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1월 7일 화요일[(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1월 7일 화요일[(녹) 연중 제31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어서 저를 도우소서.
본기도
은총을 베푸시어 저희가 하느님을 합당히 섬기고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달려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12,5-16ㄴ
형제 여러분, 5 우리는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6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7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8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9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10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11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12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13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14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15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16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제 영혼을 당신의 평화로 지켜 주소서.
○ 주님, 제 마음은 오만하지 않나이다. 제 눈은 높지도 않사옵니다. 감히 거창한 것을 따르지도, 분에 넘치는 것을 찾지도 않나이다. ◎
○ 오히려 저는 제 영혼을, 다독이고 달랬나이다. 제 영혼은 마치 젖 뗀 아기, 어미 품에 안긴 아기 같사옵니다. ◎
○ 이스라엘아, 주님을 고대하여라, 이제부터 영원까지.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5-24
그때에 15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던 이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그분께,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초대하였다.
17 그리고 잔치 시간이 되자 종을 보내어 초대받은 이들에게,
‘이제 준비가 되었으니 오십시오.’ 하고 전하게 하였다.
18 그런데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양해를 구하기 시작하였다.
첫째 사람은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고 그에게 말하였다.
19 다른 사람은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 보려고 가는 길이오.
부디 양해해 주시오.’ 하였다.
20 또 다른 사람은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그러니 갈 수가 없다오.’ 하였다.
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집주인이 노하여 종에게 일렀다.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22 얼마 뒤에 종이
‘주인님, 분부하신 대로 하였습니다만 아직도 자리가 남았습니다.’ 하자,
23 주인이 다시 종에게 일렀다.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처음에 초대를 받았던 그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아무도
내 잔치 음식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제물을 거룩한 제사로 받아들이시어
저희에게 주님의 자비를 가득히 베풀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또는>
요한 6,57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살아 계신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천상의 성사로 저희를 새롭게 하셨으니
저희에게 주님의 힘찬 능력을 드러내시어
주님께서 약속하신 은혜를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2023년 11월 07일 화요일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상우 바오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오감으로 온전히 파악되실 수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여 주십니다.
고대 근동 지방에는 잔치를 벌이기 한참 전에 미리 손님들에게 초대되었음을 알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잔치가 다 준비되면 주인이 다시 종을 보내, 초대받은 이들을 찾아가 직접 데려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은 미리 잔치에 초대받았으면서도 잔치에 오지 않습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된 첫째 부류는 구약 성경이 증언하듯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지만,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지 않았기에 그들 스스로 참된 구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이어서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그 결과 잔칫집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이 참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며 보편된 구원을 실현합니다.
그럼에도 초대받은 이는 초대에 합당한 최소한의 준비를 하고 품격에 맞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로 하느님 나라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초대에 어떻게 응답하고 있습니까?
하느님 나라에서 거행될 혼인 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저마다 일상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어떤 준비를 하고 있습니까?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동양의 고전 ‘맹자’는 군자삼락(君子三樂)’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이 첫 번째 기쁨이다. 우러러 하늘에 부끄러움이 없고, 더불어 세상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 두 번째 기쁨이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기쁨이다.” 여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 하는 것들이 별로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얻고자하는 첫 번째 기쁨은 무병장수하는 것이 첫 번째 일 것입니다. 성공하여 재물을 풍족하게 쓰는 것이 두 번째 일 것입니다. 권력과 명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 대접받고 사는 것이 세 번째 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것들을 원하기에 마귀는 예수님을 유혹할 때 이 세 가지를 사용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다른 차원에서의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상선약수(上善若水), 천장지구(天長地久)’를 이야기합니다. 계곡은 비어 있기 때문에 신령하고, 물은 아래로 흘러서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데에 거처하므로 땅과 곡식을 풍성하게 한다. 하늘은 높아도 모든 사람을 감싸고, 땅은 죽은 쓰레기를 다 받아들여 생명으로 바꾼다. 그래서 텅 빈 산의 계곡과 거기서 흘러내린 물, 그리고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하늘과 땅에게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헌신과 겸손이 기쁨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사제삼락(司祭三樂)’이 있다면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사제는 예수님을 따르기고 약속하고, 결심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사제의 기쁨의 원천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께 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겸손과 헌신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헌금보다 과부의 겸손한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거만한 기도보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한 레위와 사제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다고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위해서 헌신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고,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겸손과 헌신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마귀 들린 사람은 치유하고, 병자들은 고쳐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의 기쁨이 있다면 오직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은 행복합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참된 행복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음식을 먹게 될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잔치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무나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열매에 익숙한 사람들은 결코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겸손과 헌신을 삶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는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의 음식을 먹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106.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오늘 <복음>에서는 초대를 베푸는 이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오히려 가난한 이들, 눈 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루카 14,12-13)
예수님께서는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베풀도록 요청합니다. 친구, 형제, 친척, 부유한 이웃에 대조되는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 저는 이들, 눈 먼 이들은 보답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제시됩니다. 이들에게 행한 은밀한 자선은 하느님께 대한 응답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선을 숨겨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4)
이는 단순히 초대한 이들에게 보답을 바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 나아가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는 단순히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인간애 차원의 선행을 넘어, 신앙행위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루카 14,1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고통 받는 가난한 이 안에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현존하심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주었다.”(마태 25,35)
이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선을 하늘나라의 보상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삼기보다 곤경에 처한 이들에 대한 사랑의 동기에서 해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이러한 가난한 이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고통 받는 그리스도를 알아 뵙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210항)
또 “새로운 복음화”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교회에게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택은 문화, 사회, 정치, 또는 철학의 범주 이전에 신학의 범주이다. ~이 선택은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하느님에 대한 우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저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바랍니다. ~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통하여 우리 자신이 복음화 되도록 하여야 합니다. 새로운 복음화는 가난한 이들의 삶에 미치는 구원의 힘을 깨닫고 그들을 교회여정의 중심으로 삼으로라는 초대입니다.”(복음의 기쁨. 198항)
그리고 지난 2017년에는 연중 제33주일을 “제1차 세계 가난한 이들의 날”로 발표하시고,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라고 요청하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복음의 길’로 나아갈 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주는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곧 우리는 작고 가난한 이, 가난한 교회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오, 자비와 지혜, 신비의 하느님이여!-
"주께서는 희생보다 자비를,
번제보다 지혜를 원하시나이다."
독서의 기도 세번째 후렴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자비와 지혜의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의 신비, 사랑의 신비,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생명의 신비, 자연의 신비, 몸의 신비, 인간의 신비, 고난의 신비등 끝이 없습니다. 모두가 신비이자 은총입니다. 도대체 신비아닌 것이 없고 은총아닌 것이 없습니다. 이런 신비에 대한, 은총에 대한 깨달음이 우리를 마냥 겸허하게 합니다. 신비의 원천인, 신비의 신비이신 하느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게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끝없는 하느님 찬미와 감사입니다. 교황님의 신학에 대한 언급이 참 신선했습니다.
“신학은 오늘날 세상을 위해 복음을 해석해야 한다. 신학은 추상적이고 이념적이선 안되고 영적이어야하는 훈련이다. 자신의 무릎을 꿇고 수행해야하는 흠숭과 기도를 통해 잉태되는 초월적 훈련이요, 동시에 백성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하는 훈련이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대로의 신학자라면 기도의 사람, 사랑의 신비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 믿는 이들은 모두가 신비가로 불림받았다 함이 맞습니다. 참으로 신비감각을 키워야할 우리들입니다. 제가 불암산 기슭 요셉 수도원에 36년째 정주하면서 가장 많이,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보는 하늘과 불암산이요, 제 간절한 소망이 담긴, 참 많이 인용했던 “하늘과 산” 이라는 자작시입니다. 하늘은 하느님을, 산은 인간인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시를 쓴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외울때마다 새롭습니다.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를 소망하며 쓴 시입니다. 요즘 단풍의 곱기가 예전만은 못하지만 여전히 수도원 주위 풍경은 아름답습니다. 숙소문을 열었을 때, 집무실 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단풍 아름다운 풍경이 별세계 같습니다. 저에겐 하늘나라 체험이요 속으로 되뇌어 봅니다.
“이승의 세계가 이처럼 아름답다면 천국의 하늘문이 열렸을 때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승의 아름다움은 이런 천상세계의 희미한 그림자에 불과할 것이다. 이런 하느님의 천상고향에 궁극의 희망을 두고 살 일이다.”
아주 오래전 25년전 이맘때쯤 써놨던, 하느님이 그리울 때 마다 자주 읊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 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푸른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 싶은 당신”-1998.11.22.
엊그제 복음의 내용은 “끝자리에 앉아라”였고, 오늘은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여라”입니다. 그대로 하느님 마음을 반영하는 예수님 마음입니다. 여기서 연상된 것이 가장 끝자리에서, 또 모두를 받아들이는 바다를 연상했습니다. 바다하면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넓고넓은 바다라고 말들하지만, 나는 나는 넓은게 또 하나있지.
사람되라 이르시는 성모님은혜, 푸른바다 저보다도 넓은것같애”
어머님을 성모님으로 바꿔 산책때 마다 부르는 노래입니다. 연민과 겸손의 성모님입니다. 정말 하느님을 닮은 연민(compassion)과 겸손(humility)의 사람은 성모님처럼 바다같은 사람입니다.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믿음은 주로 이해되어야할 이상도, 도덕적 계명도 아니라 만나야 할 분이시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의 마음은 우리를 사랑으로 두드리시고, 그분의 눈은 우리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신다. 천상으로 인도하는 겸손이다. 연민의 시선과 겸손한 마음을 청하자. 연민과 겸손의 도상에 있는 이들위에 주님은 그의 생명을 주시며 죽음에 승리하게 하신다.”
정말 끝자리의 겸손을 선택하는 이들이, 불쌍한 이들을 받아들이는 자비와 지혜의 바다같은 이들이 하느님을 닮은 바다같은 사랑의 신비가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잔치를 베풀 때 친구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이 아닌 불쌍한 이들을 초대하라 하십니다. 그대로 바다같은 모습이요 이런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신비가들입니다. 성녀 마더 데레사가 그 대표적인 분입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불쌍한 이들의 보호자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예수님입니다. 신비의 하느님께 경탄하는 바오로의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이방인들은 물론 궁극에는 유대인들까지 인류 모두의 구원을 내다보는, 모든 것이 결국은 잘될 것이라는 긍정적 낙관주의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과연 만물이 그분에게서 나와 그분을 통하여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분께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정말 대 신비가이자 관상가요 영성가인 바오로 사도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무상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주요 보호자요 목적이시요 우리의 시작이자 마침이 되십니다. 우리 존재의 신비, 삶의 신비도 이런 하느님을 통해서 비로소 해명됩니다. 이런 하느님을 잊을 때 무지와 허무의 늪에서 방황하다 그 인생 끝낼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께 바치는 흠숭의 찬미와 감사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주님을 닮은 연민과 겸손, 자비와 지혜의 신비가로 만들어 줍니다.
"실로 당신의 궐내라면, 천날보다 더 나은 하루,
악인들의 장막 안에 살기보다는,
차라리 하느님 집 문간에 있기 소원이니이다."(시편84,11). 아멘.
11/7(화)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주인은 종들에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하고 이릅니다.
그 결과 잔칫집은 뒤늦게 초대된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됩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이 참으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는 보편적 구원의 길임을 가리키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초대는 선물처럼 거저 주어지며 보편된 구원을 실현합니다.(김상우 신부)
2.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전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가난한 이들을 초대하여라.”(루카 14,12-13)
주님!
당신 말씀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식탁의 잔치에서 사랑을 먹었으니, 당신의 생명을 건네게 하소서.
이제는 잔치를 베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이 사랑하는 작은이들을 초대하여 생명의 잔치를 베풀게 하시고,
저 자신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어주는 잔치가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이런 불쌍한 이들의 보호자는 바로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 진정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요 또 하나의 살아 있는 예수님입니다.(이수철 신부)
11/7(화) 연중 제31주간 화요일, 제318일 기도
복음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네가 잔치를 베풀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불쌍한 이들의 보호자는 하느님입니다.
불쌍한 이들을 바다처럼 받아들이는 이들이 하느님을 체험한,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요, 살아 있는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랑의 신비가로 살게 하소서.
살아 있는 예수님으로 살게 하소서.
- 2023년 11월7일(화) 10시...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