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2월 15일 목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2. 15. 02:07

[매묵]2024년 2월 15일 목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55(54),17-20.23 참조
주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은 내 목소리 들으시고, 많은 사람들이 대적하여도 나를 구하시리라.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본기도

주님,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축복과 저주를 내놓는다(신명 11,26)>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30,15-2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5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16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또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너희에게 복을 내리실 것이다.
17 그러나 너희의 마음이 돌아서서 말을 듣지 않고,
유혹에 끌려 다른 신들에게 경배하고 그들을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분명히 일러두는데, 너희는 반드시 멸망하고,
요르단을 건너 차지하러 들어가는 땅에서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19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20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주시겠다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가 오랫동안 살 수 있게 해 주실 분이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4,17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22-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
23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4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25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거룩한 제대에 봉헌하는 이 제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제물이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51(50),12
하느님, 제 마음을 깨끗이 만드시고, 제 안에 굳건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천상 선물을 받고 간절히 비오니
이 선물이 언제나 저희에게 용서와 구원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
하느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알려 주시니
그 길을 통하여 불멸의 빛이신 하느님께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시를 함께 감상하면 좋겠습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2000년 전에 가지 않은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몬,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입니다. 그들은 운명처럼 예수님을 만났고,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충만함과 희열을 보았습니다. 이제 그들은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의 고난과 절망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선택하였고,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저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선생님이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도 매력적이고, 군인이 입는 제복도 매력적으로 보였습니다. 아버님은 교직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사범학교를 나왔고, 고모부도 사범학교를 나와서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였습니다. 그런 제게 예수님께서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부르시지는 않았지만, 운명처럼 저는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고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이 신학교에 간다고 하였습니다.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님의 모습도 멋져보였습니다. 성소(聖召)에 대한 깊은 고민도 없이 본당 신부님께 신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 오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님과 면담하였습니다. 당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는 조건으로 허락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뒤로는 아주 열심히 신앙생활 하였습니다. 사제가 된지 33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교사나 군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제가 선택한 사제의 길은 교사와 군인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사제는 강론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는 교사가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지식을 선포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군인은 전선에서 적을 막아내고, 국민을 보호합니다. 사제는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교우들이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사제의 직무에는 교사와 군인의 역할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선택의 기준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계명과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하면 하느님께서는 축복을 주신다고 합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하느님과 멀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선택과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이야기합니다. 사제는 서품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독신서약, 신앙고백, 교구장에 대한 순명입니다. 사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독신으로 살고, 자신의 뜻이 아닌 교회의 가르침을 전하고, 교구장의 뜻을 충실히 따른다면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둘째는 선택함에 있어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죽기까지 십자가를 충실히 지고 가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도 나를 따르려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달콤한 열매만 찾아가는 선택은 당장은 좋겠지만 그 끝이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일찍 죽는 것 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루카 9,22-25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

 

외국 손님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여기저기 모시고 다니다보면 다들 큰 호기심을 가지고

제게 던지는 질문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가는 곳 마다 십자가가 왜 이렇게 많습니까? 저게 다 교회가 맞습니까?”

 

그러고 보니 이 땅에는 정말 십자가가 많더군요.

여기 저기, 50미터 100미터도 못가서 나타나는 교회들, 그 교회의 꼭대기에는 다들 보란 듯이

십자가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恨)으로, 고통으로, 슬픔으로 점철된 ‘십자가의 민족’이어서 그런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십자가는 왜?’ ‘고통은 왜?’ 라는 질문은 인간 역사 안에서 늘 되풀이 되어온 질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인류의 역사는 십자가의 역사요, 고통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시편작가들도 고통의 연속인 인간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칠십년, 근력이 좋아서야 팔십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이오니 덧없이 지나가고,

우리는 나는 듯 가버리나이다.”

 

밀물이 밀려오고, 썰물 빠져나가듯이 평생토록 반복적으로 다가오는 고통 앞에

시편 작가는 차라리 체념하고 수용하는 게 더 낫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왜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가?’라는 질문에

사람들은 너무도 쉽게 대답합니다.

 

“인류의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악, 특히 원죄에 대한 경고이자 징벌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화시키기 위해 보내시는 선물입니다.

고난은 인생의 보약입니다.”

 

‘고통은 왜?’란 질문 앞에 지금까지 교회가 제시한 전형적인 답안이었습니다.

물론 고통을 통해 신앙이 성장하고,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신앙은 일취월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통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 십자가에 대한 도에 넘치는 수동적, 소극적인 자세는

최선책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로서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자신을 버리라는 당부는 힘에 겨우니 체념하라는 말, 어쩔 수 없으니 그 자리에 주저앉으라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신의 그릇을 더욱 크게 만들라는 뜻입니다.

그 어떤 난관이 다가와도 당황하지 않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큰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매일 와 닿는 고통과 악, 병고와 불의 앞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지내라는 말이 절대로 아닐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어쩔 수 없이 수용해라.

그러나 퇴치할 수 있는 고통은 마땅히 퇴치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갖은 고난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방할 수 있는 십자가는 미리 예방하고,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은 각고의 노력을 다해 극복해야만 합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 ‘재의 수요일’을 지내고 맞이하는 첫 번째 날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을 예고하시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곧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루카 9,20)라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이어,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 곧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죽음을 당하실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루카 9,2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 일어날 일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드시'(이백주년 성서; '마땅히')라는 단어는 이 모든 것이 필연성이나 당위성에 의해 다가오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는' 일이요, 셋째는 '죽었다가 되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하느님의 권능이 개입할 것임을 시사해줍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당신을 따르는 길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세 가지를 요구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요, 둘째는 '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이요, 셋째는 이를 '날마다' 지속적으로 지는 일입니다. 

오늘은 두 번째의 ‘제 십자가를 지고’에 대해서만 보고자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곧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떠올리는 ‘신약의 십자가’가 있기도 전에 사용되고 있는 이 ‘십자가’.

곧 ‘구약의 십자가’란 대체 무엇을 말할까요? 

그것은 우선 '계약'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구약에서 ‘십자가’(타브)는 ‘계약의 표’로서 소유, 선택을 나타내는 동시에, ‘구원의 표’로 주어졌으며(에제 9,4.6.), 주님을 따르는 ‘하느님의 종’과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에게 새겨졌습니다.

그리고 레위기(25,55)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나의 종들’이라 칭하며, 탈출기(19,6)에서는 그들을 ‘제사장의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또 하느님의 제사장으로서 ‘계약’을 짊어지는 것이며, 동시에 구원의 표시로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십자가를 진다’는 곧 '계약'을 지키는 것이며, 하느님의 소유로 선택되어 거룩한 백성의 삶을 지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당신을 따르는 이’는 ‘계약’을 짊어지고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이 됩니다.

곧 생명의 길이며, 그것은 목숨을 내놓은 결단을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24)

이러한 결단은 제1독서에서 생명과 죽음의 길로 드러나며,

생명의 길은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신명 30,20)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하여, 사랑으로 그분께 매달려 있고, 생명의 길을 가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루카 9,22)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 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스스로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2.14.재의 수요일                                                  요엘2,12-18 2코린5,20-6,2 마태6,1-6.16-18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오늘 재의 수요일부터 사순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삶을 새롭게 확립하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오늘 본기도 또한 사순시기의 영적전투의 시작에 앞서 우리를 격려합니다.

 

“주님, 그리스도를 믿는 저희가, 거룩한 재계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려 하오니,

극기의 보루를 쌓게 하소서.”

 

어떻게 극기의 보루를 쌓으며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베네딕도 규칙서 “제49장;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항목도 수도자뿐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유익한 가르침을 줍니다. 

 

“수도승의 생활은 언제나 사순절을 지키는 것과 같아야 하겠지만 이런한 덕을 가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이 사순절 동안에 모든 이들은 자신의 생활을 온전히 순결하게 보존하며,

다른 때에 소홀히 한 것을 이 거룩한 시기에 씻어내기를 권하는 바이다.”

 

심기일전,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대로 온전한 삶, 참된 삶을 다시 새롭게 살기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사순시기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을 위한 세 지침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에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제몫을 다하는 삶입니다.

한두번의 회개가 아니라 날마다 평생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에 충실해야 할 사순시기입니다.

 

기후위기는 물론 날로 복잡하고 혼란해지는 사회 현실을 대할 때 신자들은 물론 전 국민의 생태적 회개와

더불어 전방위적 회개가 급박한 위기의 시대처럼 생각됩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그의 규칙서 제49장에서 사순시기, 회개에 우선적 강조를 둡니다. 

 

“우리가 악습들을 멀리하고 눈물과 함께 바치는 기도와 독서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는 통회와

절제에 힘쓸 때, 합당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늘 제1독서 요엘서 서두에서도 강조하는 바 회개의 촉구입니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주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잃었던 나를 찾아 참으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아야 하는 사순시기입니다.

오늘 요엘서가 말하는 회개는 개인의 회개는 물론 전공동체적 회개의 실현입니다.

이런 이스라엘 전공동체적 회개에 응답하여 주님께서는 당신 땅에 열정을 품으시고,

당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다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참된 신자 삶에 우선적 조건이 회개입니다.

회개의 깊이에서 주님을 만날 때 비로소 겸손한 삶, 참된 삶의 실현입니다.

주님 역시 바오로 사도를 통해 사순시기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시기이자 화해의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은혜로운 때에 내가 너의 말을 듣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요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사순시기 지금은 바로 은혜로운 때요 구원의 날이니 바로 회개를 통해 이뤄지는 구원의 현실입니다.

 

둘째, “사랑하라!”

회개의 진정성은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내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의 사랑의 삶에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요 오늘 복음은 사순시기 사랑의

세가지 실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유다인들의 전통적 세가지 사랑의 수행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합니다.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요, 모두가 사랑의 표현인 수행입니다.

이웃 사랑의 개방이 자선이요, 하느님 사랑의 개방이 기도요, 자기사랑과 개방이 단식입니다.

사랑의 기도는 단식으로 단식은 자선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

 

“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삶!

참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사랑으로 활짝 열린 이들이

참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참된 회개, 참된 사랑, 겸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진실하라!”

예수님이 참으로 혐오한 것은 안과 밖이 다른 표리부동의 진실치 못한 위선자 허영과 교만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말씀 역시 자기 중심의 허영과 교만의 사람에게 주시는 질책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중심을 잃으면 누구나의 가능성이 이런 자기 중심의 위선적 삶입니다.

 

“네가 자선을 베풀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하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다 받았다.”

 

한결같이 역으로 진실하라, 정직하라, 솔직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좋은 삶, 참된 행복, 참된 사랑도 선택입니다.

부단한 회개로 내 중심의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선택할 때 참된 사랑, 참된 행복,

안과 밖이 같은 진실한 삶입니다. 

 

그러나 명심할 사항이 있습니다.

사순시기 과도한 절제나 극기, 고행으로 어둡게 우울하게 침통하게 심각하게 지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권고가 참 적절하고 고맙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순시기를 보내라 하십니다.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참 놀라운 것이 즐거움이란 말마디가 규칙서중 여기 <제49장; 사순절을 지킴에 대하여> 라는 장에서만

2회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사순시기,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수행생활에 충실하라는 충고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하느님 중심의 즐겁고 행복한  삶을 새롭게 선택하고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재의 예식중 다음 사제의 말씀을 상기하며 하느님 중심의 회개와 겸손의 삶에 항구하도록 합시다.

부단한 회개와 겸손의 삶에서 샘솟는 참기쁨, 참행복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사람아,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라.” 아멘.


2/15(목)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가난도, 질병도, 일찍 죽는 것 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치고 도와주시어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시작하고 마치게 하소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살고 번성할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도 인간의 고통을 거슬러 투쟁하셨습니다.

인간의 불행과 슬픔에 마음 아파하시며 이를 없애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셨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셨으며,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셨습니다.

멸시받는 이들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행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힘에 겨운 십자가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를 괴롭히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루카 9,22)

 

주님!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을 따라 걷게 하소서.

고난을 겪고 죽임을 당하면서도 따라 걷게 하소서.

한 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어도 피하지도, 거부하지도 말게 하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 고난을 스스로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아멘.

 

4. 유다인들의 전통적 세가지 사랑의 수행은 오늘 우리에게도 적절합니다.

바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요, 모두가 사랑의 표현인 수행입니다.

이웃 사랑의 개방이 자선이요, 하느님 사랑의 개방이 기도요, 자기사랑과 개방이 단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숨겨진 삶!

참 영성의 진위를 판가름하는 잣대입니다. 이렇게 내적으로 사랑으로 활짝 열린 이들이

참으로 부요하고 자유로운 이들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짜 관상가, 신비가. 영성가입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참된 회개, 참된 사랑, 겸손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수철 신부)

 

2/15(목)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418(제48)일 기도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폴 클로델이란 영성가의 기도가 오늘 하루 십자가를 지고 가는 우리 삶의 양식이 되길 바랍니다.

“주님, 바꿔야 될 것은 바꿀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어쩔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주십시오.

그리고 이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도 주십시오.” 아멘.

 

- 2024년 2월15일(목) 2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