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6월 23일 주일[(녹) 연중 제12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6. 23. 20:07

[매묵]2024년 6월 23일 주일[(녹) 연중 제12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2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면서 구원의 신비를 기념하는 이 미사는, 거센 풍랑이 몰아치는 세상 속에서도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도록 도움을 주는 믿음과 희망의 원천이 됩니다. 우리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릅시다.

입당송

시편 28(27),8-9 참조
주님은 당신 백성의 힘이시며, 당신 메시아에게는 구원의 요새이시다. 주님, 당신 백성을 구원하시고, 당신 재산에 강복하시며, 그들을 영원히 이끌어 주소서.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저희를 한결같이 사랑하시고 끊임없이 보살피시니
저희가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두려워하며
언제나 사랑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07(106),23-24.25-26.28-29.30-31(◎ 1 참조)
◎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분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 배를 타고 항해하던 이들, 큰 물에서 장사하던 이들. 그들은 주님의 업적을 보았네. 깊은 바다에서 그분의 기적을 보았네. ◎
○ 그분 말씀에 사나운 바람 일자, 커다란 파도가 높이 솟았네. 그들이 하늘로 솟았다가 바다 깊이 떨어지니, 그들 마음이 괴로움에 녹아내렸네. ◎
○ 곤경 속에서 주님께 부르짖자, 역경에서 그들을 빼내 주셨네. 광풍을 순풍으로 가라앉히시니, 거친 파도 잔잔해졌네. ◎
○ 바다가 잠잠해져 기뻐하는 그들을, 원하는 항구로 그분은 이끄셨네. 주님께 감사하여라, 그 자애를, 사람들에게 베푸신 그 기적을. ◎

제2독서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평화의 샘이신 주님, 주님의 교회를 일깨워 주시어 성자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의 계명을 깊이 깨달아, 저희 민족이 참된 회개를 통하여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지혜의 샘이신 주님, 주님의 평화를 갈망하는 이들의 호소를 굽어살피시어, 정치 지도자들이 무력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시고, 이 세상에 힘이 아닌 사랑이, 전쟁이 아닌 참평화가 꽃피게 하소서.

3.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로우신 주님, 전쟁으로 희생된 무고한 생명들, 특별히 6·25 전쟁으로 희생된 영혼들을 기억하며 비오니, 그들이 하느님의 위로와 자비로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고, 전쟁의 상처로 얼룩진 한반도가 평화의 땅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4.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사랑이신 주님, 저희를 지켜 주시어, 저마다 주님의 소중한 자녀임을 깨닫고,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 사회와 저희 민족, 나아가 온 세상을 위하여 마음을 모아 기도하게 하시며, 언제 어디서나 평화를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화해와 찬미의 제물을 받으시고
저희가 이 제사의 힘으로 깨끗해져
사랑과 기쁨으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3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통한 인류 구원>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의 무한한 영광을 보여 주셨으니, 그리스도의 천주성으로, 죽을 운명을 지닌 인간을 도와주시고, 그 인성으로 저희를 죽음과 멸망에서 구원하셨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45(144),15 참조
주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10,11.15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내놓는다.

영성체 후 묵상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밤이 되었기 때문에, 풍랑이 일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겁이 나는 것입니다. 거칠게 풍랑이 이는 밤이어도,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을 제대로 안다면 결코 두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인자하신 주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저희를 새사람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거행하는 이 성사로 완전한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2주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5월에는 많은 행사가 있었습니다. ‘성모의 밤, 첫 영성체, 청소년 음악회, 구역미사, 성령강림 찬양의 밤, 사제 서품식, 중남부 남성 제17차 꾸르실료, 견진성사, 주일학교 여름 캠프, 포트워스 성당 주일미사가 있었습니다. 포트워스 성당 신부님이 비자 연장을 위해 1달 동안 한국으로 가셨고, 포트워스 성당 미사를 도와 드려야 했습니다. 행사가 겹친 날도 있었습니다. 첫 영성체와 청소년 음악회가 같은 날 있었고, 꾸르실료와 견진성사도 같은 날 있었습니다. 어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여러 행사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사제서품식입니다. 한국의 사제서품식이 질서정연하다면 미국의 사제서품식은 자연스러웠습니다. 서품식 중에 교구의 모든 사제들이 새 사제들과 친교의 포옹을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선배 사제들은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포옹하였고, 새 사제들은 활짝 웃으며 인사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강림 찬양의 밤입니다. 짧은 시간에 음악 봉사자들이 연주와 노래를 준비하였고, 성령께서 함께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고 하셨는데, 본당에는 재능을 가진 분들이 있었습니다. ‘라우다떼 찬양 팀이 음악피정도 준비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풍랑을 잠재우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호수를 건널 때입니다. 심한 풍랑에 배가 몹시 흔들렸습니다. 제자들은 그러다가 배가 뒤집어 질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워서 편안하게 주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 재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저는 풍랑을 잠재우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예전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1998 26년 전의 일입니다. 동생 수녀님이 백령도 성당에 있었고, 백령도 성당의 신부님이 동창이었습니다. 저는 동생 수녀님도 보고 동창 신부님도 보기 위해 연안부두에서 백령도 가는 배를 탔습니다. ‘임당수라고 중간 쯤 갔을 때입니다. 선장의 안내 방송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졌는데 돌아가는 것보다는 그냥 백령도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사람들은 배 멀미를 시작했습니다. 건장한 해병들도 멀미하였고, 저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심한 멀미를 했습니다.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하면서 고생하고 있을 때입니다. 백령도 주민들은 대부분 별 이상 없이 멀쩡하였습니다. 풍랑이 거세지면서 백령도 주민들은 바닥에 누웠습니다. 저도 따라서 바닥에 누워보니 신기하게도 속이 편해졌습니다. ‘불난 곳에 부채질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욕심, 시기, 질투, 미움, 욕망의 풍랑이 불곤 합니다. 그럴 때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처럼 누워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면 풍랑이 사라지고, 평온한 마음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024 5월은 지나갔습니다. 일정표의 31칸이 거의 채워졌습니다. 31칸을 그리스도와 함께 했다면 하느님의 나라에 그 날들이 업그레이드 될 것입니다. 31칸을 나의 욕심과 나의 뜻으로 채웠다면 옛것으로 지나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옛것은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것 또한 시간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새것입니다. 나의 욕망과 욕심을 채우는 시간은 언제나 옛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고, 똑같이 햇빛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30칸이 비워있는 6월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신학교에서 사제에게 필요한 덕목이 3가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표징을 읽고, 식별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함께한다는 말처럼 규칙적인 식사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사제, 공부하는 사제, 건강한 사제는 30칸의 날에 늘 새것을 채울 것입니다. 2024년도 어느덧 절반이 지나갑니다. 지난날들에 옛것을 채웠다면 남은 날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새것을 채우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2주일

마르코 4,35-41

 

주님께서 언제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선택하신 열두 사도들 역시 처음부터 위대한 사도가 아니었다는 것,

오늘 우리들처럼 한없이 부족했고, 틈만 나면 흔들리며 우왕좌왕했다는 것이 많이 웃기기도 하면서

큰 위안거리로 다가옵니다.

크게 흔들리고 우왕좌왕하는 제자들의 적나라한 모습이 오늘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마르코 복음 4장 37~38절)

 

갑자기 불어 닥친 역풍과 높은 파도 앞에 좌충우돌하면서 희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사도단의 결핍되고 불완전한 모습과

자연현상마저 좌지우지하시는 전지전능하시고 완전한 하느님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특별한 이 에피소드는 우리 인간의 현실은 얼마나 어둡고 나약한지,

얼마나 허망하며 절망적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늘 우리 한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또 얼마나 밝고 화사해지는지? 또 얼마나 영원하며 희망적인지를 알게 합니다.

 

주님의 능력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만 신뢰할 때, 주님 없이 인간끼리 뭔가 하려고 할 때는 언제나

혼돈과 무질서, 절규와 아우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즉시 다가오는 것이

잔잔한 평화와 치유, 충만한 구원입니다.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큰 풍랑 앞에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참으로 코믹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인 제자들 입장에서는 심각했겠지요. 생명의 위협 앞에 제자들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그간 받아온 특별 제자교육도, 예수님을 향한 신뢰도, 위신도,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주무시던 예수님을 흔들어 깨우며 외칩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참으로 아이러니한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느님,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님, 참 삶의 길잡이이신 스승님과 한 배에 타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지만,

살짝 들이 닥친 위기 상황 앞에 갈팡질팡하며 심하게 흔들립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에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을 잘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인생의 풍랑 앞에 설 때 마다, 하느님의 침묵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들 때 마다,

예수님께서 너무 멀리 계신 것처럼 여겨질 때 마다, 예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다는 마음이 들 때 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진설명: 젊은이들이 가장 아름답고 찬란하게 꽃을 피워내는 과정을 꽃봉오리 이미지를 통해 표현한 성김대건성당의 스테인글라스.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12주일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불볕더위가 밀려오는 듯하더니, 장마가 다그쳐옵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의 삶의 신비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곧 우리네 삶 안에 있기 마련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찾도록 이끌어줍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과 시련을 어떻게 대처하고 그것을 통하여 어디로 나아가야 할 바를 알려줍니다.

사실 인생은 고해(苦海)라고 말하듯이 인생은 ‘고통의 바다’에 비유되기도 합니다.

때때로 질병이나 고통이 우리의 삶을 괴롭히고 비참한 상태로 몰아갈 때가 있고, 자연 재해, 물질적 상실, 가정이나 공동체의 분열, 온갖 종류의 근심걱정, 시련과 박해가 있습니다.

또한 의인이나 무죄한 이들이 불합당한 처사를 당해 신음할 때도 있습니다.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억울해지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앙을 흔드는 거센 풍랑에 휩싸이기도 하고, 믿음이 시험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욥의 새 친구와 욥과 엘리후의 변론을 통해서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합니다.

여전히 욥은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왜 침묵하시는지?’ 비참에 떨어져 절규하는 그에게 하느님께서는 답을 들려주십니다.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욥 38,8-11ㄱ)

이 대답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시고 당신의 신비로운 계획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바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나아가지만,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곳은 하느님께서 길을 내주신 곳까지입니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

(욥 38,11ㄴ)

이 말씀에서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신비가 있음을 가르쳐줍니다. 

이는 결국 인간의 한계와 나약함을 인정하고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며 받아들임으로써 그 참된 해답을 얻게 됨을 말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내맡기는 것’,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곧 기쁨이나 즐거움, 혹은 성공과 승리에서만이 아니라 온갖 아픔과 질병, 고통과 상처, 무능과 실패를 통해서도 신앙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바닥을 치는 데까지 나아가서야,  그 순간 오히려 그 한계와 나약함에서 하느님께 의탁하는 길을 배우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겸손한 신앙’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이 ‘겸손한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삶은 그 자체가 고통과 시련이었지만, 바로 그것을 통해 고통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오히려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고해의 바다’를 건너는 것은 ‘믿음’입니다. 

바다 위에는 '거센 돌풍이 일었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함께 계시지만 침묵하고 계시고, 현존하고 계시지만, 잠들어 계십니다.

 

예수님을 깨우는 제자들은 함께 계신 분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신뢰하고 계셨습니다.

사실 잠들어 있는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이었습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은 잠재우고, 제자들은 깨우십니다. 

곧 풍랑을 향해서는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마르 4,39) 하시고, 제자들에게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마르 4,40)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며, 당신께서 하느님이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시편 작가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능하시고 진실에 쌓여 계시오니, 
뒤끓는 바다를 호령하시고 솟구치는 물결을 붙잡으시는 분”

(시 88,9-10)

동시에 제자들의 온갖 두려움과 걱정과 불신을 잠재우시는 반면, ‘믿음’을 깨웁니다.

 

그렇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마르 4,38)라고 투덜댈 때, 바로 그 때가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입니다.

아니, 바로 그 때가 불신에 떨어져 있을 때입니다.

 

바로 여기,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 순간이, 바로 ‘믿음’이 요청되는 순간입니다.

‘믿음’이 어둠을 넘어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하시며, 제자들을 불신의 어둔 잠에서 깨우십니다.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십니다. 

그리고 어둠을 건너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렇습니다. 

그분께 대한 믿음과 신뢰가 우리에게 거센 풍랑 속에서도 평화를 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당신께서 함께 계시는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사랑의 요청을 들어야 할 일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그분의 사랑의 요청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2코린 5,14). 

“다그치다”(συνεχει)라는 말은 ‘빨리 행동하도록 몰아붙이다’, ‘강하게 요구하다’라는 뜻으로 행동하게 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 강력한 힘이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2코린 5,17)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6.22.연중 제11주간 토요일                                                            2역대24,17-25 마태6,24-34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

                                                   “걱정하지 마라, 보라, 찾으라”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언제 어디서나 더불어의 삶중에도 내면은 위의 민들레꽃처럼 하느님만으로 행복한, 가난하고 겸손한

은수자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이 참으로 절실한 시절입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신선한 도움이 됩니다.

 

“매일 자기 전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위대함은 확실하게 쌓여간다”<다산>

 

“날마다 세 가지 점에서 나를 반성한다. 일을 할 때 불성실하지는 않았는가?

벗의 신의를 저버린 일은 없는가? 배울 때 제대로 익히지 못한 것은 없는가?”<논어>

 

이런 좋은 습관 역시 얼마나 믿음의 삶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요!

예전 피정자들에게 자주 예로 들었던 두 말마디가 생각납니다.

 

1.품위있는 노년 삶의 우선 순서는 하느님 믿음, 건강, 돈이다.

2.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확하게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 역대기 상권에서 요아스 임금이 우상들을 섬긴 것도, 배은망덕하게도 생명의 은인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인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그 자신이 살해된 근본적 원인도 하느님 중심의 믿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그런 삶자체 모두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양자택일 역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힘든 것은 삶의 중심이 하느님과 재물 둘일 때, 그리하여 마음이 갈릴 때입니다.

확고부동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얼마나 결정적이요 본질적인지 깨닫습니다.

오늘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을 사는 이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세 가지 충고 말씀이 참 고맙습니다.

 

첫째, 걱정하지 마라!

정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라면, 모두가 하느님 섭리 안에 펼쳐지는 삶이라면

저절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삶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의 모범을 보여주십니다.

그대로 예수님 삶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그대로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믿음 약한 우리들에게 주시는

복음 말씀입니다.

우리의 믿음 부족을 한없이 부끄럽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필요함을 아신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미 전래 되는 속담에도 믿음의 흔적이 있습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치랴?, ’다 그가 먹을 것은 타고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인명은 재천이라 사람의 목숨을 하늘에 달려 있다.’, 이런 삶의 낙관 역시 믿음의 반영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은 전반적으로 얼마나 약화되어 있는지요!

 

하루하루의 삶에, 오늘 지금 여기에 집중하는 것이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믿음으로 최선을 다해 좋은 추억을 쌓아가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 됩니다. 

말그대로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게 하는 믿음입니다.

 

넘어지면 곧장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파스카 믿음의 삶이 탄력좋은 삶을 살게 합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이 무너질 때 무기력, 무감감, 무의욕의 삶이요 저절로 죄와 더불어

심신도 병들게 됩니다.

영적 건강에 하느님 중심의 믿음의 삶은 얼마나 결정적인지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둘째, 보아라!

‘들어라!’, 잘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삶의 허상이나 환상을 꿰뚫어 삶의 진상을, 실상을 보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느님 섭리의 현존으로 가득한, 하느님의 선물로 가득한 세상임을

깨달을 것이며 마음 깊이에서는 찬미와 감사도, 기쁨과 평화도 샘솟을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 그런 분이십니다.

대영성가이자 신비가이자 관상적 활동가인 예수님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조화로운 평화공존의 세상이요 하찮은 미물들 역시 하느님 안에서 한가족임을 깨닫습니다. 지구에 대한 무절제한 채굴과 세상 생명체들에 대한 잔인한 착취와 학대 역시 얼마나 큰 죄인지 깨닫습니다.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도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이런 강론을 능가할 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낙관적 믿음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에 크나큰 도전이 됩니다.

매사 세상 만물과 사건들은 믿음의 눈으로, 사랑의 눈으로 눈여겨보고 지켜봐야함을 깨닫습니다.

 

셋째, 찾아라!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배고파하는 인간 실존입니다.

그러니 자나깨나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생명과 빛의 하느님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의 평생화두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는 먼져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안빈낙도 자족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최대의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기후위기에 대한 궁극의 유일한 처방이 이런 내적 혁명의 생태적 회개의 삶이요,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더불어 공동체 삶중에도 내면은 충만한 고독의 은수자로,

최민순 신부님의 두메꽃처럼 살게 하십니다. 

 

“외딸고 높은 산 골짜구니에

살고 싶어라

한 송이 꽃으로 살고 싶어라


벌 나비 그림자 비치지 않는

첩첩산중에

값없는 꽃으로 살고 싶어라


햇님만 내 님만 보신다면야

평생 이대로

숨어서 숨어서 피고 싶어라.” 아멘


6/23(일)[(녹) 연중 제12주일], 되새김 구절

 

1.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조재형 신부)

 

2. 그 어떤 풍파와 시련이 거듭된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강한 의식 속에 살아갈 때

언제나 우리는 강건합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며 희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이 아래로만 향할 때, 세상만 바라볼 때, 나 자신만 바라볼 때, 즉시 두려움 투성이의 나약한 존재로

전락합니다.

 

하느님께서 내 등 뒤에서, 내 오른편에서, 내 왼편에서 나를 꽉 붙잡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의 손길 안에 푹 잠겨있으면서도 하느님이 어디 계시냐며 부르짖습니다.

하느님의 충만한 위로와 사랑을 시시각각으로 전달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목말라 어쩔 줄 몰라 합니다.

 

그분은 늘 우리와 함께 동고동락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험난한 인생길에 항상 동행하는 분이십니다.

잠시라도 우리와 떨어지면 불안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보시며 우리를 드넓고 푸른 초원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너희는 먼져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이름을 우리 삶의 중심에 두고 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고 행복한 안빈낙도 자족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최소한도의 필요로 최대의 행복을 살아갈 수 있는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이수철 신부)

 

 

6/23(일)[(녹) 연중 제12주일], 547(177)일 기도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오늘의 말·샘 기도>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마르 4,40)

 

주님!

잠들어 있는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깨어나야 할 이는 당신이 아니라, 저 자신입니다.

당신이 함께 계시건만, 불신으로 제가 두려워합니다.

주님, 풍랑을 맞아 가라않으면서야, 비로소 제가 키잡이가 아님을 봅니다.

풍랑 속에서 잠들어 계셔도 바람과 호수를 복종시키시는 분,

당신이 저의 주님이십니다.

당신은 주무셔도 주님이시요, 깨어 계셔도 주님이십니다.

아멘.

 

- 2024년 6월23일(일) 20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