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3년 12월 25일 월요일[(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3년 12월 25일 월요일[(백) 주님 성탄 대축일 - 낮 미사]/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라 불리리라.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2,7-10
7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 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
8 들어 보아라. 너의 파수꾼들이 목소리를 높인다.
다 함께 환성을 올린다.
주님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심을 그들은 직접 눈으로 본다.
9 예루살렘의 폐허들아, 다 함께 기뻐하며 환성을 올려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예루살렘을 구원하셨다.
10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주님은 당신 구원을 알리셨네. 민족들의 눈앞에 당신 정의를 드러내셨네. 이스라엘 집안을 위하여 당신 자애와 진실을 기억하셨네. ◎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하여라, 찬미 노래 불러라. ◎
○ 비파 타며 주님께 찬미 노래 불러라. 비파에 가락 맞춰 노래 불러라. 쇠 나팔 뿔 나팔 소리에 맞춰,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환성 올려라. ◎
제2독서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1,1-6
1 하느님께서 예전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지만,
2 이 마지막 때에는 아드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3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4 그분께서는 천사들보다 뛰어난 이름을 상속받으시어,
그만큼 그들보다 위대하게 되셨습니다.
5 하느님께서 천사들 가운데 그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또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6 또 맏아드님을 저세상에 데리고 들어가실 때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천사들은 모두 그에게 경배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거룩한 날이 우리에게 밝았네. 민족들아, 어서 와 주님을 경배하여라. 오늘 큰 빛이 땅 위에 내린다.
◎ 알렐루야.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또는>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5.9-14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진리의 샘이신 주님, 구세주를 보내시어 저희를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니, 교회가 주님 사랑 안에 머무르며 세상 모든 이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소서.
2. 공직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공직에 있는 이들을 굽어살피시어, 국가의 역할과 시민의 권리를 올바로 깨닫고, 맡은 일 안에서 합리적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3. 새 영세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은총의 주님,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인 새 영세자들을 돌보아 주시어, 그들이 굳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본받고, 그 믿음을 삶에서 실천하게 하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세상 속에서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저희를 굽어살피시어, 어려움에 놓여 방황할 때 주님의 굳센 팔로 잡아 주시고,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소서.
예물기도
거룩한 예배로 바치는 이 예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주님 마음에 드는 완전한 화해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 태어나신 구세주께서 저희에게 하느님의 생명을 주셨으니
저희가 불사불멸의 은혜도 받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
오늘의 묵상
1. 전삼용 요셉신부 강론
주님 성탄 대축일
-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주님 성탄 대축일
주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가장 아름답게 드러난 모습이 바로 오늘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지만 가장 완벽하신 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도 ‘예수성탄’을 축하드리면서 저처럼 축하의 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요? 성탄절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캐럴’이 있습니다. ‘징글벨, 루돌프 사슴 코, 울면 안 돼, 거룩한 밤 고요한 밤, 경사롭다.’와 같은 노래가 있습니다. 저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면서 책을 읽었습니다. ‘구유와 트리’가 있습니다. 신학생 때 저는 매년 구유와 트리를 만들었습니다. 1년 동안 잘 보관했던 구유 세트를 꺼내서 장식했습니다. 청계천 시장에 가서 ‘은하수 전구’를 사왔습니다. 별도 달고, 구슬도 달고, 빤짝이도 걸고, 전구를 연결하였습니다. 저와 동창 신학생이 기본 틀을 만들면 수녀님이 예쁘게 다듬었습니다. ‘성탄카드’가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일학교 학생들이 같이 만들어서 팔기도 했고, 사기도 했습니다. 요즘은 카드를 쓸 일이 많지 않습니다. 주로 카톡으로 보내기 때문입니다. ‘구세군 자선냄비’도 있습니다. 제가 살던 명동 거리에는 구세군 봉사자들이 종을 울리면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탄을 축하하는 진정한 의미는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드리며, 우리 주변의 가난한 이, 헐벗은 이, 병든 이, 외로운 이를 생각하고, 그분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성탄절에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습니다. 제가 학생 때는 성당에서 ‘성탄 예술제’를 했습니다. 초등부 학생들은 율동과 노래를 준비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은 멋진 노래와 춤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연극의 제목은 ‘넷째 왕의 전설’이었습니다. 성탄절의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연극입니다. 40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납니다. 연극의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동방에서 별을 보고 예수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서 출발한 박사들은 원래 4명이었습니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 조재형’입니다. 멜키올은 황금, 발타살은 유향, 가스팔은 몰약, 조재형은 다이아몬드를 준비했습니다. 조재형은 길을 가다가 굶주린 엄마와 아이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었습니다. 이번에는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는 남자를 만났습니다. 여관으로 데려갔고, 여관 주인에게 다이아몬드 하나를 주고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베들레헴 근처에 왔을 때입니다. 돈이 없어서 팔려가는 노예를 만났습니다. 불쌍한 마음에 마지막 남은 다이아몬드를 주고 노예에게 자유를 주었습니다. 예수님께 드릴 선물을 모두 써버린 조재형은 결국 경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30년이 지났고, 노인이 된 조재형은 예루살렘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드렸습니다. 30년 전에 경배를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조재형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30년 전에 이미 너에게 선물을 받았단다. 굶주린 엄마와 아이에게 준 것이, 강도당한 남자에게 준 것이, 팔려가던 노예에게 준 것이 바로 나에게 준 것이란다.’ 조재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넷째왕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갔습니다.”
연극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지는 기억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한 남자가 쓰러져있었습니다. 술이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천호동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봉천동에 살았습니다. 동창 신학생과 함께 그 남자를 택시에 태워서 천호동 집까지 모셔다 드렸습니다. 집에는 남자의 아내와 딸이 있었습니다. 남자의 아내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제가 이렇게 사제로 32년을 지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그때 했던 작은 선행 때문인 것 같습니다. 성탄을 맞이하여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가 이기심이나 소유욕에 지배되지 않고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며 어떠한 생명도 소외되거나 경시되지 않는 건강하고 바람직한 사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31224. 대림 제4주일.
루가 1, 26-38(대림 4 주일); 긴 강론- 해군중앙성당 대림특강
[대림환]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이 하얗게 타오르는 네 번째 촛불이 켜졌습니다. 양광모 시인의 “기다림”이란 시가 떠오릅니다.
누군가 /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눈부신 일인가. //
아침이 기다리는 태양처럼 / 밤이 기다리는 별처럼 /
그에게 한 줄기 밝은 빛이 될 수 있다는 건 / 얼마나 가슴 따뜻한 일인가. //
그리하여 / 그날을 손꼽으며 내가 그를 기다리는 건 / 또 얼마나 가슴 뜨거운 일인가 //
태양을 기다리는 아침처럼 / 별을 기다리는 밤처럼 /
그를 위해 아름다운 배경이 될 수 있다는 건 / 또 얼마나 맑은 눈물 같은 일인가. //
우리는 / 태어나고 기다리고 죽나니 /
살아서 가장 햇살 같은 날은 /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촛불처럼 / 기다리는 날이라네. //
기다림의 끝자락입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와 계십니다. 바로 오늘 밤입니다.
<제1독서>에서, 나탄 예언자는 다윗 왕에게 하느님의 약속을 선포합니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2사무 7,16)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오랜 세월 감추어 두었던 신비의 계시”(로마 16,15)를 선포합니다.
“이제 모습을 드러낸 이신비가 모든 민족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끌도록,
... 알려지게 되었습니다.”(로마 16,26)
<복음>에서는 <제1독서>에서 예고되었고, <제2독서>에서 증언된 그분이 마리아에게서 잉태된 경위를 전해줍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합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천사는 “기뻐하여라.”고 선포하고, 그 이유도 밝혀줍니다. 그것은 그녀가 “은총이 가득한 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총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 말에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9). 그리고 천사는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루카 1,31) 말합니다. 그러자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루카 1,34) 라고 말합니다. 이에, 천사는 “성령께서 내려오시고 ... 너를 덮을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고 말하고, 마리아는 이렇게 ‘응답’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시간에는 이 ‘마리아의 응답’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의 응답’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응답’이 될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1. <맨 먼저>, 우리는 ‘말씀 앞에 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어디에서 경청이 발생하는지?’, 곧 ‘말씀의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응답’의 ‘첫 마디’ 안에 있습니다. 곧 “보십시오.” 라는 첫 마디는 바로 ‘그가 있는 자리’를 드러내줍니다. 곧 그가 있는 자리는 ‘주님의 현존, 주님의 면전’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천사를 ‘대면’하고 있고, 그를 ‘향하여’ 있고, 그와 ‘함께’ 있습니다. 바로 여기, ‘주님과의 면전’이라는 자리가 바로 ‘경청’이 발생하는 자리요, ‘만남’이 이루어지는 자리요, ‘응답’이 일어나는 자리입니다.
사실, 모든 기도는 바로 이 ‘현존’에서 시작해서 ‘현존’에서 끝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는 ‘현존’이 없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란, 모름지기 대상을 향하여 바쳐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애시 당초 하느님의 ‘현존’이 없이는 그 어떤 ‘기도’도, ‘만남’도 벌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주님 현존’ 없이 기도한다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한갓 넋두리요, 하소연이요, 독백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비록 자기 카타르시스는 될지언정, 기도 곧 하느님과의 만남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도에 있어, “하느님 현존에 대한 면전의식”은 그야말로 가장 우선적이고 본질적이고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존’은 대체 어떻게 해서 발생하게 될까요?
‘만남’은 대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될까요?
그것은 분명,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의 방문’으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고, 아무리 들으려 해도 들려주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만남’, 곧 ‘면전’은 그분의 ‘방문’으로부터 발생하게 되는 일입니다. 곧 그분이 ‘먼저’ 찾아오신 까닭이 아니고서야, 그 ‘사랑의 방문’이 아니고서야, ‘만남’은 애초에 발생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나자렛 마을 마리아의 집으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방문’하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현존’은 ‘먼저 방문’하신 ‘먼저 베풀어진 주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주님의 현존’이라는 ‘지극한 주님의 사랑 앞’에서 “보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 ‘바로 지금, 우리가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의 면전에 그분의 사랑의 방문 앞에 나와 대면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 그분의 면전에서 마리아는 ‘그분과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 그리고 ‘서로의 관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하여,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단지 당신이 “주님”이시고 자신이 “주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만은 아닙니다. 곧 사실에 동의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그 사실에 대한 감격으로, 진실 된 인정과 승복과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의 마음을 품은 고백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혹, ‘“종”이 되고 싶으세요?’ ‘진정, “종”이 되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요?’ ‘대체 누가 ‘종살이’를 좋아할까요?’
사실, 자신의 권리를 지니지 못하고 누군가에게 속박되어 지배당하는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비천하고 뒤틀린 질곡의 삶을 연상케 합니다. 더군다나 군대의 계급사회의 생리에서 상관 아래 매여 있는 하급자의 신분으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우리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아마 하늘나라라 하더라도 “종”으로는 살아야 한다면, 가고 싶지 않겠죠.
그런데 <성경>에는 “주님의 종”이란 용어가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종”이란 대체 누구를 말할까요?’
대게는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지칭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대표하여 모세, 엘리야, 다윗 등이 ‘주님의 종’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들은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예언자들, 대사제들, 왕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노래>에서는 “종”을 하느님께서 ‘선택한 이’, 하느님의 ‘마음에 든 이’(첫째노래, 42,1-9), ‘사명을 받은 이’(둘째노래, 49,1-7), 그리고 ‘사명을 수행하면서 ‘박해와 거부당하는 이’(셋째노래, 50,4-11), ‘무죄하면서도 죄를 짊어지고 구원을 가져다 주는 이’(넷째노래, 52,13-53,12)로 불리어 집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지금 마리아는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고 자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종”으로 그분 면전에 서게 되면, 무엇보다도 먼저 ‘듣는 이에 합당한 마음과 태도’가 요청됩니다. 솔로몬 왕은 제사를 지내려 기브온에 갔을 때, 주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1열왕 3,9)
그렇습니다. 바로 이 ‘듣는 마음’에서 지혜가 옵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듣는 마음’이 필요할까? 곧 ‘어떤 마음’으로 들어야 할까?’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마음의 귀로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변모의 모습을 보여주시고 산에서 내려와 더러운 영에 들린 아이를 고치신 장면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들어라.”(루카 9,44)
“귀담아들어라.”는 것은 단순히 청각을 통해 무엇인가를 알아듣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세심하게 정성을 다하여 귀 기울여 들음’이요, ‘말씀을 넘어 말씀하시는 분께 귀 기울여 들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듣기를 원하는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말씀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마음’으로 듣는 것이요, 그 말씀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희망의 마음’으로 듣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들음’에는 ‘마음’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의 귀’로 듣는 일입니다. 이러한 ‘경청은 이미 사랑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너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마음이다.” 또 그는 말합니다. “마리아는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이미 믿음(의 마음)으로 잉태하셨다.”
이처럼, ‘듣는 이’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의 뜻을 이해하고 헤아리는 것에 앞서, ‘말씀하시는 분에 대한 사랑과 믿음과 희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분에 대한 사랑으로 귀 기울이는 ‘인격적인 태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경청이란, “전 인격이 말씀의 경청으로 팽팽”(암브로시우스)해져 있음이요, “하느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그레고리우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그처럼 전 인격으로 주님의 사랑에 젖어 매달려 있고, 그 사랑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또한,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되,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곧 자신의 견해나 관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듣거나 자신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입장이나 자기 견해나 주장에 따라 자기 방식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선입관이나 편견, 자기 관념을 내려놓고 듣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을 들려주신 분을 ‘향하여 듣는 것’이며, 그분을 ‘맞아들여 듣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먼저 들려주시는 분이 “주님”임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해드리는 것이요, “주님”이 진정 주님 되시도록 ‘주도권’을 넘겨드리는 일입니다.
마리아는 지금, ‘주님의 종’으로서, 바로 그렇게 먼저 그분을 맞아들이고 그분이 “들려주는 대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듣는 이의 태도’는 ‘마음의 귀’로 듣고 ‘들려주는 대로 사실적으로’ 듣되, ‘실행하기(지키기) 위해 듣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듣다’라는 단어로 히브리 단어 ‘쉐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듣는 것을 너머, 말씀하시는 분의 명을 ‘귀에 담아 행동에 옮긴다’, ‘들은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합니다.
<신명기>에 따르면, 주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명과 규정들과 법규들을 주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을 듣고 명심하고 실천하여라.”(신명 6,3)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 하느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귀담아들어, 내가 너히에게 내리는 그의 모든 명령을 성심껏 실천하면, 너희 하느님께서는 땅 위에 너희를 높여주실 것이다. ... 온갖 복이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신명 28,1-2)
그러니 지금, 마리아는 말씀을 그저 흘러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담아 듣고, 들은 말씀을 지키고 실행하려는 순명의 마음’으로 듣고 있는 것입니다.
2. 이제 우리는 <두 번째>로, ‘말씀을 품으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말씀은 대체 어디에서 활동하는가?’
그것은 ‘듣는 이 안’에서 입니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이 안’에서 입니다. 이를 마리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는 응답으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이 활동하시도록 내어주는 공간은 바로 ‘마리아 당신 자신’인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말씀이 선포되어도 ‘듣는 이’가 없으면, ‘듣고 받아들이는 이’가 없으면, 말씀은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은 읽는 이(듣는 이)와 함께 자란다.”
그렇습니다. 결코, 말씀은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그저 내던져진 것이 아닙니다. 그저 허공중에 내뱉어진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분명하게 누군가를 선택하여 “향하여” 건너오는 것입니다. 곧 “향하여” 건너오는 사랑이요, 방문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우리를 택하여 베풀어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곧 말씀은 우리를 사랑하여 먼저 건네지고 ‘선사된 선물’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이 얼마나 경이롭고 신비로운 일인가!’
이는 천사가 알리는 ‘마리아의 잉태 예고’의 첫 마디에서도 드러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1,30)
그러니 이는 결코 자신이 만든 아닌 것입니다. ‘주신 분’에 의해 건너오는 것이요, 베풀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신 분’이 먼저 있기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야말로,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선물로 주어진 말씀과 은총’을 “저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자신의 가슴에 받아들여 품으셨습니다. 마음속에 품으시고 간직하셨습니다. 자신을 승복하고 수락하셨습니다. 말씀의 침범에 자신을 허용하고, 자신을 정복하도록 기꺼이 내맡기셨습니다. 그렇게 당신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말씀이 머무는 자리’요, ‘하느님의 지상거처’요, ‘말씀의 감실’이 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대체 무엇이 이 일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바로, ‘성령의 활동’이요, 그에 대한 마리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천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루카 1,35)
그렇습니다. “성령께서 ... 너를 덮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에 쓰이고 있는 ‘덮다’(επισκιαξω)라는 단어는 모세가 ‘성막을 세워 봉헌하는 장면’에서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었다(επισκιαξω).”(탈출 40,34-35)라는 표현과 서로 연결됩니다. 곧 ‘마리아를 덮은 성령’의 모습은 <탈출기>의 “성막을 덮은 영광의 구름”을 반영합니다. 그러니 “주님 영광의 구름이 성막을 덮었던” 것처럼, “성령께서 마리아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덮을 것”임을 말해줍니다.
이는 ‘마리아의 몸’이 ‘하느님 현존의 새로운 지상 거처’임을 말해줍니다.
곧 ‘옛 계약 궤’ 안에는 ‘두 개의 십계명 판’,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가 든 금 항아리’,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가 보관되어 있었듯이, 이제 ‘새 계약 궤’인 마리아는 ‘십계명 판’을 넘어 선 ‘말씀이 사람이 되신 분’을, ‘만나’를 넘어선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사제 아론’을 넘어선 ‘하늘의 참된 대사제’를 잉태(요한 1,14,6,55-58)한 거룩한 그릇으로 드러납니다.
한편, <2마카베오서>에서는 ‘주님 영광의 구름’이 나타난 것을 보면, 거기 ‘계약 궤’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고 말합니다(2마카 2,8). 그리고 이제 ‘영광의 구름’이 다시 돌아오는 장면을 바로 여기, ‘주님 탄생 예고’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3. 이제 우리는 <세 번째>로, ‘말씀을 따르신 마리아’를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야 할 것은 무엇일까?” “대체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고 ‘fiat’으로 응답합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처녀가 아기를 잉태한다.’는 이 황당한 사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대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혹 “하느님께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라는 천사의 설명을 듣고서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믿게 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전능하심은 이미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인가?’, ‘대체 그것을 원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고서, 마침내 그분께 자발적인 믿음으로 ‘피앗’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나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본문>에 보면, 마리아는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몹시 놀랐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루카 1,28-29)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는 그 뜻을 헤아려 알아듣고 ‘자발적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이 뜻’이기에 자유롭게 ‘순명’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곧 ‘주님이 원하시니까 따른 것’입니다. (우리는 2009년에 복녀품에 오른 끼아라 루체 바다노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대림 제4주일
-겸손(信), 경청(望), 순종(愛)-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시편89,2ㄱ)
대림 제4주일 B해 미사중 방금 부른 화답송 후렴, 시편 가사와 곡이 참 좋습니다. 오늘 산책중 아무도 보지 않을 때 목청껏 부르고 싶습니다. 이제부터 시작될 성탄시기 주일이나 축일등 한결같이 신바람나는 화답송 후렴이 계속될 것입니다. 어제 강론에 인용했던 원장 수사와 주고 받았던 메시지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새 책, 좋은 책을 보면 참 행복해집니다.
“수사님이 부탁한 책 구입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책보기 위해서도 오래 살고 싶네요!”
“그러면 책을 컨테이너로 사드려야겠네요.ㅎㅎㅎ”
사랑이 가득 담긴 윗트에 얼마나 마음 따뜻했는지요! 바로 다음 저절로 떠오른 말마디에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오래 살고 싶다!”
하느님을, 이웃을 더욱 사랑하라 날마다 주어지는 선물같은 날입니다.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이야말로 진정 삶의 의미입니다. 참행복도 바로 여기 주님과의 깊어지는 사랑에 있습니다. 도대체 이런 날로 깊어지는 사랑이 아니라면 우리 삶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얼마전 써놓고 행복해 했던, 겨울나무, 겨울땅을 보며 써놓은 “나 겨울에는”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푸른하늘 배경한
빛나는 배 열매들 가득 달린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들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밤마다
푸른 하늘 빛나는 별들
꼭꼭 품에 안아 두었다가
봄, 여름, 가을
무수한 사랑의 꽃들 피어낼
텅빈 충만의
겨울 땅인데
누가 감히 가난하다 하는가
나
겨울에는 동안거의 추위에도
따뜻한 봄이
텅빈 충만의 겨울나무가, 겨울 땅이 된다
나 겨울에는
이 행복에 산다
내 이름은 ‘이행복’.”-2023.12.3
하늘 사랑만으로 행복한 동안거중인 배나무들 강추위 속에서도 흡사 따뜻한 봄, ‘겨울속의 봄’을 살아가는 듯 합니다. 문득 어제 강론을 읽은 어느 자매와 주고 받은 훈훈한 덕담도 생각납니다. 얼마전 손수 뜬 털쉐타를 선물한 자매입니다.
“저도 책 한 컨테이너 추가로 사드리겠습니다.ㅎㅎㅎ”
“감사합니다! 마음에 사랑 담아 둡니다! 필요하다 싶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털쉐터 사랑만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할 수 있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수 있어도 무한한 텅빈 가슴은 하느님 사랑만으로 채울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부르고 싶은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토록 노래하리라” 화답송 후렴입니다.
도대체 이런 하느님을 사랑하는 맛이, 기쁨이, 재미가 없으면 하루하루 날마다 이 삭막한 광야인생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자주 고백성사 보속시 처방전으로 자주 써드리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느님 저를 지켜 주소서. 당신께 피신합니다. 주님께 아룁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1-2)
어떻게 이런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지요?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겸손, 경청, 순종의 삶입니다. 믿음의 겸손, 희망의 경청, 사랑의 순종이니 그대로 하느님 중심의 삶은 신망애(信望愛)의 삶으로 직결됩니다.
첫째, 겸손(信)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겸손합니다. 겸손한 믿음(信)입니다. 무신불립(無信不立), 겸손한 믿음 없으며 서지 못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교만이지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수록 겸손해집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한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 자신이 참으로 겸손한 분이요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은 겸손하고 온유한 분입니다. 겸손과 온유는 함께 갑니다.
보십시오. 하늘 높이 계신 하느님께서 당신 천사를 통해 무명의 촌구석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 나선 하느님이 아니십니까? 문득 삼고초려(三顧草廬) 무려 세 번씩이나 제갈량을 찾아 나선 삼국지의 유비가 생각납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나자렛의 마리아를 찾아나선 하느님의 그 간절함은 유비에 비할바가 아닙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예언자 나탄을 통해 다윗을 찾아 그의 무지를 일깨워줍니다. 지금까지 하느님 주도로 다윗을 이끌어온 삶임을 환기시킵니다. 1독서에서 다윗을 위해 하신 일들을 읽어 보십시오. 다윗 삶의 문장의 주어는 온통 하느님입니다.
“나는 양떼를 따라다니던 너를 목장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삼았다.”
줄줄이 이어지는 하느님 주어의 문장들이 하느님의 위업을 알립니다. 삶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섭리의 결과입니다. 내가 살아온 것 같지만 하느님 친히 인도해주시고 이끌어 주신 삶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겸손하게, 기도하게 합니다. 제가 요셉수도원에 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그러니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우리 삶의 문장에서 주어는 내가 아닌 하느님이심을 깊이 깨달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없이는 참 겸손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둘째, 경청(望)입니다.
남말하기는 쉬워도 잘 듣기는 정말 힙듭니다. 참으로 주님께 희망을 둘 때 주님 말씀의 경청입니다. 희망의 경청, 겸손의 경청입니다. 겸손은 희망의 경청으로 표현됩니다. 베네딕도 규칙서의 시작도 “들어라, 아들아!”로 시작되며, 예언서에 참 많이 나오는 말마디도 “들어라!”입니다.
‘경청의 달인(達人)’이 바로 오늘 복음의 마리아입니다. 경청은 개방입니다. 침묵의 개방도 경청을 위함입니다. 주변에 활짝 깨어 열려 있는 침묵이요 경청입니다. 경청또한 훈련입니다. 평상시 경청의 훈련이 얼마나 잘 되어 있는 희망의 사람, 경청의 달인 마리아인지 깨닫습합니다. 참으로 눈밝은 하느님의 분별력은 정확했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당신 천사를 통한 하느님의 말씀에서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경청의 마리아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속내를 다 밝히시니 그대로 전폭적 신뢰를 반영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다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주님 천사를 통한 주님의 은밀한 말씀들이요 한결같이 경청하는 마리아입니다.
셋째, 순종(愛)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때 자발적 순종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을 때, 희망할 때 순종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할수록 이 진리도 깊이 깨달아 알 것입니다. 다음 마리아의 기념비적 응답은 늘 읽을 때마다 감동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대림 제4주일, 제대 주변을 환히 밝히는 4개의 대림 촛불이 마리아는 물론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의 ‘신망애(信望愛)의 빛’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탄생이 임박함을 알립니다. 마리아의 자발적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해진 주님 성탄입니다. 마리아의 순종은 이 결정적 순간의 한번만으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까지 마리아 성모님의 생애는 말그대로 순종의 여정이요 “예스맨(Yes-Man)”으로 일관된 삶이었습니다. 그 순종의 절정은 십자가에 달리신 당신 아드님을 내려 품에 안을 때의 피에타 성모님에게서 절정을 이룹니다. 케노시스 비움의 절정으로 표현되는 사랑의 순종, 믿음의 순종이요 그대로 살아 있는 사랑의 순교자 마리아 성모님입니다.
그러니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믿음의 겸손과 희망의 경청, 그리고 사랑의 순종의 삶을,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삶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홀로 지혜로우신 하느님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12/25(월) 주님성탄대축일, 되새김 구절
1. 한 처음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말씀은 누군가의 생각을 다른 생각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개자란 뜻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말은 ‘표현’되었다는 뜻입니다. (전삼용 신부)
2.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고 사랑하며, 섬기고 용서하는 삶을 살 때 바로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께서 새롭게 탄생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3. 마리아에게 중요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 아기를 잉태하는 것이 ‘누구의 뜻인가?’, ‘대체 그것을 원하신 분이 누구인가?’를 알아듣는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이 ‘주 하느님’이심을 깨닫고서, 마침내 그분께 자발적인 믿음으로 ‘피앗’을 하게 된 것입니다. 결코, 맹목적인 순종이나 복종이 아니었습니다. (이영근 신부)
4. 대림 제4주일의 주인공은 우리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믿음의 겸손과 희망의 경청, 그리고 사랑의 순종의 삶을, 시종여일 하느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사셨던 마리아 성모님이십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 중심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삶을, 믿음과 희망, 사랑의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충실히 살도록 도와주십니다.(이수철 신부)
12/25(월) 주님성탄대축일, 제366기도일
복음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예수성탄’으로 사행시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수’ 수고하고 짐 진 자들을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 성모님의 순명으로 오셨습니다.
‘탄’ 탄생하신 예수님께 경배 드립니다.
- 2023년 12월25일(월) 6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