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5월 30일 목요일[(녹) 연중 제8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5. 30. 06:29

[매묵]2024년 5월 30일 목요일[(녹) 연중 제8주간 목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8(17),19-20
주님은 내 버팀목 되어 주셨네. 내가 그분 마음에 들었기에, 넓은 들로 이끄시어 나를 구하셨네.

본기도

주님,
이 세상을 정의와 평화로 이끌어 주시고
교회가 자유로이 주님을 섬길 수 있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여러분은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불러내신 하느님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2,2-5.9-12
사랑하는 여러분,
2 갓난아이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3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
4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값진 돌이십니다.
5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영적 제물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치는 거룩한 사제단이 되십시오.
9 여러분은 “선택된 겨레고 임금의 사제단이며 거룩한 민족이고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
10 여러분은 한때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분의 백성입니다.
여러분은 자비를 입지 못한 자들이었지만
이제는 자비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11 사랑하는 여러분, 이방인과 나그네로 사는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벌이는 육적인 욕망들을 멀리하십시오.
12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0(99),1-2.3.4.5(◎ 2ㄴ 참조)
◎ 환호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 환호송

요한 8,1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 알렐루야.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46ㄴ-52
그 무렵 46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47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48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49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50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51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52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하느님,
하느님께 봉헌할 예물을 마련해 주시고
이 예물을 저희 정성으로 받아 주시니
자비를 베푸시어
이 제사를 저희 공로로 여기시고
더 많은 상급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13(12),6 참조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 이름 찬양하리이다.
<또는>
마태 28,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구원의 성체를 받아 모시고 자비를 간청하오니
현세에서 저희를 길러 주는 이 성사로
저희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8주간 목요일

 

주일학교 아이들이 부르는 성가 중에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예수님의 사랑 신기하고 놀라워/ 오 크신 사랑/ 하늘 그보다 높고/ 바다 그보다 깊고/ 우주 그보다 넓은/ 오 크신 사랑 최근 책을 읽으면서 저는 하느님의 사랑이 신기하고 놀랍다는 걸 새삼스럽게 체험했습니다. ‘시간에 묻힌 한 사제의 삶이라는 책에서 책의 저자인 신부님은 1963년 군 제대 후에 이민을 고민하다가 여의치 않자, 성당의 신부님께 면담을 청하였습니다. 당시 젊은이의 고민은 3가지였습니다. 계속 이민 절차를 밟으며 기다리는 것, 직장을 구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 신학교에 들어가 사제가 되는 거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의 이야기를 듣다가 청년의 고향과 깊은 인연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고향이 평양인데 징집되어 한국 전쟁에 끌려왔고, 포로가 되어 거제도 수용소에 있다가 석방되었다고 합니다. 석방되고 거처를 정한 곳이 청년의 고향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그곳 정 부잣집에서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 집 아들과 친분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젊은이는 그 아들이 자신의 둘째 형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청년에게 안수해 주었고, 하느님께서 청년이 가야 할 길을 정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청년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사제가 되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깊이 고민하던 젊은이의 갈망을 하느님께서는 신비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채워주셨습니다.

 

젊은이가 신부님께 면담했든 1963년은 제가 태어나든 해입니다. 20년 후에 저는 그 신부님께 면담하였습니다. 저는 젊은이처럼 3가지를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지만, 사제가 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습니다. 신학교에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고, 5대째 천주교를 믿는 집안에서 태어난 영향도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성적표를 가져오라고 하셨고, 당시 잠시 쉬고 있던 아버지가 성당에 나오면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신부님과 면담을 한 후에, 다시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습니다. 최 씨에, 곱슬머리에, 옥니를 가진 사람은 고집이 세다고 하는데, 신부님이 그 세 가지를 다 갖추었습니다. 신부님은 고집이 세시고, 강직하였지만 속 깊은 정이 있었습니다. 제가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 먼 길을 마다치 않고 오셨습니다. 임진강 매운탕을 드시면서 본당 사제로 잘 지낼 수 있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본당 형편이 어렵다는 걸 아시고, 용돈도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신기하고 놀라운 것인지, 저는 2007년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되었습니다. 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추천서를 써 주었고, 첫 본당 신부가 되었을 때는 직접 찾아와서 격려해 주었고, 원로 사목자가 되어 은퇴하실 때는 신부님께서 분가한 성당의 본당 신부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저는 샌프란시스코에 계시는 신부님께 전화했습니다. 신부님을 사제의 길로 인도해 준 신부님이 저의 아버지 신부님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2009년 신부님은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지만, 이렇게 제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 주십니다.

 

인생은 흑자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게 살았어도,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삶이라 해도 인생은 흑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는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대가를 지급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르티매오는 주님의 은총으로 치유 받아서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르티매오는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가고 싶은 곳도 많았을 것이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뒤로 하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습니다. 모든 걸 볼 수 있지만 이제 한 분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인데, 어느 어두운 밤에 한 소경이 초롱불을 밝혀서 다녔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당신은 볼 수도 없는데 왜 그렇게 다니느냐고 하니까, 그 소경은 하는 말이 나는 소경이지만,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이 초롱불을 보고, 안전하게 다닐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신도 안전하게 다닐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무심코 지나간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뭔가를 보려고 하고,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


2.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마르 10,46-52

 

제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소경 바르티매오라는 걸인의 눈을 뜨게 하신

기적을 전하고 있다. 바르티매오는 큰 영화를 누리다가 몰락한 가문의 사람으로, 눈이 먼 채

주저앉아 구걸까지 해야 하는 거지가 되어 버린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눈먼 바르티매오는 타락한 인류의 비참하고 무력한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바르티매오는 예리코의 북쪽 문 곁에 있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는 소리를 지른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그러나 군중에게는

그 소리가 방해되었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러나 바르티매오는 거기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행렬을 멈추게 하였다. 그리고 예수께 인도되고 치유를 받는다.

 

군중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놀라운 기적 때문에 자신들도 그러한 광경을 보고 또 기회가 되면 그러한

체험을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러한 자세로 주님께 다가갔던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동의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이웃의 아픔은 안중에 없다.

그렇기에 소경이 떠드는 것이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고 그를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 것이다.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

 

은총은 우리의 응답을 요구한다. 하느님의 초대와 약속은 인간의 의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며,

자유로운 응답을 원하신다.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그러나 그 선택의 여하에 따라 생명이나

죽음이냐가 갈라진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본보기로 삼아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우리의 성소를 이루는 것이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52절)

주님의 명령은 눈을 밝혀 주었고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잘 보지 못했던 우리는 이제 하느님과

인간을 잘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는 힘을 받고 빛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어두운 정신에 빛을 주시고 영적인 눈을 열어 주신 분을 원하도록 하여야 한다.

 

이제 눈의 안개처럼 시각을 방해하는 어둠인 우리의 묵은 나를 떨쳐버리고 빛을 선택하여

빛이신 그분을 닮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송영진 모세 신부 강론

 

<연중 제8주간 목요일 강론>

(2024. 5. 30. 목)(마르 10,46ㄴ-52)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그들은 예리코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에,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마르 10,46-47).”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9-52).”

 

1)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바르티매오의 간청에 예수님께서 응답하신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바르티매오가 응답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모든 사람’을 ‘구원의 길’로 부르신 ‘부르심’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은

‘어떤 내적인 부르심’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습니다.

 

바르티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고, 그 소문만으로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갖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가 간청한 ‘자비’는 ‘다시 보는 것’인데, 단순히 시력회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새 삶’을 뜻합니다. 바르티매오가 원하는 ‘새 삶’은, 자기가 메시아로 믿고 있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어 던지고” 라는 말은, 그가 ‘과거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음을 나타내고, 그리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도 나타냅니다.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라는 말은, 그의 소망이 대단히 간절했음을 나타냅니다.

 

앞을 못 보고, 부축하거나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서 벌떡 일어나서 예수님을 향해서 곧바로 갈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간절한 심정과 ‘능동적인 응답’을 잘 나타냅니다.>

 

2) 바르티매오의 경우와는 정반대가 되는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그들이 온 섬을 가로질러 파포스에 다다랐을 때에 마술사 한 사람을 만났는데, 유다인으로서 바르예수라고 하는

거짓 예언자였다. 그는 슬기로운 사람인 세르기우스 바오로 총독의 수행원 가운데 하나였다. 총독은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6-12).”

 

여기서 ‘성령으로 가득 차’ 라는 말은, 거짓 예언자의 눈을 멀게 한 일은 바오로 사도가 개인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실제로는 거짓 예언자 자신이 자초한 일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거짓 예언자의 눈이 멀었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인 일인데, 자기 자신도 구원의 진리를

보기를 거부하고,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도 방해했기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또 ‘한동안’이라는 말은, 그의 눈을 멀게 한 일은 시력을 완전히 빼앗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고,

또 그 일은 ‘처벌’이 아니라, 그를 회개시키기 위한 ‘사랑의 회초리’ 같은 것이었음을 나타냅니다.

그 거짓 예언자가 회개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회개했다면, 박해자 사울이 앞을 못보고 있다가 회개한 후에 다시 보게 된 것처럼(사도 9,18) 다시 보게 되었을 텐데,

끝끝내 회개하기를 거부했다면 그냥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3) 요한복음 9장에, ‘보는 일’에 관한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여기서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나는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왔다.”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겠지만,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고,

구원받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셨는데,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심판자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구원과 심판은 ‘내가’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장애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볼 수 있는데도, 보아야 할 것을 안 보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지금’ 보라고 촉구하십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5.29.수요일 윤지충 바오로(1759-1791)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마카6,18.21.24-31 요한12,24-26

                                                순교 영성, 파스카 영성

                                                       -섬김과 따름-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그분께 몸을 숨기는 사람!(시편34,9)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모두 124위 순교자들은 10년전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 미사를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분들입니다.

 

1791년 신해박해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에 이어 1866년 병인박해까지 사이에

순교한 분들입니다. 

당시 저는 안식년중으로 장충동 수도원에 머물때 였고 시복식 미사에 참석하여 감격을 체험했습니다.

 

예전 박해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밖 네거리, 당고개, 새남터,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길이었습니다.

124명 순교복자들은 지역별로는 한양 37명, 경기 13명, 강원 3명, 충청 18명, 전라 24명, 경상 29명등

전국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음을 봅니다.

 

참으로 대부분 용감하게 믿음을 고백하며 순교했던 분들입니다.

당시 전라 감사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윤지충과 권상연은 유혈이 낭자하면서도 신음 소리 한마디 없었습니다.

그들은 천주의 가르침이 지엄하다고 하면서, 임금이나 부모의 명은 어길지언정

천주를 배반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칼날 아래 죽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이어지는 당신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형 판결문이 전주에 도착하자, 감사는 윤바오로와 권야고보를 옥에서 끌어내 전주 남문 밖으로 끌고 갔다.

이때 윤바오로는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이었으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들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면서 칼날을 받았으니, 그때가 1791년 12월8일 이었다.

먼저 칼날을 받은 윤바오로가 32세였고, 권야고보는 40세였다.’ 

 

이런 순교자들의 순교행적을 보면 그 신앙에 깊은 충격과 더불어 우리의 나약하고 부족한 신앙을

뒤돌아 보게 됩니다.

말그대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그대로 따랐던 분들입니다.

당신의 순교를 예감하신 주님의 복음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예수님과 그 뒤를 이은 무수한 순교자들이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들이 되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실상 이들 순교자들은 영원한 삶을 누리는 분들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절대적 가치인 진리의 주님 앞에 상대적 가치를 지닌 목숨이자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진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초연한 자유에 자발적 순교가 가능했으니

바로 이것이 순교영성의 진수입니다. 

 

바로 우리는 이런 순교의 모범을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에서 뛰어난 율법학자인

엘아자르의 순교에서 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감동으로 전달되는 그의 당당하고 의연한 고백입니다.

엘아자르는 아끼는 마음에 지인들은 살길을 제시하지만 그는 일체의 호의를 겸손히 거부하며 말합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고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고 갑니다.”

 

이런 언행일치의 신앙도 보고 배웁니다.

이런 고결한 삶, 거룩한 죽음보다 젊은이들에게 좋은 가르침의 선물은 없습니다.

참으로 보고 배울 어른들이 없어 희망을, 길을, 빛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이 널린 세상입니다.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으니

영원히 살게 된 엘아자르는 말그대로 순교자의 모범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는 순교 영성을, 순교적 삶을 살아가야 할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섬기고 따르는 십자가의 길로 입증되고 검증되는 우리의 신앙이요

순교 영성입니다.

주님께 궁극의 희망을 두고 자발적 기쁨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순교영성입니다.

현재의 시련이나 고난에 좌절하지 않고 존엄한 품위를 살아내는 자들이 거룩한 살아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참으로 순교 영성이, 파스카 영성이 절박한 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것 역시 빛나는 순교영성, 파스카의 영성입니다.

어제 딸의 도움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 초라하고

서글프다고 고백하는 분에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자신에 좌절하지 말고 주님께 희망을 두고 밝고 기쁘게 사십시오.

이것이 순교영성입니다.

어머니인 자매님이 이렇게 살아야 따님도 힘을 얻을 것입니다.

힘든 중에도 이렇게 인간다운 품위를 견지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모습이 힘든 중에도 성실히 살아가는

따님에게도 참 좋은 ‘희망의 표징’이자 선물이 될 것입니다.”

 

비상한 순교 영성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빛, 희망의 빛,

사랑의 빛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진정 순교 영성의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신망애(信望愛)의 순교 영성을 살도록 도와 줍니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제 좌우명 기도를 나눕니다.

늘 나눠도 늘 새롭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一日一生), 하루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아멘-


5/30(목) [(녹) 연중 제8주간 목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는 뭔가를 보려고 하고, 뭔가를 찾으려고 하지만, 사실 우리 자신이 지치고 힘든 이들에게 위로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어야 하는 것이 아닐지 생각합니다.(조재형 신부)

 

2. 그러나 소경은 달랐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막연한 감상적인 소원이 아니고,

필사적인 결단과 행동의 부르짖음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달려가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갈 때 발에 걸리는 겉옷까지 벗어버렸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51절) 소경은 이러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았으며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이렇게 예수님께 믿음을 갖는 사람만이 용감히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그분을 따라나서는 제자가 될 수 있다.(조욱현 신부)

 

3. 그리스말로 마술사를 뜻하는 그 엘리마스는 총독이 믿지 못하게 막으려고 그들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때에 바오로라고도 하는 사울이 성령으로 가득 차 그를 유심히 보며 말하였다.

 

‘온갖 사기와 온갖 기만으로 충만한 자, 악마의 자식, 모든 정의의 원수!

당신은 언제까지 주님의 바른길을 왜곡시킬 셈이오? 이제 보시오, 주님의 손이 당신 위에 놓여 있소.

당신은 눈이 멀어 한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즉시 짙은 어둠이 그를 덮쳐, 그는 사방을 더듬으며 자기 손을 잡아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그때에 그 광경을 본 총독은 주님의 가르침에 깊은 감동을 받아 믿게 되었다(사도 13,6-12).”(송영진 신부)

 

4.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자기 목숨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는’ 사람입니다.

절대적 가치인 진리의 주님 앞에 상대적 가치를 지닌 목숨이자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진리에 대한 한없는 사랑에서 자기 목숨에 대한 초연한 자유에 자발적 순교가 가능했으니

바로 이것이 순교영성의 진수입니다. (이수철 신부)

 

5/30(목) [(녹) 연중 제8주간 목요일]  523(153)일 기도

 

복음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소경은 겉옷을 벗으며, 예수님께 부르짖는 믿음으로...

치유를 받아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부르짖어 예수님의 눈으로 매사를 보게 하소서.

예수님께 부르짖어 예수님의 눈으로 매사를 찾게 하소서.

예수님처럼...

치유의 빛, 위로의 빛, 사랑의 빛, 희망의 빛을 비추게 하소서.

 

- 2024년 5월30일(목) 6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