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21일 화요일[(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5. 21. 07:23

[매묵]2024년 5월 21일 화요일[(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홍] 성 크리스토포로 마가야네스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입당송

시편 13(12),6 참조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청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4,1-10
사랑하는 여러분,
1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2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3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4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
5 아니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신다.”는
성경 말씀이 빈말이라고 생각합니까?
6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더 큰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7 그러므로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8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죄인들이여,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
9 탄식하고 슬퍼하며 우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슬픔으로 바꾸고 기쁨을 근심으로 바꾸십시오.
10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5(54),7-9.10ㄷ-11ㄱ.23(◎ 23ㄱㄴ 참조)
◎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 저는 생각하나이다. 비둘기처럼 날개가 있다면, 날아가 쉬련마는. 멀리멀리 달아나, 광야에 머물련마는. 폭풍우 세찬 바람 피하여, 은신처로 서둘러 가련마는. ◎
○ 주님, 헝클어 버리소서. 악인들의 말을 갈라 버리소서. 성안의 폭력과 분쟁을 제가 보고 있나이다. 그들은 밤낮으로 성벽 위를 도나이다. ◎
○ 너의 근심 걱정 주님께 맡겨라. 그분이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 의로운 사람이 흔들리도록,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리라. ◎

복음 환호송

갈라 6,14 참조
◎ 알렐루야.
○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내게서는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에서는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노라.
◎ 알렐루야.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9,2-3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아이가 그린 그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인체의 호르몬 중에 도파민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즐거움과 쾌락을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새로운 여행과 모험을 떠나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게임을 하고, 스포츠를 보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은 즐거움입니다. 도박과 마약도 즐거움입니다. 연애도 즐거움입니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도 즐거움입니다. 조금 고상하게 맹자는 인생의 3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습니다. 첫째 부모가 모두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아무런 일없이 건강한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고, 땅을 내려 보아 남에게 창피하지 않게 사는 인생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셋째 천하의 똑똑한 영재들을 모아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즐거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인류학자는 인간을 ‘Homo Ludens(즐거움을 찾는 존재)’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즐거움을 추구하고, 즐거움을 찾으면서 발전했습니다. 문학, 미술, 음악, 예술은 이런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즐거움을 추구하기에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인체의 호르몬 중에 세로토닌이 있습니다. 이 호르몬은 안정과 평화를 느끼게 해 준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안정과 평화를 주는 것이 있습니다. 피정은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줄임말입니다. 세상을 피해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측은지심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으로 데려간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의 선교회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 아프리카 수단의 이태석 신부님,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님, 요셉 의원의 선우경식 선생님은 평생 어려운 이웃을 도왔습니다. 그들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안정과 평화를 추구하면서 발전하였습니다.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그렇게 이끌기도 하고, 안정과 평화 그리고 헌신과 나눔을 추구하기에 세로토닌이라는 호르몬이 나오기도 합니다.

 

자동차에 비유하면 도파민이 가속 페달이라면 세로토닌은 멈춤 페달입니다. 가속 페달이 없는 차는 움직이지 않지만 멈춤 페달이 없는 차는 사고가 납니다. 둘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파민이 이끄는 삶과 세로토닌이 이끄는 삶의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본당의 사목도 이런 균형을 유지하면 좋습니다. 교우들의 친교를 도모하기 위해서 체육대회, 본당의 날, 음식 나눔을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서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으면 좋습니다. 적당한 유머와 놀이는 집의 창문과 같아서 활력을 줍니다. 본당에 도파민과 같은 호르몬이 함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가하면 성경공부와 피정, 봉사활동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학교 학생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집을 지어주기도 하고, 영어를 가르쳐 주기도 하면서 신앙의 자긍심을 얻기도 합니다. 어른들은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면서 복음의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날개로 본당이 균형을 이룬다면 활력과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직책이나, 우리의 업적을 보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을 보실 것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서 살았던 우리들의 삶을 보실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직책이나 자리를 가지고 다투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불편한 것을 참을 수 있다면, 잠시 여유를 가질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을 먼저 생각 할 수 있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세상은 어쩌면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것 같습니다. , 명예, 권력, 성공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이기기 이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나눔, 사랑, 겸손, 봉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입니다.

 

제자들은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도 못하였고, 그 의미를 묻지도 않았습니다. 재미만을 추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교회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요? 오늘 사제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 있을까요?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복음: 마르 9,30-37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지만, 실제로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두번째 수난 예고를 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31)

 

당신 입으로 직접 수난과 죽음을 예고를 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묵상해봅니다.

예견되는 끔찍한 상황이 눈앞에 떠올라 마음이 엄청 산란하셨을 것입니다.

피할 수만 있으면 피하고 싶다고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두려우셨습니다.

 

이런 스승님의 마음과는 달리 제자단의 반응은 한심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스승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에 대해 질문하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그간 자신들이 꿈꿔왔고 상상해왔던 길이 아니었기에 때문에

일부러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추구하고 있는 왕국과 제자들이 기대하고 있는 왕국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보이고있는 극단적 미성숙과 스승님의 정체와 사명에 대한 몰이해는 점점 커져만 갑니다.

카파르나움에 위치한 베드로와 안드레아의 집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을 하였느냐?”

앞서 걸으시던 예수님께서 뒤따라오던 제자단의 분위기를 눈치채셨던 것입니다.

계속 티격태격하며 뒤따라오던 제자들의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니,

예수님 당신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습니다.

 

제자들은 부끄럽게도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는 문제로 길에서 한바탕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노상에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동고동락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대목은 교회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 봉사하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깊이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매일 교회 안에 머물면서, 매일 거룩한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겉으로는 주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마음과 정성이 없기에, 그저 타성과 매너리즘에 빠져있기에

가장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가 진지하게 돌아봐야하겠습니다.

 

제자들은 부지런히 스승님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허깨비같은 몸만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정신과 영혼을 전혀 따라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제자, 무늬만 제자였던 것입니다.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마음이 심란해진 예수님이신데, 그래서 이미 두 번씩이나 제자들에게

수난 예고를 하셨는데, 그렇다면 스승님이 걸어가실 그 길이 어떤 길인지에 대해 함께 진지하고 숙고하고

고민할 법도 한데, 제자들은 스승님의 수난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일말의 양심이 있는 제자라면 스승님이 겪고 계신 고뇌에 조금이라도 참여하기 위해 노력할텐데,

그래서 스승님을 따뜻한 말로라도 위로해드리고자 노력할텐데, 제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수난과 죽음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장 큰 사람'에 대한 가르침 사이에 위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나아가 ‘진정한 첫째’는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종’이 되되,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도 되라고 하십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 실현을 내려놓은 자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르 9,37)

곧 어린이처럼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0.월요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창세3,9-15.20 요한19,25-34

 

                                                              어머니인 교회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어제 5월19일 성령강림대축일 다음날인 오늘 5월20일은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8년 이 기념일을 정해 첫 번째 기념미사를 봉헌했고,

매해 성령강림대축일 다음 월요일에 이 기념미사를 봉헌하도록 했습니다.

교황님의 첫째 기념미사때 강론이 지금도 생생하며 전폭적으로 공감합니다. 

 

“교회는 성모 마리아처럼 여성이며 어머니입니다.” 주제의 강론이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고 교회는 어머니이시니, 우리는 형제들입니다.” 갈파했습니다.

참으로 교회는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닮아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선 교회를 뜻하는 단어인 ‘교회’와 ‘신부’가 여성형이기에 여성적입니다.

그리고 자녀를 출산하는 어머니입니다. 교회는 신부이자 어머니입니다.

여성적인 차원이 없을 때, 교회는 참된 정체성을 잃게 되고 교회가 아니라 단순히 하나의 자선단체나

축구팀 같은 무엇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교회가 여성이고, 신부요 어머니인 이러한 태도를 지니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망각할 때, 교회는 이러한 차원이 결여된 남성적인 교회가 되고, 슬프게도 사랑도 할 수 없고

출산도 할 수 없는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는 노총각들의 교회가 되고 맙니다.

 

여성없이 교회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여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여성의 태도는 마리아에게서 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원하셨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저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압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람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어머니 교회입니다.”

 

교회나 수도원이 여성이며 어머니인 자매님들 없으면 참 유지하기 힘들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여 미사예물이나 봉헌금을 바치는 이들은 거의가 자매들입니다.

남자 형제들은 대부분 빈손으로 오지만 자매들은 거의 무언가 들고 옵니다.

봉사자들도 대부분 자매들입니다.

하느님 사랑을 가장 많이 닮은 분들이 바로 어머니들입니다. 

 

모성애에 비하면 부성애는 빈약하기 그지 없으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보다도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훌륭한 자녀들을 보면 십중팔구 배경에 자리잡고 있는 거룩한 사랑의 어머니들입니다.

특히 교회의 어머니이자 예수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는 모든 어머니들의 모범입니다.

끊임없이 교회가, 우리가 닮아야할 마리아 성모님의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의 배치도 재미있습니다.

창세기의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가 된 하와와 복음의 예수님의 어머니와는 참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우리는 하와 어머니의 실패를 완전히 만회한 참 좋은 어머니 마리아를 만납니다.

 

5월 성모성월에 참 잘 어울리는 오늘 복음의 성모마리아입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이 살아 있는 성화같습니다.

성모님과 우리의 자리가 잘 드러납니다.

흡사 이등변 삼각형의 구도를 연상케 합니다.

 

이등변 삼각형의 위 꼭지점에 십자가의 예수님이 계시고 아래 한 쪽에는 성모님이, 한쪽에는 우리가 있습니다.

아드님의 십자가 아래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하느님께 전적 의탁하심으로 자신을 완전히 비우신

케노시스의 절정이었을 것이며 저절로 거룩한 성모성심을 묵상하게 됩니다.

애제자를 두고 하시는 말씀은 역시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있는 우리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자매님은 “어머니의 딸입니다”로 알아들어도 무방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모성월 5월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곁에 계신 성모님의 비움의 사랑을 배웠으면 좋겠습니다.

‘사랑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워가는 겸손의 훈련장 공동체’에서 성모님은 최고의 스승입니다.

이어서 애제자와 동시에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당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그때부터 그 제자가 성모님을 자기 집에 모셨다 합니다. 

 

주님의 집인 수도원이나 교회는 물론이요 가정교회와 같은 가정집에서도 성모님을 모시고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성모님을 모시고 살 때 우리가 받는 은총이 헤아릴 수 없이 클 것이며 무엇보다도 공동체는

모성적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두 임종어를 마리아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더 깊이 잘 이해했을 것입니다.

 

“목마르다!”

평생 하느님께, 진리에 목말랐던 아드님 예수님처럼, 마리아 성모님도 똑같이 목말랐을 것입니다.

“다 이루어졌다!”

아드님 예수님의 고백처럼,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음을 고백하셨을 성모님의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마리아 성모님도 남은 생애 아드님의 이 두 말마디를 평생 마음에 담고 사셨을 것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바람을 거스르는 풀은 없기에 모든 가르침은 바름이어야 한다.”<다산>

“군자의 덕은 바람이고 백성은 풀이다. 바람이 불면 풀은 바람을 따라 눞는다.”<논어>

 

바람이 상징하는바 성령처럼 생각됩니다.

성령에 따라 배우고 깨닫고 실천하는 성령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어머니, 마리아 성모님의 전생애도 그러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성령의 바람따라 성모님과 함께 순리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아멘.


5/21(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도파민이 이끄는 삶과 세로토닌이 이끄는 삶의 균형을 도모해야 합니다. 

 

, 명예, 권력, 성공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경쟁해야 하고, 이겨야 하고, 이기기 이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도록 강요합니다. 나눔, 사랑, 겸손, 봉사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온통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곳입니다. 우리 또한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믿으며, 같은 곳을 향해서 가는 동반자입니다.(조재형 신부)

 

2. 그저 누가 큰 사람인가?

스승님의 나라가 서면 누가 오른쪽 왼쪽에 앉을 것인가에만 관심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까마득한 제자들에게 다시 한번 절대로 굽힐 수 없으며,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운명과 사명, 핵심 사상에 대해서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코, 9,35)(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교회는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어머니입니다.

침묵할 줄 알고, 연민 가득한 눈길로, 조용하게 어루만저주는, 수많은 지혜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압니다.

또한 사랑이 넘치며, 웃음을 머금고, 따뜻한 애정과 부드러운 온유의 사람으로서,

어머니의 길을 똑같이 걸어가야 하는 어머니 교회입니다.”(이수철 신부)

 

5/21(화) [(녹) 연중 제7주간 화요일] , 514(144)일 기도

 

복음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오늘의 말·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도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도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5월21일(화) 7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