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5. 22. 03:03

[매묵]2024년 5월 22일 수요일[(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카시아의 성녀 리타 수도자

입당송

시편 13(12),6 참조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생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주님께서 원하시면”하고 말해야 합니다.>
▥ 야고보서의 말씀입니다.4,13-17
사랑하는 여러분, 13 자 이제, “오늘이나 내일 어느 어느 고을에 가서
일 년 동안 그곳에서 지내며 장사를 하여 돈을 벌겠다.” 하고 말하는 여러분!
14 그렇지만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15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살아서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16 그런데도 여러분은 허세를 부리며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입니다.
17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9(48),2-3.6-7.8-10.11(◎ 마태 5,3)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모든 백성들아, 잘 들어라. 세상 모든 사람들아, 귀를 기울여라. 천한 사람 귀한 사람, 부유한 자 가난한 자 다 함께 들어라. ◎
○ 뒤쫓는 자들이 악행으로 나를 에워쌀 때, 그 불행한 날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랴? 그들은 자기 재산만 믿고, 재물이 많다고 자랑한다. ◎
○ 사람이 사람을 어찌 구원하랴? 하느님께 제 몸값을 치를 수도 없거늘. 그 영혼의 값 너무 비싸, 언제나 모자란다, 그가 영원히 살기에는, 구렁을 아니 보기에는. ◎
○ 정녕 그는 보리라, 지혜로운 이도 죽고, 어리석은 자도 미욱한 자도 사라진다. 재산을 남들에게 남겨 둔 채 모두 사라지리라. ◎

복음 환호송

요한 14,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9,2-3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중학교 영어시간에 배웠던 속담 중에 반짝이는 것이 모두 금은 아니다.(All that glitters is not gold.)”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보를 다니면서 이 속담의 의미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길 위를 기어 다니는 많은 애벌레들이 있습니다. 그 애벌레들이 모두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풀잎에, 가지에 붙어서 죽은 것처럼 지내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는 애벌레들이 하늘을 나는 나비가 됩니다. 고치의 과정을 지내고 있는 애벌레들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훨훨 나는 나비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전에 거지왕자라는 동화를 읽은 적도 있습니다. 궁궐에만 살던 왕자가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서 거지로 변장하고 궁 밖으로 나왔습니다. 왕자는 화려하고, 멋진 것만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세상에는 가난하고,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세상에는 배우지 못해서, 가지지 못해서, 신분이 낮아서 슬퍼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왕자의 옷을 벗고, 거지 옷을 입었지만 왕자는 비로소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자는 백성을 위하고 사랑하는 왕이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왔다고 모두 사제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졸업정원제가 있어서 1982년도에 신학생은 104명이 입학했습니다. 10년이라는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그만 두는 동창들이 있었습니다. 학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독신의 의무를 지킬 수 없어서 그만 두는 친구, 부모님의 권유로 입학했지만 신학교의 생활을 적응하지 못해서 그만 두는 친구,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현실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며 그만 두는 친구, 부제품을 받았지만 서품을 앞두고 그만 두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모두 사제가 되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인생을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모두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2023년 한국천주교교회의 통계자료가 발표되었습니다. 한국의 가톨릭 신자는 597 675명으로 집계 되었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비율은 13.5%입니다. 86.5%의 교우는 주일미사를 참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도 팬데믹 이후 주일미사 참례 수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코로나 팬데믹 이전의 상황까지 회복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줍니다. 신앙인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알려 줍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곧 죄가 됩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당연히 좋은 일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은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오 복음 25장에서 우리가 해야 할 좋은 일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생활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 것,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것, 서품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 구원의 필요조건은 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구원받기에 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나비가 되듯이, 신앙인은 복음을 실천해야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시 "방랑자의 비밀" (The Riddle of Strider)”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네. 타버린 재에서 불길이 깨어날 것이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구치리라, 부러진 칼날은 새로이 제련될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야고보서는 초기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서간입니다.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 잠시 지나가는 이 세상에 목숨 걸지 말고, 주님만을 바라보라는 가르침,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들, 과부들과 고아들, 병자들을 배려하자는 권고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내일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황, 혹독한 박해 시절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오늘 첫 번째 독서 야고보서의 가르침은 가슴에 사무칠 정도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야고보서 저자는 우리 인간 존재의 실체요 본질을 단 한 문장으로 아주 정확하게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명문장입니다.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야고보 서간의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강력한 경고장입니다.

 

오로지 이 세상 일에만 목숨 거는 사람들, 영혼이나 생명, 차원 높은 가치에 대해서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사람들, 순식간에 사라져갈 지위나 명예, 권력이나 재산을 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장입니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늘 염두에 두어야 할 불변의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인간 세상 안에서, 인간에 의해, 계획되고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다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확실하십니다. 세상 모든 확실성은 오직 주님께만 기인합니다.

 

때로 엄청나고 대단해 보이지만,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 참으로 덧없습니다. ‘한 줄기 연기!’ 참으로 적절하고 적합한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한번뿐인 우리네 인생, 너무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아야겠습니다. 너무 팍팍하게 살아서도 안되겠습니다.

 

가끔 거룩한 수녀님들 피정을 동반할 때마다 꼭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피정 첫날 앞에서 바라보면 수녀님들 얼굴이 엄청납니다. 비장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이번 피정을 통해서 반드시 성녀가 되고야 말겠다는 표정, 내 기도로 온 세상을 다 구원하겠다는 표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부탁을 드립니다. “인생을 너무 그렇게 전투적으로도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삶을 만끽하시오. 피정도 기쁘게, 영적 생활도 기쁘게 하십시오.”

 

찰나 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저는 어쩌다 보니 삶의 우여곡절을 참 많이 겪었습니다. 죽을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로 인한 끔찍한 기억이나 트라우마로 인한 괴로움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은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고통을 겪어보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얻지 못할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네 일상이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깨달음. 고통은 우리네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도구라는 깨달음. 고통은 잠시지만 고통을 넘어서는 데 따르는 은총과 축복은 영원하다는 깨달음.

 

나이를 조금씩 들어가면서 느끼는 것은 나이에 반비례해서 좋은 것들은 점점 줄어들고, 결코 원치 않았던 것들이 슬슬 친구처럼 찾아옵니다. 병고나 노화나 그로 인한 부작용들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측면의 기쁨을 추구해야 할 때로구나. 그것은 영적 생활 안에서의 기쁨, 포기와 물러섬 안에서의 기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기쁨, 그 기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될 것입니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그를) 막지 마라.”>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마르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마르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내로남불의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 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만을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1.연중 제7주간 화요일                                                        야고4,1-10 마르9,30-37

                                                            겸손을 추구하라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다-

 

오늘 새벽성무일도시 코헬렛 독서중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내용들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바로 모든 것에는 때가 있음을 아는 지혜가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새벽 눈에 들어온 겸손과 관련된 말씀이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친구란 나란히 서서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다.

저보다 나은 사람만 사귀려는 것은 받기만을 바라는 욕심이다.”<다산>

 

참으로 겸손할 때 좋은 우정의 친구도 가능함을 봅니다.

교황청을 방문한 시카고 로욜라 대학의 교수진에게 주신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희망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부지런히 꿈꾸는 사람들이, 희망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부지런히 꿈꾸는 희망의 사람들, 참으로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눈만 열리면 모두가 겸손의 스승입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온전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존재의 향기는 바로 겸손의 향기입니다.

 

엊그제 주일에는 올해 60세가 된, 47년전 13세, 신림초등학교 6학년때 제자들 둘이 와서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불러 줬습니다. 벌써 10년째 매해 방문하는 제자들입니다. 수사님들 잡수라고 추어탕과 게장도 선물했습니다.

 

이 제자들은 매해 추석때는 쌀 수십 부대를 수도원에 선물합니다.

스승의 은혜 노래는 늘 들어도 감격입니다.

저는 ‘스승’대신 ‘주님’을 넣어서 가끔 불러보곤 합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같아서, 우러러 볼수록 높아만 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은 마음의 어버이시다.

 아아 고마워라 스승의 사랑, 아아 보답하리 스승의 은혜”

 

스승의 은혜는 주님의 은혜입니다.

저절로 노래를 들으면서 자각하게 되는 감사와 더불어 겸손입니다.

평생 주님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겸손과 온유요, 평생 배워도 초보자같다는 생각이듭니다.

 

또 어제 대구가대 1회 동기생중 들꽃마을을 일구어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했던

최영배 비오 신부의 부음을 접했습니다.

대구가대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대구백화점에 가서 베레모를 사준 동기신부인데

병환으로 향년 69세로 선종한 것입니다. 

 

죽음 또한 겸손의 참 좋은 스승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늘 죽음을 환히 두고 살라 조언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죽음을 생각할 때 환상이나 허영, 교만은 걷히고 본질적 깊이의 겸손을 살게 합니다.

 

흙(humus)에 어원을 둔 인간(homo)이요 겸손(humilitas)입니다.

흙을 닮은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래서 생래적으로 흙을 찾는 인간같습니다.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겸손에 대한 주옥과 같은 설명이 많았습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스승이요, 천상선물의 가장 확고한 기초이다.”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은 모든 덕을 능가합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습니다.”

“겸손은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광을 찾는 것입니다.”

“겸손은 아주 무서운 죄를 지은 죄인도 구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할 때 모든 좋은 것이 주어집니다.”

“겸손한 마음가짐은 환금사슬과도 같습니다.”

“거룩해진 영혼의 장신구는 가난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사막의 수도승, 마카리우스 압바에게 패퇴한 악마의 고백입니다.

“나도 네가 하는 모든 것을 한다. 너는 단식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너는 철야를 나는 전혀 잠을 자지 않는다. 오직 한가지 점에서만 네가 나를 능가한다.”

 

마카리우스 압바가 그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악마는 대답합니다.

“너의 겸손이다. 그것 때문에 내가 너에게 맞서 싸울 수 없다.”

 

어느 사막교부는 겸손한 자만이 온갖 악마의 덫에 걸리지 않는다 했습니다.

테오도라 암마는 금욕수행이나 철야 또는 어떤 노고로도 구원될 수 없고 오직 참된 겸손만으로

구원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자요, 겸손과 지혜는 함께 갑니다.

모세를 위시한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특징 또한 겸손입니다.

겸손의 대가, 겸손의 달인인 겸손한 성인들입니다.

 

영성의 진위를 식별하는 잣대가 겸손입니다.

겸손을 실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니 부단히 겸손을 추구하라 말씀하시는 야고보 사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

손을 깨끗이 하십시오. 마음을 정결히 하십시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주실 것입니다.”

 

악마와의 영적전쟁에서 겸손보다 더 좋은 무기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인자무적(仁者無敵)에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2차 수난예고에도 그 심각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스승 예수님 부재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되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으로부터 참으로 겸손을 배웠다면, 길위에서 이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불필요한 논쟁은 없었을 것이며,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여정에만 충실했을 것입니다.

주님은 열두제자를 불러 겸손한, 참된 종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김(service)과 종(servant)의 어원은 같습니다.

섬김과 종의 영성으로 드러나는 겸손임을 깨닫습니다. 

겸손 역시 훈련입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비워가는 평생 겸손의 훈련장이 수도공동체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겸손을 추구하라는 말씀도 참 강렬합니다. 

 

“그대가 윗자리와 최고 영예를 사랑한다면 이제는 끝자리에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십시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가장 작은 것을 추구하고,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 뒤에 세우십시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가난하고 약한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합니다.

어린이가 상징하는 바 주님의 제자들이자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요 이들의 환대를 강조하는 주님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찌보면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인간 일반이라는 생각이듭니다.

하나하나 깊이 들여다보면 한없이 약하고 가련한 인간존재요 그 배경에는 예수님이,

그리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닮은 겸손한 사람은 차별함이 없이 주님을 맞이하듯 모든 사람을 맞이할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겸손과 온유의 예수성심을 닮아가게 합니다. 아멘.

사진설명: 성김대건성당 카페 그라시아.


5/22(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시 "방랑자의 비밀" (The Riddle of Strider)”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황금이라고 해서 모두 반짝이는 것은 아니며, 방랑하는 자들이 모두 길을 잃은 것은 아니네, 오래되었어도 강한 것은 시들지 않고, 깊은 뿌리에는 서리가 닿지 않네. 타버린 재에서 불길이 깨어날 것이고,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빛이 솟구치리라, 부러진 칼날은 새로이 제련될 것이며, 왕관을 잃은 자 다시 왕이 되리라.”(조재형 신부)

 

2. “인생을 너무 그렇게 전투적으로도 살지 마십시오.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 삶을 만끽하시오. 피정도 기쁘게, 영적 생활도 기쁘게 하십시오.”

 

찰나 같은 이 세상, 섬광처럼 지나가는 우리네 인생입니다. 해만 뜨면 사라지는 새벽안개 같은 우리네 삶입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시계로 보면 너무나 짧아 아쉬운, 수학여행 같은 우리네 지상 여정입니다. 최대한 기쁘고 신나게, 설레는 가슴을 달래며 흥미진진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나이 든 지금...이제는 지금과는 다른 측면의 기쁨을 추구해야 할 때로구나. 그것은 영적 생활 안에서의 기쁨, 포기와 물러섬 안에서의 기쁨,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의 기쁨, 그 기쁨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사라지지 않을 기쁨이 될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인자무적(仁者無敵)에 겸자무적(謙者無敵)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겸손을 추구하라는 말씀도 참 강렬합니다. 

“그대가 윗자리와 최고 영예를 사랑한다면 이제는 끝자리에 있는 것들을 찾아 나서십시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것, 가장 낮은 것, 가장 작은 것을 추구하고,

그대 자신을 다른 사람들 뒤에 세우십시오.”(이수철 신부)

 

5/22(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 515(145)일 기도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주님!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나와 생각이 다른이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의 소유자가 되게 하소서.

  • 2024년 5얼22일(수) 6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