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1월 17일 금요일[(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11. 17. 05:52

[매묵]2023년 11월 17일 금요일[(백)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엘리사벳 성녀는 1207년 헝가리에서 공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남부럽지 않게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참회와 고행의 생활을 하며 많은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그는 남편이 전쟁에서 사망하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들어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병원을 세워 직접 병자들을 돌보았다. 1231년 스물네 살에 선종한 그는 자선 사업의 수호성인이자, 재속 프란치스코회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입당송

마태 25,34.36.4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오너라. 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또는>
시편 112(111),9
그는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

본기도

하느님, 복된 엘리사벳에게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공경하게 하셨으니
그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한결같은 사랑으로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세상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13,1-9
1 하느님에 대한 무지가 그 안에 들어찬 사람들은 본디 모두 아둔하여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보면서도 존재하시는 분을 보지 못하고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그것을 만든 장인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2 오히려 불이나 바람이나 빠른 공기, 별들의 무리나 거친 물,
하늘의 빛물체들을 세상을 통치하는 신들로 여겼다.
3 그 아름다움을 보는 기쁨에서 그것들을 신으로 생각하였다면
그 주님께서는 얼마나 훌륭하신지 그들은 알아야 한다.
아름다움을 만드신 분께서 그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4 또 그것들의 힘과 작용에 감탄하였다면 바로 그것들을 보고
그것들을 만드신 분께서 얼마나 힘이 세신지 알아야 한다.
5 피조물의 웅대함과 아름다움으로 미루어 보아 그 창조자를 알 수 있다.
6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크게 탓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또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러는 가운데 빗나갔을지도 모른다.
7 그들은 그분의 업적을 줄곧 주의 깊게 탐구하다가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도 아름다워 그 겉모양에 정신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8 그러나 그들이라고 용서받을 수는 없다.
9 세상을 연구할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9(18),2-3.4-5ㄱㄴ(◎ 2ㄱ)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네.
○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말하고, 창공은 그분의 솜씨를 알리네. 낮은 낮에게 말을 건네고, 밤은 밤에게 앎을 전하네. ◎
○ 말도 없고 이야기도 없으며,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지만, 그 소리 온 누리에 퍼져 나가고, 그 말은 땅끝까지 번져 나가네. ◎

복음 환호송

루카 21,28 참조
◎ 알렐루야.
○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다.
◎ 알렐루야.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26-37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사람의 아들의 날에도 노아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28 또한 롯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짓고 하였는데,
29 롯이 소돔을 떠난 그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30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똑같을 것이다.
31 그날 옥상에 있는 이는 세간이 집 안에 있더라도 그것을 꺼내러 내려가지 말고,
마찬가지로 들에 있는 이도 뒤로 돌아서지 마라.
32 너희는 롯의 아내를 기억하여라.
33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3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날 밤에 두 사람이 한 침상에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5 두 여자가 함께 맷돌질을 하고 있으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36)·37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님, 어디에서 말입니까?”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들도 모여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성자의 무한하신 사랑의 업적을 기리며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복된 엘리사벳을 본받아
주님과 이웃을 더욱 열심히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3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또는>
요한 13,3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보고 너희가 내 제자임을 알게 되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비오니
복된 엘리사벳을 본받아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백성을 힘껏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또는>
주님,
구원의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어여삐 여기시어
저희가 복된 엘리사벳의 사랑을 본받아
그와 함께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초등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학년이 높아지면서 소유에 대한 집착도 커졌습니다. 짝꿍과 함께 쓰는 책상을 반으로 나누어 을 그었습니다. 줄을 넘어오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한심한 일인데 그때는 철이 없었습니다. 친구의 공책이 제 자리로 넘어왔습니다. 저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친구는 무시하였습니다. 저는 친구의 공책을 찢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교과서가 친구의 자리로 넘어갔습니다. 친구는 옮기라고 하면서 경고를 하였고, 저는 무시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친구가 저의 교과서를 찢었습니다. 사실 공책과 교과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소유에 대한 저와 친구의 욕심 때문에 벌어진 참사였습니다. 결국 저와 친구의 이런 행동은 선생님의 레이더에 포착되었고 친구와 저는 아주 엄한 체벌을 받았습니다. 친구와 저는 책상을 나누었던 줄을 깨끗하게 지우면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저의 공책이 넘어가도, 친구의 교과서가 넘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소유를 표시하던 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70년 전에 남과 북은 정전협정을 하였고 남과 북의 허리에는 휴전선이 생겼습니다. 서로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면서 넘어갈 수도 없고, 넘어올 수도 없는 휴전선은 70년 남과 북의 분단선이 되고 있습니다. 북한은 땅굴로 도발하였고, 남한은 북한에 총풍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휴전선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문제는 남과 북의 정치인들의 생각입니다. 휴전선을 자신들의 욕망과 정권을 채우려는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긴장과 갈등의 상징으로 남을 것입니다. 휴전선을 민족의 일치와 화해를 위한 도구로 삼는다면 휴전선은 평화와 생태의 관광지가 될 것입니다. 북한에 개성공단과 같은 경제협력 공단이 10개가 더 생긴다면, 남한의 철도가 북한의 철도와 연결되어서 남한의 수출품이 북한을 통해서 유럽으로 수출된다면 우리는 전 세계가 부러워하는 문화강국, 경제강국이 될 것입니다. 북한의 숙련된 노동과 남한의 세련된 기술이 만나면 마치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30, 60, 100배의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부디 남과 북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한과 북한의 국민들이 그런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치인들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자부하는,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목숨을 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들이 넘어올 수 없는 장벽을 만들었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의 생명줄인 물과 전기를 통제하였습니다. 팔레스타인들을 정당한 재판 없이 체포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으로 평화가 이루어지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들은 지하에 땅굴을 파 놓았습니다. 장벽 안에 갇힌 팔레스타인들은 분노하였습니다. 물과 전기를 공급받아야 하는 팔레스타인들은 가난과 굶주림에 지쳐갔습니다. 정당한 절차와 재판 없이 체포당하고, 죽어야 하는 이웃을 보았습니다. 분노와 굶주림 그리고 저항은 결국 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약 없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참된 평화와 화해는 높게 쌓은 장벽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평화와 자유는 제한된 물과 전기의 공급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참된 자유와 평화는 힘에 의한 억압과 탄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저는 초등학생 때 소유의 상징인 을 지우면서 친구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줄타기와 같은 긴장 속에서도 휴전선을 평화와 생태의 공원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답게 높은 장벽은 허물어 버리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새로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홍수가 닥쳐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제 목숨을 보존하려고 애쓰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살릴 것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연중 제32주간 금요일

지혜서 13,1-9     루카 17,26-37

 

내가 죽고 있다면 내 안에 생명이 있다

 

며칠 전에 젊은 나이에 암으로 선종하신 최영훈 루카 형제님과 스테파니아 반장님과의

카톡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루카 형제님이 신앙으로 거의 1년간 어떤 마음의 변화가 있었는지 읽으며

마음이 뭉클했습니다.

 

“저는 세례 받은 지 이제 일 년에서 이틀 모자란 초보신자입니다.

그렇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주님의 온전한 사랑을 느끼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지난 3월 29일 요양병원에서 저녁 예배를 드리던 중, 그동안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해야만 했던, 주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 위에 놓고,

마음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아버지하느님을 사랑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서 사랑했던 모든 것을 버린 날로,

아마 제가 태어난 이후 제일 많이 울었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저를 꾸짖고 책망하소서.

저의 그 얄팍하고 가벼운 신앙으로 아버지 이름을 욕되게 하였음을 눈물로 회개합니다.

 

육체에 찾아온 그깟 고통 앞에서, 너무나 쉽게 아버지를 원망하고,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고 싶었으며, 아버지를 저주하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아버지를 몰랐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으며,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수많은 은혜들, 그리고 제가 겪었던 그 많은 성령체험들을 원망했습니다.

 

제게 그러한 은총을 내리신 뜻을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새끼손톱의 1/6보다도 작은 진통제 앞에서 저는 한없이 약하고

미미한 존재임을 뼛속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저의 주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옳은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옳은 일임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제게 주신 이 고통에는, 저는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옳은 뜻이 있을 것임을 믿습니다.

아버지, 눈물로서 반성하고 회개하오니, 저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오직 아버지께서만이 저의 생사여탈을 하실 수 있는 주권자이시며 권능자이심을

믿고 고백하오니, 아버지의 부족하고 미천한 아들 루카를 불쌍히 여기시어,

제게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언제나 살아계시고 제 안에 계시며 또한 저를 지켜주시는 주 하느님아버지.

모든 감사와 영광을 홀로 받으소서.

지금 이순간의 삶을 제게 허락해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소돔 위에 유황불이 쏟아져 내릴 때처럼

그렇게 세상이 멸망하리라고 하십니다.

세상이 아니라 우리 각자도 그렇게 반드시 주님께 가게 되어있습니다.

 

소돔 땅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살고 있었지만 소돔인들은 그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롯과 아내와 두 딸이 소돔 땅을 탈출하자 소돔이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멸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품고 있어야 하는 롯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한 분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품게 되자 그의 삶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죽음까지도 감사할 수 있게 받아들였습니다.

더 겸손해지고 더 감사하게 된다면 그 사람 안에 반드시 하느님께서 계십니다.

그분을 몰아내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루카 형제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또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2남 2녀의 막내로 온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인지 제게는 어떤 마음의 상처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년 1월, 주님께서는 제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져 있던 상처를

한순간에 제 눈앞에 펼쳐보이게 하셨습니다.

 

정말 괴수와도 같은 울음과 눈물이 한동안 흘렀는데,

저도 모르게 제 입에서는 주님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라는 기도가

왜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제게는 그들에 대한 알 수 없는 미움이 사라지고,

그들에 대한 고마움과, 그들에 대한 미안함만이 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살아계시며, 항상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

그리고 제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을 알게 해준 소중한 기억이자 은혜였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제게 허락하신 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소서. 아멘!”

 

우리 안에 롯과 같은 분을 반드시 모시고 있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다면 나는 죽고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음인 내가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하느님의 기쁨이 샘솟는 것을 보면 절대 나를 그렇게 만드는 롯을

내어 쫓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말씀이요, 뒷부분은 ‘재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것이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것입니다.

전자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라면, 후자는 '아직 아니' 온 하느님 나라입니다.

전자가 하느님 나라의 ‘내면적 도래’라면, 후자는 하느님 나라의 ‘외면적 현현’에 해당하며, 전자가 ‘구속사’라면, 후자는 ‘종말론’에 해당합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루가 17,20)는 질문을 받으시고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또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 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0-21)

이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나라의 때와 장소와 성격'에 대한 대전환이요 혁명적인 선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지상적이고 정치적, 민족적인 메시아 왕국으로 이해하고 있었고, 그래서 ‘하느님 나라’가 세워질 때, 자신들을 압제하는 로마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정치적,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백성으로 살게 되리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물리적인 의미로서의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주권과 통치가 실현되면 어디에서나 이루어지는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당신의 오심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임재하는 나라로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때’는 당신과 함께 이미 왔고, 하늘 나라라는 '장소'는 공간적이거나 심리적인 내면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에'라는 역사적이면서도 동시에 초월적인 하느님의 활동 공간이며, 하느님 나라의 '성격'은 민족적, 정치적이 아니라 당신의 활동과 통치와 주권이 미치는 곳이면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와 계신 당신과 함께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지금 여기’에 ‘우리들 가운데’ ‘와’ 있는 나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림'이 언제 어떻게 올 것인지, 그리고 그 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날에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루카 17,24-25)

이는 '예수님의 재림'이 번개가 번쩍할 때처럼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동시에 즉각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동시에 범우주적으로 일어날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찾아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토피아’(장소가 없는)가 아니라 분명한 장소, 곧 하느님의 백성인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진 '우리들 안'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여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곧 ‘하느님의 다스림 안’에 머무는 일이요, 지금 ‘우리 가운데’ 와계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지혜 예찬(禮讚), 지혜를 사랑합시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어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대가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듯 삶을, 이웃을, 진리를, 지혜를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이 모두에 앞서 주님을 한결같이, 열렬히,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했습니다. 탓할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내 사랑 부족일 것입니다. 잠자리 들기전 끝기도때 간절한 주님 사랑 고백의 찬미가 둘째 연은 늘 감동입니다.

 

“우리는 잠을자도 주님과함께, 꿈에도 당신만을 뵙게하소서

 언제나 한결같이 당신영광을, 새는날 밝아올제 찬미하리다”

 

얼마나 절절한 주님 사랑의 고백인지요! 오늘은 서울 베네딕도 수녀원의 주보성녀이며 중세의 신비가이자 베네딕도회 수도자 였던 성녀 대 젤투르다 동정 기념일입니다. 성녀의 신심의 특징은 예수성심에 대한 강렬한 사랑 체험과 헌신입니다. 그래서 성녀는 영성사에서 ‘예수성심의 신학자’라고 불렸고, 예수성심 공경을 시작한 선구자 혹은 사도로 여겨집니다.

 

성녀는 중세의 신비신학과 신비주의에 중요한 역할과 기여를 했고, 특히 13세기 독일 교회 안에서 가장 위대한 신비가로 여겨집니다. 성녀의 풍부한 신비체험으로 인해 ‘독일의 테레사’로 불리기도 합니다. 1288년 심한 병을 얻게 된 성녀 젤투르다는 합병증으로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병상에서 누워있던 성녀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수녀원의 시간전례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헬프타 수도원에서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통받던 성녀 젤투르다는 1302년 11월16일 바로 오늘 거룩한 임종어 “아! 신랑이 오신다.”라고 외치면서 세상을 떠납니다. 이때 성녀의 나이는 만46세 였고, 공식적으로 성인품에 올려지지 않았지만, 1606년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전례의 기도와 독서, 찬가에서 성녀를 공경할 수 있다는 공인을 받습니다. 

 

이후 성녀의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로 확대되었고, 1738년 교황 클렌멘스 12세는 다른 젤투르다 성녀와 구별하고 성녀의 영적인 깊이를 재평가하면서 ‘위대한(the Great)’이라는 칭호를 부여합니다. 성녀의 다음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한 이 기도는 전통적으로 주님께서 성녀에게 주신 약속에 따라 이 기도를 바칠 때 마다 많은 영혼들이 연옥을 벗어난다고 알려진 기도입니다. 11월 위령성월에 바치기에 적절한 기도입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의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모든 곳의 죄인들을 위하여, 내 가족과 가정 안의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서 드리는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님의 가장 값진 피를 봉헌하나이다. 아멘.”

 

성인들의 위대한 특징은 아마도 지혜와 사랑일 것입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사랑의 깊이를 그대로 반영하는 성인들입니다. 참으로 열렬히, 항구히 지혜를 사랑한다면 “진리의 연인”이라 칭했던 성 아오스팅처럼, “지혜의 연인”이 되어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지혜를 온마음, 온정신, 온힘으로 사랑할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합시다. 지체없이 오늘 강론 제목으로 택했습니다. 지혜를 사랑할수록 오늘 기념하는 성녀 대 젤투르다처럼 날로 지혜를 알게되고 계속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을 닮아 갈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지혜서는 그대로 지혜에 대한 찬미이자 예찬입니다. 지혜서가 아니곤 어디서 이런 귀한 내용을 만날 수 있겠는지요! 생략하기가 너무 아까워 공부하는 마음으로 전문을 인용합니다.

 

“지혜 안에 있는 정신은 명석하고 거룩하며, 유일하고 다양하고 섬세하며, 민첩하고 명료하고 청절하며, 분명하고 손상될 수 없으며 선을 사랑하고 예리하며, 자유롭고 자비롭고 인자하며, 항구하고 확고하고 평온하며, 전능하고 모든 것을 살핀다. 또 명석하고 깨끗하며 아주 섬세한 정신들을 모두 통찰한다.

 

지혜는 하느님의 권능의 숨결이고, 전능하신 분의 영광의 순전한 발산이어서 어떠한 오점도 그 안으로 기어들지 못한다. 지혜는 영원한 빛의 광채이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활동의 티없는 거울이며, 하느님의 선하심의 모상이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지혜는 해보다 아름답고 어떠한 별자리보다 빼어나며 빛과 견주어 보아도 그보다 밝음을 알 수 있다. 밤은 빛을 밀어내지만 악은 지혜를 이겨내지 못한다. 지혜는 세상 끝에서 끝까지 힘차게 퍼져가며 만물을 훌륭히 통솔한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대신 태초에 지혜가 있었다 말하고 싶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은 무지가 아니라 이런 지혜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바로 이런 지혜자체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이 거룩한 미사시간입니다. 이런 지혜야 말로 하느님의 모두이자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며 그대로 주님의 현존인 성령이요 사랑이요 진리이기도 합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바로 이 지혜뿐입니다. 바로 이 지혜의 육화이자 결정체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은 그대로 날로 지혜로워지는 지혜의 여정이며 성인들이 밟았던 여정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의 지혜이신 예수님께서는 정주의 지혜에 대한 참 유익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 그러니 “보라, 여기에 있다.” 또는 “저기에 있다.”하고 사람들이 말하지도 않을 것이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에 있다.’

 

사막교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 함께 계신 어디나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로 여기서 정주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결코 부화뇌동, 경거망동하여 거짓 선동에 휘둘려 뿌리없는 사람들처럼 이리저리 떠돌지 말고 오늘 지금 여기 이 삶의 자리에 정주하며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는 주님의 다음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 것이다.”

 

그러니 언제 주님께서 임재하실지 모르니 오늘 지금 여기 정주의 자리에서 지혜롭게 깨어 살라는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를 살라고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수수께끼 같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

 

빛과 그늘의 공존입니다. 부활의 영광에 앞선 십자가의 고난과 배척입니다. 현세에서 주님과 함께 겪는 고난과 배척을 부활 영광의 희망으로 잘 견뎌내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파스카의 은총이, 파스카의 기쁨이 능히 이런 어려움을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정주의 지혜로 빛나는 삶을 살게 하시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지혜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아멘.


11/17(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것을 아는 힘이 있으면서 그들은 어찌하여 그것들의 주님을 더 일찍 찾아내지 못하였는가?” 저는 초등학생 때 소유의 상징인 을 지우면서 친구와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외줄타기와 같은 긴장 속에서도 휴전선을 평화와 생태의 공원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도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답게 높은 장벽은 허물어 버리고, 자유롭게 왕래하며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면 좋겠습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새로운 노아의 방주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면 좋겠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주님을 내 안에 모십시다.

그러면 미움이 죽고 용서가 살며, 절망이 죽고 희망이 살며,

화가 죽고 겸손과 감사가 살아납니다.(전삼용 신부)

 

3.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21)

 

주님!

저희를 비추시어, 저희들 안에 이루신 당신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를 다스리시어, ‘지금 여기’에 와 있는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저희를 변형하시어, 번개가 치면 단박에 천지가 환해지듯이,

저희의 온 정신과 영혼, 삶과 방식이 바뀌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사람들이 너희에게 ‘보라, 저기에 계시다.’ 또는 ‘보라, 여기에 계시다.’ 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나서지도 말고 따라가지도 마라. 번개가 치면 하늘 이쪽 끝에서 하늘 저쪽 끝까지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올 것이다.”(이수철 신부)

 

11/17(금) 헝가리의 성녀 엘리사벳 수도자 기념일, 제328일 기도 

 

복음 <그날에 사람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참된 평화와 화해를 이루게 하소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함께 새로운 노아의 방주’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소서.

 

- 2023년 11월17일(금) 5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