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15일 월요일[(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15. 08:56

[매묵]2024년 7월 15일 월요일[(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보나벤투라 성인은 1221년 무렵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의 바뇨레조에서 태어났다.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의 수도자가 된 그는 파리에서 공부한 뒤, 파리 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학문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작은 형제회의 총장으로 선출된 보나벤투라는 자신이 속한 수도회 설립자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전기를 완성하였으며, 철학과 신학 분야에서도 권위 있는 저서를 많이 남겼다. 1274년 무렵 선종하였으며, 1482년 식스토 4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1588년 식스토 5세 교황은 중세의 뛰어난 철학자며 사상가로 존경받던 보나벤투라 주교를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내 양 떼를 찾아서, 그들을 먹일 목자를 세우리라. 나 주님이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또는>
루카 12,42 참조
이 사람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다. 주님이 그를 세우시어, 당신 가족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어 주게 하셨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의 천상 탄일을 기념하며 비오니
저희가 그의 높은 지혜와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며
언제나 그의 불타는 사랑을 본받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희 자신을 씻어라. 내 눈앞에서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10-17
10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11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12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14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15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16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17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50(49),8-9.16ㄴㄷ-17.21과 23(◎ 23ㄴ)
◎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제사 때문에 너를 벌하지는 않으리라. 너의 번제야 언제나 내 앞에 있다. 나는 네 집의 수소도, 네 우리의 숫염소도 받지 않는다. ◎
○ 어찌하여 내 계명을 늘어놓으며, 내 계약을 너의 입에 담느냐? 너는 훈계를 싫어하고, 내 말을 뒷전으로 팽개치지 않느냐? ◎
○ 네가 이런 짓들 저질러도 잠자코 있었더니, 내가 너와 똑같은 줄 아는구나. 나는 너를 벌하리라. 너의 행실 네 눈앞에 펼쳐 놓으리라. 찬양 제물을 바치는 이는 나를 공경하리라.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5,10
◎ 알렐루야.
○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알렐루야.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3,14-19)와 복음(마태 23,8-12)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주님,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기리며 거룩한 제대에 바치는 이 제물을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 제물이 주님의 이름에 영광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어라. 너희 열매는 길이 남으리라.
<또는>
루카 12,36-37 참조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문을 두드릴 때에 깨어 있는 종!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로 힘을 얻고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복된 보나벤투라 주교를 본받아
그가 믿은 진리를 고백하고 그가 가르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보나벤투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임마누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사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성당이 폭격을 당했고, 성당 앞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도 폭격으로 손이 부서졌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다. 네가 나의 팔이 되어다오.” 성당을 복구하면서 예수님의 동상은 팔이 없는 그대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의 지나온 날을 영상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옆에는 발자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제 옆에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가는 길에 늘 함께 있었단다. 젊은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제 곁에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란다.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임마누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영광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2번이나 차와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를 걸어가는데 후진하던 차와 부딪혔습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횡단보도의 파란불에 걷고 있는데 좌회전 하는 차와 부딪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 와서 신부님들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미션엘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접촉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우리 차를 뒤에 오던 차가 받았습니다. 차 트렁크의 유리가 깨지고, 파손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에는 인색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 마태 10,34-11,1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선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 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 5,9)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행복 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013.11.15)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14.연중 제15주일                                                     아모7,12-15 에페1,3-14 마르6,7-13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의 축복된 삶

                                                  “회개, 찬미, 순종”

 

“주님,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오리다.”(시편17,15)

 

오늘 옛 어른의 지혜도 참 좋습니다.

“주변을 챙길줄 아는 사람이 백성을 다스릴 지혜도 얻는다.”<다산>

사랑 실천의 구원은 바로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섭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면 멀리 있는 사람이 찾아온다.’”

참 멋진 진리 말씀입니다. 천리향, 만리향 꽃같은 사랑의 행복한 수도공동체라면 성소자는 물론

목마른 영혼도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찾아 올 것입니다.

 

어제와 자고 난 지금의 감동을 나누고 싶습니다.

요셉수도원 설립 37주년 및, 75년 제 생애 최초의 역사적 사건입니다.

참으로 생전 처음 침실에 아담한 50만원짜리 침대를 놓았고 그 느낌이 얼마나 각별했는지

그 소감을 나눔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치스러운 고가의 침대가 아니라 안도했습니다.

돌침대가 아닌 흙침대입니다.

순전히 참 좋은 분의 사랑과 원장수사의 분별의 결단으로 이뤄진 쾌거입니다.

물론 사랑의 성령님께서 개입하셨음이 분명합니다. 

 

저와 두분의 친애하는 도반 70대 노수사들에 대한 수도공동체의 각별한 배려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평생 무소유의 비워가는 단순한 삶을 추구해온 저의 반응은 시큰둥한 편이었습니다만,

겸손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침대 놓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마침 어제 강론 제목에서 강조했다시피 노쇠해가는 삶과 더불어 겸손과 순종 수행을 통한 영적 면역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원장수사에 전한 메시지입니다.

 

“그런대로 잘 어울리고 멋집니다! 감사합니다!

동네 경노 잔치라도 열린 듯, 신기한 구경거리나 있는 것처럼, 수도형제들 내 일처럼 기뻐하며

싱글벙글 웃으며 흥분된 모습들로 다녀갑니다.

존재가 의식을 결정하는 듯 신선한 분위기입니다.

평생 방바닥에 붙어 자다가 높은 침대를 사용하니 내 존재가 격상된듯한 고귀한 느낌도 선물처럼 받았습니다!”

 

업무차 어제 오전 10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13시간 37분만에 뉴욕공항에 도착한 원장수사의 답신입니다.

“설치가 잘 되어서 제 일처럼 기뻐요. 저는 지금 막 착륙했어요.” 

 

이어 맨먼저 침대 놓는 아이디어와 성금을 후원한 분으로부터 받은 답신입니다.

“어머나! 벌써 들어왔군요. 너무너무 보기 좋고 깔끔합니다.

오랫동안 궁리 끝에 말했던 것이 일사천리로 성사되어 기쁩니다.

아마 낼은 매트레스가 들어오겠군요. 세분 노수사님들 건강하시기만 빌겠어요!”

 

또 어제 오후 고백성사차 방문했던 분은 제 면역질환으로 피부에 뚜렷한 흔적을 보고

자기가 잘 아는 한방병원에 예약하고 모시고 가겠다 하니 그 사랑에 감동했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일에 전력투구하다 생긴 면역질환이기에 “부끄러워할 상처”가 아닌

“영적전투의 훈장勳章”처럼 자부하니 당당한 느낌도 들고 주님께서 알아서 조처해 주시리라

믿는 마음도 있습니다. 

 

정말 부끄러워할 것은 “죄짓는 일”이지 결코 “피부병의 흔적”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저런 깨달음이 남은 생애 더욱 기본에 충실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각오를

새로이 하게 됩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삶을 어떻게 충실히 살아낼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묵상중 떠오른 세항목입니다.

 

첫째, “회개하라!”

주님께 파견받은 이들에게 우선적 자질은 회개입니다.

회개은총입니다.

하느님안 제자리로 돌아와 제정신으로 제대로 복음 선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지에 대한 궁극의 답도 참된 회개뿐입니다.

파견에 앞서 제자들은 회개와 더불어 그 텅빈 자리에 주님은 더러운 영들의 대한 권능을 가득 넣어 주셨고,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따라 무소유의 홀가분 차림으로 떠나니 이 또한 소유의 삶이 아닌

존재의 삶을 택한 회개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말그대로 이런 회개를 통한 자유는 복음 선포를 위한 자유이겠습니다.

 

어디에 가든 환대를 고맙게 받아들이되 최대한 민폐를 끼치지 말고,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발밑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미련없이 떠나라 합니다.

다만 주어진 선교사명에 최선을 다할뿐 결과는 하느님께 맡기는 진인사대천명의 자세는

그대로 참된 회개의 열매인 믿음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파견의 궁극 목표가 다음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하느님의 나라를 맞이하기 위한 회개요,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많은 마귀는 쫓겨나고 많은 병자는

기름부음을 받아 병이 치유되니 영육의 치유와 건강에 회개가 단연코 우선임을 깨닫습니다.

매사 겪게 되는 힘든 일들을 회개의 계기로, 비움의 계기로, 겸손의 계기로, 즉 자아초월의 계기로 삼을 때

상처나 짐은 영적성장과 성숙의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회개해야 삽니다.

죽을 때가지 끊임없는 회개요 회개의 여정에 결코 지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순종하라!”

즉각적인,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산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삶은 지상명령의 순종입니다.

순종의 길을 통해 하느님께 갑니다.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자살은 꿈도 꾸지 못할 것입니다.

 

끝까지 살아내는 순종일 때 구원입니다.

순종의 사랑, 순종의 믿음, 순종의 인내, 순종의 겸손, 순종의 지혜입니다.

하느님께, 진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형제들간 상호순종도 물론입니다.

 

순종이야 말로 영적성숙의 잣대입니다.

공동체의 일치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발적 사랑의 순종입니다.

 

단번에 순종은 없습니다.

순종의 여정입니다.

순종의 여정을 살아가면서 날로 깊어 익어가는 순종입니다.

이런저런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거룩한 죽음의 순종입니다.

순종할 때 배웁니다.

순종하지 못하면 배우지도 못합니다. 

 

순종의 훈련, 순종의 습관입니다.

봄철 배꼭지는 아무리 당겨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가을 열매 익었을 때 잘 떨어지는 배꼭지처럼 사람도 영성이 잘 익어야 이런 자발적 지체없는 순종입니다.

참으로 눈밝은 주님은 정확히 아모스를 주목했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불렀고 그는 지체없이 순종했음이

다음 그의 고백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예언자도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던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저는 초등학교 8년동안 교사생활하다가 주님께 붙잡혀 34세 늦깍기로 수도원에 들어왔고

올해로 수도생활 42년째입니다.

다시 산다 해도 이렇게 주님께 붙잡혀 올 것 같고, 또 이렇게 살 수 뿐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셋째, “찬미하라!”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맛으로, 재미로 살아가는 여기 찬미의 수도자들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회개의 열매가, 순종의 열매가 찬미입니다.

오늘 제2독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총의 찬미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매주간 월요일마다 바치는 찬미입니다.

그리스말 본문에는 3절에서 14절까지가 한 문장입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내리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찬미에서는 자연히 하느님께서 거의 모든 동사의 주어로 등장합니다.

어느 한 대목도 생략하기가 아깝지만 전반부 만 인용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존재를 끊임없이 격상시키는, 날로 주님을 닮아 존엄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 우주와 인류의 구원이 망라된 참 웅대하고 아름다운 찬미가입니다.

이런 끊임없는 하느님 찬미의 축복 선물은 끝이 없습니다. 

 

예수님 늘 함께 하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주님께 파견받은 우리들의 축복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거룩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회개의 삶에, 순종의 삶에, 찬미의 삶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참행복의 비결입니다.

이런 삶자체보다 더 좋은 복음선포도 없습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런 축복된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온누리에 미치는 찬미의 축복 선물입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7/15(월)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조재형 신부)

 

2.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양승국 신부)

 

3 .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길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이수철 신부)

 

7/15(월)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24일차 기도

 

복음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15일(월) 8시4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