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2월 29일 목요일[(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2. 29. 06:18

[매묵]2024년 2월 29일 목요일[(자) 사순 제2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39(138),23-24 참조
하느님, 저를 꿰뚫어 보시고 제가 걸어온 길 살펴보소서. 저의 길 굽었는지 보시고 영원한 길로 저를 이끄소서.

본기도

하느님,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니
저희 마음에 성령의 불을 놓으시어
굳은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지만, 주님을 신뢰하는 이는 복되다.>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17,5-10
5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 있다.
6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그는 광야의 메마른 곳에서, 인적 없는 소금 땅에서 살리라.”
7 그러나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8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9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10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2.3.4와 6(◎ 40〔39〕,5ㄱㄴ)
◎ 행복하여라,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
○ 행복하여라! 악인의 뜻에 따라 걷지 않는 사람, 죄인의 길에 들어서지 않으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되새기는 사람. ◎
○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아, 제때에 열매 맺고, 잎이 아니 시들어, 하는 일마다 모두 잘되리라. ◎
○ 악인은 그렇지 않으니, 바람에 흩날리는 검불 같아라. 의인의 길은 주님이 아시고, 악인의 길은 멸망에 이르리라. ◎

복음 환호송

루카 8,15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6,19-31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말씀하셨다.
19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20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21 그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개들까지 와서 그의 종기를 핥곤 하였다.
22 그러다 그 가난한 이가 죽자 천사들이 그를 아브라함 곁으로 데려갔다.
부자도 죽어 묻혔다. 23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24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25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26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
27 부자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28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29 아브라함이,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하고 대답하자,
30 부자가 다시 ‘안 됩니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가야 그들이 회개할 것입니다.’ 하였다.
31 그에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일렀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이 제사로 사순 시기를 거룩히 지내게 하시고
겉으로 지키는 재계로 마음속 깊이 회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19(118),1
행복하여라, 온전한 길을 걷는 이들,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이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의 힘으로 저희가 끊임없이 선행을 실천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
주님,
주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는 종들을 굽어보시어
주님의 힘으로 보호하시고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부자와 라자로.

오늘의 묵상

1.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6,19-31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에 가면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부조 조각화 한 점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기괴하고 우스꽝스럽습니다.

그 모습이 사람인 것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애매모호한 작품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관광객들에겐 아무런 의미 없는 작품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유심히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이 작품은 큰 감명과 깨달음을 주곤 한답니다.

 

주인공의 형상은 대충 이렇습니다.

앞머리는 숱이 무성하지만, 뒷머리는 완전 대머리입니다.

발뒤꿈치에는 조그마한 날개가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나의 앞머리가 무성한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가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하게 함이요,

길게 늘어뜨린 이유는 사람들이 나를 발견했을 때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뒷머리가 대머리인 이유는 내가 지나가고 나면 다시는 나를 붙잡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요,

내 발뒤꿈치에 날개가 달린 이유는 최대한 빨리 사라지기 위해서다.

 

나의 이름은 바로 ‘기회’이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부자, 외적으로는 행복한 것처럼 비춰지지만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불행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모를 잘 만났든지, 아니면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 났던지, 엄청난 부자가 되었습니다.

몇 평생을 쓰고도 남을 재산을 축척하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무슨 말이겠습니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 좋은 기회를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것입니다.

관대한 나눔을 통해 어려운 이웃도 돕고 또 자신을 위해서는 하늘에 보화를 쌓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실을 보십시오.

라자로라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거지가 자신의 식탁 바로 아래 기어 다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했습니다.

안타깝게도 하느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을 기회를 놓쳐버린 것입니다.

 

오늘이라는 소중한 기회의 한 가운데를 지나가는 우리 역시 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시시각각으로 기회는 우리 앞에 펼쳐집니다.

다시금 새출발 할수 있는 기회, 사랑을 실천할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수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


2.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2주간 목요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이렇습니다. “1347, 칼레는 영국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지만, 더 이상 원병을 기대할 수 없어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후에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자비를 구하는 칼레시의 항복 사절단이 파견됩니다. 그러나 점령자는 모든 시민의 생명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누군가가 그동안의 반항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라며 이 도시의 대표 6명이 목을 매 처형받아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칼레시민들은 혼란에 처했고 누가 처형을 당해야 하는지를 논의했습니다. 모두가 머뭇거리는 상황에서 칼레시에서 가장 부자인 피에르가 처형을 자청하였고 이어서 시장, 상인, 법률가 등의 귀족들도 처형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처형을 받기 위해 교수대에 모였습니다. 그러나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들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죽음을 자초했던 시민 여섯 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하여 살려주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역사가에 의해 기록되고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귀족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할 수 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습을 종종 보곤 합니다. 본당에 교무금 제도도 없고, 헌금도 그리 많이 내지 않지만, 본당을 위해서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그 자녀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후원하는 부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복지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서 가난 때문에 의료혜택을 못 받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정부에서 의, , 주에 대해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도 듣곤 합니다. “미국에서 살려면 아주 잘 살거나, 아주 못살아야 한다.” 중산층은 세금에 대한 의무는 많지만,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혜택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저도 신문사를 운영하면서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4달 동안 급여를 받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직원들도 몇 년 동안 임금 인상 없이 근무해 주었습니다. 신문사를 떠나면서 후원금을 내고 왔습니다. 제가 5년 동안 뉴욕에서 잘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자리를 마련해 준 신문사에 대한 애정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후임 신부님이 신문사를 운영할 수 있도록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분이시니, 너희도 거룩하게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에서 벗어난 부유한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합니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믿고 종업원들에게 막말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민의 의무인 입대를 피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을 받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그런 부당하고 부정한 청탁의 결과로 우리 사회에 부정과 부패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수사권과 공소권을 남용해서 이득을 챙기려는 일부 검사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사회적인 약자와 억울한 피해자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권력과 정치인들이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면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부유할지라도, 가난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은행이라는 곳간에 재물을 쌓듯이,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재물을 쌓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그의 신뢰를 주님께 두는 이는 복되다. 그는 물가에 심긴 나무와 같아 제 뿌리를 시냇가에 뻗어 무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움 없이 그 잎이 푸르고 가문 해에도 걱정 없이 줄곧 열매를 맺는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사순 제2주간 목요일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대조된 모습을 통해, 불신과 재물의 올가미에 사로잡힌 우리를 하느님의 말씀에로 초대합니다.

 

이 비유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자주색 옷과 고운 아마포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롭게 살았다. 

그의 집 대문 앞에는 라자로라는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사실 이 부자는 특별한 악행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재물을 자신의 호화로운 생활과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고, 타인에게는 무관심하고 인색했습니다.

곧 종기투성이의 몸으로 대문 앞에 누워있는 가난한 라자로를 무시하고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해서 할 바를 다한 것이 아니라 선행과 자비를 베풀지 않음이 곧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야고 4,17)

다시 말하면,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곧 죄임을 말해줍니다. 

그가 심판받은 것은 그가 단순히 부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하지 않은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어야 하고, 마시되 자신의 혀만 적시는 것이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재물을 소유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서, 자비를 입어 부자가 되었으니 가난한 이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오늘 복음에서 부자가 죽어서 아브라함에게 한 말, 곧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 16,24)라는 간청은 ‘제가 자비를 베풀게 해주십시오.’ 라는 간청으로 바뀌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부자가 대문 앞에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로 누워있어도 못 본 것은 자신의 호사스러움과 즐거움, 탐욕과 인색에 눈이 가려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형제들 사이에, 또 가난한 이들과의 사이에, 냉대와 무시와 무관심의 골짜기를 파놓아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것은 곧 저승에서의 골짜기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라자로’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그렇습니다.

라자로가 은총을 입은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승에서 처지가 뒤바뀐 부자는 자기 형제들에게 라자로를 보내달라고 청하지만,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루카 16,29)

부자는 이승에 살고 있는 자신의 형제들의 회개를 위해서 라자로를 보내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보다 더 효과적일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브라함은 이승에서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이 있으니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덧붙입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루카 16,31)

사실 우리가 당신을 믿지 못함은 기적을 보지 못했거나 듣지 못했거나 체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듣고 보고 체험하고도 받아들이지를 않는 완고함 때문일 것입니다.

곧 믿음을 일으키는 것은 기적이 아니라, 말씀을 듣고 받아들임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들이 복되다.”

(루카 11,28)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2.28.사순 제2주간 수요일                                                           예레18,18-20 마태20,17-28

 

                                                        “어떻게 살아야 하나?”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

 

나라는 물론 전세계적으로 매우 혼란스럽고 좀처럼 길이, 빛이,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희망을 주는 지도자들도 참 보기 힘듭니다.

국내 사정이나 정치사정은 더욱 그러합니다.

극한 대결과 분열상태입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진리를 또 확인하게 됩니다.

과연 인류는, 역사는 진보하는가?

때로는 회의하기도 합니다.

저절로 묻게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입니다.

강론 제목이자 답은 단 하나로 요약됩니다.

“종과 섬김의 영성으로”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마다 이때쯤 맞이하는 은총의 사순시기가 우리를 구원합니다.

참으로 회개와 더불어 깨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몫을 다하며 제대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대표적 <자화상>이란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八割)이 바람”이라 했습니다.

‘바람’으로 상징되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모습을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바람을 산으로 바꿔 “요셉수도원에서 36년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불암산”이라 주저없이 고백합니다.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지금도 여전히 되뇌는 고백입니다.

 

산은 한결같은 정주의 상징입니다.

제가 쓴 무수한 시중 불암산이 대상인 경우도 참 많습니다.

불암산을 볼 때마다 저절로 떠오르는 시편 121장입니다.

 

“산들을 우러러 눈을 드노라, 어데서 구원이 내게 올런고?

 구원은 오리라 주님한테서, 하늘땅 만드신 그님한테서.”(시편121,1-2)

 

여기서 오랫동안의 삶을 되돌아 보면 힘들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고

말그대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고백대로 살아온 느낌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란 예감이 듭니다.

18년전 2006년 봄철에 써놨던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라는 시도 생각납니다.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아무리 세월 흘러도

 해마다 봄마다 신록의 생명 가득한 산, 꿈꾸는 산

 산은 나이도 먹지 않나 보다

 세월도 비켜가나 보다

 늘 봐도 늘 새롭고 좋은

 늘 거기 그 자리 그대로의 정주의 불암산이다”-2006 봄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것은 여기 살면서 답답하고 막막한 적은 있었어도

“실망, 원망, 절망”의 삼망은 결코 단 한번도 없었다는 것이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궁극의 믿음과 희망, 사랑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놀라운 책을 구입하여 읽고 있습니다.

70대 후반의 어른과 30대 초반의 손자뻘 후배가 나눈 “우리에게는 아직 시간이 있습니다”라는 대화집입니다.

손자뻘 되는 청년의 서문 일부를 나눕니다.

 

“할아버지뻘 되는 정성헌 선생님을 대할 때마다 저는 끝없는 낙관에 놀랍니다.

젊은이들은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을 때 선생님은 오히려 미래를 준비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0년이 남았다’면서 저를 다그치시죠. 따르고 싶은 어른이 생기니 앞길이 보입니다.

저는 고작 6년차인데 선생님은 지구 생명 살리기 운동만 60년 하셨습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 역설적이게도 먼저 태어나신 선생님에게서 저의 미래를 봅니다.”

 

절망이 대죄입니다.

제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지론입니다.

“넘어지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게 대죄이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참으로 탄력좋은 파스카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바로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가 복음의 예수님이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

사면초가의 절망적 상황에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두분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 에 답을 줍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예레미야의 절박하고 간절한, 한결같은 기도가 답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 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보소서.

선을 악으로 갚아도 됩니까?...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기도는 하느님 향한 영혼에 창문을 내는 것입니다.

햇빛같은 은총이, 시원하고 향긋한 바람같은 성령이 들어오지 않는 창문없는 방같은 영혼이라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오래전 써놨던 “좋은 창 지닌 방하나만 있어도”란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 그림, 사진...

 대부분이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보다 더 좋은

 임만드신 창문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년 봄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 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듭니다.

말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만나러 매일 외딴곳을 찾았던 듯 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대응이 극히 침착합니다.

제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좌절하거나 흥분함이 없이 부인과 문답을 나누셨고, 아마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들었을 것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내공이 얼마나 깊은지, 바로 하느님 향한 신뢰와 희망의 반영임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도 제자공동체의 유일한 대안이자 처방은 “종과 섬김의 영성”뿐임을

천명하십니다.

형제들의 공동체에서 군림과 세도는 일체 배제됩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왔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도 같으니 섬김의 종입니다.

이에 영감받은 대 교황 성 그레고리오는 교황을 “하느님의 종들의 종”이라 정의합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 믿는 이들은 공통적으로 섬김의 직무인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할 수 있으며,

영성이 있다면 섬김과 종의 영성뿐임을 깨닫습니다.

 

학교, 병원, 식당처럼, 주님의 교회나 수도원도 예외없이 서비스업에 속합니다.

저는 서비스업의 3대 요건에 늘 유의하곤 합니다.

첫째 사람이 친절하며 좋아야하고, 둘째 실력이 좋아 유능해야 하고,

셋째 안팎의 환경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며, 이렇게 서비스업의 삼박자를 갖출 때

손님들도 끊임없이 줄을 이을 것입니다. 

 

사람이 친절하고 좋아도 실력이 없어 무능하면 서비스업에 실격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로 우리 요셉수도원이 서비스업의 3대 요소를 갖췄는가 점검해 보곤 합니다.

 

일례로 의사가 사람만 좋고 실력이 없어 무능하다면 정말 쓸모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환경이나 건물이 아닌 사람임을 깨닫게 됩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무장하여 당신의 서비스업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2/29(목) 사순제2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다시금 새출발 할수 있는 기회, 사랑을 실천할수 있는 기회, 하느님께서 내뻗으시는 손을 잡을 기회,

구원받을 수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기회가 온다’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기회는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나가는 것입니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기 때문에 잘 준비한 사람만이 잡을 수 있습니다.

 

꿈과 비전을 가진 사람, 열정과 지혜를 가진 사람, 사랑과 자비를 지닌 사람만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기회를 잘 잡아낼 수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2.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놀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을 살았다면 살아서도 행복했고, 죽어서도 하느님의 품에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재물의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부유할지라도, 가난할지라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2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은행이라는 곳간에 재물을 쌓듯이, 천국이라는 곳간에도 재물을 쌓아야 하겠습니다.(조재형 신부)

 

3.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가 이승에서 파놓고 건너가지 않은 그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도 그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라자로가 구원을 입은 것이 그의 가난하고 고통 받은 삶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도움과 자비를 입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을 입고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영혼의 방에 하느님 향한 창을 내는 일이 바로 기도입니다.

사면초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를 끄집어 낼 수 있는 분은 전능하고 자비하신 주님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 역시 사면초가의 상황입니다.

세 번째 수난과 부활의 예고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은 사흗날에 되살아날 것이다.” 말마디에서 보다 시피 예수님은

부활의 희망에로 활짝 열린 문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공동체안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늘 외로웠고 고독했으리란 생각이듭니다.

말그대로 오합지졸의 공동체, 동상이몽, 동문서답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를 만나러 매일 외딴곳을 찾았던 듯 싶습니다.

수난과 부활의 예고에도 동참하거나 공감하는 이들 하나도 없고 심지어 제베데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두 아들이 예수님의 나라가 들어설 때 예수님 자리 양쪽에 있게 해달라는 청을 합니다. 

모두가 철부지들 같습니다. (이수철 신부)

 

2/29(목) 사순제2주간 수요, 432(제62)일 기도

 

복음 <너는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부자는 가련한 라자로를 거들떠보지도 않으며, 자신과 라자로 사이에 골짜기를 파놓고 분리된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에서의 분리의 골짜기는

저승에서 부자가 건너갈 수 없는 분리의 골짜기가 되고 맙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가난한 이가 종기투성이 몸으로 누워 있었다.”

(루카 16,20)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 타인의 처지를 볼 줄 알게 하소서.

음식을 먹되 나누어 먹고, 자신의 혀만 아니라 남의 혀도 적셔주게 하소서.

재물을 소유하되 소유당하지 않게 하시고, 탐욕에 빠지지 않고 인색하지 않게 하소서.

악을 저지르지 않을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시고,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2월29일(목)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