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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20 글/시]세계적인 문호를 만든 한마디-따뜻한 하루[355]/의성(醫聖) 장기려

마르티나 2024. 3. 20. 09:42

2024년 3월20일(수) 글/시

 

세계적인 문호를 만든 한마디 / 따뜻한 하루[355]

  

 

덴마크의 오덴세라는 마을에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한 그는 열한 살 때 희곡을 써, 기대를 하고는 사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반응은 냉담했고 '이걸 글이라니?'라며 되레 핀잔을 주었습니다.

 

소년이 크게 실망한 채 울상으로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는 그를 꽃밭으로 데려갔습니다.

"여기 잎을 보렴, 지금은 보잘것없지만 언젠가는 꽃 피우겠지, 이처럼 너도 마찬가지란다."

어머니 말에 용기를 얻은 그는, 훗날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고 어른들을 위로하는

위대한 작가로 '미운 오리 새끼, 성냥팔이 소녀' 등을 집필한 세계적인 문호 안데르센입니다.

 

성경에도 칭찬이 미치는 결과에 대해 근심과 대조해 언급합니다(잠언 12,25).

마음속의 근심은 사람을 짓누르지만 좋은 말 한마디가 그를 기쁘게 한다.’

 

예수님께서도 베드로의 고백에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라며 이르십니다(마태 16,18-19).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렇습니다.

한 사람의 가능성은 열매를 맺기 전까진 크기와 무게를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새싹과 같아서,

주변에 따뜻한 말 한마디에 작은 꽃이 되기도, 나아가서는 매우 큰 나무가 되기도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예수님께서는 너는 행복하다!”라고 칭찬하시며, 그에게 교회 수위권을 맡기십니다.

 

감사합니다. ^^+

 

 


 

"의성(醫聖) 장기려"

 

바보 의사 '장기려 박사' 이야기 입니다.
제가 밤에 뒷문을 열어 놓을 테니

어서 집으로 가세요.
장기려 박사는 어느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막막해 하고 있을 때 이를

눈치 채고는 병원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가게 해 주었습니다.


이 환자에게는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

- 원장 -
병이 나으려면 무엇보다
잘 먹어야 하는 환자에게
장기려 박사가 써준 처방전 입니다.


서울대,부산대 의대 교수,
부산 복음병원 원장을 지냈지만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에게는

방한칸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재직중
6.25가 발발했습니다.
이남으로 내려온 후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과

전쟁 부상자들을 무료로 진료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 었습니다.


그는 1968년 당시 100원 하는

담뱃값만도 못한 월 보험료 60원에

뜻있는 사람들과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설립하여 1989년 전 국민에게 의료보험이
확대될 때까지 20만명의 영세민

조합원에게 의료혜택을 주었습니다.
국가보다 1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의료보험 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를 이렇게
불렀습니다 바보...그는 바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인생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인생의 승리는 사랑하는 자에게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철저히 청지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했고
집 한 채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었고

뇌경색으로 반신이 마비될 때까지
무의촌 진료를 다녔습니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했고

자신이 칭송받는것을 싫어 했습니다.
그는 이웃과 나누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특히 아내에 대한 그의 극진한 사랑은

육체나 환경을 초월한 영혼과
영원의 사랑이었습니다.


1950년 12월 평양의대 병원 2층

수술실에서 그가 밤새워 가며 부상당한

국군 장병들을 수술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탄이 병원 3층에 떨어졌습니다.
국군들은 모두 재빨리
철수해야 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생이별을 하게 되었고 일평생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을 가슴에 품고

아내를 그리워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주변의 많은 사람이 그에게 재혼을

권했지만 그는 언제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 했습니다.


한 번 사랑은 영원한 사랑 입니다.

나는 한 여인만을 사랑하기로

이미 약속을 했습니다.
나는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잠시 그저 혼자 살겠습니다.
그가 부인을 그리며 1990년에 쓴

망향편지는 우리들의 가슴을

에이는 듯 합니다.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 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허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미국에서 북한을 많이 도운
그의 제자가 북한 당국과

합의하여  중국에서 장기려 부부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어코 그 기회를

사양 하였습니다
나만 그런 특권을 누리면  다른

이산가족의 슬픔이 더 커진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결국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아내를 그리워 하다가 만나지 못하고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 85세를
일기로 소천하셨습니다.


그때 한국의 언론은 ‘한국의슈바이처’

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아쉬워 했습니다.
그는 어두운 밤과 같은
그 시대에 밝은 빛을 비추며
병든 사람들을 섬기면서 겸손하고

가난하고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醫聖, 장기려 박사님의 바보처럼 사는 삶

이시대를 밝히는 등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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