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1월 5일 주일[(녹) 연중 제31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5일 주일[(녹) 연중 제31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14ㄴ-2,2ㄴ.8-10
14 정녕 나는 위대한 임금이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민족들은 나의 이름을 경외한다.
2,1 자 이제, 사제들아,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계명이다.
2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8 그러나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레위의 계약을 깨뜨렸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9 그러므로 나도 너희가 온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리라.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10 우리 모두의 아버지는 한 분이 아니시냐?
한 분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지 않으셨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는 서로 배신하며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더럽히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
○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
○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2,7ㄴ-9.13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에서,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8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과 함께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9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13 우리는 또한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때,
여러분이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실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신자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고 너희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주님께서 교회로 부르신 이들을 보호하고 도우며, 세상 속에서 구원의 희망을 전하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인자하신 주님, 평화를 바라면서도 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세계를 굽어보시어, 이해관계와 이익을 좇아 다투기보다, 대화로 갈등을 풀며 평화로이 살아가게 하소서. ◎
3. 사별 가족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힘겨워하는 이들을 위로하시어, 그들이 십자가 아래 성모님을 기억하며, 부활의 희망으로 고통을 이겨 내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이끌어 주시어, 모든 이가 겸손하고 서로 배려하며, 말을 앞세우기보다 행동으로 실천함으로써 참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일
열정적인 춤으로 사랑을 받던 가수 김완선이 부른 노래 중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수는 춤을 추며 부르지만 가사는 철학적인 면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 가사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빨간 모자를 눌러 쓴/ 난 항상 웃음 간직한 삐에로/ 파란 웃음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눈물/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모두들 검은 넥타이 아무 말도 못하는 걸/ 사람들은 모두 춤추며 웃지만/ 나는 그런 웃음 싫어/ 술 마시며 사랑 찾는 시간 속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 난 차라리 웃고 있는 삐에로가 좋아/ 난 차라리 슬픔 아는 삐에로가 좋아/ 초라한 날 보며 웃어도/ 난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가사 중에 ‘우리는 진실을 잊고 살잖아!’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교우들과 만나면 자연스럽게 ‘본당사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교우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교우들이 실망하고, 빨리 임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기를 바라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뭉클하고, 그리움이 넘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사제의 이름만 들어도 기분이 나빠지고, 화가 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32년을 사제로 살면서 ‘나는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미사를 정성스럽게 집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들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교우들과 가까이 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좋은 강론으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주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늘 기도하고, 항상 감사하며, 언제나 기뻐하는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재정에 투명하고, 청렴한 사제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신자들이 실망하고, 분노하는 사제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부끄럽고, 안타깝습니다. 신자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책임과 의무를 소홀히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성사에는 관심이 없고 재물만 챙기려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준비 없는 강론으로 횡설수설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자주 화를 내고, 남 탓을 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지나친 음주로 자주 실수하는 사제들에게 실망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처럼 순교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처럼 열정적인 사목은 못할지라도 신자들이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제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월요일에는 약수터에서 물통에 물을 담아왔습니다. 그 물을 아이들이 마시고, 어른들이 마셨습니다. 물통에 물을 가득 담으면서 힘든지 몰랐습니다. 주일에는 수녀님과 함께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바닥에 묻은 흙을 청소하면서 내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설날과 추석에는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 다녔습니다. 사제가 직접 봉고를 몰고 어르신들을 모시러가니 모두들 좋아하셨습니다. 농사지은 쌀, 마늘, 깨, 오이, 고추도 가져다 주셨습니다. 주일 미사를 마치고 교우들과 함께 마당에 쌓인 쓰레기를 모두 담아 치우면 마음이 홀가분했습니다. 함께 마시는 막걸리는 꿀맛이었습니다. 수녀님과 함께 서울 청계천으로 가서 비디오테이프를 사왔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만화영화도 사고, 종교영화도 사고, 고전영화도 사왔습니다. 아이들이 교리실에서 영화를 보았고, 교우들은 집으로 빌려가서 보았습니다. 주일 미사 후에 교우들이 친교를 나눌 수 있는 ‘식당’도 만들었습니다. 태권도를 시작해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그 아이들이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았습니다.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32년 사제생활 중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입니다. 저를 믿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는 교우들이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교우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제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미소를 짓기를 소망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2. 전삼용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일
<불가능에 도전하는 이는 위선적일 수 없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질책하십니다. 그들은 말은 하고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가르치기는 잘하고 인사 받기 좋아하지만, 정작 자신들은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그렇게 보이려는 것을 ‘위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운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기 몸을 무화과잎으로 가리기 시작한 이후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는 교만에서 시작되고 교만은 우리를 위선자로 만들기에 이 죄에서 벗어나려면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해지면 다른 이들이 나를 무시함으로 겸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인천에 사시는 한 할머니가 병원장 사모님으로서 잘 나갈 때 의료 사고가 터져서 병원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에 부닥쳤습니다. 그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친구들에게 비웃음 당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돈이 있다고 많이 자랑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위해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위 이러저러하게 보이려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 시선의 노예가 되어가는지도 모르고.
교회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영화 ‘스포트라이트’(2015)는 미국 가톨릭교회가 오랫동안 성직자들의 아동 성추행을 은폐해 온 사실을 신문 기자들이 밝혀내는 내용입니다. 우리로서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고 실제로 이 사건을 통해 미국 가톨릭교회가 상당한 물적 정신적 타격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왜 교회는 솔직하지 못했을까요? 하느님을 완전히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세상의 시선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세상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봐야 자기 힘으로는 모두를 속일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나뭇잎으로 가리던 서로의 부끄러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느님께서 만들어주신 가죽 옷을 입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죽 옷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말은 세상과 다른 새로운 존재로 태어남을 의미합니다. 이 지상 시스템 안에 속해서는 세상 시선에 절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물 위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래야 배에 타고 있을 때보다 자유로워집니다. 같은 배에 타고 있으면 아무래도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에 그들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물 위로 뛰어내리면 이제 물 위를 제대로 걷지 못하지만,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타인을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이렇듯 그리스도 덕분으로 새롭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 이 지상 사람들과 다른 위치에서 살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판단은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위 병원장 사모님도 십자가의 길을 하다가 제4처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만나실 때, 예수님께서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주셨고 그 이후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창피해서 나가지 못하던 본당에 나가 먼저 화장실 청소를 하였습니다. 병원장 사모님이 성당 화장실 변기를 매일 닦으면서도 기쁠 수 있었습니다. 병원이 망해도, 친구들이 비웃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런 것과 무관한 존재가 될 하느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해방되는 유일한 방법은 이렇게 하느님 사랑을 믿고 불가능에 도전하는 일입니다. 마더 데레사는 아무 능력이 없는 작은 수녀로서 모든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입히겠다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자 모든 비웃음에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동전 몇 개만 가지고 담대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커다란 병원을 짓겠다고 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결국 수녀님의 말대로 병원이 지어지는 것을 본 세상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세상 비웃음에 맞서봅시다. 버락 오바마는 학교에서 장차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항상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면 대부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무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성체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죽 옷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 받는 노예 생활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세상을 이길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04.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루카 14,11)
우리는 각자 “자리” 혹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자리”에 따른 역할과 사명을 부여받아 살아갑니다. ‘자리’는 때로는 “신분”이나 “계급”의 차이를 만들고 빈부귀천을 형성하며 우월감과 열등감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리’에 대한 열망은 출세와 입신양명의 성공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선을 넘지 않고 ‘제 자리’를 잘 지키는 것은 교양이요 미덕이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느 자리, 어느 위치에 있든지 타인을 존중하고 먼저 배려하고 우러르며, 자신을 낮추는 것이야말로 겸손과 인격을 드러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이 서로 “윗자리”를 차지하려는 모습을 보시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8-10)
이 비유 속에서 초대받은 사람의 관심은 온통 “자리”와 “대우”에 쏠려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잔치에 초대받은 이에게 중요한 것은 ‘자리’가 아니라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이요, 자신에 대한 ‘대우’가 아니라 초대해주신 분의 호의에 감사하는 일일 것입니다.
사실, 오늘도 우리를 초대한 혼인잔치에는 말씀과 성찬의 밥상이 너끈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과 몸으로 밥상을 차리셨습니다. 이 밥상은 윗자리에나, 맨 끝자리에나, 그 어느 자리에나, 모두 풍성합니다. 그러니 자리 밑에서 부스러기만 주어먹을 수 있어도 행복입니다. 잔치에 초대받은 것만으로 이미 행복입니다.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초대하신 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줄 아는 것이야말로 축복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질 것입니다.”(루카 14,11)
이는 사람의 ‘높고 낮음’이 자신의 욕심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초대하신 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높낮이는 자신이 정하거나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배정되는 것이며, 주어지는 것이요 부여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 문장의 종결어미는 ‘낮아지고’ 혹은 ‘높아질 것이다’는 수동태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오히려 자신이 아니라 상대를 높이는 이가 높아질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여지고” 상대를 낮추는 이는 자신도 함께 낮추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낮추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려가 상대를 높이는 일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일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떨어져 땅에 뒹구는 이 가을의 낙엽처럼 돌아가 썩어 거름이 될 자리로 가 머물러야 할 일입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 / 낮은 곳으로 / 자꾸 내려앉습니다.
/ 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 // 나는 그대에게 / 무엇을 좀 나누어 주고 싶습니다.
//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할지라도 / 그대여 / 가을 저녁 한 때 /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 // 사랑이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8)
주님!
오늘도 잔치 상을 너끈하게 차려주시니, 기뻐하게 하소서.
또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끝자리의 겸손을 사랑합시다!”-
"주님, 아침에는 당신의 사랑,
밤이면 당신의 진실을 알림이 좋으니이다."(시편92,2)
아침 새벽 독서의 기도, 시편136장 26절까지는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라는 매구절 반복이었습니다. 이런 끊임없이 흥겹게 노래하는 주님 찬미의 마음에서 저절로 샘솟는 감사와 겸손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참 좋은 겸손의 덕입니다. 하느님 앞에 참으로 회개할 때 그 회개의 열매가 겸손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겸손이요,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니 인간 무지에 대한 답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내적 아름다움은 겸손에 있습니다. 여름철 오랫동안 피어있는 “자귀나무꽃”의 은은한 향기에서 연상된 것은 겸손이었고 써놓은 글이 있습니다.
“향기맡고 찾아내는 꽃
한참가다 향기맡고 뒤돌아 보는 꽃
자귀나무꽃
존재의 향기
생명의 향기
사랑의 향기
겸손의 향기
당신은 이런 분이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2023,6,19
겸손한 이들에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러면 복음 선포는 저절로 이뤄질 것입니다. 복음화는 개종이 아니라 증거와 매력을 통해 이뤄진다는 교황님 말씀이 생각납니다.성덕의 잣대가 겸손이요, 존재의 향기, 겸손의 향기를 발하는 아름다운 분들이 바로 예수님을 닮은 성인들이요 오늘 기념하는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잔치에서 윗자리를 탐하는 이들을 바라보시며 제자들에게 겸손히 끝자리를 택할 것을 권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 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매사 끝자리를 택하는 겸손한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아예 끝자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에 보면 “단식을 사랑하라”, “순결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오는데 끝자리의 “겸손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겸손뿐 아니라 기도를 사랑하고, 공부를 사랑하고, 침묵을 사랑하고, 수도생활을 사랑하고, 그러면 저절로 자연스럽게 덕도 몸에 배게 됩니다. 잠언에도 비슷한 말이 나옵니다.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말라.
‘이리 올라오게!’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하대 받는 것보다 낫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율법학자들의 드러내기 좋아하는 모습을 경계하라 주신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기다란 예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것이요, 장터에서 인사받는 것, 회당에서도 높은 좌석, 잔치에서도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이런 속빈 허영을 택하지 말고 속이 꽉찬 겸손의 삶을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 말씀은 선택된 이방인들의 자만에 대한 경고와 유다인들의 구원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강조하는바 구원은총에 대해 한결같이 겸손한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나서 구원이 아니라 은총으로 구원이니, 이런 구원은 은총의 선물이라는 자각에서 저절로 “감사”와 “겸손”이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지막 복음 말씀이 겸손에 대한 결론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자신이 아닌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참으로 자신을 겸손히 낮출 때 주님 친히 높여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베네딕도 규칙서 7장은 “겸손에 대하여” 열두 단계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공부하는 마음으로 간단히 살펴봅니다.
1.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늘 눈앞에 두어 잠시도 잊지 않는 것이다.
2.자신의 뜻을 좋아하지 않으며,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을 즐겨하지 않는 것이다.
3.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순종으로 주님을 본받는 것이다.
4.순명에 있어 어렵고 비위에 거슬리는 일 또는 당한 모욕까지도 묵묵히 인내로써 받아들이는 것이다.
5.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모든 악한 생각이나 남모르게 범한 죄악들을 겸손된 고백을 통하여 숨기지 않는 것이다.
6.수도자가 온갖 비천한 것이나 가장 나쁜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7.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자신이 가장 못하고 비천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신의 말로써 드러내는 것이다.
8.수도자들이 수도원의 공동규칙이나 장상들의 모범이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이다.
9.수도자가 말함에 있어 혀를 억제하고, 침묵의 정신을 가지고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10.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다.
11.수도자가 말할 때는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12.수도자가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내는 것이다.
말그대로 겸손의 수련이요 훈련이요 습관화입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사랑하듯 겸손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겸손을 사랑할 때 능동적 자발적 기쁨으로 겸손의 훈련에 항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은 겸손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의 이 모든 단계들을 다 오른 다음에 수도자는 곧 하느님의 사랑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며, 이전에는 공포심 때문에 지키던 모든 것을 별로 어려움 없이 자연스럽게 습관적으로 지키기 시작할 것이니, 이제는 지옥에 대한 무서움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좋은 습관과, 덕행에 대한 즐거움에서 하게 될 것이다.”(성규7,67-69)
오늘은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입니다. 16세기 가톨릭 개혁시대를 주도했던 인물중 하나로 일생동안 한결같이 교회를 위해 치열하게 일하며 살았던 성인입니다. 46세 과로로 점차 체력이 소모되어 은퇴후 선종까지 성인의 행적은 경이로울 뿐입니다.
교황청 국무원장, 프란치스코회 지도 사제, 가르멜회 지도 사제, 구호기사단 지도 사제, 밀라노 대교구장,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서 편찬 위원장,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 설립자, 성 암브로시오 헌신회등 참으로 불철주야 교회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성인입니다. 성인은 1584년 11월3일 밤,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라는 마지막 겸손한 임종어를 남기고 선종하였고 주교좌성당 중앙 제대 아래 묻힙니다.
성인은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였고 권력을 휘두를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성덕을 높임으로써 개혁의 반대자들로부터도 칭송을 받았으며, 자신의 성직자나 수도자, 평신도들에게 권력을 남용한 적이 없었습니다. 성인은 후대 성직자와 교리교사의 수호성인으로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의 충실한 종, 매력적인 겸손한 성인,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입니다.
모든 덕의 어머니이자 성덕의 잣대가 겸손의 덕입니다. 참된 회개의 열매인 겸손이요,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겸손이야 말로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인간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겸손이요, 겸손 또한 은총의 선물임과 동시에 훈련과 습관을 필요로 하는 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매일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온유하고 겸손한 주님을 닮아가게 합니다.
"하느님, 하시는 일로 날 기쁘게 하시니,
손수 하신 일들이 내 즐거움이니이다."(시편92, 5). 아멘.
11/5(일) 연중 제31주일, 되새김 구절
1.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조재형 신부)
2.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여 세상 비웃음에 맞서봅시다. 버락 오바마는 학교에서 장차 무엇이 되고 싶냐고 물을 때 항상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흑인 아이가 대통령이 될 거라고 말하면 대부분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무시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성체 성사가 있습니다. 우리를 다른 존재로 만들어주는 가죽 옷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 받는 노예 생활로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불가능에 도전하며 세상을 이길 것인지는 우리 선택에 달려있습니다.(전삼용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너를 혼인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루카 14,8)
주님!
오늘도 잔치 상을 너끈하게 차려주시니, 기뻐하게 하소서.
또한, 감사할 줄을 알게 하소서.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이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이영근 신부)
4. 우리 베네딕도 규칙서 7장은 “겸손에 대하여” 열두 단계에 대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9.수도자가 말함에 있어 혀를 억제하고, 침묵의 정신을 가지고 질문을 받기 전에는 말하지 않는 것이다.
10. 쉽게, 또 빨리 웃지 않는 것이다.
11.수도자가 말할 때는 온화하고 웃음이 없으며 겸손하고 정중하며 간결한 말과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큰 소리를 지르지 않는 것이다.
12.수도자가 마음으로뿐 아니라, 몸으로도 자기를 보는 사람들에게 겸손을 항상 드러내는 것이다.(이수철 신부)
11/5(일) 연중 제31주일, 제316일 기도
복음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다른 존재가 되게 하소서.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세상의 시선에 지배 받는 노예 생활을 벗어나게 하소서.
불가능에 도전하며 하느님의 시선으로 살게 하소서.
- 2023년 11월5일(일) 8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