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2월 19일 월요일[(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2월 19일 월요일[(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종들이 제 주인의 손을 눈여겨보듯, 저희는 주 하느님을 우러러보며 당신 자비만을 바라나이다.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천상의 가르침으로 저희를 회개시키시어
사순 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레위기의 말씀입니다.19,1-2.11-18
1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에게 일러라.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 너희는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속여서는 안 된다.
동족끼리 사기해서는 안 된다.
12 너희는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을 더럽히게 된다. 나는 주님이다.
13 너희는 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품팔이꾼의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너희는 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눈먼 이 앞에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15 너희는 재판할 때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너희는 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너희 동족을 정의에 따라 재판해야 한다.
16 너희는 중상하러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
너희 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님이다.
17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18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 ◎
○ 주님의 규정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 ◎
○ 주님을 경외함 순수하니 영원히 이어지고, 주님의 법규들 진실하니 모두 의롭네. ◎
○ 저의 반석, 저의 구원자이신 주님, 제 입으로 드리는 말씀, 제 마음속 생각, 당신 마음에 들게 하소서.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네.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5,31-4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31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32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33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35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36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37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38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39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40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41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43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44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45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46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정성을 다하여 봉헌하는 이 예물을 너그러이 받으시어
주님의 은혜로 저희 삶을 거룩하게 하시고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용서하여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가장 작은 내 형제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이 성사로 몸과 마음에 힘을 얻고 비오니
저희가 천상 영약을 충만히 받아 구원의 영광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이 백성의 마음을 주님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어
해야 할 것을 깨닫고
올바른 일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저는 어린 시절에 공산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 그 구호가 섬뜩했습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시기는 ‘냉전’의 시대였음을 알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상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아메리카,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는 남한, 일본, 대만이 함께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공산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념의 대립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 되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한국도 북방외교를 채택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습니다. 이념의 벽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제질서는 자본과 자국의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에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 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 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들이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 지금이 바로 은혜로운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25,31-46
우리는 과연 어느 쪽입니까?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마지막 날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동물인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모든 사람을 갈라놓겠다는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면, 꽤 두렵고 섬뜩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협박성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 양떼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 담긴 격려의 말씀입니다.
달릴 곳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이 땅에 강생하신 메시아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모습은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상 생활 동안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한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당신 왕좌에 좌정하십니다.
목자로서 살아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외침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호응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권능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릴 것입니다.
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긴 지팡이로 목자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편으로 갈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세상 속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헐벗고 떠도는 이들, 병들고 갇힌 이들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쪽에 앉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백번 천번 기억해야 할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에 가서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실천한 이웃 사랑이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져보니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240218. 사순 제1주일.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오늘은 사순절 첫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새로운 때”와 “그때에 해야 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의 끝부분을 들려줍니다. 이는 새로운 창조 이야기입니다. 그야말로 홍수의 물로 씻겨 진,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게 됩니다. 곧 “새로운 때”, “회개의 때”를 알립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베드로는 노아의 방주를 ‘세례’를 미리 보여주는 예표로 말하면서, “세례는 몸의 떼를 씻어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힘입어 하느님께 바른 양심을 청하는 일”(1베드 3,21)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시, “새로운 때”, “그리스도의 부활로 하느님의 바른 양심을 입을 때” 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로 나가시어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마치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에게 유혹을 당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광야’에는 사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활동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나가셨습니다. 그러기에 광야는 시험을 받는 장소임과 동시에, 은총의 장소이기도 하고, “은총의 때”를 몰고 오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모세에게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이집트에서 나와 주님께 제사를 드린 곳이요, 주님의 자비와 보호를 체험한 곳이었고, 엘리야에게는 하느님의 보호를 체험한 곳이요, 호세아에게는 주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 이끌려나갔던 곳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주선합니다. 그야말로 ‘광야’는 하느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는 장소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순례의 삶’을 살아갑니다.
사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 첫 사랑의 외침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발설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것은 “때”가 찼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때가 찼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시작하신 일이 그저 아무 때나 우연히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요, 이전의 모든 시간이 지금의 이 “때”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곧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후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신 이후 줄곧 준비해 온 “때”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어디로 가야할 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이요 목표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다스림의 나라요,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은 ‘곁에 가까이 있다’는 말로 이미 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곧 당신과 함께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선물로 주어져 이미 현재에 와 있는 나라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이들 안에 이미 ‘현존’하는 나라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고 있으니,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루카 11,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이는 믿음에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이미 먼저 선사된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예수님께서는 ‘회개’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느님 나라”는 선사되었습니다. ‘이미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며, 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믿는 것이 바로 “회개” 입니다. 그러니, ‘회개’란 이 ‘먼저 베풀어지고 선사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일 때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에서의 ‘회개’란 ‘뉘우치고 돌아옴’을 말합니다. 곧 내면적인 뉘우침과 동시에, 돌아오는 인격적인 행위를 포함합니다(슈브. 메타노이아). 그러니 단지 뉘우치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올 곳을 먼저 알아야 진정한 회개는 가능해 집니다. 그것이 바로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인 ‘하느님의 나라’ 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로의 돌아옴입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건설되도록 자신을 수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느님 사랑 안으로의 전환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가 아닌,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건설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다스리고 실현시키는 나라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곧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셔 들이는 일이요, 하느님의 의로움과 뜻에 전적으로 돌아서는 일, 바로 그 일 말입니다. 단지 도덕적인 참회와 윤리적인 통회만이 아니라,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과 삶의 전인격인 전환을 말입니다.
하오니,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제 삶 안에서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사순 제1주간 월요일
-더불어 광야 인생 순례 여정-
"주님의 전사, 말씀의 전사, 사랑의 전사, 믿음의전사, 평화의 전사"
“어떻게 살 것인가?”
오늘 사순 제1주일 강론 제목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지닌 화두와 같은 물음입니다. 그러니까 32년전 1992년 1월15일 왜관수도원에서 종신서원식 미사때 제가 한 강론 제목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였습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흐르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답답한 마음에 끊임없이 묻게되는 물음은 광야 순례 인생 여정, “어떻게 살 것인가?”입니다. 요즘 매일 인용하게 되는 다산 어록에 나오는 말씀이 오늘도 참 좋습니다.
“공부는 나를 알아감으로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과정이다. 함께 하는 이가 있으면, 공부가 더욱 즐거워진다.”
공부중의 평생공부가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하느님 공부, 예수님 공부요, 그래서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믿는 이들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공부하는 평생학인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새로워지는 공부가 진짜 평생공부요 이렇게 사는 것입니다. 제 좌우명이 뭔지 아십니까?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입니다. 하루하루 살 때, 거품이나 환상, 허영은 사라지고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참삶을 살 수 있습니다.
역시 올해 2024년 우리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사순시기 담화문도 참 깊고 풍부하며 참삶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광야를 통해 우리를 자유로 이끄십니다”라는 제하에 일부 내용을 인용합니다.
“사순시기는 은총의 때입니다. 이 은총의 시기에 호세아 예언자의 말처럼, 광야는 다시 한번 우리 첫사랑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형성하시어 우리를 종살이에서 벗어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죽음에서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를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신랑처럼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이시며 우리를 당신께 다시 이끄십니다.”
2월18일자 오늘 가톨릭평화신문에 “서울대교구장 정순택 대주교는 1월30일 서울 명동 교구청 접견실에서 국민의 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의 예방을 받고 환담했다”는 기사 내용도 이채로웠습니다. 대주교는 한위원장에게 “전국을 누비시면서 각계각층의 목소리를 들으실 텐데, 특히 작은 목소리에 더 귀기울여 들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으며, 한위원장은 “포용의 자세를 잘 배우도록 하겠다. 힘없는 소수를 대변하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노력하겠다” 화답했다 합니다.
좌우의 극단의 대립과 갈등, 분열의 상태에서 좌우를 함께 품에 안아야 하는, 어느 한쪽도 내칠수 없는 자비롭고 지혜로운 어머니 교회로서의 통합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고 힘들지... 어머니 교회의 고뇌는 깊을 수뿐이 없습니다. 오늘날 광야 세상에서 겪게되는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사순시기는 물론 우리의 평생 삶에 대한 궁극의 물음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과 독서 말씀이 답을 줍니다. 하루하루 이렇게 살면 됩니다. 끊임없는 영적전쟁의 광야여정에서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광야 여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꿈을,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전삶을 압축 요약하고 있는 사순시기입니다. 사순시기를 잘 살아야 나머지 삶을 잘 살 수 있습니다.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주님과 함께 기쁘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적전투의 삶이라하여 너무 심각하고 긴장하지 마십시오. 베네딕도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놀랍게도 즐거움이란 단어 둘을 오직 사순시기에 대한 장에서만 사용합니다. 앞서도 소개했지만 내용이 고맙고 고무적이라 다시 나눕니다.
“그리하여 각자는 성령의 즐거움을 가지고 자기에게 정해진 분량 이상의 어떤 것을 하느님께 자발적으로 바칠 것이다. 즉 자기 육체에 음식과 음료와 잠과 말과 농담을 줄이고 영적 갈망의 즐거움으로 거룩한 부활 축일을 기다릴 것이다.”
그러니 광야여정의 영적전쟁의 삶,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광야여정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우리 광야여정의 축소판입니다. 예수님을 광야로 인도한 성령은 광야 여정중 사탄과의 영적전투중에도 예수님께 결정적 도움을 주셨음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보다 더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꿈이, 희망이 생생하고, 성령은 물론 교회공동체 형제들의 우군이 있으며, 무엇보다 베드로 사도가 고백하는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면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오르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계시는데, 그분께 천사들과 권력들과 권능들이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광야는 낙원임을 잊지 마십시오.
광야를 광야로 받아들일 때 광야는 낙원이 된다고 토마스 머튼은 갈파했습니다. 오늘 광야여정중의 예수님은 40일 동안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지만 유혹에 넘어가거나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사탄의 유혹에 떨어진 하와와 아담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입니다.
사탄이 없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사탄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때 낙원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통과해가면서 영적성장에 낙원의 실현입니다. 유혹이 없이는 영적성장도 멈춥니다. 그러니 유혹을 없애 달라 기도할 것이 아니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예수님은 사탄이 아닌 성령께, 천사들에 귀를 기울이며 들짐승들과도 평화로운 공존을 이루며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으니 그대로 지상 낙원의 실현입니다. 다음 복음의 짧은 대목이 예수님의 지상낙원의 삶을 요약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우리 삶의 지침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십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시중을 들었다.’
들짐승들이 상징하는바 사람같지 않은 무지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처럼 들짐승들 같은 사람들, 괴물같은 사람들, 사탄같은 사람들도 측은히 불쌍히 가엾이 여기며 평화로이 공존해야 하는 지상 낙원의 현실입니다. 자비와 지혜에 용기를 겸비한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서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시 걱정할 것 없습니다. 영적승리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성령께서 늘 우리와 함께 계시고 천사들 또한 늘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광야여정중에도 낙원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에 결정적 표지 역할을 하는 계약의 표징들인 무지개와 십자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제1독서 창세기에 홍수에서 살아난 노아와 그 가족들은 세례의 물로 구원받은 우리를 상징합니다.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무지개를 가리키며 하신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우리를 향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이것이 나와 땅 사이에 세우는 계약의 표징이 될 것이다. 내가 땅 위로 구름을 모아들일 때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나타나면, 나는 나와 너희 사이에, 그리고 온갖 몸을 지닌 모든 생물 사이에 세워진 내 계약을 기억하고, 다시는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살덩어리들을 파멸시키지 못하게 하겠다.”
구약의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라면 신약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구약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구약에서의 하느님을 제동하는 장치가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였다면, 이제 우리 교회의 시대에 하느님을 제동하는 유일한 장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뿐입니다. 광야 여정, 탈출의 여정에 우리의 결정적 길잡이 역할을 하는, 하느님을 무한히 인내하게 하는, 계약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 회개의 표징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 예수님께서 광야여정, 탈출의 여정중인 우리에게 영원한 길잡이가, 인도자가 되어 주십니다.
부단히 더불어 광야에서의 탈출의 여정을 통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사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오늘 광야의 현실에서 하느님 나라의 꿈을 실현하며 사는 참으로 역동적인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 신자들의 삶입니다. 이런 삶이 주님의 기쁨이 되고 주님의 기쁨은 우리의 힘이 됩니다. 바로 은총의 사순시기는 물론 전생애를 관통하는, 우리가 날마다 살아 내야 할, 다음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의 복음선포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아멘.
2/19(월) 사순제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조재형 신부)
2.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
주님!
언제나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제 자신을 빠져나가 당신께 나아가게 하소서.
어디에 어떤 처지에 있든지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당신을 따라 당신의 나라에 들게 하소서.
오늘, 제 안에 당신의 나라를 이루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구약의 계약의 표징이 무지개라면 신약의 계약의 표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저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가슴이 뛴다”는 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를 볼 때 마다 구약 창세기의 계약의 표징인 무지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수철 신부)
2/19(월) 사순제1주간 월요일, 422(제52)일 기도
복음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작은 친절과 봉사를 기쁘게 하게 하소서.
하느님의 사랑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게 하소서.
- 2024년 2월19일(월) 7시1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