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2월 23일 금요일[(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2월 23일 금요일[(자) 사순 제1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를 고난에서 빼내 주소서. 비참한 저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저의 죄악 낱낱이 없애 주소서.
본기도
신자들이 파스카 축제를 정성껏 준비하며
엄숙히 시작한 육신의 재계로 영혼의 참된 쇄신을 이루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8,21-28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21 “악인도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를 버리고 돌아서서,
나의 모든 규정을 준수하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22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은 더 이상 기억되지 않고,
자기가 실천한 정의 때문에 살 것이다.
23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24 그러나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고,
악인이 저지르는 온갖 역겨운 짓을 따라 하면, 살 수 있겠느냐?
그가 실천한 모든 정의는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배신과 자기가 지은 죄 때문에 죽을 것이다.
25 그런데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 보아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희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26 의인이 자기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것 때문에 죽을 것이다.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는 것이다.
27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28 자기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생각하고 그 죄악에서 돌아서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
복음 환호송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20ㄴ-2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0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21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23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25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26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이 제사를 자비로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주님과 화해하고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나는 죄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죄인이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새롭게 되어
옛 죄를 깨끗이 씻고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을 인자로이 굽어보시어
겉으로 지키는 재계로 마음속 깊이 회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1주간 금요일
학교에 다닐 때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군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타인에게는 부드럽다는 의미였습니다. 반대로 ‘외강내유(外剛內柔)’라는 말은 소인배들의 행동이라고 배웠습니다. 소인배는 자신에게는 부드럽지만 타인에게는 엄격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외강내강(外剛內剛)’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본인에게 엄격할 뿐 아니라, 타인에게도 엄격한 사람입니다. 군대와 같은 조직에서는 필요한 덕목입니다. 생명을 구하는 소방대원들에게도 필요한 덕목 같습니다. ‘외유내유(外柔內柔)’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흔히 ‘술에 술 타고, 물에 물 타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상시에는 큰 무리가 없겠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본인은 물론, 조직에도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자에게는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 생각해 봅니다. 저를 신학교에 보내 주신 아버지 신부님은 ‘외강내강’의 사목자였습니다. 고향이 황해도셨고, 실향민이었습니다. 북한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탈출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혈혈단신으로 사시면서 외강내강의 삶을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 씨에, 옥니에, 곱슬머리 면 고집이 엄청 세다.’ 아버지 신부님은 삼박자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최 씨였고, 옥니였고, 곱슬머리였습니다. 그런 성품이셨기에 교구의 재정 담당을 하였고, 본당 신축을 3번이나 하였습니다. 은퇴하여서도 식복사 없이 모든 것을 혼자 하였습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는 저를 돌아봅니다. 저는 아버지 신부님처럼 ‘외강내강’의 사목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떠올리면 ‘잘 했네, 잘 될 거야’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저는 시편의 이런 말도 좋아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기어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그가 하는 일마다 잘되리라.” 햇님과 바람의 이야기도 좋아했습니다. 결국 길 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는 것은 강한 바람이 아니었습니다. 따듯한 햇빛이 나그네의 옷을 벗게 하였습니다. 저는 제가 무엇인가를 잘 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오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에 저 자신을 맡기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큰 어려움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이든 미리 준비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도 읽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 당신은 습관을 결정할 수는 있다. 그 습관이 당신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외유내유하는 제게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욱’하는 성격입니다. 제가 부족한 부분이 자꾸 드러나면 참지 못하고 자리를 피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지나고 나면 늘 후회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외유내강’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악인이라도 자기가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온유하셔서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했을 때라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스스로의 삶에는 엄격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이야기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입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의 성격이신지요? 어떤 성격이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5,20-26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인간관계 안에서 때로 본의 아니게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건널 때가 있습니다.
주고받은 상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세월이 많이 흘러도 일종의 트라우마로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때 왜 그런 처신을 했을까?
왜 그때 입을 딱 틀어막지 않았을까?
후회하며 자다가도 생각이 떠올라 이불킥을 해보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과 같아, 되돌릴 수 없으니
더 괴롭습니다.
그런데 그런 갈등과 상처는 멀리 시드니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연인,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 매일 얼굴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 사이에
일정의 완충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가까이 지내다 보니 서로 다름으로 인한 고통이 당연히 발생합니다.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바처럼, 나와 다른 한 존재를 견딘다는 것,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모릅니다.
존재로 인한 고통과 십자가는 때로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오늘 우리에게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가르침을 건네고 계십니다.
상호 관계가 극으로 치닫기 전에 예방책을 마련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상호 관계가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는 데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각각 살아온 환경이나 지니게 된 가치관, 정치적 견해 차이 등등 모든 것이 다른 현실에서
너무나 당연히 생각이 다를 것입니다.
따라서 함께 일을 해나가거나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입장 차이가 발생합니다.
그럴때는 적정한 어느 순간 딱 멈추면 좋을 텐데, 그게 또 의지대로 되지 않습니다.
서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언성이 높아집니다.
화를 내고 성을 냅니다.
최악의 상황은 바로 욕설이요 폭력입니다.
상대방을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칩니다.
그럴 때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멱살을 잡던지 주먹을 날릴 것입니다.
그 순간 둘 사이의 관계는 생명력을 잃습니다. 관계는 끝난 것입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살아생전 불붙는 지옥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돌아가실 때까지 이십 년 삼십 년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으셨던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자상하고 인자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분은 당연히 화를 내야 할 상황에서도 절대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온유와 사랑의 박사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의 비결은 그치지 않는 일상적인 기도였습니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1주간 금요일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우리는 지금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의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의로움'입니다.
곧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맺음'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회개와 화해를 요구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참된 의로움'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태 5,20)
오늘 복음은 그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에 대해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형제를 ‘바보’ 혹은 ‘멍청이’라고 모욕하고 멸시하는 것까지도 ‘살인’에 포함시키십니다.
곧 형제에게 ‘성’내고 ‘바보’ ‘멍청이’라고 말하는 언어 폭력도 ‘살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참으로 혀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집회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이들이 칼날에 쓰러졌지만, 혀 때문에 스러진 이들보다는 적다.”
(집회 28,18)
또한 이는 '혀'의 살인뿐만 아니라, 죄의 뿌리인 내면적인 면도 살인에 포함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1요한 3,15)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단지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더 나아가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곧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살인하지 않는 것이 본질인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 본질입니다.
화해하면 살인하지 않게 되지만, 살인하지 않는다고 화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우선하는 일이 화해하는 일입니다.
먼저 화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물을 바칠 때, ‘먼저 화해하라’ 고 하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그러니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곧 예물입니다.
마치 “야훼께서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시고”(창세 4,4)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바로 ‘예물’로 삼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제단의 예물보다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을 바라십니다.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6,24)
그러니 불목한 형제가 있는지 살펴보고, ‘얼른’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일입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의로이 아니라 ‘화해’를 이루는 것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 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2.22.목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1베드5,1-4 마태16,13-19
참 목자 영성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
지난 밤 초춘(初春)에 내린 흰눈이 온누리를 덮었습니다.
나무마다 눈꽃 설화(雪花) 만발한 초봄입니다.
우리 모두 순결한 사랑, 순결한 마음으로 살라 하느님 주신 은총의 선물입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오늘 시편 화답송 후렴은 다음 오늘 감사송(하느님 백성의 목자인 사도)과도 잘 어울립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닮은 사도들이요 오늘날의 주교들, 사제들이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우선적인 직무가 섬김의 목자직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한 목자이신 아버지께서는 양 떼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보호하며 지켜 주시려고,
복된 사도들을 목자로 세우시어, 성자를 대리하여 양 떼를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본기도가 이를 분명히 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베드로 사도의 신앙 고백을 반석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셨으니,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교회가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베드로 반석 위에 세워졌기에 흔들리지 않는 교회요 우리 믿는 이들의 삶입니다.
오늘 축일의 유래를 간략히 살펴 봅니다. 로마시대에는 죽은 이의 기일에 무덤에 모여 추도하는 관습이 있었고,
2월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 행사를 거행했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바로 오늘 축일은 여기서 유래합니다.
이어 바오로 4세(재위1555-1559) 교황이 6-7세기때 갈리아 지방에서 유래된 1월18일을 로마전례력에 수용해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로 정했으며, 1960년 성 요한 23세(재위1958-1963) 교황이 이 사도좌 축일을
2월22일에 지내도록 했습니다.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근거가 되는 교부들의 어록도 참 풍부합니다.
1.“그리스도의 교회는 베드로의 굳건한 반석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성 대 레오 교황)
2.“베드로는 반석을 뜻하는 말인데, 반석은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라는 이름 안에
교회가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3.“이 바위는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고백을 바위라고 표현하신뒤, 그 반석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몹수에스티아의 테오도루스)
4.“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웁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입니다.
곧 반석 위에 세우시어 굳건함과 힘을 지니게 하십니다.”(오리게네스)
5.“사도들은 유일한 초석 예수님 안에 있는 초석들입니다. 설사 사도들이 없다해도
예수님만은 마땅히 초석으로 불리시지만, 사도들은 그리스도 없이는 결코 교회의 초석들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프리마시우스)
6.“‘교회가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마태16,18)’고 말하지만, 모든 사도 위에 세워졌음을
알려주는 말씀도 있습니다(마태18,18).
그들 모두가 하늘 나라의 열쇠를 받았으며 교회의 힘도 그들 모두에게서 나옵니다.
그러나 열둘 가운데 하나가 선택된 것은 분열이 일어나지 않도록 머리가 지명된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
이 모든 교부들의 말씀은 오늘 복음에 근거합니다.
그러니 신앙의 모범인 베드로를 본받아 예수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돈독히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랑할 때 압니다.
사랑과 앎은 함께 갑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기에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히 고백함으로 주님의 극찬과 더불어
전권을 위임 받을 정도로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베드로를 신뢰했는지 깨닫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반석이라 극찬을 받던 베드로가
순식간 사탄의 걸림돌이 되어버립니다.
세 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사랑의 확인을 받아낸 일화(요한21,15-19)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지로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 번 오고 간 문답입니다.
베드로가 이 체험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지요!
베드로가 순교에 이르기까지 항구할 수 있었던 믿음도 이런 체험의 은혜일 것입니다.
새삼 이런저런 시행 착오를 겪으며 깊어지는 믿음의 여정이요 깊어지는 주님과 우정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베드로의 면모는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는 얼마나 위로와 힘이 되는지요!
바로 오늘 제1독서 주님의 사도이자 목자인 베드로의 고백에는 참목자 예수님을 닮은 목자의 사랑이
녹아있음을 봅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믿는 모든 이들에게 큰 가르침과 깨우침을 주는 금과옥조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목자뿐 아니라 양떼 신자들이 으뜸 목자 예수님께 보고 배워야 할 삶의 자세입니다.
참으로 자비와 지혜, 온유와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하나로 녹아 있는 참 목자 예수님을 닮은
아름답고 거룩한 삶의 자세입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논어의 공자 말씀도 주님의 평생 배움의 학인(學人)들인 우리를 격려합니다.
세월과 함께 쌓여 드러나는 ‘공부의 주름’, ‘연륜의 나이테’이길 소망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다산)
“시 삼백편을 외워도, 사방이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공자)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참목자 예수님을 닮아 주님과 사도들과 함께
교회의 반석이 되게 합니다.
또 하나의 베드로 반석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황송스럽고 영광스런 말씀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저승의 세력도 교회를 이기지 못하리라.”(마태16,18). 아멘.
2/23(금) 사순제1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롭고 온유하셔서 우리가 잘못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신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한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이웃이 잘못을 했을 때라도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선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한 없이 넓은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인의 삶이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조재형 신부)
2. 갈등과 상처는 멀리 시드니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사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벌어지지 않습니다.
지극히 가까운 사람들, 예를 들면 배우자나 연인, 형제자매, 절친한 친구, 매일 얼굴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섬세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하루 온종일 가까이 지내는 이웃이라 할지라도, 나와 그 사이에
일정의 완충지대를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생활 속 거리 두기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마태 5, 24)
주님!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늦기 전에 얼른 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서둘러 하게 하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 사랑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이수철 신부)
2/23(금) 사순제1주간 금요일, 426(제56)일 기도
복음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용서하시는 하느님!
자비와 사랑의 하느님!
허물투성이, 죄투성이 저를...
용서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으로 저를 이끄시어...
성령의 뜻을 이루소서.
- 2024년 2월23일(금) 6시20분..수산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