’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자녀가 된 행복이고 그분의 의로움은 그분께 하느님 자녀로 인정받음입니다. 위 할아버지는 다른 것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하느님께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기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인정받았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먼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 형제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아버지께 바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를 바칠 자격은 예수님에게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카 복음에서는 마태오 복음에 나와 있는 주님의 기도에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와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가 빠져있습니다. 당시 여러 버전의 주님의 기도가 있었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마태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말을 많이 하는 것일까요?
기도는 수준이 높아질수록 그 말이 단순해집니다. 아기들이 “엄마, 엄마, 엄마…” 하는 기도가 더 셀까요, 아니면 많은 말로 부모를 설득하는 자녀의 기도가 더 셀까요? 부모를 말로 설득하려는 노력 안에는 부모에게 온전히 의탁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오히려 단순하게 엄마라는 말을 반복하는 아기가 부모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받습니다. 주님의 기도나 묵주기도, 혹은 자비의 기도가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게 되는데, 그래도 그러한 기도가 더 힘이 강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많은 말을 하는 기도보다는 기도가 단순해질수록 더 높은 수준의 기도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다 높은 수준의 기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기처럼 그 단순한 “엄마!”란 말에 자기 온 감정을 집중 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한 주님의 기도라도 한 기도 말에 오래 머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선교사가 문명과 접하지 않은 한 섬에 선교를 들어갔다가 시간이 없어 주님의 기도만 알려주고 나왔습니다. 3년 뒤에 그 선교사가 그들을 다시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마을 주민들은 물 위를 걸어서 선교사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깜짝 놀란 선교사에게 그들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저희가 선교사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반복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 위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도 말이 단순하다는 말은 그 말 안에 자신의 모든 감정을 담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반복하는 “엄마, 아빠!”란 말엔 아기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습니다. 점점 어린이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저는 성체조배 할 때 주님의 기도만을 바칩니다. 보통 주님의 기도를 한 번 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정신을 집중하기 위해 기도할 때 호흡에 맞춰 숫자를 셉니다. 잠이 안 올 때 상상으로 양의 숫자를 세는 것과 같습니다. 숫자를 세면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분심이 되면 어디까지 숫자를 셌는지 잊어버립니다. 저는 주님의 기도를 끊어가며 바치고 그 의미에 집중하면서 동시에 70번 호흡을 셉니다. 그러면 주님의 기도 한 번 바치는 데 한 시간이 걸립니다. 이런 식으로 주님의 기도를 하며 성경 묵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 자녀가 될 수 있는 기도를 알려주셨습니다. 기도 말 안에 깊이 스며들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녀 된 마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물 위를 걸을 수 있는 존재까지 되는 것 이것이 기도의 목적이고, 부모에게 아이가 자신의 모든 것을 넣어 “엄마 엄마!, 아빠 아빠!”라고 부르는 말 안에 하고 싶은 모든 말이 들어있는 것처럼 기도가 단순해질 때 기도는 더 높아집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사제생활을 10년 했던 2001년 때입니다. 본당사제로 사목하면서 바쁘게 지냈지만 영적인 갈망이 있었습니다. 강론 준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신자들과 친교를 나누고, 아픈 사람을 찾아가면서 지냈지만 영적인 목마름은 계속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너는 잘 하였다. 그러나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라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부자청년은 슬퍼하며 예수님을 떠났다고 했습니다. 가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30대 후반의 저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기도와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서 일곱 마귀를 떨쳐버릴 수 있었던 것처럼 ‘기도 사제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 걸음에 예수님의 ‘빈무덤’을 찾아갔던 것처럼 매주 금요일에 왕복 200킬로가 넘는 혜화동 신학교엘 갔습니다. 기도모임 사제들은 매주 금요일 성체조배를 하였고, ‘영신수련’에 대한 책을 공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영신수련’은 제게 영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가뭄 끝의 단비가 되었습니다.
영신수련 지도 사제들은 매년 신학생들의 8일 피정과 30일 피정을 지도하였습니다. 저는 선배 사제들에게 배우면서 신학생들을 위한 피정에 함께 하였습니다. 선배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힘을 주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도자가 힘을 주면 학생들도 힘을 주게 되고 그렇게 되면 지도자도 힘들고 학생들도 힘들다는 것입니다.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였습니다. 피정에 깊이 들어가면서 학생들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빠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내면을 깊이 보면서 지난날의 잘못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피정을 준비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먼저 묵상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신학생들은 이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선택’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한 ‘명상’을 하면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영신수련 피정에 함께하면서 좀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주교님께 ‘해외연수’를 청하였고, 주교님께서는 저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영신수련을 공부하였고, 직접 40일 피정을 하였습니다. 해외연수를 마친 후에 돌아와서 영신수련 지도사제 모임에 함께 하였고, 2014년 성소국장이 될 때까지 10년 넘게 학생들과 함께 피정을 하였습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세례를 받았고, 어엿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 보다 먼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고, 이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 또한 스승인 요한에게 배워서 열심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도 요한의 제자들처럼 ‘기도’할 수 있도록 가르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아름다운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주님의 기도에 따라서 살면 아무런 걱정도, 갈등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예전에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만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만 바라면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고 남을 양식을 쌓아 두려 하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고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애써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고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도 않으면서.”
오늘 하루 ‘주님의 기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면 좋겠습니다.
-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10.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루카 10,39)
지금, 마르타는 예수님의 몸을 섬기고 있다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섬기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르타가 ‘성찬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면, 마리아는 ‘말씀의 전례’를 거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섬김이 진정한 ‘주님 섬기기’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해야 할까?
그것은 주님을 섬기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자신을 섬기시도록 승복하는 일입니다. 실상 주님을, 혹은 남을 섬긴다고 하면서, 막상은 자기 자기를 섬길 수가 있습니다. 마치 마르타처럼 말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부족함과 무능함을 받아들이는 자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막상 주님 앞에 앉아서도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말이나 생각을 듣고 있거나 타인의 말을 듣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이 그 어떤 섬김보다도 더 큰 섬김이 됩니다. 마치 마리아처럼 말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으로 하여금 자신을 섬기도록 허용해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곧 자신을 향한 주님의 섬김을 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주님 되시게 해드리는 일에 해당합니다. 곧 ‘나는 섬김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신 말씀대로 해드리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과 한 자리에 있게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그분의 일, 곧 섬기는 일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나의 종이 되십니다. 종의 모습으로 오시어 우리를 섬기십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지금 자신보다 더 작아진 예수님을 만나고 있는 셈입니다. 곧 ‘종’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한다면, 예수님의 섬김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 당신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허용하는 일, 당신께서 나를 사랑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승복하는 일, 이것이야말로 당신을 섬기는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꼭 한 가지, 그것은 자신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주님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는 일, 주님께서 나를 섬기시도록 수락하는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정작, 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無爲而無不爲)의 단계, 곧 무위(無爲)의 도(道)일 것입니다. 이는 그야말로, 아무 것도 하지 않음에도 사실은 전부를 하는 신령스런 도(道)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관상하는 일이 바로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섬김은 주님을 주님 되시게 해 드리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회개, 경청, 환대-
오늘 강론 제목은 “환대의 영성-회개, 경청, 환대-”입니다. 정주서원을 하고 수도가정을 이뤄살아가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에게 환대영성은 핵심적 영성입니다. 환대의 사랑, 환대의 기쁨, 환대의 행복, 환대의 치유, 환대의 평화, 환대의 아름다움등 끝이 없으며 환대는 영성의 잣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님 사랑을 닮은 환대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세상이 불안하고 두려울수록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세상의 오아시스와 같은 정주 요셉 수도원의 환대의 영성은 더욱 빛날 것입니다. 그래서 정주와 환대의 영성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원을 환대의 집으로, 수도자들은 환대의 사람이라 명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좌우명 기도 한연도 환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활짝 열린 앞문, 뒷문이 되어 살았습니다.
앞문은 세상에 활짝 열려 있어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하여
영혼의 쉼터가 되었고
뒷문은 사막의 고요에 활짝 열려있어
하느님과 깊은 친교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이래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의 선교는 환대를 통한 선교라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환대는 베네딕도 규칙 53장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손님들을 그리스도처럼 환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께서는 장차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 너희는 나를 맞아주었다’라고 말씀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합당한 공경을 드러낼 것이며 특히 신앙의 가족들과 순례자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환대 영성의 놀라운 점은 손님들의 환대를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맞아들이는 분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환대하듯 찾아오는 이들을 환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환대의 반대는 냉대나 박대입니다. 환대의 치유와 반대로 냉대의 상처와 아픔은 참으로 오래 갈 것입니다. 저는 교회도 수도원도 섬김의 직무로서 학교나 병원, 음식점처럼 서비스업에 속한다 봅니다. 정말 서비스업에 속하는 분들이라면 친절하고 따뜻한 환대는 기본이어야 할 것입니다. 불친절하고 냉대하는 차거운 분위기의 서비스기관이라면 손님은 절대 다시는 가지 않을 것입니다. 환대하면 오래전 그러니까 23년전 써놓은 시가 생각납니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
한번이라도 찌프린 적이 있더냐
하루 이틀 몇날이든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활짝 핀 환한 얼굴로
오가는 이들
맞이하고 떠나 보내는
주차장옆 코스모스꽃 무리들
피곤한 모습 전혀 없다
볼 때마다 환해지는 마음이다
환대는 꽃처럼 하는 것이다.”-2000.9.27.
정말 신기한 얼굴입니다. 활짝 웃는 환대의 얼굴이 꽃같은 사람 얼굴이라면 화로 이그러진 얼굴은 때로 괴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의식적 의도적 미소나 웃음의 훈련과 습관도 필요함을 배웁니다. 바로 오늘 루카복음의 마르타와 마리아가 환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상시 참 편안하게 수시로 찾았던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가 살았던 환대의 집, 베타니아 집같습니다.
여러분도 피곤하고 지쳤을 때 언제든 이렇게 찾을 수 있는 그리운 환대의 집이나 환대의 사람이 있으신지요? 저에겐 언제나 여기 환대의 집인 성전과 환대의 주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의 두 자매는 모두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하여 환대한 환대의 사람들이었는데 환대의 방식이 달랐습니다. 전통적인 오늘 복음의 해석은 관상의 마리아와 활동의 마르타로 분류했는데 틀린 것은 아니나 본질적인 관점은 관상과 활동이 아닌 환대에 있음을 봅니다.
환대의 방식에서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르타처럼 제 좋을 대로의 음식준비의 환대가 아니라 손님인 예수님의 의중에 따른 환대를 한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발치에 다소곳이 앉아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며 환대하는 마리아의 모습은 그대로 꽃처럼 아름답습니다. 분주하게 음식준비하다 화가난, 좀 질투하는 마음도 있었을 마르타가 예수님께 불평을 쏟아 놓습니다. 두분의 주고 받는 대화가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 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마르타의 내면이 참으로 시끄럽고 산만했음을 봅니다. 화와 짜증이 가득하고 내적평화가 없습니다. 참으로 내적회개와 내적평화의 회복이 화급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요나의 회개선포에 니느베 사람들의 거족적, 전격적, 전폭적 회개가 이뤄지는 극적인 장면을 보여줍니다. 이제 기후재앙과 온갖 전쟁을 야기한 전세계인들이 영적혁명과 같은 더불어의 생태적 회개가 참으로 절박한 절체절명의 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죄도 병도 많은 각자도생의 세상이요 흡사 공동의 집인 지구가 불타고 있는듯 합니다.
그러나 니느베 백성들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틱한 회개만 있는게 아니라 평범한 일상의 회개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이며 바로 활동에 치우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관상기도와 회개였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정확하며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건 차별이 아니라 분별의 지혜입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부드럽고 따뜻한 호칭에 주님의 애정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우선적인 필요한 한 가지는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라는 마르타의 무지를 일깨우는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사실 정말 잘 경청해야 맹목적인 활동으로 일에 중독되지 않고 깨어 올바로 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의 방향을, 일의 완급을, 일의 우선 순위를 분별하고 절제할 수 있는 힘은 관상과 경청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이래서 관상과 활동, 기도와 일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러니 참된 환대 영성의 원리가 자명히 드러나니, 회개-경청-환대의 구조입니다. 놀랍게도 우리가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미사와 시편성무일도 공동전례가 이런 구조로 이뤄졌음을 봅니다. 미사시 참회 고백기도 자비송으로 시작하여 말씀 전례에서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경청하고, 이어 성찬 전례에서 성체의 주님을 모시는 환대로 참된 환대 영성의 실현입니다. 회개와 경청, 환대의 정신으로 시편성무일도를 바치는 우리들은 그대로 주님을 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날마다 수행하는 공동전례기도는 주님을 환대하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환대의 영성 훈련시간인 것입니다. 이런 공동 전례를 통한 주님의 환대는 일상에서의 형제들 환대에로 그대로 전환되어 주님을 환대하듯 형제를 환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우리를 환대하고 우리는 주님을 환대함으로 주님의 환대와 우리의 환대가 만나는 참된 치유와 구원의 복된 시간입니다. 아멘.
10/11(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저희가 선교사님이 가르쳐준 기도를 다 기억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만은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만을 반복해서 바쳤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아버지이신데 우리에게 불가능한 게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 위를 걸어보니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전삼용 신부)
2. 제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외우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외우고, 주님의 기도에 따라서 살면 아무런 걱정도, 갈등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20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신앙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유일한 기도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바치는 모든 기도문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루카 10,42)
그렇습니다. 주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저는 그것을 이미 가졌고, 그것을 당신이 주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그 어떤 처지에서도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이상 근심 걱정할 일도 없습니다.
당신께서 저의 주님이라는 이 사실!
바로 이것이 제가 지닌 진정한 한 가지입니다.
오로지 이 “한 가지”로 하여 저는 행복합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삶의 여정은 끊임없는 기도의 여정이자 회개의 여정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이며 바로 활동에 치우친 마르타에게 필요한 것은 관상기도와 회개였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지적이 정확하며 마르타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이수철 신부)
10/11(수)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제291일 기도
복음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습관처럼 주님의 기도를 외우기보다는
주님의 기도가 주는 영적인 힘을 느끼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며...
주님의 사랑안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사랑을 위하여...
살게 하소서. 아멘.
- 2023년 10월11일(수) 6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