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16일 화요일[(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16. 06:10

[매묵]2024년 7월 16일 화요일[(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백] 카르멜산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17(16),15 참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7,1-9
1 우찌야의 손자이며 요탐의 아들인 유다 임금 아하즈 시대에,
아람 임금 르친과 르말야의 아들인 이스라엘 임금 페카가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지만 정복하지는 못하였다.
2 아람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이 다윗 왕실에 전해지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3 그러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 아들 스아르 야숩과 함께
‘마전장이 밭’에 이르는 길가 윗저수지의 수로 끝으로 나가서
아하즈를 만나, 4 그에게 말하여라.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5 아람이 에프라임과 르말야의 아들과 함께
너를 해칠 계획을 꾸미고 말하였다.
6 ′우리가 유다로 쳐 올라가 유다를 질겁하게 하고 우리 것으로 빼앗아
그곳에다 타브알의 아들을 임금으로 세우자.′
7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 일은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8 아람의 우두머리는 다마스쿠스요
다마스쿠스의 우두머리는 르친이기 때문이다.
이제 예순다섯 해만 있으면
에프라임은 무너져 한 민족으로 남아 있지 못하리라.
9 에프라임의 우두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우두머리는 르말야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48(47),2-3ㄱㄴ.3ㄷㄹ-4.5-6.7-8(◎ 9ㅁ)
◎ 하느님이 그 도성을 영원히 굳히셨네.
○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우리 하느님의 도성, 당신의 거룩한 산에서. 아름답게 솟아오른 그 산은, 온 누리의 기쁨이라네. ◎
○ 북녘 끝 시온산은, 위대한 임금의 도읍이라네. 하느님은 그 궁궐 안에 계시며, 당신을 요새로 드러내신다. ◎
○ 보라, 임금들이 몰려와, 함께 들이쳤으나, 보자마자 질겁하고, 허둥지둥 달아났네. ◎ 
○ 해산하는 여인의 진통처럼, 공포가 그들을 덮쳤네, 타르시스의 배들을 들부수는 샛바람처럼. ◎

복음 환호송

시편 95(94),7.8
◎ 알렐루야.
○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
◎ 알렐루야.

복음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게도 오십견이 찾아왔습니다. 매일 걷지만, 스트레칭을 자주 하지 않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물리치료를 받는데 선생님이 오십견 치료에 쉬운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자꾸만 어깨를 돌려주고, 늘려주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합니다. 그 과정이 아플 거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야 치료가 된다고 합니다. 심할 때는 마취하고 어깨를 늘리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오십견인데 60이 넘어서 왔으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우리의 몸도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식사로 꾸준히 관리해 주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듯이,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신앙의 오십견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믿음이 약해지고, 의욕이 없고, 불평과 불만이 늘어나고, 기도 생활 보다는 세상의 일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몸의 오십견은 증상이 있고, 불편하여서 치료받지만, 신앙의 오십견은 증상도 느끼지 못하고, 불편함도 느끼지 못해서 점차 심해지게 됩니다.

 

신앙의 오십견을 치료하기도 쉬운 방법이 없습니다. ‘회개가 최고의 방법입니다. 회개란 어딘가로 향하는 것과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이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어딘가로 향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에 있으며, 어딘가로부터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동안 하느님 사랑에서 벗어나 우리의 본래의 지향을 어지럽히는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며 율법과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단죄했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을 잡으러 다녔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체험은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고 찾는 회개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울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 사도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뀌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눈물은 무질서한 충동과 집착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회개였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상실에 대한, 고통에 대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강대국들의 위협 앞에 두려워하지 말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이러한 때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확실히 가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소돔과 고모라에 내려졌던 재앙보다 더 큰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강력한 요청입니다. 진흙 속에서도 아름다운 꽃은 피어납니다. 알이 깨어지는 아픔이 없이 병아리는 세상을 볼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힘들고 어려운 일은 있었습니다.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며 절망하는 것도 우리의 선택이고, 장애물을 넘어서는 용기를 가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희망을 품는 것도 우리의 선택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1,20-2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마음은 아직도 이팔청춘인데, 어느덧 세월에 흐르고 흘러버렸습니다.

그래도 제 혈관 속에는 살레시안의 푸른 피가 뛰고 있기에, 청소년 사목자로서

아이들을 위해 뭐라도 하고 싶지만, 그게 참 여의치 않습니다.

 

정년이 지나면서는 청소년 시설이나 청소년 사목 현장에 남아 있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남아 있는다 치더라도 세월의 간극, 문화적 차이를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로 인해 한동안 좌절감이랄까 우울감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청소년 사목자로서 반드시 아이들 앞에 서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거나, 본격적인 청소년 사목터에서

아이들을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청소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일종의 사목적 회심이라고나 할까요.

찾아오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머물다 갈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것, 아주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찾아오는 아이들에게 환한 얼굴로 인사하고, 환대하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쾌적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예초를 하고, 꽃나무를 심는 것도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예초기를 돌리면서, 돈가스를 튀기면서, 안전 요원으로 보트를 운행하면서, 아이들을 생각한다면,

그것 역시 좋은 청소년 사목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도시를 꾸짖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태 11, 21-22)

 

회개라는 것은 사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회개도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할

일상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수많은 일들, 사건들, 만남들은 일상적인 회개를 위한 좋은 계기입니다.

 

오늘도 저는 신나게 예초기를 돌리면서 또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예초기를 등에 지고 허리춤보다 높은 잡풀들을 시원시원 날리다 보니, 기분이 좋았지만,

순식간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습니다.

한 시간쯤 돌리다 보니, 더위와 갈증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였습니다.

 

안 되겠다 싶어 다 벗어놓고 야외 식당 그늘에 잠깐 앉았습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시원한 캔맥주 하나를 꺼내 땄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원샷으로 끝냈습니다.

그 순간은 일종의 작은 천국 체험이었습니다.

모든 세포, 모든 기관과 장기를 통해 시원함을 받아들이는 그 맛이란...

 

그 순간 그런 생각이 몰려왔습니다.

우리네 삶 속에 때로 결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결핍을 느껴봐야 풍요로움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때로 갈증과 허기가 있어야 삶이 더 단단해집니다.

큰 병고를 겪으면서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오늘 다시 한번 우리가 회심할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방향 전환을 할 수 있는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도시들을 꾸짖으시는 장면입니다.

곧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경고를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사실 이들 도시들이 꾸짖음을 받은 이유는 복음을 적극적으로 방해했거나 윤리적으로 심각한 죄악을 지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죄악으로 본다면, 바알 숭배에 빠져 여러 차례 예언자들에게 책망을 받았던 페니키아의 티로와 시돈이, 그리고 부패와 타락의 전형이었던 소돔이 더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릴래아의 이 도시들에게 엄중한 심판의 경고가 내려진 것은 그들에게 주어진 특권을 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와 기적들을 대부분 그들 지역에서 행하셨건만, 회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특은을 받고도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들으면서 저에게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두려움입니다.

저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혹은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았건만, 아직 하느님과 형제들을 그만큼 사랑하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루카 12,41-48)의 마지막 구절이 제 마음을 압박해 옵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

(루카 12,47-48)

저 역시 그들처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고, 완고함으로 굳어져 있음을 봅니다.

지금도 저와 함께 계시는 그분을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듣고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자꾸자꾸 체험시켜 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파라오처럼 완고하고 변덕스런 제 마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곧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마치 뒷날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셨듯이 말입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마태 23,37)

오늘도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듣습니다. 

우리를 회개로 부르시는 애간장 태우시는 마음을 듣습니다.

죄인의 멸망을 바라지 않으시고 회개하여 살기를 바라시는 우리 주님의 사랑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의 이 사랑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이오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부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15.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1221-1274) 기념일 

                                                                                                              이사1,10-17 마태10,34-11,1

                                                       주님의 제자다운 삶

                                          “날마다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

 

“올바른 길을 걷는 이는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시편50,23ㄴ)

 

화답송 후렴이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오늘 옛 어른의 말씀도 우리에게 좋은 삶의 지침이 됩니다. 참으로 어른스럽게,

주님의 제자답게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어른스러움이란 세월에 따라 잡히지도, 세월을 거스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나이다워지는 것이다.”<다산>

“나이 쉰에는 하늘의 뜻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말을 듣는 법을 터득했고,

일흔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논어>

 

나이 일흔에는 매사 하는 일이 자유로우면서도 죄를 짓는 일이 없었다 하니 그대로 하늘의 뜻과 일치된

공자의 삶이었음을 봅니다.

과연 나이와 더불어 내적으로 성숙되어 주님을 닮아가는 삶인지 뒤돌아 보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도 시공을 초월하여 강렬한 호소력을 지닙니다.

주님의 제자다운 삶에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참으로 귀를 기울여 경청하라 하시며 이사야 예언자는 그대로 하느님의 생각을 전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요 우리 예수님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예언자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너희의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도 지쳤다.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나는 들어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정의와 공정, 선행의 삶이 없는 전례의 헛됨을 지적한 말입니다.

전례의 거부가 아니라 전례를 가득 채우는 참 좋은 정의로운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삶이 빠진 전례는 공허하고 헛될 뿐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고스란히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사회정의의 실천이 얼마나 엄중하고 절박한 하느님의 요구인지 오늘의 부정의한 현실을

거울처럼 비춰주는 말씀입니다.

우리 가까이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할 정의와 공정, 선행, 약자를 보살피는 자비행의 삶과 함께 가는

전례일 때 하느님도 기꺼이 받아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명이 너무나 단호하여 충격적입니다.

그대로 예언자의 계보를 잇고 있는 예수님입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표현이 거칩니다만

예수님 자체가 칼입니다.

빛의 칼, 지혜의 칼, 진리의 칼, 정의의 칼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더불어 빛과 어둠, 지혜와 무지,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로 갈리니 저절로 분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 거짓 평화입니다.

“거짓 평화를 주지 마라”(성규4,25)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여기서의 분열은 잠정적인, 참평화에 이르는 창조적, 과정적 분열일 뿐입니다.

 

새삼 값싼 평화는 없음을, 참평화와 일치에 이르는 지극한 인내와 노력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역시 값싼 은총도 값싼 평화도 없듯이 값싼 제자직도 없음을 다음 예수님 말씀이 웅변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주님은 공동체 일치의 중심입니다.

참으로 사는 길은, 참으로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사는 길은, 주님 때문에 죽어서 사는 길은

일치의 중심인 주님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죽을 때까지 제 운명의 십자가,

제 책임의 십자가를 지고 항구히 주님을 따르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값싼 제자직의 삶은 없습니다.

제자다운 삶임은 물론 참사람의 길입니다. 

 

베네딕도 성인도 제자들에게 강조하는바 ‘그 무엇도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보다 앞세우지 마라’는 것입니다.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이어지는 환대의 사랑, 환대의 신비도 깊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됩니다.

여기서 너희는 우리 제자들을 물론 더 넓게 보면 인류가족에게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을 하느님을 배경에 두고 있는 제자들이자 형제들이요 이들을 환대함은 바로 예수님을,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하나하나가 주님을 배경한 참 고귀한 품위의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환대할 때 보상이 따를 것임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느님 자녀답게 스스로 이웃을 환대하며 품위있게, 어른스럽게 살아감이

얼마나 주님의 제자다운 삶인지 깨닫습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가톨릭 교회의 성인들이고 오늘 기념하는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13세기 도미니코회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뤘던 프란치스코회의 성 보나벤투라는

경건과 사랑이 흐르는 면에서 “세라핌적 박사(The Seraphic Doctor)”라 불렸고,

<성 프란치스코의 대전기>를 비롯한 수많은 저서를 남깁니다. 

 

보나벤투라 이름에 담긴 사연을 들으면 성 프란치스코와의 섭리적 인연임을 깨닫게 됩니다.

프란치스코가 앓고 있는 보나벤투라를 보자 “잘 왔노라(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란 전설도 있고,

그가 병이 나았다는 전언을 듣고 “좋은 소식이로다(bona ventura)”라고 말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성인은 파리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오래 재직할 수 없었음은 그가 40대 초반 프란치스코회 제7대 총장으로

뽑혔기 때문입니다.

위기상황에서 총장직에 오른 그는 엄청난 책임감과 그에 따른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쉼없이 활동합니다.

 

그는 36개의 분파로 나뉠 정도로 심각했던 프라치스코회의 내적갈등의 완화라는 결실을 이룸으로

프란치스코회의 제2창설자로 일컬어 집니다.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그의 지혜와 성덕을 흠모하여 1273년 3월23일 추기경으로 임명했고

임명장을 들고 왔던 교황 사자는 부엌에서 식기를 씻고 있던 성인을 만납니다.

추기경이 된 성인은 리용 공의회 참석중 교황과 동서교회의 다수의 고위 성직자들이 임석한 가운데

병환으로 선종하니 진인사대천명후의 거룩한 죽음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53세로 선종하기 까지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여 교회와 수도회에 충성을 다했던 성 보나벤투라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사랑하며

주님의 제자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10). 아멘.


7/16(화)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되새김 구절

 

1.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회개라는 것은 사도 바오로나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처럼 아주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삶의 전환을

이루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의 회개도 있습니다. 목숨 다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되풀이해야 할

일상 안에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매일 행하는 수많은 일들, 사건들, 만남들은 일상적인 회개를 위한 좋은 계기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이오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부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표현이 거칩니다만

예수님 자체가 칼입니다.

빛의 칼, 지혜의 칼, 진리의 칼, 정의의 칼입니다.

 

예수님의 임재와 더불어 빛과 어둠, 지혜와 무지,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로 갈리니 저절로 분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 거짓 평화입니다.(이수철 신부)

 

7/16(화)  [(녹)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25일차 기도

 

복음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토록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이오니,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않는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제 마음을 부수소서.

아멘.

 

- 2024년 7월16일(화) 6시...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