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3년 12월 17일 주일[(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3. 12. 17. 21:19

[매묵]2023년 12월 17일 주일[(자)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금을 쌓아 두는 것보다 자선을 베푸는 것이 낫다”(토빗 12,8). 한국 교회는 1984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3주일을 ‘자선 주일’로 지내고 있다. 자선은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주신 성체성사의 나눔의 신비를 체험하게 하는 신앙 행위이다. 오늘 교회는 가난하고 병든 이들, 소외된 이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특별 헌금으로 자선을 실천한다. 교회는 자선이라는 사랑의 구체적 실천으로 다시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기다릴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이 하느님 나라의 평화와 영광을 누리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어, 주님 은총으로 우리에게 깨끗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주시고, 구세주께서 오시는 길을 정성껏 준비하게 하여 주시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필리 4,4.5 참조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 백성이 주님의 성탄을 간절히 기다리오니
저희가 구원의 큰 기쁨을 누리며
즐거운 마음으로 이 축제를 맞이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61,1-2ㄱ.10-11
1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2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루카 1,46ㄴ-48.49-50.53-54(◎ 이사 61,10ㄱ 참조)
◎ 내 영혼이 내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네.
○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고, 내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내 마음 기뻐 뛰노네. 그분이 비천한 당신 종을 굽어보셨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복되다 하리라. ◎
○ 전능하신 분이 나에게 큰일을 하셨으니,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다. 그분 자비는 세세 대대로 그분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미치리라. ◎
○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고, 부유한 자를 빈손으로 돌려보내셨네.
당신 자비를 기억하시어 당신 종 이스라엘을 돌보셨네. ◎

제2독서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1서 말씀입니다.5,16-24
형제 여러분, 16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17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18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19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20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21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22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
23 평화의 하느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완전히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24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이사 61,1 참조(루카 4,18 인용)
◎ 알렐루야.
○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
◎ 알렐루야.

복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8.19-28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19 요한의 증언은 이러하다.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사제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을 때, 20 요한은 서슴지 않고 고백하였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하고 고백한 것이다.
21 그들이 “그러면 누구란 말이오? 엘리야요?” 하고 묻자,
요한은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고 물어도 다시 “아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2 그래서 그들이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우리를 보낸 이들에게 우리가 대답을 해야 하오.
당신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오?”
23 요한이 말하였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24 그들은 바리사이들이 보낸 사람들이었다. 25 이들이 요한에게 물었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26 그러자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27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28 이는 요한이 세례를 주던 요르단 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목자이신 주님, 교회에서 봉사하는 많은 이를 보살펴 주시니, 주님 말씀과 가르침을 전하는 교리 교사들이 성령의 권능 안에서 담대하고 창의적으로 임무를 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세상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공동체들을 굽어살피시어,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충실히 하며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게 하소서.?

3.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세상 모든 이를 굽어살피시어,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현실 앞에서 가난 때문에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시며, 저희가 연대의 힘으로 공동선을 실현할 수 있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성탄의 기쁜 소식을 기다리는 모든 가정에 강복하시어, 여러 사정으로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이 기도 안에서 하나 되어 사랑을 느끼고 가족의 소중함을 잃지 않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예물을 정성껏 봉헌하며 비오니
주님께서 제정하신 거룩한 신비의 거행으로
저희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대림 감사송 1 : 그리스도의 두 차례 오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비천한 인간으로 처음 오실 때에는
구약에 마련된 임무를 완수하시고
저희에게 영원한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리고 빛나는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에는
저희에게 반드시 상급을 주실 것이니
저희는 지금 깨어 그 약속을 기다리고 있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이사 35,4 참조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힘을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우리 하느님이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리라.

영성체 후 묵상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 평화의 하느님께서 …… 여러분의 영과 혼과 몸을 온전하고 흠 없이 지켜 주시기를 빕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께서는 성실하신 분이시니, 꼭 그렇게 하여 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바오로 사도는 권고하고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주님께서는 인자하시니
이 성사의 힘으로 저희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시어
다가오는 성탄 축제를 준비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자선주일입니다.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대림 제3주일(자선주일)

 

- 미완성으로 태어나는 인간

대림은 구세주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무엇을 준비하며 기다려야 할까요? 그리스도께서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구세주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면 그분이 오셔도 무시하거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우리에게 그분은 왜 필요할까요? 그분 없이는 완성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당신은 누구요?”(요한 1,19)라고 묻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말하기 이전에 자기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며 모세에게 예언된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은 메시아께 가는 ‘길’과 같다고 합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요한 1,23) 
    그러나 요한의 정체를 알려고 온 이들은 ‘길’이 어떤 의미인지 몰라 이렇게 따집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요한 1,26-27)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이르는 분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요한을 감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했다고 놀라지 말기를 바랍니다. 요한은 그리스도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그분께 가는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여자로 완성되어 태어난 것일까요? 그러나 여자는 자녀를 낳고 키울 때 완성됩니다. 그래야 모성애도 알고 자기 몸에서 아기를 먹일 살과 피와 같은 젖도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남편이 없었다면 아이가 태어날 수 없었음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하지 못하는 아내 밑에서 자란 아이는 엄마도 공경할 줄 모르게 성장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자와 남자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내는 주님께 순종 하듯이 남편에게 순종 해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고 그 몸의 구원자이신 것과 같습니다.”(에페 5,22-23) 
여자가 남자라는 구원자를 만나야 여자로서 완성되는 것처럼, 사람도 하느님을 만나야 완성됩니다. 여자가 남자를 그리워하듯 인간은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반대로 남자가 여자를 그리워하여 자기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준비가 되어있듯,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신을 찾으면 됩니다. 우리의 양식이 되기 위해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은 신은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라틴어 단어 겸손(humilitas)은 ‘흙’(humus)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흙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위에서 자라는 나무들은 자기 자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기만의 열매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비가 오고 태양이 비추니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무에게 “나는 하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라고 말할 때 흙이 완성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첫째 날 ‘빛’이 창조 되었습니다. 아기에게 빛이 들어오면 부모를 찾게 됩니다. 처음엔 자기를 바라보는 부모를 구별하지 못하다가 점차 그와 자신을 구별하게 됩니다. 둘째 날 궁창이 창조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같은 물인 줄 알았지만, 나는 땅의 물이고 하늘의 물이 존재하는 것을 압니다. 셋째 날은 자기를 하늘의 물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는 물을 바다로 밀어내고 마른 땅이 나옵니다. 그러고는 하늘에서 비를 받아 땅에서 풀과 나무들이 자라게 합니다. 그러면 땅은 이제 풀과 나무가 하늘을 알아가게 만드는 ‘길’이 됩니다. 이때 비로소 땅이 완성됩니다. 
    엘리사벳을 방문하시는 성모 마리아도 마찬가지이십니다. 그분은 하느님을 잉태한 땅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길이 되어주셨습니다. 그러고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라고 노래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하면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자기를 완성하여 당신께로 이끄는 길이 되려는 땅에게 주님께서는 참 하늘이 되어주십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대림제3주일(자선주일)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5년에 개봉되었던 영화이니 어느덧 20년이 되어갑니다. 영화는 옴니버스 형식으로 4가지 이야기를 전해주었습니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을 이어가는 젊은 부부, 경제적인 여유는 있지만 애정이 없는 부부,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드는 아들, 카페를 운영하는 여인과 노년의 사장님의 우정을 잔잔하게 전해 주었습니다. 영화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을 오르려는 우리시대의 욕망과 허상을 비웃듯이 사랑, 나눔, 우정이라는 꽃마차를 타고 가려는 따뜻한 이웃의 이야기를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보는 내내 가슴이 뭉클하였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영화 속의 대사가 있습니다. “초라한 옷이 창피한 것이 아니다. 초라한 생각이 창피한 것이다. 이 세상에 너로 인해 행복한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으면 놔줄게.” 2000년 전에 있었던 주님의 성탄에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을 맞았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멀리 동방에서 예물을 준비하고 주님을 찾아왔던 동방박사들이 있습니다. 천사의 인도로 들판을 지나 이제 태어난 주님께 경배 드렸던 목동들이 있습니다. 이제 성탄이 일주일 남았습니다. 아름답고, 따뜻한 마음으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로 성탄을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평화신문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시편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윤영주님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조상의 묏자리를 잘못 써서 그렇다. 사주가 나빠서 그렇다. 등등 치료 방법도 거의 없고, 질병의 원인도 잘 알지 못했던 근동 지방의 고대인들에게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 자식이 이런 아픔을 겪어야 하나라는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아픔이 마음과 영혼까지 좀먹어 갑니다. 그 때문에 치료는 죄의 사함을 받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들은 질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았기에 현대인들보다 더 자주 성찰하고 참회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더 가까웠고, 주님께 더 많이 의지하였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늘렸고, 질병의 원인도 알고 있기에 주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가 적어진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의지적으로라도 더 자주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있기를 청합니다.” 영성의 안부를 묻는 김용은 수녀님의 이야기도 나누고 싶습니다. “언젠가 수녀원에서 마당을 정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몇몇 나무를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때 유치원 교사인 한 수녀님은 어린이들과 함께 나무와의 고별식을 거행했습니다. 아이들은 한 명씩 나와 나무에게 이별 인사를 하면서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고마웠고, 미안했고, 수고했다는 아이들의 언어로 이별 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의식을 통해서 나무가 세상의 일부이고, 자신들도 그 나무와 연결된 세상에서 살고 있으며 무엇보다 초월자인 하느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나무나 사물은 함부로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자신과 모든 사물은 연결되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터득했습니다.” 이렇게 가톨릭평화신문은 가슴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나에게 편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외로운 이들을 위로하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주는 것이 신앙인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의 길을 준비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난하고, 비록 그 길에 장애물이 있어도 넘어가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겸손하게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도 좋아하셨고, 한동안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아 라라 라라라 라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216. 대림 제2주간 토요일.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타볼산에서의 거룩한 변모 후 산에서 내려올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까?”(마태 17,10)
 
엘리야의 재림에 대해서는 이미 <말라키서>(3,1,23)에서는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에게 내린 율법과 규정을 기억하라는 말(3,22)함께 언급됩니다. 그러니 모세와 엘리야와 예수님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여기에는 엘리야아 오지 않았는데 어뗗게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아일 수 있느냐는 율법학자들의 주장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과연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바로잡을 것이다.”(마태 17,11)라고 엘리야의 사명도 밝히시면서 말씀하십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마태 17,12)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알아보지 못했음을 말씀하시면서, 마찬가지로 이미 와 있는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한 그들은 이미 와 있는 메시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말슴하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요한 1,2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듯이, 이제 당신께서도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십니다. 결국,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함을 말해주며, 엘리아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암시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엘리야도 메시아도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가운데 와 계신 분을 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는 영적인 눈을 떠야 할 일입니다. 특히 성탄을 준비하면서 ‘먼저’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바로잡는 엘리야의 인도를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만약, 오늘 우리가 완고함과 비뚤어진 마음과 악의로 형제들을 거부하고 배척하면, 그분은 오늘 우리에게 그렇게 제멋대로 다루어지고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은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신 그분을 버림받지 않고, 박해받지 않도록 해 드려야 할 일입니다. 더 이상은 그분을 제멋대로 다루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겪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에서, 있기 마련인 고난에 당황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고 있음에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도 여러분은 기뻐하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4,13).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대림 제2주간 토요일

 

-우리가 살아있는 또 하나의 엘리야요 세례자 요한이다-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이 좋습니다. 위로와 평화를 줍니다. 새벽에 일어나 카톡을 열으니 김남조 시인의 대표작인 “겨울바다”라는 시가 도착해 있었습니다. 지난 10월10일에 96세로 선종한, 마리아 막달레나라는 세례명을 지닌 유명한 가톨릭의 여류시인입니다. 마지막 시집은 93세때 냈다하니 참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겨울바다”시중 마음에 와닿은 대목이었습니다.

 

“나를 가르치는 건

 언제나 시간

 끄덕이며 끄덕이며 겨울바다에 섰었네

 

 남은 날은 적지만

 기도를 끝낸 다음 더욱 뜨거운

 기도의 문이 열리는

 그런 영혼을 갖게 하소서”

 

그대로 뜨거운 기도의 시인의 기도시임을 깨닫게 합니다. 겨울바다에 서듯, 새벽에 일어나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면 맨먼저 바라보는 겨울하늘입니다. 이어 떠오르는 예전에 써놨던 두편의 자작 고백시입니다.

 

“산처럼

 머물러 살면

 푸른하늘

 흰구를

 빛나는 별들

 아름다운 하느님

 배경이 되어 주신다”-1997.8.11

 

“정주”라는 시에 이어 언젠가 인용했던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다음 고백시입니다. 물론 여기서 당신이 가리키는 바는 평생 연모戀慕의 대상인 주님입니다. 새벽마다 기상하여 자비의 집 숙소문을 열었을 때,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 오는 겨울하늘에 저절로 떠오르는 “당신이 그리울 때”라는 자작시입니다.  

 

“당신이 그리울 때, 

 당신이 보고 싶을 때

 눈들어 하늘을 본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푸른 하늘, 흰구름, 빛나는 별들

 

 한눈 가득 들어오는 

 가슴 가득 안겨오는

 그리운 당신, 보고싶은 당신”-1998.11.22

 

이런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중에 있습니다. 예수님 역시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순례여정중에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함께 함을 봅니다. 결코 예수님은 혼자가 아닌 무수한 도반들과 함께 함을 봅니다. 말그대로 “더불어(together)”의 여정이요 이점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그 앞에는 높은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이 일어납니다. 세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동행했으며, 영광스러운 변모시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세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도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눴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영적지평은 이렇듯 영원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으며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과 평생 도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문득 작년에 선종하신 전임 교황인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고백도 생각납니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자신의 영적스승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성 보나벤투라는 고백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신의 흠모하고 존경하는 성인들을 스승이자 도반으로 삼아 깊은 친교를 나눴던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분명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에 대해 깊은 애정을 지니셨을 것입니다. 오늘 집회서에서 엘리야의 활약은 얼마나 눈부신지요! 한마디로 하느님과 완전 사랑의 일치를 이룬 삶이었기에 이런 자유자재한 기적이요, 에녹과 모세에 이은 승천입니다. 오늘 제1독서 집회서 끝부분은 공동번역이 더 실감이 납니다. 

 

“당신을 본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하며, 당신과 사랑으로 맺어진 사람을 얼마나 행복합니까? 우리 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집회48,11)

 

이 대목은 30년전 어느 수녀님의 편지글에 순진하게도 당신을 저로 착각하고 많이 행복해 했던 내용인데 후에야 집회서의 말씀임을 알고 실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바로 이런 당신은 엘리야는 물론 궁극에는 우리 파스카의 예수님을 가리키지만 이런 대상에 해당된다면 참 행복할 것입니다. 

 

좌우간 구약에서 신약으로의 면면한 전통은 엘리야의 재림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집회서와 마지막 성서, 말라기서 마지막 구절, 그리고 루가 복음에 연이어 나오는 공통적 내용입니다.

 

“당신은 정해진 때를 대비하여, 주님의 분노가 터지기 전에 그것을 진정시키고,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되돌리며, 야곱의 지파들을 재건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집회48,10)

 

똑같은 내용이 구약의 마지막권 말라기서 맨끝에도 나옵니다.

 

“보라, 주님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전에 내가 너희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리라. 그가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자녀의 마음을 부모에게 돌리리라. 그래야 내가 와서 이땅을 파멸로 내려치지 않으리라.”(말라3,23-24)

 

이어 루카복음 1장 "세례자 요한 출생 예고(1,5-24)" 에도 나옵니다.

“그는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아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루카1,17)

 

새삼 엘리야, 세례자 요한을 비롯한 모든 성인들이 죽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 안에 다 살아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이런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주님은 세례자 요한이 재림한 엘리야요 이를 알아보지 못한 무지한 이들에게 고난과 죽음을, 또 예수님 자신도 당신을 모르는 무지한 자들에게 고난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얼마나 내적으로 엘리야, 세례자 요한과, 또 우리와 운명공동체처럼 깊이 결속되어 있는지 깨닫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 그처럼 사람의 아들도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신후 부활하시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역사는 반복된다 하지만 우리는 악순환의 반복을 끊고, 이 회개와 은총의 대림시기 또 하나의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 되어 이분들이 못다한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들을 해야 하겠습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5,9)

 

극단의 분열과 갈등의 전쟁의 시대에 화해와 일치, 평화의 일꾼이 되는 것보다 중대한 사명은 없으며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십니다. 이 은총의 대림시기, 주님 평화의 일꾼이 되어 사는 것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끝으로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12/17(일) 대림 제2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그분께 가는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전삼용 신부)

 

2. 오늘은 대림 제3주일이며 자선 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해야 하는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신앙인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조재형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마태 17,12)
 
주님!
제 눈이 가려져 엘리야를 알아보지 못함은
빛을 피하고 어둠을 좋아한 어리석음이었습니다.
제 가슴이 굳어져 당신을 맞아들이지 못함은
진리보다 제 자신으로 꽉 채운 완고함과 오만이었습니다.
빛이요 진리이신 주님! 저를 밝히소서.
제 어리석음과 완고함을 걷어내소서. 오만불손함을 태우소서.
제가 밝아져, 더 이상은 당신을 제멋대로 다루지 않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오늘 복음은 엘리야의 재림에 관한 내용으로 그 앞에는 높은 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사건이 일어납니다. 세 애제자들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동행했으며, 영광스러운 변모시에는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합니다. 세 제자들은 물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세와 엘리야와도 깊은 영적 친교를 나눴음을 봅니다. 예수님의 영적지평은 이렇듯 영원에 열려 있음을 봅니다. 예수님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으며 우리 또한 이런 예수님과 평생 도반이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이수철 신부)


 

12/17(일) 대림 제2주일, 제358기도일

 

복음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예수님을 만나서...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게 하소서.

그리스도께서 완성하려는 인간의 모습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을 만나서...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하소서

모든 일에 감사하게 하소서.

  • 2023년 12월17일(일) 21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