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2 글/시]오로지 책임감 하나만으로-따하[397]/나의 마지막 소원은 -따하[398]/맨발의 연주자-따하[399]
2024년 6월22일(토) 글/시
오로지 책임감 하나만으로 / 따뜻한 하루[397]
한 왕자가 사냥을 나갔다 길을 잃고 헤매게 되었습니다.
마침 양 떼를 모는 목동을 만난 왕자는 길 안내를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는 방향만 알려주고는 안내해 달라는 부탁은 거절했습니다.
"왕자님 죄송하지만 저는 남의 집 돕는 목동인데 이를 두고 길 안내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큰돈 걸면서 재차 안내를 부탁했지만, 그는 왕자의 부탁을 끝내 거절했습니다.
급료보다 많이 제안까지 한 왕자는 급기야 목동에게 칼을 겨누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왕자는 생각할수록 괘씸했지만, 하는 수 없이 목동의 설명대로 길을 찾아 내려갔습니다.
그 후 나라를 맡은 그는 인재를 등용하려 했지만, 마땅한 인재를 찾지를 못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맡은 바 책임 탓에 목숨을 위협해도, 흔들리지 않던 그 목동이 떠올랐습니다.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인재도 중요했지만, 그 같은 이가 훨씬 귀하다 생각을 한 것입니다.
왕은 결국 그를 찾아 중요한 일 맡기며, 오랫동안 곁에 두고 나라를 잘 이끌었답니다.
세상일에는 가볍거나 무거운 책임은 없습니다.
하찮고 귀한 일 따로 없듯 책임은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의 미래는 다를 겁니다.
그 숨겨진 가치는 분명히 드러나며, 찾지를 않아도 세상이 먼저 찾을 것입니다.
미국 출신의 유명한 강사인 데일 카네기의 ‘책임’에 대한 말입니다.
“일의 크고 작음에 일체의 상관없이 책임을 다하면 꼭 성공한다.”
사실 예수님만큼이나 책임감 강하신 분이 어디 계셨을까요?
그분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의 모든 죄를 구원해주시고자,
지상 순례를 나서시면서 끝내 십자가의 모진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느님 아버지께로 다시 불림을 받아 그분 오른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우리도 그분께서 베타니아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주신 사명인,
땅 끝까지 만민을 향한 ‘복음 선포’를 온몸으로 실천해야 하겠습니다(루카 24,50 참조).
감사합니다. ^^+
나의 마지막 소원은 / 따뜻한 하루[398]
어느 마을에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하는 부부에게 남자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노인이 부부에게 나타나 아이를 위한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 엄마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말했습니다.
"이 아이가 앞으로 모든 이에게 사랑받게 해 주세요."
아이는 자라면서 많은 이의 사랑을 받으며 살았었지만,
사랑받을 줄만 알았지만, 남을 사랑할 줄을 몰랐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아이는 청년이 되어서도 자신만 알았고,
커가면서도 남을 모르는 점점 교만한 이가 되어 갔습니다.
어느 날 그 노인을 만난 엄마는 간절히 말했습니다.
"노인 어르신, 지금도 저에게는 한 가지 소원이 더 있습니다.
이제는 제 아이가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게 해 주세요."
우리는 사랑받고 살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릴 땐 부모로부터, 좀 커서는 친구들 사랑받고 싶어 합니다.
결혼하고는 배우자에게, 노인이 되어서는 자식들 사랑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사랑은 받을 때보다 나눠줄 때만이, 삶의 기쁨도 더 커지고 행복해집니다.
누군가가 사랑은 나눠주는 것에서 진정한 행복을 느낀답니다.
‘우리는 오로지 사랑을 함으로써만 사랑을 배울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요한 15,12ㄴ-13).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나는 참포도나무다’에서 이것이 당신의 계명이라며 이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사랑’에 대해 언급합니다(1코린 1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
맨발의 연주자 / 따뜻한 하루[399]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맨발로 타악기 연주를 한 글레니에게도 시련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8살 때 청각장애를 일으키며, 12살에 완전히 청력을 상실하는 장애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녀 자신만이 듣는 '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양 귀 대신 양 뺨과 머리, 가슴 등 ‘온몸’으로 소리를 듣는 연습을 했습니다.
20여 년의 피나는 노력 끝에 그녀는 미세한 대기변화로 음의 높낮이를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리 진동을 잘 느끼는 섬세한 발끝의 촉각 하나하나가 그녀의 청각이 되었고,
결국 그녀는 무대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채 연주를 해서 '맨발의 연주자'로 불렸습니다.
"귀로 소리를 듣는다는 건 한순간이지만, 그 후에는 사라지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더 많은 것들을 온몸으로 직접 듣고 느끼면서 받아들여요."
인생에서 찾아오는 시련은 좌절을 주기도 하지만, 반면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도 줍니다.
우리도 시련 극복의 의지만 있다면 글레니가 주는 감동처럼 기적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도 ‘시련 속에서 주님을 경외함’을 언급합니다(집회 2,1-3).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다가 대비시켜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에 허둥대지 마라.
그리하여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면,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예수님께서도 당신과 함께 시련을 감내한 제자들에게 보상을 약속하십니다(루카 22,28-30).
“너희는 내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는 그 어려운 때에도, 나와 함께 있어 준 사람들이다.
내 아버지께서 나에게 이 나라를 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에게 열두 지파 나라를 준다.
그리고 너희는 내 식탁에서 먹을 것이며,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을 심판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시련이란 꼭 방해 거리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우리의 발아래 놓으면 더 높이 오를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