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6월 9일 주일[(녹) 연중 제10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6. 9. 06:25

[매묵]2024년 6월 9일 주일[(녹) 연중 제10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0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자를 보내시어 우리를 악령의 지배에서 구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믿음의 무기로 우리를 도와주시어, 우리가 날마다 악의 세력을 이기고 그리스도께서 이룩하신 파스카 승리에 참여하게 하여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시편 27(26),1-2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하느님은 모든 선의 근원이시니
성령께서 이끄시어 저희가 바르게 생각하고
옳은 일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나는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라.>
▥ 창세기의 말씀입니다.3,9-15
사람이 나무 열매를 먹은 뒤, 주 하느님께서 그를 9 부르시며,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10 그가 대답하였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11 그분께서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12 사람이 대답하였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13 주 하느님께서 여자에게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 하고 물으시자,
여자가 대답하였다.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
14 주 하느님께서 뱀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너는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 가운데에서 저주를 받아
네가 사는 동안 줄곧 배로 기어 다니며 먼지를 먹으리라.
15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30(129),1-2.3-4.5와 6ㄴㄷ-7ㄱ.7ㄴㄷ-8(◎ 7ㄴㄷ)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 깊은 구렁 속에서, 주님, 당신께 부르짖나이다. 주님, 제 소리를 들어 주소서. 애원하는 제 소리에, 당신 귀를 기울이소서. ◎
○ 주님, 당신이 죄악을 헤아리신다면, 주님, 감당할 자 누구이리까? 당신은 용서하는 분이시니, 사람들이 당신을 경외하리이다. ◎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
○ 주님께는 자애가 있고, 풍요로운 구원이 있네. 바로 그분이 이스라엘을, 모든 죄악에서 구원하시리라. ◎

제2독서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4,13─5,1
형제 여러분,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17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이고 가벼운 환난이
그지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마련해 줍니다.
18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5,1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2,31-32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이제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밖으로 쫓겨나리라. 나는 땅에서 들어 올려지면 모든 사람을 나에게 이끌어 들이리라.
◎ 알렐루야.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3,20-35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20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21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24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25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26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27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29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30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31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32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34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35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희망이신 주님, 지상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하늘의 영원한 고향을 그리워하며 어떠한 어려움도 굳은 믿음으로 이겨 내게 하소서.

2. 세계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지혜이신 주님, 세계 지도자들을 살펴 주시어, 그들이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기보다, 주님의 피조물인 지구의 안전과 인류의 평화를 위하여 힘쓰게 하소서.

3. 이산가족과 북한에 고향을 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로우신 주님, 전쟁과 분단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이산가족과 북한에 고향을 둔 이들을 보살펴 주시어, 이들의 아픔이 하느님 나라로 건너가는 십자가의 은총이 되게 하시고,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길잡이가 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사랑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성령으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하고, 언제나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리며, 믿음과 사랑이 충만한 일치의 공동체를 이루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가 바치는 예물을 기꺼이 받으시고
저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3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8(17),3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시옵니다.
<또는>
1요한 4,16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신다.

영성체 후 묵상

지금 겪는 환난에 낙심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답게, 지금 여기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 병을 고쳐 주시는 성체를 받아 모시고 비오니
저희를 온갖 죄악에서 자비로이 지켜 주시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사탄은 끝장이 난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0주일

 

지난 5 15 부처님 오신 날입니다. 댈러스 인근에 보현사엘 다녀왔습니다. 스님도 성탄 때는 성당으로 왔다고 합니다. 보현사에서 느낀 점이 있습니다. 절의 주지 스님이 여자 스님이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남자 스님인 줄 알았는데 여자 스님이라 조금 놀랐습니다. 아직 예불 중이라서 법당에서 잠시 기다렸습니다. 스님은 목탁을 두드리며 불경을 암송했습니다. 그렇게 10분 남짓 기다리면서 성당과는 사뭇 다른 사찰의 예불을 보았습니다. 스님은 끊임없이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웠고, 불자들도 따라 하였습니다. 성당의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찰의 예불은 목탁과 염불로 이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성당은 제대와 신자 석이 있고, 신자 석은 대부분 의자로 되어 있는데 사찰은 아직 의자가 아닌 방석이 깔린 바닥에 앉는 것 같았습니다. 예불을 마치고 스님과 차를 마시고 돌아왔습니다. 스님은 공양하고 가라고 했는데 차만 마시고 왔습니다. 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천주교회가 동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었습니다.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동양의 종교인 불교가 서양에 전해지는데도, 비슷한 어려움이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미국에서는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주일로 옮겨서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드리면서 언젠가 미국에서도 부처님 오신 날이 공휴일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담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라고 묻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아담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비슷한 질문을 아담의 아들 카인에게도 하십니다. ‘카인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하느님께서는 아벨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서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카인의 대답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동산에서 당신의 소리를 듣고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어디에 있다고 대답하기 전에 알몸이라서 숨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아담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카인도 하느님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 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부터 카인의 죄를 묻지 않으셨습니다. 카인이 스스로 자기 잘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니 보현사의 지암 스님이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나 어디에 있느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실 저는 스님이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미 사제로 33년을 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찰의 분위기와 사찰의 문화가 제게는 생소하기 때문입니다. 보현사에서 17년을 주지 스님으로 지내고 있는 지암 스님은 전임 신부님들과도 인사했다고 합니다. 스님 또한 성당의 사제가 되라고 하면 어려울 것입니다. 이미 출가해서 30년 넘게 불가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성당의 분위기와 성당의 문화가 생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어디에 있는지 묻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부처님도, 하느님께서도 스님과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물으실 것입니다. 스님이 , , 를 멸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불자들에게 전하며 팔정도의 삶을 살아간다면 부처님의 물으심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복음삼덕과 향주삼덕의 가르침을 교우들에게 전하며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른다면 저 역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주저함 없이 ! 제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먼저 묻지 않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잘못한 이의 죄를 묻기 전에, 그들이 뉘우칠 기회를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을 새롭게 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모두가 불자이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0주일

복음 : 마르코 3,20-35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바오로 사도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이방인의 사도’, ‘모든 민족의 사도' ‘위대한 대설교가’

‘백개의 팔을 지닌 일꾼’,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저술가’...

 

생각만 해도 존경스럽고 믿음직스러운 바오로 사도이지만,

전도 여행차 로마를 떠나 아테네를 거쳐 코린토로 여행하기 전,

이렇게 솔직히 자신의 내면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1 코린토서 2장 3절)

 

뿐만 아니라 바오로 사도는 계속되는 전도여행 중의 갖은 박해와 다양한 위협으로 인해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정신적 심리적으로도 크게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자만하지 않도록 하느님께서 내 몸에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나를 줄곧 찔러 대 내가 자만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2 코린토 12장 7절)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는 변변한 수입도 없어 늘 가난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는 그 누구에게도 짐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천막 만드는 일과 복음선포를 병행했습니다.

오늘날 너무 편하게 사목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참으로 부끄럽게 만듭니다.

 

더구나 당시 코린토는 아카이아라는 로마 주(州)의 수도인 동시에 로마 집정관의 체류지였으며,

로마 군대의 주둔지였습니다.

또한 동서를 연결하는 국제도시였기에, 다양한 인종, 문화, 학문, 종교, 상업의 집결 장소였습니다.

 

자연스레 코린토는 죄와 타락의 도시, 거대한 부와 사치의 도시,

우상숭배와 부도덕의 도시로 정평이 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코린토 교회 안에는 바오로 사도의 직무 수행에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비방하는 적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오로 사도가 다른 열두 사도처럼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불림 받은

순수 정통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문제 도시 코린토 교회의 방문을 앞둔 바오로 사도였기에

너무나 당연히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차라리 이곳을 건너 뛰고 다른 도시로 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오로 사도는 피해가지 않고 정면 돌파를 감행합니다.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자신은 비록 나약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강건하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반대자들도 자신이 돌봐주어야 할 양떼라고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큰 마음으로 포용합니다.

 

코린토 2서는 바오로 사도가 혈혈단신으로 코린토 교회의 회개와 성장을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투쟁하고 있는 흔적으로 가득합니다.

목숨 건 전도 여행로 인해 지칠대로 지친 바오로 사도가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서

코린토 공동체 건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참으로 눈물겹기까지 합니다.

 

코린토 2서만큼 바오로 사도의 인간적이고 영성적인 탁월성을 느끼게 해주는 편지는

다시 또 없습니다.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눈물겨운 편지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명대사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2 코린토 4장 16~5장 1절)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0주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봄은 오다가 멀찍이 피해 도망가고, 여름이 과속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오늘의 말씀 전례는 ‘믿음’이라는 주제 아래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는 죄를 지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대한 불신으로 숨습니다.

그들이 아마 하느님을 믿었다면, 알몸이 두려워 숨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했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2코린 4,13)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믿고 따르는 제자 중에 열둘을 뽑아 사도로 세우신 뒤, 산을 내려오시어 집 안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군중들이 그분의 일행이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예수님의 친척도 있었는데,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고 붙잡으러 왔습니다.

 

또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이 이방인 신인 베엘 제불에 사로잡혔거나 마귀 우두머리(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모함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갈라진 나라와 집의 비유’를 통해서 반박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말을 통해, 당신께서는 성령의 힘으로 그와 같은 일을 하신다는 것을 밝히십니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마르 3,29)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영원히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다니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속죄양이 되셨는데, 어찌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을 수가 있을까요?

혹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하느님의 자비에 한계가 있다는 말일까요?

대체 왜 '용서받지 못한 죄'가 있을 수가 있단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알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용서받지 못하는 죄'는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말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용서하지 않는 죄'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하는 죄'라는 사실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용서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셔도 그가 용서를 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곧 용서받지 못함은 용서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시는 게 아니라, 용서하시지만 인간이 그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아서 '용서받지 못한 죄'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도대체 어떤 죄를 말할까요? 
그것은 ‘용서하시는 성령의 활동’을 의지적으로 배척하고 비난하거나, 사탄의 일로 단죄하거나 방해하거나 핍박하는 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 학자들이 바로 그런 죄에 걸려든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성령을 모독하는 죄'가 왜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되는 걸까요? 
그것은 성령의 활동인 용서를 고의로 받아들이지 않는 바람에 새 생명으로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곧 자신이 완고함과 고집으로 성령의 활동을 거부하는 바람에 용서가 차단되어 버린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의 방문을 받고서, 새로운 ‘영적 가족’을 선포하십니다.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34-35)

이는 당신의 영적 가족의 ‘두 가지’ 구체적인 모습을 말씀하십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계시는 집 안에 들어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마르 3,34)입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병들고 소외당하고 가난하나 구원을 갈망하여 몰려와 예수님 둘레에 앉아 말씀에 귀 기울이는 이들입니다.

 

이는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 한 가족임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설혹 피를 같이한 혈육이라 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예수님의 새로운 가족이 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수님의 어머니요 형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있되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을 아는 이가 아니라, ‘믿고 실행하는 이’입니다.

 

사실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곧 성당에 와 있다고 해도 혹은 수도원에 들어와 있다고 해도, 모두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이들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안에서 이루는 진정한 가족 관계는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고 믿고 실행하는 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말씀'이 하느님의 뜻을 가르쳐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늘 '말씀'을 향하여 있고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장소요 공간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그 뜻을 지니신 하느님께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해서 이루며 우리 안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6.8.토요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 

                                                                                                         이사61,9-11 루카2,41-51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대축일과 기념일이 극명한 대조를 이룸에서 성모님의 겸손을, 또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갖게 됩니다.

부전자전이기보다는 모전자전같습니다. 

저절로 예수성심 신심과 성모성심 신심을 비교하게 됩니다.

 

성가숫자만 보면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235-279)이 45곡, 예수성심에 관한 성가들(199-210)이

11곡이니 성모님에 관한 성가들 숫자가 압도적입니다.

얼마나 전통적으로 교회의 사랑을 받아온 성모성심 신심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성모님의 적자들로 상징되는 역대 교황님들을 보면 한결같이 열렬한 성모신심을 대하게 됩니다. 

 

오늘 성모성심 기념일의 유래를 간략히 나눕니다.

무엇이든 뿌리 확인이 우선입니다.

성모성심은 공경은 17세기 성 요한 에우데스가 시작하였는데, 이는 예수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성모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따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성심 공경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다가 교황 비오 12세는 1942년,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합니다.

이어 경신사성은 1996년 1월1일자 교령으로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인 바로 오늘

선택 기념일로 지내 오던 이 축일을 “의무 기념일”로 지내게 된 것입니다.

 

성모성심은 무엇입니까? 오늘 복음 및 제1독서에서 잘 드러납니다.

저는 성모님의 사랑과 지혜의 마음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사실 참된 사랑이라면 그 사랑은 지혜와 함께 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품성인 자비와 지혜가 함께 가듯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유명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일화입니다. 

해마다 파스카 축제때 마다 예루살렘에 아들 예수님을 대동하던 예수님의 부모를 통해

그분들의 깊은 신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다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큰 일이 생긴 것입니다. .

부모는 소년 예수님이 함께 있으려니 여겼는 데 하루 여행길 후에야 비로소 예수님이 없음을

뒤늦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랍고 당황스러웠겠는지요!

 

예루살렘에 되돌아온 후 사흘 뒤에야 부모는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너무나 태연자약하게

대화를 나누는 아드님 예수를 발견한 것입니다.

율법교사들과 대화중 듣는 이들은 모두 소년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고,

이를 발견한 부모는 무척 놀랐다 합니다.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의 대화가 실감나게 전달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모두가 알아듣지 못하였고 바로 여기서 성모성심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대목이 중요합니다.

고결한 영혼의 특징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성모님의 반응은 조건반사적 감정적 대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의 반응입니다.

사태의 진실을 모를 때는 섣불리 건들이지 않고 그냥 놔둔채 깨달아 알 때까지 기다리며

묵묵히 바라보는 무관심의 관심의 사랑과 지혜가 제일입니다.

 

성모님의 침묵의 사랑, 인내의 지혜가 빛납니다.

분명 지극한 인내로 참아견디며 침묵중에 때를 기다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을 성모성심입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말마디처럼 어진 사랑이 산처럼 높고.

지혜가 바다처럼 깊었을 성모성심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성장과정이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그대로 보고 배웠음을 입증합니다.

순종하는 예수님에게서 순종의 사랑, 순종의 지혜임도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

 

성모님께서 얼마나 하느님께 잘 협조하여 소년 예수님을 키우셨는지 성모성심의 사랑과

지혜를 엿볼수 있는 대목입니다.

아마도 늘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아드님 예수님을 대하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성모성심에 결정적 도움이 되었을 찬미와 감사의 삶과 기도입니다.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요, 영성적으로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지닌 재산이라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뿐이겠습니다.

성모님의 찬미가 마니피캇을 기억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전 화답송은 동병상련처럼 생각되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미가입니다.

그리고 이사야서의 찬미가는 그대로 성모님의 마니피캇을 연상케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변질되거나 부패됨이 없이 늘 푸르른 성모성심을 유지할 수 있던 비결이 바로 여기있습니다.

바로 한결같은 하느님 찬미와 감사의 기도와 삶이 성모성심은 물론 우리의 사랑과 지혜의 성심의 형성에도

결정적 기여를 한다는 것입니다.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아나뷤의 후예답게 날마다 시편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노래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소년 예수님과 율법학자들과 대화를 나누던 장면처럼

저는 흥미로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세계 최고의 지성이자 연로한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로마의 아파트 차고에서

30가정의 남녀노소의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입니다.

 

누구보다도 교황님의 성모님 공경은 해외 사목차 출국과 귀국시

꼭 성모경당에서 인사드리는 모습에서

잘 드러납니다.

대부분 메시지에서도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기사 제목은 “교황 프란치스코 로마 아파트 차고에서 교리교수를 하다”였습니다.

교황님은 안락의자에 앉아있고 평범한 남녀노소의 사람들은 교황님을 에워싸고 주고 받는 대화입니다.

 

“여러분 좋은 저녁입니다. ‘폭풍들(storms)’에 의해 좌절케 해서는 안됩니다.

좋은 관계를 위해 본질적인 세 말마디를 잊지 마십시오.

미안합니다(sorry), 좋습니다(please), 감사합니다(thank you).”

 

“유일한 것은 증거(testimony)를 통해서이다.

여러분은 역사를 전달할 책임이 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중의 하나는

그들이 곧바로 일어선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실패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미끄러진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지지 않는, 노인들이 무시되는 교구는 진짜 신자들 공동체가 아니다.

잊지 마라.

‘노인들은 기억이고 아이들은 약속이다(the elderly are the memory and the children are the promise)’”

 

“증거(testimony)이다. 주로 사람은 가정에서 태어난다.

첫 조언은 부모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아이들이 부모가 서로 사랑함을 느낄 필요가 있다.

만일 너희들이 다툴일이 있으면, 아이들 앞에서 하지 말고, 아이들을 침대로 보내고

너희들이 원하는 만큼 다투라.”

 

“결코 아이들과 대화를 멈추지 말라. 교육은 대화중에 일어난다.

그들은 혼자 남겨주지 말고 압박하지도 말며, 자유롭게 하라.

삶의 공부는 가정에서 이뤄진다.

무엇인가 아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밖에 있는 누가 아니다.”

 

다양한 질문들에 교황님의 답변 몇만을 인용했습니다.

교황님의 친절한 사랑과 지혜로운 답변들로 가득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끊임없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가장 많이 사람들을 접견하고 만나고 대화하는

89세 노령의 사랑과 지혜 가득한 교황님의 성심이 침으로 경탄스럽습니다. 

 

말그대로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처럼, 성모성심을 닮은 예수님 성심이요,

교황님의 성심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찬미와 감사의 미사전례 은총이 우리 모두 성모성심, 예수성심을 닮아

사랑과 지혜로 충만한 내 고유의 성심으로 살게 하십니다. 아멘.


6/9(일) [(녹) 연중 제10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에 대한 을 새롭게 하십니다.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와 자매 그리고 부모를 넘어서라고 하십니다. 부처님의 자비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이는 모두가 불자이듯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조재형 신부)

 

2. 코린토 2서만큼 바오로 사도의 인간적이고 영성적인 탁월성을 느끼게 해주는 편지는

다시 또 없습니다.

이보다 더 열정적이고 눈물겨운 편지 역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어 하나 하나,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명대사입니다.

 

“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 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 코린토 4장 16~5장 1절)(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성모님은 찬미와 감사의 사람이요, 영성적으로는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인 아나뷤의 후예였음이 분명합니다.

이들이 지닌 재산이라고는 찬미와 감사의 노래 기도뿐이겠습니다.

성모님의 찬미가 마니피캇을 기억할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6/9(일) [(녹) 연중 제10주일], 533(163)일 기도

 

복음 <사탄은 끝장이 난다.>  

 

<오늘의 말·샘 기도>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마르 3,33)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의 혈통에 저를 입적시키셨습니다.

당신과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오니, 제 삶이 당신 신성으로 거룩해지게 하소서!

제 안에서 당신의 말씀이 자라나고 아버지의 뜻이 실행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9일(일) 6시2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