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15일 주일[(녹) 연중 제28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10. 15. 21:10

[매묵]2023년 10월 15일 주일[(녹) 연중 제28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28주일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온 세상 사람들을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부르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지혜를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희망을 증언하게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의 잔치를 거부하지 않고, 그 잔치에 예복 없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여야겠습니다.

입당송

시편 130(129),3-4 참조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이스라엘의 하느님,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옵니다.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주님의 넘치는 은총으로 언제나 저희와 함께하시어
저희가 끊임없이 좋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주님께서 잔치를 베푸시고,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25,6-10ㄱ
6 만군의 주님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살진 음식과 잘 익은 술로 잔치를,
살지고 기름진 음식과 잘 익고 잘 거른 술로 잔치를 베푸시리라.
7 그분께서는 이 산 위에서 모든 겨레들에게 씌워진 너울과
모든 민족들에게 덮인 덮개를 없애시리라.
8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정녕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9 그날에 이렇게들 말하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이분의 구원으로 우리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10 주님의 손이 이 산 위에 머무르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6ㄷㄹ)
◎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제2독서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4,12-14.19-20
형제 여러분, 12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13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14 그러나 내가 겪는 환난에 여러분이 동참한 것은 잘한 일입니다.
19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20 우리의 하느님 아버지께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에페 1,17-18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2,1-1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11 임금이 손님들을 둘러보려고 들어왔다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 하나를 보고,
12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 하고 물으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였다.
13 그러자 임금이 하인들에게 말하였다.
‘이자의 손과 발을 묶어서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려라.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14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1-1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비유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1 말씀하셨다.
2 “하늘 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
3 그는 종들을 보내어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다.
4 그래서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렇게 일렀다.
‘초대받은 이들에게,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준비를 마쳤으니,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하고 말하여라.’
5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
6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종들을 붙잡아 때리고 죽였다.
7 임금은 진노하였다.
그래서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없애고
그들의 고을을 불살라 버렸다.
8 그러고 나서 종들에게 말하였다.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초대받은 자들은 마땅하지 않구나.
9 그러니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10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희망이신 주님, 주님께 희망을 두고 살아가는 교회를 이끄시어, 주님의 잔치에 이웃을 초대하여 기쁨과 희망을 함께 나누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풍요를 널리 전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70여 년을 남과 북으로 갈라져 있는 저희 민족을 굽어보시어,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 속에서도 주님의 진리를 찾고 따르며 일치와 평화를 위하여 힘을 모으게 하소서.

3. 굶주리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사회적 불평등 속에서 굶주리는 이들을 굽어살피시어 위로하시고, 그들이 사회 구조 안에서 현실적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저희 모두 지혜와 힘을 모으고 실천하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어려운 처지에 놓인 가정들을 돌보아 주시어,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를 믿고 온전히 의탁하며, 어머니인 교회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신자들이 바치는 기도와 예물을 받아들이시고
이 정성된 제사로 저희가 천상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가오니
이 세상에서 날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체험할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성령의 첫 열매를 지닌 저희에게도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이어지리라 희망하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저희도 모든 천사와 함께 주님을 찬미하며
기쁨에 넘쳐 큰 소리로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34(33),11
부자들도 궁색해져 굶주리게 되지만, 주님을 찾는 이에게는 좋은 것뿐이리라.
<또는>
1요한 3,2 참조
주님이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희망을 걸었던 주님이시다.” 모든 민족들의 입에서 이러한 탄성이 나올 때까지, 주님께서 마련하신 혼인 잔치에 이웃들을 초대합시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는 바오로 사도의 이 확신이 우리의 고백이 되게 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8주일

 

- 걸음마를 멈춘다는 말은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다는 말과 같다.

 

세례를 받고 보통 1년 정도 뒤에 견진 성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며 견진 성사를 미루기도 합니다. 세례와 견진을 마치 별개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으면 견진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 예식에 이미 이마에 기름을 바르는 견진 성사 예식이 들어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것을 설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임금은 아드님의 혼인 잔치에 아무나 초대합니다. 처음 초대했던 이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우선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으려 하지 않고 그분을 죽였습니다. 이에 이방인들이 초대받게 됩니다. 그러나 혼인 잔치에 초대 받아 세례를 받은 이들 가운데서도 쫓겨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혼인 예복을 갖추지 않은 사람입니다. 혼인하는 날 잠옷 바람으로 왔다면 그것이 혼인 준비가 안 된 것을 증명해줍니다. 옷은 그 자리에 합당한 준비와 노력을 했음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혼인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성체 성사를 의미합니다. 그 성체 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그러나 기어 다니는 아기가 자기도 부모처럼 두 발로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고 바로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과의 오랜 싸움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견진의 과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는 세례를 받고 40년의 견진을 거칩니다. 그들은 이전의 파라오를 섬기기 위해 노예 살이 했던 본성인 소유욕, 성욕, 지배욕을 포기하고 청빈과 정결과 겸손의 열매를 맺는 자신과의 싸움을 평생 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을 하지 않는다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준비가 안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사악의 신부를 찾으라고 종을 하란 땅에 보낸 일이 있습니다. 그때 그 부르심에 응답한 여인이 레베카입니다. 레베카는 착한 여인이었고 그래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의 종이 주는 옷과 장신구로 몸을 꾸며야 했습니다. 이사악은 레베카의 얼굴을 몰랐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준 옷과 예물은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자기 처소로 맞아 들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의 종이 선물한 옷과 장신구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나왔는데 피는 세례를 주며 물은 견진을 상징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죄를 끊을 결심을 하고 견진 성사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 되기에 합당한 옷을 입습니다. 이 과정 안에서 수없는 넘어짐이 발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뱀에 물렸습니다. 파라오의 종살이하던 시절을 그리워하며 하느님께 불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그들에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방법을 알려주시기 위해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상징하는 구리뱀을 장대에 달아 그들이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들도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덴젤 워싱턴은 “앞으로 넘어지라”라고 말합니다. 대학에서 퇴학 당하고 군대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며 어머니 미장원에서 앉아 있을 때 한 손님이 종이에 이런 말을 적어줍니다. “소년이여, 넌 세계를 돌아다닐 거야. 그리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거야.” 덴젤 워싱턴은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면 달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이루어질 때까지 수없이 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끝을 의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목적지를 정하는 것은 세례와 같습니다. 그리고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견진의 과정을 거치며 자신이 세례 받은 사람임을 증명합니다. 그 다음은 자신에게 그러한 믿음을 준 이와 결국 하나가 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체 성사입니다. 같은 죄로 수천 번 고해 성사 하십시오. 이것이 세례 받았음을 증명하는 것이고 혼인 예복을 만들어 입는 견진 성사를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걸음마를 멈춘 아기는 인간이 되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8주일

 

며칠 전에 하느님의 침묵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북유럽의 어느 성당에 예수님 상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상 앞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상을 찾았습니다. 예수님 상에는 성당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었습니다. 문지기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보고 자기도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나는 매일 문지기로 있는데 하루만이라도 사람들이 기도하는 예수님 상이 되면 좋겠습니다.’ 문지기의 기도를 들은 예수님은 문지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 오늘 나와 자리를 바꾸자. 너는 예수님 상이 되고, 나는 문지기가 되겠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사람들이 어떤 기도를 하던지 응답하지 마라.’ 문지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문지기는 예수님 상이 되어서 사람들의 기도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어느 부자가 돈 가방을 들고 예수님께 찾아왔습니다. 그는 도박을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오늘 도박에서 큰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 한 후에 돌아갔는데 그만 돈 가방을 놓고 갔습니다. 문지기는 가방을 가져가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에는 가난한 농부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아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하는데 치료비가 부족하다고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데 돈 가방을 보았습니다. 농부는 그것이 예수님께서 마련해 주신 것이라 생각하고 가져갔습니다. 문지기는 그 가방은 주인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예수님과 한 약속이 있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농부가 간 뒤로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청년은 곧 배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야 했습니다. 청년은 아무런 사고 없이 무사히 다녀 올 수 있도록 기도했습니다.

 

청년이 막 나가려는데 부자가 돌아왔습니다. 부자는 청년이 돈 가방을 가져갔다고 생각했습니다. 부자는 가방을 달라고 하였고, 청년은 자신은 가방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부자는 청년에게 경찰서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청년은 시간이 없어서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참지 못한 문지기는 부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가방은 가난한 농부가 가져갔습니다.’ 부자는 농부에게 가서 가방을 찾았고, 청년은 바다로 나가 배를 탔습니다. 그렇게 모든 문제가 해결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문지기에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모든 일을 망치고 말았다.’ 문지기는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내가 약속을 어긴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잘못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평화를 이루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문지기에게 무엇이 잘못 된 것인지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결국 돈 가방을 가지고 도박했고 가진 모든 돈을 탕진하였다. 농부의 아내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고 말았다. 청년은 결국 배를 탔지만 큰 풍랑을 만나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였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면 부자는 도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한 농부의 아내는 치료를 받아 건강을 회복했을 것이다. 청년은 바다로 가지 않아서 목숨을 구했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침묵을 깊이 묵상하면서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이 언제든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물고기 잡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어쩌면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같이 감옥에 갇혔지만 어떤 이는 불평과 원망으로 시간을 보내지만, 어떤 사람은 밤하늘의 별을 세며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감옥이라는 환경을 바꾸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런 감옥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가 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과거의 실패와 잘못을 붙잡고 아직 오지 않는 걱정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 약속의 말씀을 간직하고 희망을 찾아 길을 떠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그래서 우리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시리라.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내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치워 주시리라. 보라, 이분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이분께 희망을 걸었고 이분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 비록 유배지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처지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기억하신다는 희망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의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영광스럽게 베푸시는 당신의 그 풍요로움으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넉넉하거나 모자라거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잘 지내는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시련과 고통은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디딤돌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힘든 사람들은 모두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편하고, 주님의 짐은 가볍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인은 삶의 먼지를 헤아리며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 속에 빛나는 한 줄기 빛을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14.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마귀의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모욕하는 자들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제압하셨습니다. 그러자 군중 속에서 한 여인이 너무도 감동을 받아 탄성을 올립니다. “당신을 낳아서 젖을 먹인 여인은 얼마나 행복합니까!”(루카 11,27)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찬사를 부인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나 단지 혈족관계에만 치중한 그 말을 넘어서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여기서, 여인의 행복선언과 예수님의 행복선언은 사뭇 다릅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을 찾지만, 각자가 찾는 행복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대체 어떤 행복이 참된 행복일까요? 여인은 아기를 간직했던 태중과 젖을 먹인 가슴이 행복하다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보낸 찬사를 떠올려봅니다.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복되십니다.”(루가 1,45)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을 잉태한 것보다, 그리스도를 믿었던 점에 있어서 더욱 복됩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믿으셨습니다. 하여, 말씀을 잉태하시고 이루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허용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승복하신 것입니다. 말씀을 믿고 지키고 실행한 것입니다.
 
이처럼, 행복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믿고 지키면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행복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께 있을 뿐이요,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곧 행복’입니다. 그것은 ‘경청한 바를 믿는 일’ 입니다.
 
‘말씀을 경청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성모님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은 먼저 “믿는” 일입니다.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믿는 일입니다. 그래서 비록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다하더라도 그분을 믿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베네딕도의 [규칙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들어라. 아들아, ~마음의 귀를 기울이고 . ~기꺼이 받아들여 보람 있게 채움으로써 ~순명의 노고로 되돌아가라”
 
이는 ‘마음의 귀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들려주는 대로 듣지 않고, 자기 방식으로 듣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듣는다는 것은 ‘마음의 귀로 듣는 일’, 곧 ‘말씀하시는 분의 마음에 주파수를 맞추는 일’, ‘마음의 귀를 경작하여 사랑과 믿음으로 듣는 일’입니다. 그것은 ‘먼저 사랑하고 믿는 일’, 말씀보다 앞서 ‘말씀하시는 분을 사랑하고 믿는 일’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받아들여지면, 그 믿음의 능력으로 말씀이 성취되고 실현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진정 참된 행복을 바란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들은 바를 사랑과 믿음으로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행복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우심을 빌며

 당신의 말씀에 희망을 거나이다."(시편119,147).

 

10월13일 어제 이태리의 젊은 교회 지도자들인 고등학생들의 모임 첫날에 교황님이 보낸 메시지 핵심 내용이 멋졌습니다.

 

“꿈은 크게, 하느님 역시 그렇다!(Dream big, God does too!)”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저절로 꿈의 사람, 희망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이 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비참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7일째 전투에서 1만여명의 사상자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전쟁하는 나라 모두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입니다. 참으로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런 비참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원대하고 영원한 꿈이,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 단 하나 평화입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평화의 꿈인데 참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이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합니다. 모든 전쟁이 영적 전쟁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고 바람직할까요!

 

아마 종교간의 평화공존이 한국처럼 잘 되는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이 또한 우리의 자랑입니다. 이런 하느님 평화의 꿈을 앞당겨 실현하며 살아가는 곳이 여기 가톨릭의 요셉 수도원입니다. 그리하여 “평화의 집”이란 피정집 명칭도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평화를 찾아, 그리스도의 평화를 목말라 평화의 집, 기도의 집,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는지요!

 

요즘 그동안 계속해서 읽은 매일미사 제1독서는 에즈라, 하까이, 즈카르야, 느헤미아, 바룩, 요나, 말라기, 요엘의 말씀으로 모두가  바빌론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이후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들입니다. 예언자들의 궁극적 특징은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것입니다. 

 

칠흑같은 절망의 현실에서도 결코 하느님의 꿈을, 하느님의 희망을 선포하고 노래하며 살았던 꿈과 희망의, 생명과 빛의 예언자들이었습니다. 오늘로서 요엘서는 끝나고 다음 월요일부터 제1독서는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오늘 요엘서의 빛나는 희망의 대목입니다.

 

그날에는 

산마다 새 포도주가 흘러내리고

언덕마다 젖이 흐르리라.

유다의 개울마다 물이 흐르고

주님의 집에서는 샘물이 솟아

시팀 골짜기를 적시리라.”

 

이 거룩한 미사를 드리는 오늘이 그날입니다. 그날의 평화를 오늘 앞당겨 살게 하는 미사은총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꿈, 하느님의 희망을 앞당겨 살아갑니다. 무엇보다 우선적인 것이 하느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모두를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모든 수행을 사랑합니다. 수행덕목들뿐 아니라 성 마리아와 성 요셉을, 모든 성인들과 모든 이웃을, 삶을, 자연을, 모든 피조물을, 진리를, 말씀을, 모두를 사랑합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그 대표적 인물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4장 “착한 일의 도구들은 무엇인가”는 76절까지 계속되며 첫절은 하느님 사랑입니다.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라는 1절입니다. 그리고 41절은 “자신의 희망을 하느님께 두라”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참행복입니다.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 희망을 하느님께 두어라”(시편131,3) 말씀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나에게 공평히 열려있어 선택할 수 있는 참행복입니다. 시편의 두 고백도 생각납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 저의 힘이시여.”(시편18,2)

 

우리가 배운 모든 참행복은 하느님께 있음을 봅니다. 엊그제 화답송 후렴도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주님을 신뢰할 때, 참행복이 있음을 고백했습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은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기뻐하여라”에서 보다시피 우리의 참기쁨도 주님께 있음을 봅니다. 여기서 연유한 제 행복기도 다음 대목입니다.

 

“주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요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이옵니다.”

 

그러니 참행복은 우리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사랑의 주님을. 희망의 주님을, 평화의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의 말씀대로 살 때 참행복입니다. 이래서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이란 고백도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참행복에 대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

 

참행복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참행복을 선택하여 살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노력에 항구할 때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말씀을 사랑하여 듣고 지키는데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한 열정과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단 두절로 짧습니다만 참행복의 비결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와 주님이 주고받은 대화가 흡사 불승들의 선문답같고,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에 나오는 제자와 스승이 주고 받은 대화처럼 긴 여운을 남깁니다.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잘 난 자녀를 둔 어머니에 대해 선망하는 마음은 인지상정, 모든 어머니의 공통적 심정일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질문했던 어머니는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주님을 사랑하여 찾는 모든이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주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합니다.”

 

‘오히려’란 말마디에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다하지 못한 말씀을 제가 보완합니다. 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심중을 반영하는 묵상이란 확신이 듭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는 행복한 분입니다. 그러나 나를 낳은 육신의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기에 행복합니다. 사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킨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내 어머니 성모 마리아야 말로 시종여일 ‘예스-맨(yes-man)’으로 ‘순종의 사람’이었고 끊임없이 한결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켰으며 평생 저와 함께 했습니다. 

 

여러 어머님들 참으로 행복하고 싶습니까? 참행복은 순전히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제 어머니 성모님을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제 어머니 성모 마리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키십시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은 바로 당신의 이런 모습을 고스란히 보고 배울 것입니다. 나도 성장과정중 성모 마리아 어머님의 이런 모습을 배웠고 지금도 배웁니다.‘-

 

육신의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성모님을 생각하며 어머니 은혜 노래중 어머니를 성모님으로 바꿔 불러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한번 불러보시기 바랍니다.

 

“높고높은 하늘이라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높은게 또 하나있지

 낳으시고 기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하늘 저보다도 높은것같애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것같애“

 

참행복은 모두에게 공평히 활짝 열려 있는 선택입니다. 인간의 본질은 탐욕도 무지도 허무도 아닌 사랑이요 말씀입니다. 사랑과 말씀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사랑하듯 말씀을 사랑하여 자나깨나 깨어 말씀을 듣고 지키는 공부에 온힘을 다할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행복을 살 수 있도록 우리의 하느님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북돋아 주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 할렐루야."(시편117,2). 아멘.


10/15(일) 연중 제28주일, 되새김 구절

1. 성체 성사에 초대받아 온 사람들은 세례 받은 이들입니다. 세례 받은 이들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음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몸만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능력도 하나가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자신도 뛰어내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믿음이 혼인 예식에 참여하게 합니다. (전삼용 신부)

 

2.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도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을 구원하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가는 부활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 오히려 행복하다.”(루카 11,28)
 
주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듣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들은 말씀을 잉태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게 하소서.
하여, 말씀을 품은 감실이 되게 하소서.
또한, 품은 말씀을 지키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때도 사랑으로 지키게 하소서.
또한, 말씀을 경작하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다름 아닌, 당신의 희망을 이루어지도록 경작하게 하소서.
주님, 저를 경작하여 당신 말씀을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지금 우리가 평화롭게 지내는 이 시간에도 우크라이나에서, 이스라엘에서는 비참한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7일째 전투에서 1만여명의 사상자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전쟁하는 나라 모두가 유일신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입니다. 참으로 꿈의 하느님,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면 결코 이런 비참한 전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원대하고 영원한 꿈이, 희망이 무엇입니까? 하나, 단 하나 평화입니다. 누구나 소망하는바 평화의 꿈인데 참 역설적으로 인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대부분 하느님을 믿는 나라들이 그렇게 전쟁을 많이 합니다. 모든 전쟁이 영적 전쟁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고 바람직할까요!(이수철 신부)

 

10/15(일) 연중 제28주일, 제295일 기도

 

복음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침묵 중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잔치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하느님 잔치에 참석하기를 희망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참석하여...

풍요로운 하느님을 만나면서..

영적으로 충만한 기쁨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 2023년 10월15일(일) 21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