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7월 8일 월요일[(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7월 8일 월요일[(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성전에서 당신의 자애를 생각하나이다. 하느님, 당신을 찬양하는 소리, 당신 이름처럼 땅끝까지 울려 퍼지나이다. 당신 오른손에는 의로움이 넘치나이다.
본기도
타락한 세상을 성자의 수난으로 다시 일으키셨으니
저희에게 파스카의 기쁨을 주시어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입니다.2,16.17ㄷ-18.21-22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6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17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
18 주님의 말씀이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21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22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네.
○ 나날이 당신을 찬미하고, 영영 세세 당신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그분의 위대하심 헤아릴 길 없어라. ◎
○ 세대가 세대를 이어 당신 업적을 기리고, 당신 위업을 널리 전하리이다. 당신의 위엄 그 찬란한 영광을 이야기하고, 당신의 기적을 노래하리이다. ◎
○ 경외로운 당신 업적 그 위력을 말하고, 당신의 크나큰 위업을 선포하리이다. 넘치는 당신 은혜를 기억하고 알리며, 당신 의로움에 환호하리이다. ◎
○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8-26
18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21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22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23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24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25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26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께 바치는 이 제사로 저희를 깨끗이 씻어 주시고
영원한 생명에 날마다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 행복하여라, 주님께 바라는 사람!
<또는>
마태 11,28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성사의 큰 은혜를 가득히 받고 비오니
구원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어
저희가 끝없이 주님을 찬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교구사제 모임 중에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었습니다. 강론을 하는 것은 보람이지만, 강론을 듣는 것은 기쁨입니다. 교구장님은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가 있습니다. 이방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을 대는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극히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이라는 표현대신 ‘주님’이라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 대신에 ‘하늘나라’라는 표현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방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했을 때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표현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저는 교구장님의 강론을 들으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하늘나라는 같은 의미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빛나는 나라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에 대한 개념입니다. 미국에 이미 거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서류상으로 아직 온전히 미국에 거주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지만 취업에 제약이 따르기도 합니다. 서류가 미비한 사람들은 외국에 나가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나갈 수는 있지만 재입국이 거절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시간의 특징은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입니다. 구원은 선형적으로 나열되는 시간 경과를 따라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와 아직 오지 않은 하느님 나라 사이의 긴장과 역동 속에 십자가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구원은 과거에 박제된 사건일 수 없습니다. 나의 생생한 현실이며 오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선포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아직 하느님의 나라를 온전한 마음과 정신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마지막 때를 사는 지금 나는 온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교구장님은 이미 시작된 하느님의 나라를 우리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하는 사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가야 하는 사제들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 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고 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12해 동안이나 ‘하혈’하던 여인은 고통 중에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여인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이제 그 여인은 하혈이 멈추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믿음으로 하혈하던 여인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하느님의 나라를 체신현험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전승은 그 여인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함께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여인은 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수건으로 닦아 드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었던 회당장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일어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2.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강론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9,18-26: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치유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께 나타나 예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했던 것같이(2열왕 5,11), 신앙이 없는 사람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한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는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를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오늘 복음은 두 개의 기적 이야기가 극적인 긴박감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장면이요, 또 하나는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이 두 이야기에는 서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곧 두 이야기 모두 이미 절망하고 포기되었어야 할 상태에서 믿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고 있던 여인'은 이 불결한 병 때문에 이미 삶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상태이지만,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겠지.'(9,20) 라고 믿었습니다.
회당장 역시 딸이 죽어 이미 생명이 끝나버린 상태이지만,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9,18)이라고 믿었습니다.
또한 둘 다 '손'이라는 도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고, 마침내 병이 나았습니다.
회당장 역시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시면 살아날 것이라고 간청하였고, 예수님이 아이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는 곧 일어났습니다.
한편, 이 두 이야기에는 서로 다른 점도 있습니다.
곧 회당장의 죽은 딸에게 있어서는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아이가 일어났다는 사실이요, 하혈병을 앓던 여인에게 있어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앞의 이야기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죽음을 생명으로 이끄는 권능의 도구라면, 뒤의 이야기에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끌어들인 도구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앞의 이야기에서는 회당장의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권능으로 죽은 소녀를 살리신 반면에, 뒤의 이야기에서는 하혈병을 앓던 여인이 자신의 믿음으로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을 불러들였습니다.
그래서 이 뒷이야기에만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9,22)라는 말씀이 덧붙여졌습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 깨우쳐줍니다.
사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의 믿음’은 언뜻 보기에는 미신적이기까지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옷에 손을 대기만 하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주술적이거나 마술적이기까지 합니다.
또한 ‘회당장의 믿음’ 역시 언뜻 보기에는 억지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미 죽은 아이에게 손을 얹어주면 다시 살아나리라는 믿음’, 그것은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고 바보짓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거나 예수님이 손을 얹어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분과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관장하시는 분이시며, 부정을 깨끗이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렇게 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이야기는 예수님의 신성과 메시아, 곧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시고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줍니다.
그러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에 빠지는 일이 없이 ‘끝까지 믿어라’는 말씀입니다.
오로지 예수님께만 희망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전능한 손길에 우리의 손을 맡겨드려야 할 일입니다.
또한 우리는 믿음의 손으로 그분의 옷을 부여잡고 그분의 권능과 자비가 우리들 안에 흘러들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7.연중 제14주일 에제2,2-5 2코린12,7ㄴ-10 마르9,18-26
어떻게 살아야 하나?
“참사람이 됩시다”
한결같아라, 두려워하지 마라, 약점을 자랑하라,
“수도자가 누구인가?” 묻는 사람이 수도자라 합니다.
날마다 물어야 물음은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어떻게 살아야 하나?”등 입니다.
치열하고도 한결같은 노력없이는 참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공부의 목적은 무지에서 벗어나 나를 아는 참사람이 되는 것이요, 정말 중요한 필생의 평생 공부는
참사람이 되는 공부 하나뿐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참사람의 탐구와 하느님 탐구는 함께 갑니다.
결국 참사람이 되는 공부는 하느님 공부요 날로 닮아가야 하는 하느님입니다.
이보다 도전적이고 흥미진진한 공부도 없습니다.
미리 말씀드리는바 답은 사랑의 이중계명 하나뿐이니,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입니다.
옛 어른의 말씀도 참사람의 경지에 이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지만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사람, 일상의 삶에서 품격을 갖춘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다산>
이런 경지는 정말 하느님의 뜻에 일치한 대자유인의 경지이며 공자의 논어 위정편에서 말하는
일흔 살에 이른 경지와 일치합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공자가 얼마나 치열한 공부의 여정을 살았는지 그 공부의 발자취를 보여줍니다.
하고자 하는 바를 해도 법도에,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았다니 정말 자유로운 참사람의 경지입니다.
“‘곧고 반듯하고 위대해서 익히지 않아도 이롭지 않음이 없다.’는 말은, 곧 그 행하는 바를
의심치 않는 것이다.”<주역>
주역의 말씀 역시 참사람이, 참어른에 이른 경지를 보여줍니다.
다음 시인 백석의 고백도 좋은 깨우침이 됩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이런 경지에 이른 참사람을 만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주인공 우리 주 예수님이 우선이고 이에 앞선 제1독서의 에제키엘 예언자,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님이 생의 전부였던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입니다.
이 세분에게서 저는 참사람이 되는 길을 배웁니다.
첫째, “한결같아라!”
오늘 복음에서 무지한 고향 사람들에 대한 반응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는 삶의 자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란 고향 사람들은 겸손히 배우려는 자세는 전무합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얻었을까?” 의문을 제기하며
예수님의 배경에 대한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질투합니다.
결코 자기의 무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대로 우리 인간의 보편적 어둔 모습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바로 이 말마디가 부정적 분위기를 요약합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고향 사람들의 선입견과 편견의 완고함에 대한 주님의 깊은 좌절감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나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 밖에는 어떤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으며, 이들의 믿지 않음에 놀랍니다.
예수님의 지혜에 놀란 고향사람들, 그리고 이들의 믿음 없음에 놀란 예수님이 참 묘한 대조를 이룹니다.
예수님의 빛나는 대목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좌절함이 없이 미련없이 훌훌떨치고 일어나 홀가분하게, 묵묵히, 한결같이 계속
자기 길을 가시는(to keep going) 모습이 감동입니다. 제 지론이 생각납니다.
‘넘어지는게 죄가 아니라, 자포자기 절망으로 일어나지 않는 게 죄다.
넘어지면 즉시 일어나 새롭게 시작하는 한결같은 삶이, 탄력좋은 삶이 제일이다.’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곁같이 사명에 전념하라, 바로 오늘 복음의 예수님이 그 삶의 모범입니다.
둘째,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에 앞서 에제키엘 예언자가 파견되는 자리 역시 적대적입니다.
이를 대비해 주님의 영이 에제키엘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를 일으켜 세우며 주시는 격려 말씀입니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이스라엘 자손들, 나를 반역해 온 저 반역의 민족에게 너를 보낸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자손들에게 너를 보낸다.”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들’은 그대로 회개가 절실한 우리의 부정적 무지한 면모를 보는 듯합니다.
마음 완고하기가 예수님 고향 사람들과 흡사합니다.
우리 역시 일상에서 이런 이들을 만나기도 할 것이며 주님은 에제키엘은 물론 우리에게
든든한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너 사람의 아들아.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도 두려워하지 마라.”
주님의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씀에 이어 반드시 나오는 말마디가 ‘내가 너와 함께 있다.’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니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적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약점을 자랑하라!”
참 용기있고 참 자유로운 영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진정 강한 자는 자기를 이긴 자입니다. 진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나 안에 있습니다.
내가 문제요 내가 적입니다.
자기가 받은 고통이 자만에 대한 해결책임을 발견한 바오로의 감사에 넘친 감동적 고백입니다.
불리하다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자기를 비우는 겸손의 계기로, 바로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는
바오로 사도의 순발력의 지혜가 참 놀랍습니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주님의 은혜로운 말씀은 그대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어지는 바오로의 감동적 고백도 그대로 나의 고백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통해 자기에 대한 궁극의 빛나는 승리를 보여줍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부끄럼없이 자랑하다니 참 대단한 내적 용기입니다.
정말 자기를 이긴 영적승리자, 자유로운 영혼의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애오라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일치의 삶이 참으로 감동적이며,
내적 힘과 용기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자기를 이긴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멋진 참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1.한결같으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약점을 자랑하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한 주님과의 일치 은총이 날로 주님을 닮아 이런 참사람의 삶을 살게 해 주십니다. 아멘.
7/8(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탈리타꿈(일어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에로 옮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셨습니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조욱현 신부)
3. 그들의 믿음은 단순히 상황이 바뀌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그분과 그분께서 그렇게 해주시리라는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믿음’과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관장하시는 분이시며, 부정을 깨끗이 하실 수 있는 분이시며, 그렇게 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약함도 모욕도 재난도 박해도 역경도 달갑게 여깁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오히려 강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부끄럼없이 자랑하다니 참 대단한 내적 용기입니다.
정말 자기를 이긴 영적승리자, 자유로운 영혼의 바오로의 고백입니다.
바오로의 애오라지 그리스도 중심의 삶이, 그리스도와의 내적일치의 삶이 참으로 감동적이며,
내적 힘과 용기의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자기를 이긴 천하무적의 주님의 전사 바오로입니다.
참으로 멋진 참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1.한결같으십시오.
2.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약점을 자랑하십시오.
(이수철 신부)
7/8(월) [(녹)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제17일차 기도
복음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태 9,18)
주님!
당신께서는 저를 빚어 만드시고, 당신의 지문을 새기셨습니다.
선악과를 붙잡았던 제 손을 대신하여 당신 손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그 손을 얹으시어 저를 축복하소서!
제 안에 새긴 당신 얼을 새롭게 하소서!
제 온몸에 사랑의 전류가 흐르게 하고,
제 손을 잡는 이마다 사랑의 전등이 켜지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8일(월) 7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