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0월 25일 수요일[(녹) 연중 제29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10. 25. 17:52

[매묵]2023년 10월 25일 수요일[(녹) 연중 제29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7(16),6.8 참조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본기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6,12-18
형제 여러분, 12 죄가 여러분의 죽을 몸을 지배하여
여러분이 그 욕망에 순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13 그리고 여러분의 지체를 불의의 도구로 죄에 넘기지 마십시오.
오히려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난 사람으로서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자기 지체를 의로움의 도구로 하느님께 바치십시오.
14 죄가 여러분 위에 군림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습니다.
15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합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총 아래 있으니 죄를 지어도 좋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6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자신을 종으로 넘겨 순종하면
여러분이 순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라는 사실을 모릅니까?
여러분은 죽음으로 이끄는 죄의 종이 되거나
의로움으로 이끄는 순종의 종이 되거나 하는 것입니다.
17 그러나 하느님께 감사하게도,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전해 받은 표준 가르침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18 여러분은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24(123),1-3.4-6.7-8(◎ 8ㄱ)
◎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사람들이 우리에게 맞서 일어났을 때, 주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셨던들, 우리를 거슬러 저들의 분노가 타올랐을 때, 우리를 산 채로 삼켜 버렸으리라. ◎
○ 물살이 우리를 덮치고, 급류가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거품을 뿜어내는 물살이 우리를 휩쓸었으리라. 저들 이빨에 우리를 먹이로 내주지 않으셨으니, 주님은 찬미받으소서. ◎
○ 사냥꾼의 그물에서, 우리는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 구원은 주님 이름에 있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시네. ◎

복음 환호송

마태 24,42.44 참조
◎ 알렐루야.
○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오리라.
◎ 알렐루야.

복음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39-4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9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40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41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42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43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45 그러나 만일 그 종이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게 오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하인들과 하녀들을 때리고 또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기 시작하면,
46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불충실한 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48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33(32),18-19 참조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
<또는>
마르 10,45 참조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 나는 몇 명의 영혼을 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가?

 

샤를로트 퍼킨스 길먼의 『누런벽지』 (The Yellow Wallpaper)는 19세기 후반의 여성들이 겪는 정신적 및 사회적 억압에 관한 내용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주인공은 의사인 남편 존, 그리고 그들의 아기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대형 저택을 임대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서술자는 최근에 아기를 출산한 후 임신성 우울증 또는 신경 쇠약과 같은 조건으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존은 아내를 일시적인 신경성 장애로 진단합니다. 그는 그녀에게 휴식을 취하고, 글쓰기나 그림 그리기와 같은 활동을 피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들은 저택의 최상층 침실에 머물게 되는데, 이 방에는 누런색의 이상한 벽지가 붙어 있습니다. 서술자는 처음에는 그 벽지를 싫어하지만, 점차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남편의 권장에 따라 아무 활동도 하지 않게 된 서술자는 점차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집니다. 그녀는 벽지 뒤에 여성이 갇혀 있다고 믿게 되며, 이 여성이 밤마다 벽지를 긁으려고 시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는 서술자가 점점 더 광기에 빠져들면서, 그녀가 벽지를 완전히 찢어버리고, 그녀 자신이 그 벽지 뒤의 여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이 소설은 여성이 아픈 이유는 남성처럼 공부하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고 여성은 본래 약한 존재라는 선입견에 맞서는 최초의 페미니즘적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길먼은 그렇게 벽지에 갇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길먼의 아버지는 독실한 종교인이었지만, 가족을 책임지지 않고 떠나버렸습니다. 그래서 홀어머니와 어려움 속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결혼한 남편도 결국 길먼의 신경 쇠약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치부하였습니다. 

 

    그녀는 휴양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하는 금기를 깨고 소설을 씁니다. 여성도 무언가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는 당시 보수적인 미국에 퍼져있던 무거운 분위기와 홀로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휴양을 마치고 나와 남편과 이혼합니다. 그리고 여성의 인권을 위해 싸우는 길을 선택합니다. 그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의 미국 여성주의자, 소설가, 시인, 강사로, 여성의 권리, 사회 개혁, 그리고 여성의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깨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온 여인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 쉬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길을 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산길을 간다고 생각해도 이미 나 있는 길과 내가 헤치고 가는 길은 상당한 어려움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보람으로 남을까요? 어려운 길로 나아가 길을 낸 사람일 것입니다. 의미 있는 일, 보람 있는 일, 결국 행복한 결과를 주는 일은 반드시 그렇지 않은 일보다 어렵고 힘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있음에 당신의 제자들과 일반 신자들의 차이를 말씀하십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더 큰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노예 해방을 위해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부와 전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조금은 편한 수녀의 생활을 접고 더 힘든 길을 택하여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태석 신부님도 마찬가지고 온 나라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평생 부담감으로 살아온 축구선수 메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예는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많이 맡기신다는 말은 그만큼 인정해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인정받으면 그만큼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행복은 내가 누구이냐에 대한 나의 믿음에 달렸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그만한 능력과 일, 성과가 나지 않으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의사가 되었는데 진료를 하나도 하지 않으면서 의사가 된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그만한 일을 해야 그만한 보람이 옵니다. 그 보람은 바로 내가 믿는 그 사람이 되었다는 자존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의 행복을 얻으려면 그만큼 많이 일해야 합니다. 사람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영혼을 구하려는 꿈을 꾸고 있나요? ‘나는 가족도 구하지 못하는데 뭔 큰일을 하겠느냐?’라고 생각하나요? 그러면 나 자신을 벽 속에 가두는 것이 됩니다. 누런벽지의 길먼처럼 벽지를 뚫고 갇혀 있는 나를 꺼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다고 믿을 때 나에겐 더 많은 고난의 십자가가 마련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갈 때는 그리스도께서 부활 때 느끼셨던 그 기쁨과 더 가까운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그 행실대로 갚아주십니다.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나의 자존감, 곧 행복의 수준을 만듭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순례 두 번째 날에는 정난주(명연) 마리아 묘 용수성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신앙 때문에 남편 황사영 알렉산델은 순교하였고,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에 관노로 유배 갔고, 2살 아들은 추자도에서 생이별하였습니다. 정난주 마리아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저의 고향도 생각났습니다. 저는 1963 4 15일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376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태어난 이유는 5대조 할아버지께서 신앙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깊은 산골로 피난 가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는 1991 8 23일 사제서품을 받고 제가 태어났던 고향으로 가서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교우촌에서 지내는 많은 분들이 미사에 함께 해 주었고, 저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비록 관노의 신세였지만 정난주 마리아는 신앙 안에서 충실하게 살았고, 고인이 되었을 때도 고인을 존경하던 마을 사람들이 묘소를 잘 돌보았습니다. 지금 고인의 무덤은 많은 신앙인들이 찾는 성지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하는 남편의 죽음도, 2살 아들과의 생이별도, 평생의 관노생활도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떼어놓을 수 없었습니다.

 

용수성지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탔던 배가 상해를 출발해서 제물포로 가려했는데 도중에 태풍을 만나 갖은 고초를 겪은 후에 제주도 용수포구에 도착했던 곳입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선원들은 용수포구에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배를 수리한 후에 다시금 출발하여 나바위 성지에 도착하여 무사히 조선에서의 사목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용수성지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있습니다. 기념관에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생애를 볼 수 있고, 제주 교구의 역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제주 교구에서는 고증을 고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타고 왔던 라파엘 호를 복원하였습니다.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하면서 라파엘 호에 승선한 사람들이 직접 배를 몰고 제주 앞바다를 나갔는데 평온한 날에도 멀미 때문에 포기하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건장한 사람들이 하루도 못 견디는 배 위에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5개월 넘게 지냈다고 합니다. 순례에 함께한 분들 앞에도 심한 파도처럼 삶이 장애물이 있습니다. 물론 제게도 장애물이 있습니다. 순례자들과 저는 라파엘 호에 잠시 머물면서 우리가 장애물들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를 청하였습니다.

 

요즘 우리는 제1독서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율법과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의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율법과 기득권은 필요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인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오늘 나는 나에게 주어진 하루라는 하느님의 선물을 어떻게 보내는지 생각하며, 문득 예전에 어느 식당에서 읽었던 글을 생각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고, 읽고, 사랑하고, 웃고,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024.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가을이 저물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의 준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여기에서, 깨어있음의 표시는 두 가지입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과 ‘등불을 켜놓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탈출기>에서 하느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파스카 음식에 대해 하신 말씀, 곧 “그것을 먹을 때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발에는 신을 신고 손에는 지팡이를 쥐고, 서둘러 먹어야 한다.”(탈출 12,11)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허리에 띠를 매고 있어라”는 것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이 허리에 띠를 매듯이 일할 수 있는 자세를 갖추고 경계하고 있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사나운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허리에 띠를 매고 있는 것(아우구스티누스)을 말해줍니다. 곧 임을 맞아들여 시중 들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루카 12,39) 모르듯, “생각하지도 않을 때 사람의 아들이 올 것”(루카 12,40)이기 때문입니다.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는 것은 마음과 지성에 등불을 밝히고 기운차게 깨어 있으라는 것(알렉산드리아의 치릴루스), 혹은 ‘선의 행실’로 등불을 밝힘(아우구스티누스)을 의미합니다. 곧 임이 잘 찾아올 수 있도록 불을 밝혀두고, “빛 속에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빛으로 준비하고 있는 것, 빛 속에 있는 것이 “깨어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무엇보다도 <시편>에서 “말씀은 발의 등불”(시 119,105)이라 말하고 있듯, ‘말씀의 등불’을 밝히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께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를 통해 “깨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
 
여기서 ‘깨어있음’은 단지 잠들어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을 기다리고” 있음을 말합니다. 잠들지 않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인이 돌아오면 문을 “곧바로 열어 주려고” 뜨거운 열망으로 기다리는 것, 곧 사랑의 열망으로 임을 그리워하는 것, 희망하는 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정리해 보면, ‘깨어있음’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주인이 오기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다림은 이미 축복입니다. 그 안에 이미 임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기다리는 이 안에서 임이 이미 빛을 밝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깨어 기다리는 이는 이미 빛 속에 있는 이요, 이미 등불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깨어있을 수 있음”은 이미 품고 있는 임으로 말미암아 것, 곧 깨어 계시는 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시편> 말씀처럼 “당신 빛으로 당신을 보는”(시 36,10 참조)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주인은 참으로 묘하신 분이십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이 당연하거늘, 오히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주인님은 그러신 분이십니다. 우리보다 먼저 우리를 섬기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를 복된 사람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이 미사를 통해, 몸소 당신 몸과 피로 성찬을 차려주시고 우리의 양식이 되어 섬기시니, 그저 주님 사랑에 감사드릴 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주님!
허리에 띠를 매고 임을 반겨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시중 들 수 있게 등불을 밝히고 빛 속에 있게 하소서!
빛 속에 있는 일도, 깨어있는 일도.
깨어날 수 있음도, 깨어있을 수 있음도,

오직 깨어 계시는 임께서 함께 계신 까닭이오니,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깨어 있어라.”

우리 문도미니코 수사님의 종신서원 상본 성구이기도 합니다. 요셉 수도원 성전 뒷면 양쪽에도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환히 빛나는 눈을 지닌 커다란 올빼미 그림이 걸려 있고, 제의실 방에도, 제 집무실에도 늘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지닌, 깨어 있음을 상징하는 필란드 흰 올빼미 도자기 작품이 놓여져 있습니다. 

 

영성생활의 궁극목표가 깨어 있음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도 깨어 있는 삶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평생 끊임없이 계속되는 공동체의 전례기도도 궁극으로 목표하는 바는 공동체의 일치요 깨어 있는 삶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음은 사랑입니다.

깨어 있음은 기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은총입니다.

깨어 있음은 순수입니다.

깨어 있음은 침묵입니다.

깨어 있음은 겸손입니다.

깨어 있음의 평화입니다.

깨어 있음은 진실입니다.

깨어 있음의 일치입니다.

깨어 있음은 행복입니다.

깨어 있음은 훈련입니다.

깨어 있음은 인내입니다.

깨어 있음은 준비이며 기다림입니다.

 

깨어 있음의 은혜가 끝이 없습니다. 막연한 깨어 있음이 아니라 주님께 희망을 두고 주님을 기다릴 때 항구히 인내하며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깨어 기다림의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한 두 번의 깨어 있음이 아니라 늘 한결같이 깨어 있는 삶입니다. 언제 어디서 주님이 오실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어 살 때 맑고 향기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주님은 어떤 분입니까? 제가 특히 좋아하는 전례기도서 3시경 찬미가 2절에서 소개되는 주님입니다. 

 

“진리여 사랑이여 목적이시여, 

 우리의 다함없는 행복이시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바라며, 

 주님께 도달하게 하여주소서.”

 

이런 주님을 기다리기에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깨어 기다릴 때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살아 계신 주님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면 실감나게 이해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믿는 모든 이들이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을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명령이요 짧지만 강렬합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흡사 영혼의 등불을 환히 켜들고 깨어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이어 계속되는 주님의 당부말씀입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행복하여라, 깨어 있는 종들!”

여기 또 행복 선언이 나옵니다. 주님을 기다리며 깨어 있는 이들이 바로 참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나오는 주님은 우리를 섬기러 오신 겸손한 분임을 분명히 드러냅니다. 우리가 깨어 기다리는 분은 바로 우리를 시중들러 오신 겸손한 주님이십니다. 참으로 평상시 깨어 주님을, 형제들을, 겸손히 섬기며 오실 주님을 깨어 준비하며, 기다리며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너무 잘 아시며 오실 때 이런 우리를 식탁에 앉히신 다음 시중을 드신다 합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장면인지요! 바로 우리가 오매불망, 순수한 마음으로 한결같이 깨어 기다리는 분은 이런 겸손하신 주님이십니다. 겸손하신 주님은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의 아담과 그리스도의 비교를 통해 분명히 잘 드러납니다. 한 사람 아담과 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비교입니다. 참으로 한 사람의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요!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어 생명을 받습니다.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듯이, 한 사람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죄가 죽음으로 지배한 것처럼, 은총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주는 의로움으로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분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입니다. 아담의 실패를 순종으로 일거에 만회하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은총을 주시는,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주님입니다. 이런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분발하여 깨어 있게 합니다. 언젠가 오시는 주님이 아니라 날마다 미사를 통해,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형제들과의 만남을 통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늘 깨어 기다리는 삶이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깨어있음의 훈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즘 널리 시행되고 있는 향심기도, 비움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의 수행이 목표하는 바도 바로 이런 깨어 있는 삶입니다. 저 역시 늘 호흡에 맞춰 성구를 되뇌이며 오전, 오후 30분씩, 명상기도를 수련해오기 30년이 넘었습니다. 참으로 깨어 있음의 훈련에 좋은 기도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우리가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 역시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깨어있음을 위한 참 좋은 기도입니다. 깨어 있는 영성훈련에 충실할 때 건강한 영혼, 건강한 정신, 건강한 마음입니다.

 

“깨어 있어라!”

늘 깨어 살 때 참행복입니다. 깨어 살 때 늘 영원한 오늘, 영원한 현재를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깨어 지낼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 깨어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은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 일일일생 하루로, 일년사계로, 우리 인생 여정을 압축하면 현재의 시점이 나오고 더욱 분발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 깨어 환상이나 거품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제 경우를 보면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오후 4:30분, 일년사계一年四季로 압축하면 시점時點은 초겨울, 이런 확인이 죽음도 머지 않았다는 자각과 더불어 깨어 있는 삶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이 또한 깨어 살기 위한 참 좋은 실제적 수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며 살도록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다음과 같이 깨어 기다리다 주님을 맞이하는 행복한 종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루카12,38). 아멘.


10/25(수)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마더 데레사는 천국의 문 앞에 있던 베드로 사도에게 “나는 이 천국을 가난한 사람들로 가득 채우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차이가 나의 자존감, 곧 행복의 수준을 만듭니다.(전삼용 신부)

 

2.  1독서에서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일관되게 말씀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은 율법과 기득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며 신앙은 하느님을 믿는 의로움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생각하고, 읽고, 사랑하고, 웃고, 나누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입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루카 12,35)

주님!
허리에 띠를 매고 임을 반겨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시중 들 수 있게 등불을 밝히고 빛 속에 있게 하소서!
빛 속에 있는 일도, 깨어있는 일도.
깨어날 수 있음도, 깨어있을 수 있음도,

오직 깨어 계시는 임께서 함께 계신 까닭이오니, 주님 찬미받으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깨어 있어라!”

늘 깨어 살 때 참행복입니다. 깨어 살 때 늘 영원한 오늘, 영원한 현재를 삽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깨어 지낼 날은 오늘입니다. 오늘 깨어 잘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될 것이니 걱정은 저절로 내려놓게 됩니다.(이수철 신부)

 

10/25(수)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제305일 기도

 

복음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신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 많이 요구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의 뜻대로 나를 움직이소서.

지금 이곳에서 나의 모든 지체를...

통제하시고 관리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

하느님 나라를 살게 하소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지복의 기쁨을 만끽하며...

매사 하느님의 뜻임을 알아...지족하게 하소서. 

 

- 2023년 10월25일(수) 17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