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0월 26일 목요일[(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0월 26일 목요일[(녹)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당신이 응답해 주시니, 제가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귀 기울여 제 말씀 들어 주소서.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 주소서.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성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정성껏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6,19-23
형제 여러분,
19 나는 여러분이 지닌 육의 나약성 때문에 사람들의 방식으로 말합니다.
여러분이 전에 자기 지체를 더러움과 불법에 종으로 넘겨
불법에 빠져 있었듯이,
이제는 자기 지체를 의로움에 종으로 바쳐 성화에 이르십시오.
20 여러분이 죄의 종이었을 때에는 의로움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21 그때에 여러분이 지금은 부끄럽게 여기는 것들을 행하여
무슨 소득을 거두었습니까?
그러한 것들의 끝은 죽음입니다.
22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죄에서 해방되고
하느님의 종이 되어 얻는 소득은 성화로 이끌어 줍니다.
또 그 끝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23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는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머물려고 모든 것을 해로운 쓰레기로 여기노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49-5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49 “나는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그 불이 이미 타올랐으면 얼마나 좋으랴?
50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
5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52 이제부터는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서로 갈라져,
세 사람이 두 사람에게 맞서고 두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설 것이다.
53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이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딸에게, 딸이 어머니에게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맞서 갈라지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자유로운 마음으로 이 예물을 바치오니
주님의 은총으로 저희를 씻으시어
저희가 주님께 드리는 이 성찬의 제사로 더욱 깨끗해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주님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때 먹여 살리신다.
<또는>
마르 10,45 참조
사람의 아들은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천상 잔치에 자주 참여하여
현세에서 도움도 받고 영원한 신비도 배우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의 날개만으로는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새는 2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왼쪽 날개와 오른쪽 날개는 서로 대립하거나 싸우기 위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가 원하는 방향으로 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 주는 존재입니다. 대부분의 민주국가에는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여당은 국민의 선택을 받아 일정기간 국가를 운영하는 정당입니다. 야당은 국민의 선택은 받지 못했지만 여당이 추진하는 정책이 국가를 위한 것인지 살펴보고, 다음에는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 힘을 모으는 정당입니다. 여당과 야당은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국가가 국민을 위해, 국민에 의한, 국민의 국가가 될 수 있도록 연대하고 보완해야 합니다. 국민은 보지 않고 상대방을 억누르고 짓밟으려는 정당만 있다면 그런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버리고 3류 국가로 전락하기 마련입니다. 1류 국가를 만들어 복지와 분배가 공평하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3류 국가를 만들어 독재와 폭력으로 가난과 공포가 만연하게 하는 것도 국민의 몫입니다. 깨어 있는 시민의 냉철한 판단과 불의에 맞서 공정과 정의를 구현하는 시민들의 용기만이 문화와 복지가 넘쳐나는 국가를 만들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깨어 있는 시민들의 땀과 열정, 때로는 피와 눈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라보는 성찰입니다. 깊은 성찰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습니다. 회개와 결심이 없는 성찰은 울리는 징과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이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깨어있지 못하는 불충한 종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인이 보낸 소작인을 때리고, 주인이 보낸 외아들까지 죽여 버리는 나쁜 소작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곳간에만 재물을 채우고 좋아했던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혼자만 좋은 옷을 입고, 배불리 먹었던 부자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위선과 교만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도 하느님께 가지 못하면서 남들도 들어가기 못하게 가로막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찰하고 회개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하셨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가진 것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늘 ‘패자부활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입니다. 성찰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식별은 그런 성찰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고독과 위안이 식별의 기준은 아닙니다. 식별의 기준은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우리는 악으로부터도 고독과 위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육적인 고독을 느끼는 사람은 욕망과 욕심에서 위안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려는 나방과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채워지는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우리를 육적인 고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육적인 위로를 받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었던 부자입니다. 자신의 곳간에 재물을 쌓아놓고 좋아했던 부자입니다. 명예와 권력, 재물에 취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사람입니다. 그런 위로의 끝은 영적인 죽음입니다. 육적인 위로에서 자유롭게 하는 것도 하느님의 말씀과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독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영적인 고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산상수훈’은 영적인 위로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멍에는 편하고, 그런 예수님의 짐은 가볍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불’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불은 성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성령의 이끄심입니다. 불은 영적인 위로와 고독을 식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가해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루카 12,49-53
성령의 불은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는
‘불’을 주러 오셨다고 하십니다. 한 집안의 다섯 식구가 있다면 세 사람이 두 사람과 갈라지고
두 사람이 세 사람과 갈라지게 될 것이라 하십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불’은 성령님이고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실 때
내려주실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혼자 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체제와 맞서는 새로운 체제를 갖춘
공동체가 형성될 것이란 뜻입니다.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는 사막의 교부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그리스도교 수도회의 창시자로 기억됩니다.
많은 은수자와 수도자들이 있었지만, 그가 수도회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실현할 수도회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젊은 안토니오는 약 251년에 이집트에서 태어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고 일찍 부모를 여의었습니다.
어느 날 성당에 들어갔을 때 부자 청년의 복음이 낭독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청년에게
당신을 따르려거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듣고는 그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친척들과 문제가 없었을까요?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팔고 사막으로 들어갔고 20여 년을 수련한 후에 거기에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은둔 수도회의 초창기 형태가 형성된 것입니다.
안토니오에게 떨어졌던 것은 성령의 불입니다. 이는 혼자만 타라는 말이 아니라 많은 이들과 함께
불타도록 만들라는 명령과 같았습니다. 불은 붙어 있는 것들을 함께 태우는 본성이 있습니다.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혼자만 타게 만드는 불은 없는 것입니다.
동방의 수도회 시초가 성 안토니오라면 서방은 성 베네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분은 연대상으로 2백 년 정도 차이가 납니다. 베네딕도 성인은 청년 때 로마에서 교육받다
도시의 부도덕한 생활에 실망하여 수비아코라는 곳의 바위 동굴에서 약 3년 동안 은둔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깨달은 것을 전파하기 위해 수도회를 창설하고
“일하고 기도하라”라는 깨달음을 전파하였습니다.
체제는 진실보다 강합니다. 공동체는 진리보다 강합니다. 전에도 설명했듯이 바보 마을에서 해시계는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전락할 뿐입니다. 진리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의 공동체에게 합당합니다.
성령은 진리이십니다. 성령의 불이 붙으면 그 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진리에 합당한 체계가
필요합니다.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고서는 성령의 감도가 숨을 쉴 수 없고 실현될 수 없습니다.
헬리코박터 파일로리(H. pylori)라는 박테리아가 소화성 궤양과 위염을 일으킬 수 있다는 발견은
의학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발견 중 하나였습니다. 이 발견은 궤양이 주로 스트레스, 매운 음식 또는
과도한 위산에 의해 발생한다는 오랜 믿음에 도전했습니다.
이 발견을 한 호주의 두 과학자인 배리 마샬과 로빈 워렌 박사는 수년 동안 의료계에서 거부당해왔습니다.
이에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마샬 박사는 헬리코박터균 배양액을 마셨습니다.
며칠 내에 그는 위염이 발생하여 박테리아가 위염을 유발할 수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 자체 실험은 위험했지만, 가설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를 제공했습니다.
그렇다고 경직화된 의학계가 바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연구하는 집단을 세우고
끊임없는 반복 실험과 결과를 제공하자 어쩔 수 없이 의학계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노력이 10년 뒤에 결실을 거둬 둘은 노벨 의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도 가난을 기본 정신으로 하는 수도회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쫓겨났고 교회에서도 쫓겨났습니다.
나중에야 교황이 회개하여 탁발수도회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묵상
231025.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오늘 <복음>도 종말에 관한 비유인 앞 장면의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에 이어, “집주인과 도적의 비유”와 “청지기의 비유”를 들려줍니다. 앞의 것은 어제 복음과 함께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있는 종들”(루카 12,37)이라는 ‘깨어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이라면, 뒤의 것은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들”(루카 12,43)이라는 ‘깨어 일하고 있는 종들’에 대한 행복선언입니다.
이는 ‘깨어있는 자’는 단지 잠들지 않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깨어 일하는 자’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깨어있으려면, 먼저 ‘대체 무엇이 맡겨졌고’, ‘무슨 일이 맡겨졌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할 일입니다. 곧 청지기(집사)가 가져야 할 태도와 방식을 가르쳐주십니다. 우선 비유에서, “청지기”는 주인을 대신하여 종들과 양식과 재물을 돌보는 직무를 맡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이는 먼저 제자들에게 다른 어떤 일이 아니라, ‘주인의 종들이 맡겨졌고’, ‘그들에게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고 돌보는 일’이 맡겨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바로 이 ‘사실 인식’을 제대로 해야 할 일입니다. 곧 ‘나에게 맡겨진 종은 나의 종이 아니라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마구 부려 먹으라고 맡겨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양식을 내주라고 맡겨졌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양식은 이미 정해져 주어졌고, 그것을 때에 맞추어 소홀함이 없이 잘 챙겨내어 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맡을 수 있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충실함’은 하느님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계약을 맺으시며 그 약속에 ‘신실하심’(헤세드)과 ‘한결같은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곧 당신 종들을 끝까지 챙기시는 ‘충실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이 마음을 ‘청지기’가 지녀야 될 태도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일은 ‘슬기로움’으로 처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슬기로움’이란 맡겨진 이들을 다루는 기술이나 요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뜻에 따라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주는”(루카 12,42) 일입니다. <잠언>에서는 말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거룩하신 분을 아는 것이 곧 예지다.”(잠언 9,10)
그렇습니다. 지혜는 주님을 알고, 두려워하고, 믿는 마음에서 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아는 지혜”를 넘어, “주인의 뜻에 따라 사는 지혜”를 의미합니다. <시편> 작가는 말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원이요, 그대로 사는 사람이 슬기를 깨친 사람이다.”(시 111.10)
그렇습니다. ‘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곧 주인의 뜻을 알고 그것을 충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요, “깨어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이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행복하여라, 책임을 다하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
“주님, 당신 눈동자처럼 저를 보호하소서.
당신 날개 그늘에 저를 숨겨주소서.”(시편17,8)
어제 강론은 흡사 깨어 있음 예찬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강론중 몇가지를 후에 추가했고 만족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빛입니다. 깨어 있음은 생명입니다. 깨어 있음은 위로입니다. 깨어 있음은 치유입니다. 깨어 있음은 주님의 현존입니다.” 후에 추가하고 보니 새삼 깨어 있음이 얼마나 큰 은총인지, 깨어 있음의 영적훈련과 습관이 참 중요하다 생각되었습니다.
어제는 매월 갖는 예수성심자매회 월례 모임이 있었습니다. 2005년 태동되어 시작됐으니 무려 18년 역사를 지닌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요셉 수도원을 사랑하는 자매들입니다. 어제 7명의 참석자매들과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웃는 모습이 참 자연스럽고 평화로워 보기 좋았습니다. 10년을 훌쩍 넘으니 가을 인생에 접어든 모습들이 노화老化보다는 성화聖化되어가는, 저물어가기보다는 여물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자연스럽고 성화되어 가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세월이 흘러도 모두 변함없는 모습입니다. 신부님도, 저희들도...”
한 자매와 주고받은 메시지입니다. 한분한분이 모두 한결같이, 변함없이 가정공동체라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 온 충실하고 슬기로운 자매들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다음 대목과 일치합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어제 “깨어 있어라”는 내용의 복음은 모든 제자에게 내리는 권고라면 오늘은 관리자로서 형제자매들을 책임진 이들에게 내리는 권고입니다. 그러니 각자 삶의 자리에서 이런저런 책임을 진 모두에게 해당됨을 봅니다. 막연한 믿음이, 사랑이 아닙니다. 참 믿음은, 참 사랑은 그 책임을 다할 때 입증됩니다. 책임을 다하는 믿음이, 책임을 다하는 사랑이 참 아름답고 고귀합니다.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주님의 종들이요, 바로 예수성심자매회 자매들 모두가 그러합니다. 일년사계로 하면 가을철에 속한 연세들로 잘 익어가는 신망애信望愛의 열매들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오늘 사진 나눕니다! 편히 쉬세요! 사랑하는 수산나 자매님! 오늘 자매님 참석 못하신 것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멋진 신부님, 사진으로라도 뵈니 평화가 오네요. 신부님 사랑합니다.”
제가 감동하고 놀라워하고 고마워하는 점은 무려 15년 이상을 공동체의 책임자로서 그 책임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15년 이상 매월 모임에 한번도 결석한 적이 없었는데 불의의 사고로 병원에 입원중이라 어제 처음 모임에 참석치 못한 것입니다. 자매님은 물론 많은 분들이 10년을 넘어서니 내적 아름다움이 빛을 발합니다. 한결같이 깨어 제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온 삶이기에 이런 맑고 향기롭고 기품있는 모습일 것입니다.
요즘 배밭사이를 산책할 때의 느낌도 참 각별합니다. 지난 10월19일로 배밭의 배수확이 완료되었습니다. 배나무들 역시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처럼 묵묵히 제 삶의 자리에서 제 책임을 다하였기에 풍성한 배열매들을 낼 수 있었습니다. 큰 배열매들을 보면 저절로 탄성이 나옵니다. 하느님과 사람들과 배나무의 공동책임을 다한 노고의 결실이, 기도와 일의 결정체가 배열매들입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기적, 사랑의 열매들입니다.
그러니 수확후의 배밭은 “텅 빈 충만의 사랑”입니다. 배열매들 수확후의 배밭을 산책할 때는 참 흐뭇하고 넉넉하고 편안하며 행복한 느낌입니다. 배밭의 배나무들처럼 제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하고 이런 열매 풍성했던 노년의 가을 인생이라면 얼마나 멋지고 아름답겠는지요! 말그대로 “텅 빈 충만의 사랑이요 행복이요 아름다움”일 것입니다. 만일 흉작으로 인해 수확이 없는 가을 배밭같은 가을 인생이라면 그 인생 “텅 빈 공허와 허무”와 같아 참 쓸쓸하고 외롭고 춥게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 복음 전반부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과는 대조적인 후반부의 불충실하고 어리석은 종의 경우가 우리에게는 반면교사가 됩니다. 깨어 있지 못하고 참으로 태만하고 무책임했던 종이었고 이런 불충실한 종에 대한 주인의 책임추궁이 참 단호합니다. 주인 탓이 아닌 스스로 태만과 방심, 무절제하고 무책임한 생활로 불행을 자초한 어리석은 종입니다. 복음의 결론 같은 말씀이 마지막까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끝까지 책임을 다해야 함을 배웁니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은 것이 요구되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끝까지, 한결같이 많이 받은 만큼 제 삶의 자리에서 분투의 노력으로 최선을 다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제1독서 로마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주님의 순종의 종, 의로운 종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순종의 종이 되었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참으로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답게, 또 주님의 순종의 종, 의로움의 종답게 살게 하십니다.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위에 있나니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을 건지시고,
굶주릴 제 그들을 살게 하시도다.”(시편33,18-19). 아멘.
10/26(목)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두 개의 날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바라보는 성찰입니다. 깊은 성찰은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는 ‘회개’와 다시는 같은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낳습니다. 회개와 결심이 없는 성찰은 울리는 징과 같이 공허할 뿐입니다. .....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돌아온 아들의 비유는 ‘성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하나를 하느님 나라에서는 더욱 기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는 늘 ‘패자부활전’이 있기에 우리는 희망을 지니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입니다. 성찰이 나의 삶에 대한 것이라면 식별은 그런 성찰이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를 판별하는 기준입니다.
참된 신앙은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죄가 주는 품삯은 죽음이지만, 하느님의 은사는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조재형 신부)
2. 성령께서 임하시면 자신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 이전의 공동체와 분열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혼자만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어 쇄신을 일으킬 생각을 해야
성령에 합당한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나만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받은 성령을
어떻게 나의 공동체에 시스템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야 성령을 받기에
더 합당한 사람이 됩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냐?”(루카 12,42)
주님!
먼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제가 주인이 아니라, 당신께 속해 있는 자인 까닭입니다.
무엇을 하든 제 방식이 아니라 당신의 방식을 따르고,
제 뜻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따르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관리인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순종의 종이 되었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10년을 훌쩍 넘으니 가을 인생에 접어든 모습들이 노화老化보다는 성화聖化되어가는, 저물어가기보다는 여물어가는 모습이었습니다.(이수철 신부)
10/26(목) 연중 제29주간 목요일, 제306 기도일
복음 <나는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성찰과 식별로 하느님께 나아가게 하소서.
성령의 불로 나만 타는 게 아니라 체제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내가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순종의 종이 되었고,
죄에서 해방되어 의로움의 종이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가을 인생에 접어든 나의 모습이...
노화老化보다는 성화聖化되어가는,
저물어가기보다는 여물어가는 모습이기를 기도합니다.
- 2023년 10월26일(목) 6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