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3월 4일 월요일[(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3월 4일 월요일[(자) 사순 제3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본기도
주님 없이는 교회가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사오니
언제나 주님의 은총으로 교회를 이끄시고
무한하신 자비로 깨끗하게 하시어
저희를 보호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5,1-15ㄷ
그 무렵 1 아람 임금의 군대 장수인 나아만은 그의 주군이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주님께서 나아만을 시켜 아람에 승리를 주셨던 것이다.
나아만은 힘센 용사였으나 나병 환자였다.
2 한번은 아람군이 약탈하러 나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사로잡아 왔는데,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곁에 있게 되었다.
3 소녀가 자기 여주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르신께서 사마리아에 계시는 예언자를 만나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주인님의 나병을 고쳐 주실 텐데요.”
4 그래서 나아만은 자기 주군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서 온 소녀가 이러이러한 말을 하였다고 아뢰었다.
5 그러자 아람 임금이 말하였다.
“내가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써 보낼 터이니, 가 보시오.”
이리하여 나아만은 은 열 탈렌트와 금 육천 세켈과 예복 열 벌을 가지고 가서,
6 이스라엘 임금에게 편지를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편지가 임금님에게 닿는 대로, 내가 나의 신하 나아만을
임금님에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그의 나병을 고쳐 주십시오.”
7 이스라엘 임금은 이 편지를 읽고 옷을 찢으면서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8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는 이스라엘 임금이 옷을 찢었다는 소리를 듣고,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였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9 그리하여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대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10 엘리사는 심부름꾼을 시켜 말을 전하였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11 나아만은 화가 나서 발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
12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은 성을 내며 발길을 옮겼다.
13 그러나 그의 부하들이 그에게 다가가 말하였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14 그리하여 나아만은 하느님의 사람이 일러 준 대로,
요르단 강에 내려가서 일곱 번 몸을 담갔다.
그러자 그는 어린아이 살처럼 새살이 돋아 깨끗해졌다.
15 나아만은 수행원을 모두 거느리고 하느님의 사람에게로 되돌아가
그 앞에 서서 말하였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그리나이다. ◎
○ 제 영혼이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나이다.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 가서 뵈오리이까? ◎
○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 당신의 거룩한 산, 당신의 거처로 데려가게 하소서. ◎
○ 저는 하느님의 제단으로 나아가오리다. 제 기쁨과 즐거움이신 하느님께 나아가오리다. 하느님, 저의 하느님, 비파 타며 당신을 찬송하오리다. ◎
복음 환호송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 나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정성껏 봉헌하는 이 예물을 받으시어
저희에게 구원의 성사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신자들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여
해마다 깨끗하고 기쁜 마음으로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게 하셨으며
새 생명을 주는 구원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을 찬양하여라, 모든 민족들아. 우리 위한 주님 사랑 굳건하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를 깨끗하게 하시고
모두 하나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간절히 기도하는 백성을
주님의 오른손으로 지켜 주시고 깨끗하게 하시어
현세의 위로를 받으며 미래의 행복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일수록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심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수 있듯이, 사소하게 나간 말 한마디가 큰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약점을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예뻐만 보이는 장미의 정원에도 자세히 보면 잎이 찢어진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색이 바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 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이스라엘 왕은 먼저 불평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유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의 부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 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나병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제게 위로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사순 제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4,24-30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 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 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둡니다. 한달 두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3.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 강론
사순 제3주간 월요일
"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이스라엘의 자만은 자기들만이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선민사상’이었습니다.
그래서 타민족에 대해서는 냉대하는 태도였고 늘 교만으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에게서 구원을 찾을 수 있는가?’하는 그들의 마음보는 자기들은
어째거나 ‘자동구원’이고 타민족은 멸망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고질적인 사고에 획을 긋는 이야기 하나는 아람 장수인 나아만의
나병치유의 사건이라 하겠습니다.
나아만의 몸종인 한 이스라엘 소녀에 의해서 임금에게까지 예언자 엘리사가 알려졌습니다.
나아만은 위엄을 차리며 군마와 병거를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러나 엘리사의 심부름꾼에 의해서 들려지는 것은 너무나 기대에도
한참 못 미치는 짧은,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 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2열왕 5,10)라는 간단한 말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냉대하거나 깔보는 말로 여기며 나아만은 화가 났지만 부하들의 만류도 있고 해서
그는 예언자의 말대로 요르단 강물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담급니다.
물론 예언자의 말대로 그의 나병은 말끔히 낫습니다. 나아만은 수행원과 함께
엘리사에 앞에서 진심을 털어 놓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15절)
비록 이방인이라 해도 엘리사 예언자를 통하여 보여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처럼 당신 고향을 찾아가셔서 회당에 들어가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냉담한 모습에 세렙타 과부와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꺼내서 말씀하시지요.
이방인을 고쳐주신 하느님의 두 기적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만에 대한
일침(一針)이셨습니다.
주님의 비판하는 말씀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그들은 화가 난 것이지요.
그들은 분에 못이겨 예수님을 끌고 고을 밖까지 내 몰고 갑니다. 벼랑 끝에서 주님께서는
의연히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떠나십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화가 나서 무력으로 몰고 가는 그들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수습하셨는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무리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해도 아직 ‘주님의 때’가 오지 않으셨다는 것과
그들 앞에서 의연하신 모습을 침묵가운데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의 교만은 어떤 약이라도, 설령 주님의 말씀으로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푸대접과 냉대를 받으셨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만과 교만은 자신의 마음을 닫게 하고 굳을 대고 굳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보통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의 이웃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그런 모습을 못 본다는 사실입니다.
교만이 뚝뚝 떨어지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좋은 말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결국 그는 이웃에게서
귀와 눈을 막고 점점 못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유능하다고 해도 이 교만에 빠지면 결국은 아무 쓸모짝에도 없는 처지가 되더라구요.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는 남에게서 교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꽁꽁 숨어 있는
교만을 찾아내야 합니다.
남보다 우월하고 잘 났다는 마음, 남 보다 더 알고 할 수 있다는 심보도 따지고 보면
다 ‘그 밥에 그 나물’인 것이지요.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들보는 못 보는 나의 이 심보에 주님의 사랑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면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을 향한 손가락이 나 자신을 가리키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탓을 아파하는 날이면
더 좋겠습니다.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4.3.3.사순 제3주일 탈출20,1-17 1코린1,22-25 요한2,13-25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성전사랑, 계명준수, 지혜추구-
“주님의 법은 완전하여 생기 돋우고,
주님의 가르침은 참되어 어리석음 깨우치네.”(시편19,8)
신자가, 수도자가, 사제가 되기 전에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일은 평생과제임을 깨닫습니다. 참된신자라면 참된사람이겠고
이또한 평생과제라는 것입니다.
이런 참사람되는 평생공부보다 더 중요한 공부는 없을 것입니다.
89세 고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참신자이자 참사람의 모범입니다.
하루하루 100% 삶을 사시는 분입니다.
세상에서 교황님보다 부지런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교황님이 어제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좋으실대로(please)’ 그리고 ‘감사합니다(thank you).’두 말마디입니다.”
어린이들 접견시 하신 말씀입니다.
이런 평범하나 친절한 말마디가 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합니다.
“정의를 행하는 것은 용기의 덕을 요구한다.”
교황청 사법의 해를 맞이하여 교황청 법조인들 알현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교황님과 함께 광범위한 대화를 나눴음에 감사한다.”
교황님 알현후 하신 독일의 수상이자 사회민주당 정치가인 올라흐(Olaf)의 말입니다.
또 교황님은 사별가족들과의 접견중에는 이들이 기도중에 위로를 발견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오늘의 다산 어록과 공자의 말씀이 참사람이 누구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해 솔직하고 진심을 다할 때, 상대에 대한 진심도 흘러나온다.”-다산
‘자로가 군주를 섬기는 자세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속이지도 숨기지도 말고, 바른말을 하는 것이다.”-공자
아주 예전 변호사 사무소를 찾았을 때 벽에 걸려있던 액자 안에 ‘공선사후(私先公後)’라는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아마도 그 변호사의 좌우명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요즘 공천파동중 회자되는 말마디가 ‘선당후사(先黨後私)’입니다.
모두가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선을 우선시하는 분별의 지혜를, 참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삶의 모습입니다.
참신자와 참사람이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며칠전 병원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던중 1회용 커피를 마시려고 물을 탔을 때
녹지 않아 웬일인가 당황했는데 무심코 찬물 꼭지를 눌렀던 것입니다.
좀 멀리서 노모와 함께 기다리던 젊은 자매가 급히 오더니 조용히 다시 다른 컵 따뜻한 물에
믹스커피를 타주고 앞서의 커피를 내다 버리고 제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사소한 일 같지만 얼마나 고맙던지 그 친절한 배려의 사랑에 제가 미혼의 젊은 사람이었다면
프로포즈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고, 아들이 있다면 며느리로 삼고 싶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친절한 배려의 사람이야말로 참사람이자 참신자의 모범이겠습니다.
무엇보다 잘 떠나는, 마지막 잘 떠나는 죽음에서 드러나는 삶의 향기입니다.
예수님은 떠나셨지만 온 인류에게 미사라는 참좋은 영원한 생명의 선물을 남기셨고 부활하시어
늘 우리와 함께 계시니 참으로 잘 떠남의 모범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처럼 잘 떠나는 참된신자로서의 삶이라면 그대로 참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바로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첫째,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성전을 사랑합니다.
성전사랑은 성전정화로 자연스럽게 표현됩니다.
공동체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성전은 주님이 삶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주님을 사랑하듯 주님의 집이자, 기도의 집, 환대의 집,
평화의 집인 성전을 사랑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의 성전정화 활동을 통해 자연스럽게 표출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환전꾼들을 내쫓으시고 비둘기 파는 가난한 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는 말씀에
제자들은 즉시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을 알아 챘기에 저절로 “당신 집에 대한 열정이 저를 집어삼킬 것입니다.”
라는 성경 말씀을 연상합니다.
세상을 성화(聖化)해야할, 세상의 마지막 영적 보루인 거룩한 성전이 속화(俗化)된다면
정말 대책이 없을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안에 다시 세우겠다.”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마침내 당신 몸이 영원한 성전이 될 날을 내다보는 주님이시며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 성전에 머뭄으로 이미 그 혜택을 풍성히 누리고 있습니다.
건물의 성전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공동체가, 우리 하나하나가 주님의 성전이니
성전정화의 개념은 참 넓습니다.
사순시기는 회개의 시기이자 성전정화의 시기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보이는 성전정화는 물론
공동체 성전의 정화로, 그리고 극기, 절제, 선행, 단식, 기도, 자선 활동을 통해 각자 자기 성전정화로
드러나야 함을 봅니다.
둘째,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집인 성전을 사랑함과 동시의 하느님의 계명을 사랑합니다.
십계명은 물론 주님의 계명은 한결같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사랑 역시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계명준수의 구체적 실천을 통해 환히 드러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온 인류에게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사랑 선물인 십계명을 소개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십계명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2.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3.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
4.부모에게 효도하라.
5.사람을 죽이지 마라.
6.간음하지 마라.
7.도둑질을 하지 마라.
8.거짓증언을 하지 마라.
9.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10.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예나 이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공동체에 적용되는 참신자는 물론 참사람이 되기 위한
삶의 기본 자세에 대한 구체적 가르침이 십계명입니다.
무엇보다 십계명을 포괄하는 사랑의 이중계명인 경천애인과 황금률, 그리고 마태복음 산상설교중
진복팔단의 실천에 까지 이른다면 말그대로 금상첨화, 사랑의 완성이자 하느님 사랑의 절정이 될 것입니다.
셋째,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지혜입니다.
삶의 지혜, 분별의 지혜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무지에 대한 답이 지혜요, 지혜 또한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입니다.
회개와 더불어 은총의 선물이 자기를 아는 겸손과 지혜입니다.
교회학자 축일시 새벽 독서기도 성무일도시 초대송 후렴과 아침기도시 성경소구도 은혜롭습니다.
“지혜의 원천이신 주님께, 어서와 조배 드리세.”
“나는 지혜를 욕심을 채우려고 배우지 않았고, 이제 그것을 아낌없이 남에게 주겠다.
나는 지혜가 주는 재물을 하나도 감추지 않는다.
지혜는 모든 사람에세 한량없는 보물이며 지혜를 얻은 사람들은 지혜의 가르침을 받은 덕택으로
천거를 받아 하느님의 벗이 된다.”(지혜7,13-14)
하느님과 우정이 깊어지면서 지혜의 사람이 됩니다.
지식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혜가 좋아서 교회학자임임을 깨닫습니다.
지혜중의 지혜가, 지혜의 결정체가, 하느님의 지혜가 바오로 사도가 고백하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십니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보다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역시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한결같은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2.한결같은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3.한결같은 지혜추구의 삶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참신자의 삶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주님의 규정은 올바르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주님의 계명 밝으니, 눈을 맑게 하네.”(시편19,9). 아멘.
3/4(월) 사순제3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 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 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양승국 신부)
3. 이방인을 고쳐주신 하느님의 두 기적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만에 대한
일침(一針)이셨습니다.
주님의 비판하는 말씀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그들은 화가 난 것이지요.
그들은 분에 못이겨 예수님을 끌고 고을 밖까지 내 몰고 갑니다. 벼랑 끝에서 주님께서는
의연히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떠나십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는 남에게서 교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꽁꽁 숨어 있는
교만을 찾아내야 합니다.
남보다 우월하고 잘 났다는 마음, 남 보다 더 알고 할 수 있다는 심보도 따지고 보면
다 ‘그 밥에 그 나물’인 것이지요.
남의 눈에 티끌을 보면서 내 안에 있는 들보는 못 보는 나의 이 심보에 주님의 사랑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돌아서면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남을 향한 손가락이 나 자신을 가리키고 가슴을 치며 자신의 탓을 아파하는 날이면
더 좋겠습니다.(정인준 신부)
4. 하느님의 지혜라 일컫는 예수님과 우정이 깊어질수록 지혜로움 삶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참된 신자로 살 수 있을까요?”
1.한결같은 성전사랑의 삶입니다.
2.한결같은 계명준수의 삶입니다.
3.한결같은 지혜추구의 삶입니다.(이수철 신부)
3/4(월) 사순제3주간 월요일, 436(제66)일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엘리야나 엘리사처럼 유다인들에게만 파견되신 것이 아니다.>
이방인을 고쳐주신 하느님의 두 기적 이야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만에 대한 일침(一針)이셨습니다.
주님의 비판하는 말씀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곤 그들은 화가 난 것이지요.
그들은 분에 못이겨 예수님을 끌고 고을 밖까지 내 몰고 갑니다.
벼랑 끝에서 주님께서는 의연히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떠나십니다.
사순절을 지내는 우리는 남에게서 교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꽁꽁 숨어 있는 교만을 찾아내야 합니다.
아버지 하느님!
겸손하게 하소서.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애쓰지 않게 하소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내놓을 줄 알게 하소서.
- 2024년 3월4일(월) 7시30분...수산나 -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