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15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14. 05:19

[매묵]2024년 7월 14일 주일[(녹) 연중 제15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오늘은 연중 제15주일입니다. 성자께서는 사랑의 신비와 인간의 존엄을 밝혀 주십니다. 우리가 오로지 그리스도께만 매여, 성령으로 가득 차, 믿음과 실천으로 형제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굳은 믿음을 청합시다.

입당송

시편 17(16),15 참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5(84),9ㄱㄴㄷ과 10.11-12.13-14(◎ 8 참조)
◎ 주님, 저희에게 자비와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 하느님 말씀을 나는 듣고자 하노라. 당신 백성, 당신께 충실한 이에게, 주님은 진정 평화를 말씀하신다. 그분을 경외하는 이에게 구원이 가까우니, 영광은 우리 땅에 머물리라. ◎
○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
○ 주님이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열매를 내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은 그 길로 나아가시리라. ◎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는>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1,3-10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에페 1,17-18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저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부르심을 받은 저희의 희망을 알게 하여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창조주이신 주님, 저희를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고 하셨으니, 저희가 주님께 받은 은총으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온 세상에 전하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평화의 샘이신 주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갈등을 안고 살아가는 국가들을 살펴 주시어, 갈등을 겪고 있는 이들이 담대하고 적극적으로 대화하여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사목적 배려가 필요한 아픈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위로자이신 주님, 병자성사를 받는 이들과 그들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강복하시어, 이 성사로 주님의 힘을 얻게 하시고, 또한 이 성사가 모든 이에게 연민과 희망을 더욱 잘 드러내는 표징이 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하신 주님, 영원한 생명을 청하는 저희 본당 공동체를 굽어보시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며,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깨닫고 성실히 실천하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4 <구원의 역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탄생하시어 인류를 새롭게 하시고, 수난하시어 저희 죄를 씻어 주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오르시어 천국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알고 그 희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5주일

 

예전에는 천동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와 금성의 모양 변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금성을 관측하면 달처럼 다양한 모양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천동설에 의하면 금성은 초승달 또는 그믐달 모양으로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금성의 위상 변화 역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지구는 1시간에 약 1,670km의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을 둘러싼 대략 9 6천 만km에 달하는 타원 궤도를 1년 동안 돌고(공전) 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주 운동과 계절 변화인데 일주 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성이며, 태양은 우리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항성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변방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꿈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는 달을 탐사하였고, 화성까지 탐사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천동설과 지동설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성당의 중심은 아닙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은 중남부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은 포트워스 한인 성당입니다. 그리고 대략 4시간 거리에 오스틴, 휴스턴, 샌 안토니오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에 엘파소, 덴버, 콜로라도 성당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기에는 먼 거리에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성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제들이 함께 모여서 연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중남부 지역 대표 신부님과 휴스턴, 오스틴, 샌 안토니오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꾸르실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레지오, 엠이, 성령기도회도 담당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4시간 거리에 있는 성당이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피정도 함께 하면 좋겠고, 성령기도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5주일: 나해

복음: 마르 6,7-13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여름 캠프 온 아이들을 위한 식자재를 구입하기 위해 대형 식자재 마트에 갔습니다.

이것저것 잔뜩 산더미처럼 카트에 싣고 계산대 앞에 서니 근무하시는 자매님께서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묻습니다.

 

“사장님은 대체 무슨 일을 하신데요?”

 

그 상황에서 ‘사실 저는 천주교 신부인데요!’ 하기도 거시기 했습니다.

그래서, “작은 식당 하나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작은 식당이 아닌 것 같은데...아무튼 더위에

고생이 많으시네요.” 하십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야 재미있고 기쁜 마음으로 하는 일이지만, 가족들의 생계가 자신의 어깨에 달려있는 자영업자들,

얼마나 마음 고생이 많으실까, 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는 마트 직원의 질문 앞에 다시 한번 제 신원, 제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각별히 총애하셔서 이름을 불러주시고, 선택하시고, 복음 선포의 사명을 주셨는데,

그러한 소명에 기쁘게 응답하고 있는지, 마지막까지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지 크게 반성이 됩니다.

 

예언자로 산다는 것, 때로 근사하고 멋있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폭군이나 압제자의 잔악한 횡포나

그릇된 지도층 인사들의 타락 앞에서도 그저 숨죽이고 지낼 뿐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 한번 보십시오. 주님으로부터 예언의 사명을 부여받습니다.

두렵고 떨리지만, 주님께서 가라고 하시니 고관대작들 앞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며, 그의 파렴치한 치부를 아무런 가감없이 고발합니다.

서슬퍼런 예언의 말씀 앞에 왕들조차 고개를 조아립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평생 한두번입니다.

나머지 대부분의 생애는 핍박과 돌팔매질과 추방과 놀림의 연속입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자신에게 예언자의 소명을 주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도망다니기까지 합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거룩한 주님의 지성소 베텔 땅을 더럽히지 말고

유다 땅으로 가서 예언하며 밥 먹고 살아라, 는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의 질책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스 7,14-15)

 

보십시오. 아모스 예언자는 철두철미한 신원의식, 겸손한 신원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단한 예언자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면서도 자신의 근본, 본래 처지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자신은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본래 양치는 목자요, 돌무화과 나무를 가꾸는 농부였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결핍 투성이요 천덕꾸러기였던 원래 나의 허물을 벗고 사목자가 되고

책임자가 되고 나면 많은 사람들이 변합니다.

자신의 근본을 잊고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어딜 가면 주인공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 나를 보필해야 합니다.

슬슬 주님께서 혐오하시는 거짓 목자, 삯꾼으로 전락하는 중입니다.

 

요즘 저는 일부러 이런저런 힘든 일들을 골라 하고 있습니다.

저도 까마득한 시절에는 새벽부터 밤늦도록 산업 현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던 근로자였습니다.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 오늘의 말씀(7/14일) : 연중 제 15 주일

*제1독서 : 아모 7, 12-15 * 제2독서 : 에페 1, 3-14

* 복음 : 마르 6, 7-13

 

7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 오늘의 강론 :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 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 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제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 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파견 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려줍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 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 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13.연중 제14주간 토요일                                                            이사6,1-8 마태10,24-33

 

                                            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의 일상화

                                         “영적 면역력 증진과 더불어 온전한 삶”

 

"주님은 어지시다 찬양들하라,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시편136,1)

 

이런저런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입니다.

“조그만 구멍 하나만 뚫렸어도 깨진 항아리가 된다. 큰 예의는 작은 예의를 지키는 데서 완성된다.”<다산>

 

일상의 작은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배웁니다.

크고 작은 예의가 없듯이 크고 작은 죄도 없습니다.

참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는 온전한 삶을 추구해야 할 것입니다.

 

“남의 오래된 잘못을 말하지 말고 깔보는 표정을 지어서도 안된다. 갑작스레 방문하지 말아야 하며,

갑작스레 떠나서도 안된다.”<예기>

이 또한 삶의 지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깨어 있는 삶이라면 이처럼 일상의 지혜에도 충실할 것입니다.

<예기>는 중국 고대 경전인 오경의 하나로, 예법의 이론과 실제를 풀이한 책으로

삶의 지혜를 집대성한 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 월요일 하늘병원 진료차 방문후 떠나려 할 때 두 젊은 여자 직원이 청해서 고백성사를 줬습니다.

뜻밖의 청이 신선한 감동이었습니다.

젊은 분들이 신앙으로 살아가는 삶은 참 갸륵하고 아름다웠습니다.

두분께 각기 기도문과 더불어 준 동일한 보속에 만족했습니다.

 

“오늘 하루 병원 생활 중 환자들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게, 행복하게 사는 것이 보속입니다.”

보속이 아니더라도 하루하루 하느님과 이웃을 겸손히 잘 섬기며 기쁘고 감사하며 행복하게 산다면

'참으로 사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전 사막을 찾았던 구도자들이 추구했던 유일한 목표는 “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어제는 요셉 수도원에 정주하다가 세상을 떠난 이정우 바오로 수사의 기일 4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나 팔팔합니다!”

6월29일 베드로, 바오로 사도 대축일날 영명축일을 지내며 건강을 뽑내신 88세 노령의 수사님이었는데

약 2주후 세상을 떠났고 당시는 아무도 선종하시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불어 떠오른 생각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살아계셨다 해도 돌아가신 것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냥 시간만 연장된 무의미하고 무기력한 삶도 많지 않은가?

나이 30에 죽어서 70에 묻힌다는 말도 있지 않나?

하루하루 선물 인생을 생각없이 낭비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감 없는 죽은 삶도 비일비재하지 않나?”

 

어제 수도형제의 사랑의 권유로 함께 인근의 피부병 진료차 <소나무 한의원>에 들렸습니다.

진단은 “면역질환”이란 것이었습니다.

피부가 면역력이 떨어짐으로 인한 것이기에 장기적인 관리와 보양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면역력이 좋고 강할 때는 건강하고 아름다운 피부이지만 면역력의 결핍은 만병의 시초라는 것입니다. 

 

순간 연상된 마음의 면역력, 정신의 면역력, 영혼의 면역력이 떨어졌을 때의 심각한 결과를 묵상했습니다.

피부 육신의 면역력에 앞서 이런 영적 면역력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싶었습니다.

이래서 영적 면역력의 증진을 위한 “신망애信望愛의 삶”, “진선미眞善美의 삶”, “평화와 기쁨”,

“찬미와 감사”, “겸손과 섬김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말씀이 영적 면역력에 대한 참 좋은 처방을 보여줍니다. 

 

바로 하느님 사랑의 신비 체험입니다.

인간의 본원적 치유는 하느님뿐입니다.

인도의 성자 간디는 온마음을 다해 하느님 이름을 부름으로 웬만한 병은 다 나았다 합니다.

인간의 영육의 전인적 힐링은 물론 영적 면역력의 증진에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인  미사은총보다

더 좋은 처방은 없다는 확신입니다.

 

하느님 신비 체험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하는 주님의 미사은총의 선물이 참 고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예수님이야 말로 하느님 신비 체험의 대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지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정말 두려워할 바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을 떠나는, 하느님과 단절되 영혼의 죽음입니다.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두려워할 때 비로소 일상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공포의 두려움이 아니라 외경의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하느님 향한 외경의 두려움을 키우는데 흠숭의 기도가 제일입니다.

더불어 잊지 못하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은 아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허락없이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다.”

매사 하느님의 뜻을 찾고 살아야 함을 절감합니다.

 

평범한 하느님 신비 체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이사야의 소명 체험 처럼

비상한 하느님 신비 체험도 있습니다.

이사야의 소명체험에 앞선 날개 여섯 개 달린 사랖들의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미사전례에

차용되고 있음을 봅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

 

미사전례중 '거룩하시다' 장면시 꼭 이사야의 하느님 체험의 고백을 연상하시기 바라며

이사야의 체험을 여러분의 체험으로 삼기 바랍니다.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

 

순간 사랖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타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날아와

이사야 잎에 대고 말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말씀과 성체가 타는 숯을 대신합니다.

“자,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죄는 없어지고 너의 죄악은 사라졌다.”

 

이사야의 하느님 신비 체험을 그대로 차용한, 영적 면역력을 증진시켜주는 미사전례야말로

하느님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새삼 고맙게 깨닫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사야 예언자가 주고 받는 대화는 그대로 미사중 파견 예식을 연상케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하느님 신비 체험후 가야할 복음 선포의 자리는 각자 삶의 제자리입니다.

빛의 주님과 늘 함께 할 때 두려움의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 가리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이사6,8). 아멘.


7/14(일)  [(녹) 연중 제15주일], 되새김 구절

 

1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예언자요 사목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는 비결은 나의 근본, 내 결핍 투성이의 보잘것없던 모습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이영근 신부)

 

4.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지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귀하다.”

(이수철 신부)


 

7/14(일)  [(녹) 연중 제15주일], 제23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그들을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 2024년 7월14일(일) 5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