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17일 금요일[(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5. 17. 08:04

[매묵]2024년 5월 17일 금요일[(백) 부활 제7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묵시 1,5-6 참조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 피로 우리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가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가 되게 하셨네. 알렐루야.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예수는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합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25,13ㄴ-21
그 무렵 13 아그리파스 임금과 베르니케가 카이사리아에 도착하여
페스투스에게 인사하였다.
14 그들이 그곳에서 여러 날을 지내자
페스투스가 바오로의 사건을 꺼내어 임금에게 이야기하였다.
“펠릭스가 버려두고 간 수인이 하나 있는데,
15 내가 예루살렘에 갔더니 수석 사제들과 유다인들의 원로들이
그에 대한 소송을 제기하면서 유죄 판결을 요청하였습니다.
16 그러나 나는 고발을 당한 자가 고발한 자와 대면하여
고발 내용에 관한 변호의 기회를 가지기도 전에
사람을 내주는 것은 로마인들의 관례가 아니라고 대답하였습니다.
17 그래서 그들이 이곳으로 함께 오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그다음 날로 재판정에 앉아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18 그런데 고발한 자들이 그를 둘러섰지만
내가 짐작한 범법 사실은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19 바오로와 다투는 것은, 자기들만의 종교와 관련되고,
또 이미 죽었는데 바오로는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예수라는 사람과 관련된 몇 가지 문제뿐이었습니다.
20 나는 이 사건을 어떻게 심리해야 할지 몰라서,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
그곳에서 이 사건에 관하여 재판을 받기를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21 바오로는 그대로 갇혀 있다가 폐하의 판결을 받겠다고 상소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황제께 보낼 때까지 가두어 두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3(102),1-2.11-12.19와 20ㄱㄴㄹ(◎ 19ㄱ)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셨네.
또는
◎ 알렐루야.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
○ 주님은 당신 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당신 왕권으로 만물을 다스리시네.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천사들아, 그분 말씀을 따르는 힘센 용사들아. ◎

복음 환호송

요한 14,26
◎ 알렐루야.
○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시리라.
◎ 알렐루야.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5-1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아침을 드신 다음,
15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16 예수님께서 다시 두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7 예수님께서 세 번째로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므로
슬퍼하며 대답하였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1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 가리키신 것이다.
이렇게 이르신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주님의 백성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드리는 이 제물을 받아들이시고
성령을 보내시어 저희 마음을 깨끗하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부활 감사송 4 <파스카 신비로 새로워진 세상>
주님, 언제나 주님을 찬송함이 마땅하오나,
특히 그리스도께서 저희를 위하여 파스카 제물이 되신 이때에,
더욱 성대하게 찬미함은,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이제 죄와 죽음은 사라지고,
타락하였던 만물이 새로워지며,
그리스도 안에서 저희 생명이 온전히 회복되나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또는>
<주님 승천 감사송 1 : 승천의 신비>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영광의 임금님이신 주 예수님께서는 죄와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로서
(오늘) 천사들이 우러러보는 가운데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셨으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중개자, 세상의 심판자,
하늘과 땅의 주님이 되셨나이다.
저희 머리요 으뜸으로 앞서가심은
비천한 인간의 신분을 떠나시려 함이 아니라
당신 지체인 저희도 희망을 안고 뒤따르게 하심이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기쁨에 넘쳐 온 세상이 환호하며
하늘의 온갖 천사들도 주님의 영광을 끝없이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6,13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너희에게 모든 진리를 가르쳐 주시리라. 알렐루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하느님,
신비로운 성사로 저희를 기르시고 거룩하게 하시니
이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부활 제7주간 금요일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

 

요즘은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때문에, 이스라엘과 이란의 긴장 때문에 이스라엘 성지순례가 어렵습니다. 저는 30년 전에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처음 다녀왔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한 번도 안 간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간 사람은 없다.” 유명한 맛 집을 한 번만 가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 번 다녀온 사람은 기회가 주어지면 또 가기 마련입니다. 뉴욕에서 지낼 때입니다. 제가 주로 가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대박집, 금성가든, 제주도, 곱창이야기, 병천순대, 나주곰탕’을 자주 갔습니다. 자주가면 ‘단골’이 되고, 단골이 되면 특별한 서비스를 주기도 합니다. 

 

성지순례를 갈 기회가 있으면 ‘이스라엘’을 가려고 했습니다. 다른 성지도 많지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곳이고, 복음을 선포한 곳이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곳이고,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삶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33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10번 이상은 다녀왔습니다. 저는 복음화 학교의 지도신부를 10년 이상 하였습니다. 매년 공동체는 성지순례를 다녀왔고, 제가 함께 했었습니다. 뉴욕의 신문사에서 일 할 때입니다. 매년, 신문사 주최로 성지순례가 있었고, 저는 함께 했습니다. 성지순례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스라엘에 여러 성지가 있지만 저는 그 중에도 ‘갈릴래아’를 사랑했습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많은 표징을 보여 주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갈릴래아에는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그곳에 배 모양의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을 선포하신 행복선언 성당이 있습니다. 

 

갈릴래아에는 예수님께서 5천명을 배불리 먹이신 오병이어 성당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풍랑을 잠재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 위를 걸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더 깊은 곳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쪽으로 그물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마귀를 쫓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병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여라. 나도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 그렇습니다. 갈릴래아는 지금 내가 있는 ‘삶의 자리’입니다.

 

그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트만과 같은 신학자는 3번이라는 숫자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베드로가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배반하였는데 예수님께서 3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면서 베드로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다.” 저도 그 해석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 바위 위에 손을 대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때 제 마음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가브리엘 너 나를 사랑하느냐?”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셨던 것처럼 제게도 그런 질문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확신에 차서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렸습니다. 주님께서 제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내년에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0번 넘게 ‘그리스도의 식탁’을 찾았습니다.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납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부귀, 명예, 권력에 있지 않습니다. 희로애락의 세상사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를 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의 빛으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을 열어 주셨으니 이 큰 선물을 받은 저희가 굳은 믿음으로 더욱 열심히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복음: 요한 21,15-19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연인들 사이에 생기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수시로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현상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당신을 향한 그의 사랑을 한 두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거듭 확인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오늘도 우리를 당신 눈동자보다 더 귀히 여기시며 우리를 총애하시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직접 확인하고 싶어하십니다.

그 옛날 베드로 사도에게 던지셨던 그 질문을 오늘 우리에게도 거듭 던지고 계십니다.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 제대 앞으로 나아가 온 마음과 정신을 다해 정성껏 파스카 성제에 참여하고 몰입할 때,

주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묵상할 때,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주를 손에 쥐고 성모님과 함께 예수님의 삶과 죽음, 인류 구원 사업의 전체적인 여정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풀톤 쉰 대주교님(1895~1979)의 말씀을 떠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 묵주기도가 지루한 반복이나 그저 해야 하는 일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아름다운 진리에는 지루한 반복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묵주기도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성모님을 향한 매일의 사랑 고백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주님을 향한 사랑 고백은 성체성사나 기도에 머무르지 않고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미사와 기도의 핵심 정신이 우리 매일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천될 때,

주님을 향한 진정한 사랑 고백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밤새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상을 차려 아침을 먹이신 다음, 베드로에게 당신의 일을 맡기시며 묻습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5.16.17)

뭔가 이상한 질문입니다. 

보통 일을 맡길 때면, ‘이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어떻게 잘 할 수 있겠느냐?’ 하고 묻는데, 엉뚱하게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왜일까요? 

이는 일을 ‘잘’ 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당신께서 맡기신 일은 ‘능력’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으로 해야 하는 일임을 말해줍니다. 

‘일’을 사랑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무엇이 본질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나의 양들’이 아니라, ‘주님의 양들’을 돌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요한 21,15.16.17)

그렇습니다. 

당신의 양들이 맡겨진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우리를 믿으시기에 맡기신 양들입니다. 

 

이는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능력을 보고 맡기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으로 맡기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양들을 돌보라 하심은 당신이 먼저 우리를 돌보신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보다 앞서, ‘당신이 먼저 우리를 믿고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 채, 세 번의 동문서답으로 대화를 끝내고 맙니다. 

그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요한 21,15.16.17)라고 고백할 뿐,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라고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사실 이전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의심하고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주님은 그가 배신할 줄을 알면서도 그를 믿으셨습니다.

 

그러니 비록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더라도 주님께서는 사랑하시기를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하느님의 신실하심’(헤세드)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믿음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를 알아듣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양떼를 돌보지 않고 도망치고 말게 될 것입니다. 

폴란드 소설가 센키비치의 소설 <쿼바디스> 마지막 장면에는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지하교회에 숨어있던 베드로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빠져나가던 중, 갑자가 한 줄기의 빛이 그를 향해 다가오자, 그는 그 빛이 그리스도임을 알고 땅에 엎드린 채 묻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러자 빛이신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네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로마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지 않겠느냐?”

그제야 비로소 베드로는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 당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본질적이고 우선적인 것은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일’에 앞서,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요청받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16.부활 제7주간 목요일                                              사도22,30;23,6-11 요한17,20-26

                                                           일치의 여정

                                                 -사랑의 일치 공동체 예찬-

 

“별 수 없는 향기이지만

 하얀 색깔 환하고 

 소박한 모습

 기다리는 이 없어도

 하늘 보고파

 때가 되니 피어난 주차장 앞 

 마가렛꽃

 늘 봐도 정겹다”<1998.5.12.>

 

곧장 뒤이어 피어나기 시작한 마가렛꽃 사랑이 새롭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해야 합니다.

공동체에 감사해야 합니다.

저는 늘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공동체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요셉 수도공동체에 산처럼 정주하기 36년째, 날로 깊어지는 공동체와의 사랑입니다.

공동체와의 사랑은 주님과의 사랑을 뜻합니다.

저에게 참으로 위대한 스승은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로부터 배우는 것이 참 많습니다.

공동체에 뿌리 내리고 있기에 매일 강론 쓰기도 가능합니다.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하나하나가 그리스도의 얼굴들이요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견뎌내야 하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죄짓는 일이라면 하느님은 용서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분열시키는 일이라면 하느님 하시는 일은 일치입니다.

사람이 흩어버리면 하느님은 모으십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공동체 일치의 비결을 말합니다.

역시 사랑의 일치입니다.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하고, 육체나 품행상의 약점들을 지극한 인내로 참아 견디며,

서로 다투어 순종하고, 아무도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르지 말고,

오히려 남에게 이롭다고 생각되는 것을 따를 것이다.”(성규72,4-7)

 

이 또한 아가페적 순수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꽃과 같습니다.

꽃의 크기, 모양, 색깔, 향기가 다 다르듯 사람의 사랑의 크기, 모양, 색깔, 향기도 다 다릅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는 사랑입니다.

또 끊임없이 주님 사랑 안에서 정화되고 성화되어야 하는 이기적 불순한 사랑입니다. 

평생 공부가 사랑입니다.

 

평생 “사랑의 학교” 공동체에서 아가페 사랑을 배워가는 형제들입니다.

서로 건드리지 않는 것, 그냥 놔두고 묵묵히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존재에 대한 연민의 사랑이요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랑입니다. 

 

무한히 인내하는 사랑, 기다리는 사랑입니다.

말 그대로 주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주님의 사랑의 계명입니다.

 

아주 예전에 써놓은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라는 장시가 생각납니다.

 

“존재는 관계이자 사랑이다

 혼자서는 못산다

 혼자꾸면 꿈이요 함께꾸면 현실이다

 잘났든 못났든 함께 살아야 한다

 ‘함께’안에 ‘홀로’여야 한다

 비록 떨어져 있어도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들이

 그를 잡아주어야 한다

 흙속에 묻힌 뿌리들처럼 좌우사방 보이지 않게 뿌리내려야 한다

 뿌리내림의 관계다

 단절고립된 혼자가 그대로 지옥인거다

 땅을 보라

 평화로운 공존의 사랑이 아닌가

 보금자리 공동체는 땅과 같고 

 사람들은 땅의 품에 뿌리내린 초목들과 같다

 뿌리내릴 너와 나의 공동체가 없다면 

 그 삶 얼마나 위태롭겠는가!

 예전 철없을 때는 알맹이는 남고 껍데기는 가라며 순수를 고집했지

 참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껍데기없는 알맹이가

 알맹이 없는 껍데기가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내가 껍데기라면 너는 알맹이고 

 네가 알맹이라면 나는 껍데기인거다

 알맹이 있어 껍데기이고 껍데기 있어 알맹이다

 네가 있어 나이고 내가 있어 너이다

 이렇게 알고 보면

 우리는 서로 ‘짐’이 아니라 

 서로가 하느님의 ‘선물’인거다

 평범하나 이보다 더 깊은 진리, 깊은 지혜 있을 수 없다

 그러니 너와 내가 함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온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주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있는 곳에 함께한다 하지 않으셨나

 혼자서는 살지도 못하고 절대로 사람도 못된다

 십중팔구 괴물이나 폐인이다

 때때로 내 공동체의 땅을, 내 관계들의 뿌리를 점검해 볼 일이다 

 너무다 자명한 진리, 까맣게 잊고들 산다”-2005.5.

 

19년전 이때쯤의 장시의 깨달음의 글이지만 지금은 더욱 공감합니다.

공동체 예찬 같은 시입니다.

하느님을 그대로 대변하는 예수님의 오늘 복음 말씀도 그대로 사랑의 일치에 대한 간곡한 기도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고별기도의 내용은 공동체의 일치를 위한 기도입니다.

참으로 일치의 여정에 항구하기 위하여 주님의 은총을 청하는, 믿는 모든 이들을 위한 기도요

바로 우리가 그 대상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치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내주의 사랑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삶과 사랑 따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자체가 사랑입니다.

일치의 사랑안에서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마음이 시선은 늘 공동체의 중심인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매일의 사랑의 성체성사가, 공동체의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래서 주님 사랑 안에 머물며 평생 날마다 바치는 사랑의 공동전례기도 찬미와 감사의, 사랑의 훈련입니다.

 

평생 사랑의 전사로, 사랑의 달인으로 만드는 평생 사랑의 훈련입니다. 

제가 볼 때, 사랑의 전사, 사랑의 달인이 사도행전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사랑의 지혜로 위기를 돌파해가는 바오로의 시야에는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는 공동체라는 의식입니다.

최고 의회에서 바오로의 증언이 결정적 해결의 열쇠가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리라는 희망 때문에 재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어 부활을 주장하는 바리사이들과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과의

격렬한 논쟁이 일어났고 천인대장의 기민한 개입으로 바오로는 구출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 정말 하느님의 사랑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뿐이 없고,

일단 이들의 격렬한 대립에서 탈출에 성공한 바오로입니다만,

여전히 무지한 이들은 하느님께 맡기고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일치의 선교 여정에 오르는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부활의 증언, 사랑의 증언, 일치의 여정에 항구한, 지칠줄 모르는 열정과 일치의 사도 바오로입니다.

“용기를 내어라” “두려워하지 마라” 참 많이 우리를 격려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공동체는 내가 누구인지 나를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공동체 자체가 나를 사랑으로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의 공동체 안에서 사랑의 일치의 여정에 항구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주의 어지심이

 우리 위에 내리옵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 

 우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주소서.”(시편90,17). 아멘.


5/17(금)  부활 제7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갈릴래아 호숫가에 ‘그리스도의 식탁(Mensa Christi)'라는 바위가 있습니다. 그 바위 위에 작은 성당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그 바위 위에서 제자들과 함께 빵과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3번 베드로 사도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3번 ‘예 주님,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대답을 듣고 3번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 역시 베드로 사도처럼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기꺼이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저에게는 당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 고백은 입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제대로 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양승국 신부)

 

3. 결국 우리에게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의 일을 따르라' 하지 않으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또 ‘나의 일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영광을 저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시고, 또 저를 사랑하셨듯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일치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사랑의 일치입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내주의 사랑안에 머물러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5/17(금)  부활 제7주간 금요일, 510(140)일 기도

 

복음 <내 어린양들을 돌보아라. 내 양들을 돌보아라.>

 

<오늘의 말·샘 기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7)

주님!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심은 저의 사랑을 당신이 모르셔서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먼저 아침상을 차려 사랑을 먹이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먼저 사랑하시고, 

훨씬 더 더 사랑하시며, 목숨까지 내주며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제가 당신을 배신할 줄을 빤히 알면서도 여전히 저를 사랑하시십니다.

하오니, 이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주님!

“나를 따라라.” 말씀하시는 주님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17일(금) 8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