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6월 16일 주일[(녹) 연중 제11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6월 16일 주일[(녹) 연중 제11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부르짖는 제 소리 들어 주소서. 저를 도와주소서. 제 구원의 하느님, 저를 내쫓지 마소서, 버리지 마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자비로이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하느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희가
거룩한 은총의 도움으로 계명을 지키며
마음과 행동으로 하느님을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17,22-24
22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손수 높은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으리라.
가장 높은 가지들에서 연한 것을 하나 꺾어
내가 손수 높고 우뚝한 산 위에 심으리라.
23 이스라엘의 드높은 산 위에 그것을 심어 놓으면
햇가지가 나고 열매를 맺으며 훌륭한 향백나무가 되리라.
온갖 새들이 그 아래 깃들이고 온갖 날짐승이 그 가지 그늘에 깃들이리라.
24 그제야 들의 모든 나무가 알게 되리라.
높은 나무는 낮추고 낮은 나무는 높이며 푸른 나무는 시들게 하고
시든 나무는 무성하게 하는 이가 나 주님임을 알게 되리라.
나 주님은 말하고 그대로 실천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 당신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 주님을 찬미하오니 좋기도 하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여, 당신 이름 찬송하나이다. 아침에는 당신 자애를, 밤에는 당신 진실을 알리나이다. ◎
○ 의인은 야자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향백나무처럼 자라나리라. 주님의 집에 심겨, 우리 하느님의 앞뜰에서 우거지리라. ◎
○ 의인은 늙어서도 열매 맺고, 물이 올라 싱싱하리라. 불의가 없는 나의 반석, 주님이 올곧으심을 널리 알리리라.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5,6-10
형제 여러분, 6 우리가 이 몸 안에 사는 동안에는
주님에게서 떠나 살고 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습니다.
7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8 우리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몸을 떠나 주님 곁에 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9 그러므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우리는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
10 우리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서야 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이 몸으로 한 일에 따라 갚음을 받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씨앗은 하느님의 말씀, 씨 뿌리는 이는 그리스도이시니 그분을 찾는 사람은 모두 영원히 살리라.
◎ 알렐루야.
복음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26-34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26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27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28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29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31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32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33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34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하신 주님, 하늘 나라의 신비를 전하는 교회를 살펴 주시어, 모든 이를 당신의 자비로 부르시는 주님의 사랑을 온 세상에 드러내는 증인이 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평화의 임금이신 주님,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을 굽어보시어, 악을 악으로 갚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선으로 악을 이겨 냄으로써 참평화가 깃들 수 있게 도와주소서.
3. 조국을 떠나는 이주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보호자이신 주님, 전쟁이나 굶주림을 피하여 위험하고 무차별적인 폭력이 벌어지는 길로 내몰린 이주민들을 지켜 주시어, 그들이 어렵게 찾아 머무는 나라에서 환대받고 새 삶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사랑이신 주님, 여러 이유로 위기를 겪는 가정들을 돌보아 주시어,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을 키우며 믿음 안에서 어려움을 이겨 내게 하소서.
예물기도
사람을 새롭게 하는 성사가 되게 하시니
이 제사가 저희 육신과 영혼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라네.
<또는>
요한 17,11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가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잔치에서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저희가 주님의 사랑으로 친교를 이루어
주님의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1주일
우리의 주식은 ‘쌀’입니다. 쌀로 밥도 하고, 쌀로 떡도 하고, 쌀로 국수도 만들고, 쌀로 막걸리도 만듭니다. 쌀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들의 땀과 눈물이 알알이 익어가는 것이 쌀입니다. 봄이 되면 농부는 논에 물을 받습니다. 모판에 키운 어린 벼를 논에 옮겨 심습니다. 이것이 ‘모내기’입니다. 벼를 너무 얕게 심으면 바람이 불거나, 비가 내리면 물에 둥둥 뜨게 됩니다. 그런 벼는 열매 맺지 못합니다. 벼를 너무 깊게 심으면 숨이 막혀 제대로 자라지 못합니다. 그래서 벼를 ‘적당한’ 깊이에 심어야 합니다. 쌀을 나타내는 한자는 미(米)입니다. 이는 농부가 88번을 수고해야 비로소 알곡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어르신들은 ‘밥은 곧 하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은 ‘쌀가게’를 하였습니다. 지금은 마트에 가서 쌀을 쉽게 살 수 있지만, 그때는 쌀가게에서만 쌀을 살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제게 과제를 주곤 했습니다. 쌀에 있는 작은 돌이나, 도정이 안 된 벼를 골라내는 겁니다. 그렇게 골라내면 아버지는 십 원을 주셨습니다.
신학교를 ‘못자리’라고 하였습니다. 신학교는 울타리가 되어서 신학생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는 신학생이 사제가 될 수 있도록 양성하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88번의 수고와 땀을 흘려 알곡을 생산하듯이, 신학교는 10년 동안 신학생을 양성합니다. 2학년을 마치면 군에 입대합니다. 4학년이 되면 ‘독서직’을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이때부터 사제의 복장인 ‘수단’을 입습니다. 5학년이 되면 ‘시종직’을 받습니다. 제단에서 봉사할 수 있는 소임이 주어집니다. 시종직을 받으면 성체분배를 할 수 있습니다. 1989년에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있었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이 여의도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습니다. 시종직을 받은 저는 성체분배를 하였습니다. 7학년이 되면 ‘부제품’을 받습니다. 부제가 되면 성직자의 반열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아닌 ‘품’을 받습니다. 예비자들에게 교리를 가르칠 수 있으며, 세례성사도 줄 수 있습니다. 혼인예식도 거행할 수 있고, 장례 절차의 여러 예식을 주도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와 관련해서 축복예식도 할 수 있으며, 봉성체와 성체 강복 등도 할 수 있습니다. 7학년을 마치면 ‘사제품’을 받습니다. 사제가 되면 못자리인 신학교를 떠나서 사제의 직무를 수행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이 피기위해서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울었다고 하듯이, 한 명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10년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토, 국민, 정부’가 정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농부가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길가에, 자갈밭에,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는 열매 맺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뿌려진 하느님의 말씀이 열매 맺도록 우리의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숨겨진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농부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이 묻혀있는 밭을 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금과 은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큰 집과 땅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야할 보물은 지금 굶주린 사람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입니다. 지금 갇힌 사람입니다. 지금 외로운 사람입니다.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눌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나라에 가까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부가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물에 건져진 것 중에 쓸모없는 것은 버리고, 양식이 되는 것만 가져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밀밭에 함께 자라는 가라지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은 모아 곳간에 넣어놓고, 가라지는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더욱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지금 잘못한 사람은 회개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마침표를 찍을 때까지 우리는 충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누가 밀인지, 누가 가라지인지 판별은 오직 하느님의 몫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룩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작지만 발효가 되면 커지는 누룩처럼 하느님의 나라도 비록 그 시작은 미소할지라도, 그 끝은 창대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1주일: 나해
복음: 마르 4,26-34
한없는 풍요로움과 가능성, 확장성을 지닌 하느님 나라!
그 누구도 다녀와 본 적이 없는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너나 할 것 없이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댑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어서 떠들어 대다가도 가끔씩 걱정이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를 만져보며 코끼리의 생김새는 큰 기둥 같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전혀 아닌 이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입니다.
저는 가끔 전례나 그레고리안 성가에 충실한 큰 수녀원 본원 미사, 그것도 부활 성야 미사 같은
큰 미사를 봉헌할 때 무릎을 탁! 치며, 아 그래 어쩌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은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보곤 합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을 비롯한 무수한 성인 성녀들, 천사들이 모두 좌정해 계시는 곳,
그리고 한쪽 일반석에는 먼저 떠난 사랑하는 사람들이 앉아있는 곳.
그럼 거기서는 뭘하는가? 마치 부활 성야 미사때처럼 제1독서, 화답성가, 제 2독서, 화답성가...알렐루야,
복음 낭독, 명강론, 성찬의 전례...등등 거룩한 예식이 끝도 없이 계속되는 곳.
그래서 지상에서 거룩한 전례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곳이지만,
돈이나 세상 좋은 것들에만 오르지 함몰되어 살아왔지 미사나 전례에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곳, 그 자체로 생지옥이요 연옥같은 느낌이 드는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아주 슬쩍 하느님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주십니다.
겨자씨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우세한 특징은 한없는 풍요로움과 확장성임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이 어떤 씨앗보다더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더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마르 4,31-3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 언젠가, 먼 훗날에도 가능하겠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땅 위에서도
실현되어야 하겠습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우리 인간이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된 충만함 속에 사는 곳이라고 확신합니다.
서로의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북돋와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부족함을 기꺼이 견뎌주는 우리 공동체,
서로의 성장을 위해 꾸준히 땀 흘리는 우리 각자의 현실이 또 다른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11주일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사랑이 불타오르는 6월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저 높은 곳으로 부터 품고 온 아버지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 나라’가 선사됩니다.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우리에게 선사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손수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을 따서 심고, 그 나무가 무성하게 하는 이가 당신 주님이심을 알게 하리라.”(에제 17,22-24 참조)고 새로운 나라의 희망을 알려줍니다.
이 향백나무의 ‘꼭대기 순’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비유로 말씀하신 ‘겨자씨’를 떠올려줍니다.
제2독서에서 "함께 살든지 떠나 살든지 주님 마음에 들고자 애를 씁니다."(2코린 5,9)라고 하느님 나라를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믿음을 보여줍니다.
복음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 4,27)
그렇습니다.
먼저, ‘씨’는 우리에게 선사됩니다.
선물로 주어집니다.
곧 주시는 분에 의해 건네져 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가는 나라’, 혹은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라 이미 건네 ‘온’ 나라입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 나라의 이 ‘씨앗’은 이미 우리 안에, 우리들 가운데 들어와 있고, 스스로 줄기를 뻗고 싹을 틔우며, 이삭을 맺고 낟알을 영근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알아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곧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체험하는 일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상호 침투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그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곧 체험하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들어오는’ 나라요, 동시에 ‘들어가는’ 나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성장하고 자라며,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이삭을 맺고 낱알을 영글어 갑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느님 나라가 퍼져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막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위대한 은총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라도록 응답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가 거창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와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작은 모습’으로 와 있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이미 우리 안에 심어진 씨앗입니다.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듯, 그 그늘에 짐 진 이들을 불러 안식을 주듯, 자라게 됩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작은이의 모습으로 하느님 나라를 품고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이 앞에, 작은이로 오실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작아져야 할 일입니다.
그래야 작은이로 계신 그 씨앗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도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공동체에서,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속에서 썩기만 하면 말입니다.
‘씨가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르게’ 그렇게 썩는다면 말입니다.
그들 속으로 들어갈 만큼, 작아지고 낮아지면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 나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요, 그 나라를 체험하게 되는 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 나라의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6.15.연중 제10주간 토요일 1열왕19,19-21 마태5,33-37
정직하여라
“참 좋은 진실하고 겸손한 삶”
“주님을 언제나 내 앞에 모시오니,
내 오른편에 계시옵기, 흔들리지 않으오리다.”(시편16,8)
옛 어른의 오늘 말씀도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루하루 쌓여온 습관들이 내일을 결정하는 운명이 된다.
굳어진 습관은 갑옷이 될 수도, 벽이 될 수도 있다.”<다산>
“본성(本性)은 서로 가까우나 습성(習性)에 따라 멀어진다.”<논어>
새삼 늘 강조해온 좋은 덕목을 사랑하여 훈련하여 습관화함이 얼마나 중요하며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 하는데 좋은 습관이나 버릇은 평생 반듯한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이런 면에서 좋고 필요한 덕목들인 기도와 노동, 성독이 균형잡힌 수도원 일과표의 반복된 생활이
좋은 삶의 습관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감사하게 됩니다.
오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훨씬 능가하는 예수님의 제4 대당명제는 “정직하여라”입니다.
200주년 성서는 “맹세하지 마라”입니다. 맹세하지 말고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하라는 것입니다.
자기를 몰라 무지해서, 교만과 허영으로 맹세하지, 자기 삶의 실상을 잘 들여다 보는
진실하고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들은 결코 맹세하지 않습니다.
맹세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가 없습니다.
한치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이고 내 맹세가 확고부동하게 옳은지 확신할 수 없는데
어찌 맹세할 수 있겠는지요!
그래서 정직하라, 진실하라는 말씀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정직하면 떠오르는 예화가 있습니다. 여러번 예로 들었습니다만 예로 들 때마다 새롭습니다.
저를 가장 좋아했던 바로 고인이 된 윗형의 삼형제 아들들, 조카들이 있는데 셋 모두의 삶이 반듯하여
자랑스런 마음입니다.
첫째 조카의 진솔한 고백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국어 선생님이 가훈을 알아 적어 오라 했어요.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셋을 써주셨습니다
. ‘1.정직, 2.효도, 3.우애’였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아버지 말씀이 더욱 생각이 납니다.”
이 가훈을 듣고 어찌 덕목의 첫째로 정직을 선택했는지 저는 형의 착상이 참 신선함에 감탄했습니다.
사회생활에 정직하고 진실한 삶이 상호신뢰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은 실로 지대합니다.
그래서 50살 전후의 삼형제 조카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정직하고 효도하며 우애좋은 형제들로,
또 사회생활도 잘하며 살아갑니다.
한 예를 더 들면 세 조카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인 아버지가 몇날 자리를 비울때는
셋이 나란히 ‘잘 다녀 오시라’고 큰절을 했고 다녀온 후에도 ‘잘 다녀오셨냐’ 인사하며
셋이 나란히 큰 절을 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 아이들처럼 키워도 되나 속으로 웃으며 반신반의했는데 제 생각이 짧았음을
지금서야 깨닫습니다.
그대로 윗 형님인 아버지의 삶을 그대로 보고 배운 것이지요.
그래서 삼형제 조카들을 볼 때 마다 기분이 좋습니다.
좋은 밑거름처럼 어렸을 때 형성된 좋은 덕목의 영향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 빛을 발함을 봅니다.
마리아 성모님께 효도로 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능가할자 없을 것입니다.
로마를 떠나 사목방문차 나갈 때나 돌아올 때나 반드시 성모경당에 들려 성모님께 인사드리는
교황님의 진실하고 겸손한 모습은 늘 강한 인상을 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맹세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주 단호합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
땅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그분의 발판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위대하신 임금의 도성이기 때문이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숨에 읽혀지는 지극히 진실하고 정직하고 겸손하라는 말씀입니다.
거짓말이 일상화되어 있으면서도 부끄러워할 줄, 두려워할 줄 모르는 후안무치, 적반하장,
내로남불의 정치 지도자들을 보면 저절로 개탄하는 마음이 됩니다.
진리이신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무지에서 벗어나 주님을 닮아 진실하고 정직하며, 온유하고 겸손하며,
자비롭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더욱 단호합니다.
삶은 지극히 단순담백해야 한다는 것이니 이런 이를 일컬어 진국이라 합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엇이든 사실을 사실대로 참되이 말하면 충분한데 맹세 따위 군말을 붙이는 것은
사탄의 사주를 받은 짓거리라는 것입니다.
문득 교황님의 악마와 대화하지 말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본의 아니게 과장된 말이나 뒷담화 모두가 보이지 않는 악마가 끼어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도 일치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5,12)
맹세는 물론이고 구구하게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요 저절로 침묵이 뒤따를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진실과 겸손한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진리의 연인으로 불리기를 바랐던 성 아우구스티누스, 진리의 협력자로 불리기를 원했던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얼마나 겸손하고 지혜로운 진리의 사람인지 깨닫게 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엘리야가 엘리사를 부르는 장면도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진실하고 겸손하며 순수하고 지혜로운 두 인물을 만납니다.
평생동안 주님이 주신 제 사명을 최선을 다해 수행한 엘리야, 이제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정하니
그 스승에 그 제자입니다.
엘리야를 따라나서기 전 단호하게 말끔히 뒷정리를 하는 엘리사의 모습이 참으로 진실하고 거룩해 보입니다.
‘엘리사는 엘리야를 떠나 돌아가서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하였다.
그런 다음 일어나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시중을 들었다.’
주님을 따르는 이들의 모범이 되는 아름다운 장면이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 합니다.
뒤로 달아날 다리를 불살라 버림으로 퇴로를 차단하고 배수진을 친, 옥쇄(玉碎)까지 각오한
결연한 참된 순교적 삶의 자세로 흔쾌히 스승 엘리야를 따라 나선 제자 엘리사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진실하고
겸손한 참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주 하느님, 당신 법에 제 마음 기울게 하소서.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시편119;36.29). 아멘.
6/16(일) [(녹) 연중 제11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예수님께서는 ‘겨자씨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겨자씨가 비록 작지만 그것이 땅에 뿌려져서 자라면 많은 새들이 쉴 수 있는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나라에는 우리가 머물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상대평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절대평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따르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조재형 신부)
2. 아마도 하느님 나라는 이런 곳일 것입니다.
쥐꼬리보다 작은 우리의 선행, 너무나 미흡해 보이는 우리의 기도, 우리가 베풀었던 손톱만한
이웃사랑이 깜짝 놀랄 만큼 풍성한 결실을 거두는 곳, 넉넉함과 풍요로움, 기쁨과 감사,
대견함과 환희로 가득 찬 곳이 하느님 나라일 것입니다.
세파에 닳고, 세월의 흐름에 퇴색되고, 갖가지 상처와 죄로 얼룩진 우리가 그 오랜 짐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변화된 영혼으로 거듭나는 곳이 ‘하늘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더이상 슬픔도, 눈물도, 상처도, 고통도 존재하지 않는 곳, 오로지 하느님의 풍요로운 자비와 은총만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곳, 그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 앞에 우리의 모든 죄와 상처, 과오와 실수들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그곳이 하느님 나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4. “나의 형제 여러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십시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그 밖의 무엇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십시오.
그래야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야고5,12)
맹세는 물론이고 구구하게 변명이나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의 지혜요 저절로 침묵이 뒤따를 것입니다.
말그대로 주님을 닮은 진실과 겸손한 진리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이수철 신부)
6/16(일) [(녹) 연중 제11주일], 540(170)일 기도
복음 <어떤 씨앗보다도 작으나 어떤 풀보다도 커진다.>
<오늘의 말·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6월16일(일)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