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2월 16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2. 16. 08:29

[매묵]2024년 2월 16일 금요일[(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30(29),11
들으소서,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구원자 되어 주소서.

본기도

주님,
저희가 시작한 참회의 생활을 인자로이 도와주시어
육신으로 닦는 이 재계를 성실한 마음으로 완수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1(50),3-4.5-6ㄱㄴ.18-19(◎ 19ㄴㄷ)
◎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당신의 크신 자비로 저의 죄악을 없애 주소서. 제 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시고, 제 잘못을 깨끗이 지워 주소서. ◎
○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당신께, 오로지 당신께 잘못을 저지르고, 당신 눈앞에서 악한 짓을 하였나이다. ◎
○ 당신은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 제가 번제를 드려도 반기지 않으시리이다.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은 부서진 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아모 5,14 참조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사순 시기의 재계를 지키며 이 제사를 봉헌하오니
저희 마음을 주님의 뜻에 맞게 바꾸어 주시고
극기를 실천하는 꿋꿋한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25(24),4
주님, 당신의 길을 알려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거룩한 신비에 참여하고 비오니
이 사랑의 영약으로 모든 죄의 상처를 낫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
이 백성이 언제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에 감사하며
지난 삶을 뉘우치오니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영원토록 주님을 뵈옵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보좌 신부 때입니다. 1994년이니까 어느덧 30년 전입니다. 지구 초등부 교사 모임을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오는데 현관문이 안에서 잠겨있었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 신부님이 문을 열어 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몇 시냐?” 이 말의 텍스트는 시간을 묻는 것이지만 이 말의 콘텍스트는 왜 이렇게 늦게 다니는가?’는 질책이었습니다. 신부님의 의도를 잘 모르고 지금 10 30분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텍스트는 맞지만 콘텍스트는 파악하지 못한 50점 자리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나중에는 좀 더 일찍 다니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부부 사이에도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아내가 나 머리가 아파!’라고 말하면 남편이 약 먹어요.’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텍스트는 맞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원하는 것은 남편의 관심 사랑일 수 있습니다. 아이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친정 일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새로 구입한 청소기 때문에 머리가 아플 수 있고, 정말 두통이 있어서 머리가 아플 수 있습니다. 아내가 말하는 맥락의 콘텍스트를 잘 파악하는 남편은 아내에게 더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관계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듯이,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집단 간에도 텍스트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콘텍스트를 잘 선점하고, 프레임을 잡는 곳이 대중의 관심을 더 받게 되고, 선거에서 유리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낮으면 야당에서는 정권심판, 중간평가라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의 발목 잡기가 지나쳐서 국정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하면서 대통령과 여당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콘텍스트를 만들려고 합니다. 중간평가를 다루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정권에 대한 견제를 선택하기도 하고,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수준 높은 정치는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콘텍스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한 국민들은 텍스트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식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정치 테러, 살인미수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텍스트를 두고도 야당과 여당의 콘텍스트는 첨예하게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큰 틀에서 정치인에 대한 테러는 규탄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된다고 우려를 발표합니다. 야당은 신상공개, 테러를 벌인 동기, 공범여부, 정당 활동에 대한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여당은 경미한 사고, 우발적인 사고, 정치적인 동기는 없는 사소한 사건이라는 콘텍스트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국민들은 이 사건에 숨어있는 콘텍스트를 판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단식에 대한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전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식사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먹어야 살기 때문에 단식하면 당연히 배가 고프기 마련입니다. 단식에도 몇 가지 콘텍스트가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약한 사람이 자신들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곤 합니다. 야당의 대표가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양심수 석방을 위해서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때에는 진상 조사를 요구하면서 아버지가 단식하기도 했습니다. 한국을 찾았던 교황님께서는 세월호의 유족들을 만나서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단식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경건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단식의 진정한 콘텍스트는 단식의 행위와 날수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예수님께서도 단식 그 자체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2024년 나해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오 9,14-15

 

단식의 이유가 하느님이어야 하는 이유

 

오늘 복음은 단신 논쟁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자신들은 단식을 자주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지만,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인데 그때는 단식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단식은 신랑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도구가 된다는 뜻입니다. 

 

사실 모든 희생은 이웃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도구입니다. 모든 희생은 피 흘림입니다.

피는 생명인데 내가 흘리는 피로 끈끈한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 대표적인 관계가

부부관계이고 가정이고 나라이며 넓게는 인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남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할까요? 어차피 세상은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희생을 합니다. 그 희생이 자기 자신이 될 때는 행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은 모르지만,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입니다. 

 

영화 ‘패밀리맨’(2000)에서 주인공은 호화롭고 고독한 삶을 살아가는 성공한

월스트리트의 경영자 잭 캠벨입니다. 그는 직업적 성공을 위해 개인적인 관계와

가족생활을 희생하면서 자기 경력에 ​​전적으로 헌신하고 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잭은 의문의 남자와의 이상한 만남을 경험하고, 그로 인해 다음 날 아침

대체 현실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이 새로운 삶에서 그는 더 이상 부유한 사업가가 아니며,

대학 시절 연인 케이트와 결혼한 평범한 교외 가장입니다.

두 사람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방향 감각을 잃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필사적으로 노력하던 잭은

점차 사랑, 가족, 일상의 단순한 기쁨의 가치를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가족의 따뜻함, 부모로서의 도전과 보상, 헌신적인 파트너의 사랑을 경험합니다.

 

이 대체 생활에 더욱 몰입하면서 그는 개인적인 관계보다 자기 경력을 우선시함으로써

자신이 놓쳤던 것의 깊이를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됩니다.

어차피 고생하는 것으로 따지면 같은데 결국 나 자신을 위해 고생했던 것은

외로운 지옥이었음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보게 된 것입니다. 

 

모든 행복은 관계에서 옵니다.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지고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단식은 이러한 희생과 같습니다. 희생의 목적은 소속감에서 오는 행복입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행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내가 속한 공동체만을 위한 희생이라면

그것은 나 자신만을 위한 희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영화의 주인공이 가정을 위해 사기를 치고 도둑질하며 살인까지 저지른다면

그 가정 안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요? 잡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고 가족들은 그러한

부모를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자신이 하는 희생이 가정을 위한 것이라면 가정을 지켜주는 더 큰 공동체인

나라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법도 지키고 세금도 냅니다.

하지만 오염으로 지구가 멸망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니 가정을 위한 사랑은

온 인류를 위한 사랑과 이어져야 합니다. 그렇게 가다 가장 큰 공동체를 만나게 되는데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인이요 모든 공동체의 원인인 하느님과 그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이 먼저 신랑이신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도, 나라도, 가정도, 배우자에 대한 희생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국가 유공자로서 가정에서도 환영받습니다.

 

내가 하는 모든 희생이 이기적이지 않도록 모든 공동체의 원인이 되는 하느님을 위한 희생이

되게 합시다. 그러면 모든 이들로부터 사랑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단식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그 희생으로 온 인류, 나라, 가정,

배우자를 위한 희생이 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3.  2월 16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이사 58,6)>

 

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강론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태 9,14)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던지는 질문입니다.

단식은 잘 알다시피 어떤 목적 하에 일시적으로 먹기를 중단하는 겁니다. 세상이 풍요로워지면서 의료나 미용 목적의 단식이 유행해서 그 무게가 가벼워지긴 했지만, 정치적 사회적으로는 정의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순교적 행위가 되기도 하고, 종교적 측면에서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절대자 앞에 나아갈 때 맑고 정갈한 상태를 새롭게 회복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비워내는 과정으로 행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외세의 침략이나 패망, 국가적으로 중요한 인물의 와병, 민족적 수치 앞에서 옷을 찢고 먼지를 머리 위로 날리며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걸치고 단식했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예언자를 통해 전해질 때 역시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어 그분 마음을 돌리고자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단식은 인간이 하느님께 통회와 청원의 마음을 담아 취하는 겸손의 표현이고 또 다른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식을 단지 굶는 행위라 본다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라는 말이 가능하긴 합니다 단식의 지향보다 그 빈도수에 관심을 둔다면 그럴 겁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단식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단식을 그 의미나 지향보다 횟수와 형식에 관심을 두는 의식이 팽배해지자,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이렇게 호소하셨습니다.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이사 58,4).

그리고 분명히 밝히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이사 58,6).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은 "풀어 주고, 끌러 주고, 내보내고, 부수어 버리고, 나누고, 맞아들이고, 덮어 주고, 숨지 않는 것" 즉, 가난하고 약해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 대해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는 연대입니다. 그저 먹고자 하는 자기 욕구를 절제하는 단식에 그치지 말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실제로 그들의 요구를 채워주는 행위가 진정한 단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단식이 내가 굶고 비워내는 행위에서 타인을 채우고 풍요롭게 해 주는 행위로 승화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 좋아하는 진정한 단식이 됩니다.

그렇다면 단식이 온전히 이타적이기만 한 행위일까요? 내가 굶어 남의 배를 채우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비움의 행위에 따르는 놀라운 은총을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을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9).

피조물로 이 지상에 살아가면서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을까요! 빛과 치유, 의로움, 주님 영광의 보호, 주님의 경청과 즉각적 응답... 이렇게 주님과 단단히 결속할 수 있다면, 몇 끼 굶는 게 문제겠습니까, 내 밥그릇 비워 남 주는 게 대수겠습니까! 단식의 가치가 이렇게 놀라운 것이라면 어찌 안 할 수가 있겠습니까?

단식은 사랑입니다. 아니, 사랑이어야 합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태 9,15)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실 때 혼인 잔치와 신랑, 잔치 손님의 표상을 사용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랑이 무르익어 절정을 이루는 혼인 잔치, 그 사랑이 세상에 공표되고 인정 받는 그 자리에서는 누구도 사랑 이외의 것에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신랑은 신부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신부 역시 신랑에 대한 사랑으로 잦아듭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소리 높여 축하하며 사랑의 흥을 돋우고, 손님들은 사랑의 포도주에 취해, 저마다 과거의 현재의 미래의 사랑 안에서 헤엄칩니다. 이 자리에선 남녀노소, 빈부격차, 인종, 민족, 그밖에 어떤 차별적 요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 신랑이 현존하는 혼인 잔치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단식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머지않아 신랑을 빼앗기고 잔치가 끝나고 친구와 손님들도 뿔뿔이 흩어질 때가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 신부는 누구보다 황망히 울며 애태울 것입니다. 님을 잃은 슬픔에 잠겨, 비로소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는지 찾느라,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고 엎드려 단식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그들처럼 단식할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단식을 살지 못한 부끄러움에 다시 처음부터, 단식의 가나다부터, 단식의 ABC부터 다시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단식 자주 하십니까? 안 하신다구요? 정말 부럽습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늘 함께하시니까요. 그래서 단식할 필요가 없으시니 감축드립니다.

저는 사순절 시작하기 전부터 단식을 계속 해오고 있습니다. 요즘 신랑을 빼앗겨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맘이 너무 짠할 때가 많아서입니다. 그분이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안에서 함께 고통받고 억압받고 계시니, 어찌 혼인잔치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그분과 함께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 없을 때, 그분을 그리며 가난한 이들과 동참하여 단식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이번 사순절엔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도 벌이겠지만, 가끔은 사랑의 단식을 통해 그분을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그분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보다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주님 어전에 가납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월 16일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짐이 아닌,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

 

다산(茶山) 정약용과 논어 공자(孔子)의 오늘 말씀이 멋집니다.

“꽃향기를 맡기위해서는 먼저 허리를 숙여야 한다. 시냇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다산

“육포 한묶음 이상을 예물로 갖춘 자를 나는 가르치지 않은 적이 없다.”

스승이나 제자를 막론하고 겸손과 감사는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의 기본적 품성임을 깨닫습니다.

 

어제가 ‘재의 수요일’이자 ‘발렌타인데이’인줄은 후에 초코렛 선물을 받고 알았습니다. 외출후 귀원하니 집무실 앞에 정체불명의 봉투가 있었고 초코렛이 들어 있었습니다. 후에 카톡 메시지를 받고 알았습니다.

 

“신부님, 오늘 재의 수요일이면서 Valentine’s day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초코렛 선물하는 날입니다. 사랑합니다!!

봉투에 글을 읽어 보세요! 제가 신부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입니다!”

“아, 자매님 선물이었군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봉투가 보이지 않네요!”

“초코렛 넣은 bag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니 봉투에 영문글자들이 보였습니다.

“Thank you, is the least I can say to you show my appreciation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 me”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어 주신 모든 것에 대한 제 감사를 보여줄 수 있는, 당신께 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아름다운 말마디는 그대로 하느님께 드리고 싶은 말마디처럼 들립니다. 하루하루가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응답은 감사와 찬미입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미사 강론은 “하느님 중심의 참된 삶-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는 요지로 전개했는데 후에 생각난 내용을 첨가하지 못했음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요 사랑이요 진실이지, 죽으면 회개도 사랑도 진실도 끝입니다. 삶이 연장되는 것은 하루하루 회개하라, 사랑하라, 진실하라 주어진 날들인 것입니다.”

 

얼마전 교구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은퇴신부들의 처우에 대해 나눴습니다. 교회 역시 고령화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계속 양산되는 고령 은퇴 사제들의 처우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선물인생인듯 생각했는데 이제는 교회에 불편하고 무거운 짐들로 느껴지고 있는 노은퇴사제들입니다.

 

“삶은 선물인가? 짐인가?”

 

제가 늘 화두로 삼고 있는 말마디입니다. 받을 때는 선물이었는데 받고 나서 시간이 흐르면 어김없이 대부분 불편하고 무거운 짐이, 쓰레기가 됩니다. 사랑했던 사람들도 병들고 아프면, 심지어 나도 병들고 아프면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선물 인생을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의 영적 본능입니다.

 

“삶은 선택입니다!”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도 선택, 행복도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탄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의 주님, 희망의 주님,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용감하게, 무거운 짐 인생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 인생을 선택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희망차고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사랑하면 짐도 선물로 변합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하느님을 대변한 신명기 모세의 말씀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가 대상입니다.

 

“보아라, 내가 오늘 너희 앞에 생명과 행복, 죽음과 불행을 내놓는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주 너희 하느님의 계명을 듣고,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며 그분의 길을 따라 걷고, 그분의 계명과 법규들을 지키면, 너희가 번성할 것이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내 놓았다. 너희와 너희 후손이 살려면 생명을 선택해야 한다. 또한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께 매달려야 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주님은 너희의 생명이시다”

라는 말마디가 참 은혜롭습니다. 헛것인 세상 우상들에, 결국은 버려질 짐같은 것들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신 주님께 매달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 제1독서에 “오늘"이란 말이 무려 4회 나옵니다. 영원한 오늘, 지금 여기 오늘을 뜻합니다. 모세의 말씀을 구체화하는 신약의 새모세,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바, 바로 생명의 길, 행복의 길, 구원의 길, 성인의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만고불변의 보편적 구원의 진리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우리가 선택하여 따라야 할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주님을 온전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버리고 내 책임의, 내 운명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있는 그날까지, 죽는 그날까지 하루하루 한결같이 날마다 오늘 예수님을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 생명의 길, 행복의 길, 성인의 길입니다.

 

더불어 예수님과 우정의 일치도 날로 깊어져 예수님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입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아야 비로소 늘 선물인생이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힘껏 늘 십자가의 길 선물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다음 고백기도대로 살 때 하루하루 날마다 선물 인생이 될 오늘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오늘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 오늘을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2/16(금)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예수님께서는 단식의 기준이 먼저 신랑이신 당신이 되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도, 나라도, 가정도, 배우자에 대한 희생도 지켜질 수 있습니다.

나라에서 인정받는 사람은 국가 유공자로서 가정에서도 환영받습니다.(전삼용 신부)

 

3. 이번 사순절엔 신랑이신 그분과 함께 기쁨의 잔치도 벌이겠지만, 가끔은 사랑의 단식을 통해 그분을 빼앗긴 이들에게 다시 그분을 찾아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나보다도 그들의 상처가 아물고,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되고, 그들의 간절한 부르짖음이 주님 어전에 가납되기를 바라고 또 바랍니다.(오상선 신부)

 

4. “삶은 선택입니다!”

“늘 선물 인생을 사십시오!”

 

생명도 선택, 행복도 선택입니다. 타고난 부정적인 것들에 탄식하고 원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것이 아니라 날마다 생명의 주님, 희망의 주님,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여 기쁘게, 감사하며 살아가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살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이수철 신부)

 

2/16(금)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419(제49)일 기도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배고픈 이들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입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참으면서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단식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하느님!

매사 절제하고 단식하며 살게 하소서.

 

- 2024년 2월16일(금)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