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17일 수요일[(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17. 08:35

[매묵]2024년 7월 17일 수요일[(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7(16),15 참조
저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 뵈옵고, 당신 영광 드러날 때 흡족하리이다.

본기도

하느님,
길 잃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시니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가
그 믿음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올바로 살아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10,5-7.13-16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5 “불행하여라, 내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그의 손에 들린 몽둥이는 나의 분노이다.
6 나는 그를 무도한 민족에게 보내고
나를 노엽게 한 백성을 거슬러 명령을 내렸으니
약탈질을 하고 강탈질을 하며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처럼 짓밟게 하려는 것이었다.
7 그러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그러한 뜻을 마음에 품지도 않았다.
오로지 그의 마음속에는 멸망시키려는 생각과
적지 않은 수의 민족들을 파멸시키려는 생각뿐이었다.”
13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나는 민족들의 경계선을 치워 버렸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으며
왕좌에 앉은 자들을 힘센 장사처럼 끌어내렸다.
14 내 손이 민족들의 재물을 새 둥지인 양 움켜잡고,
버려진 알들을 거두어들이듯 내가 온 세상을 거두어들였지만
날개를 치거나 입을 열거나 재잘거리는 자가 없었다.”
15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마치 몽둥이가 저를 들어 올리는 사람을 휘두르고
막대가 나무도 아닌 사람을 들어 올리려는 것과 같지 않으냐?
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 버리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4(93),5-6.7-8.9-10.14-15(◎ 14ㄱ)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 주님, 그들이 당신 백성을 짓밟고, 당신 소유를 괴롭히나이다. 과부와 이방인을 살해하고, 고아들을 학살하나이다. ◎
○ 그들은 말하나이다. “주님은 보지 않는다. 야곱의 하느님은 모른다.” 미욱한 백성들아, 깨달아라. 미련한 자들아, 언제 깨치려느냐? ◎
○ 귀를 심으신 분이 듣지 못하신단 말이냐? 눈을 빚으신 분이 보지 못하신단 말이냐? 민족들을 징계하시는 분이 벌하지 못하신단 말이냐?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분이 알지 못하신단 말이냐? ◎
○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시고, 당신 소유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재판이 정의로 돌아오리니, 마음 바른 이 모두 그 뒤를 따르리라. ◎

복음 환호송

마태 11,25 참조
◎ 알렐루야.
○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 찬미받으소서. 아버지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 알렐루야.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교회가 바치는 예물을 굽어보시고 받아들이시어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성덕을 더해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84(83),4-5 참조
주님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또는>
요한 6,56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거룩한 선물을 받고 비오니
저희가 이 성찬의 신비에 자주 참여하여
나날이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연령회에서 11월 위령성월을 죽음에 대한 교육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저는 그렇게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앙인에게 죽음이란?’이라는 주제는 본당신부님이 하는 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에 대해서 깊이 성찰하지 않았습니다. 강의 부탁을 받으면서 신앙인에게 죽음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말에 죽음과 관련된 단어가 있습니다. 자주 듣는 말이 돌아가셨습니다.’입니다. 이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여행을 가듯이,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운명하셨습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관계가 끝났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말에 죽음은 어딘가로 떠나는 여행과도 같고, 이 세상과의 관계가 끝났다는 말과 같습니다. 어딘가로 떠났다면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잘 갔다 오라는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이 제사를 교회는 우상숭배라고 여겼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 복자는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제사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설과 추석에 차례를 지낼 수 있도록 예식을 마련하였습니다. ‘연도는 죽은 이를 위한 한국교회의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연도는 고인의 유족들에게는 깊은 위로가 됩니다. 연도는 이제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이를 위해 성인들의 통공을 바라는 기도입니다.

 

구약성서 마카베오서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아자르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엘아자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미 나이도 많고 풍채도 훌륭하였다. 그러한 그에게 사람들이 강제로 입을 벌리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더럽혀진 삶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가며 돼지고기를 뱉어 버렸다.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 엘아자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곱 아들을 둔 어머니의 이야기입니다. 마카베오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어떤 일곱 형제가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어 채찍과 가죽 끈으로 고초를 당하며, 법으로 금지된 돼지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임금에게서 받은 일이 있었다. 이 사악한 인간, 당신은 우리를 이승에서 몰아내지만, 온 세상의 임금님께서는 당신의 법을 위하여 죽은 우리를 일으키시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실 것이오. 하느님께서 다시 일으켜 주시리라는 희망을 간직하고, 사람들의 손에 죽는 것이 더 낫소. 그러나 당신은 부활하여 생명을 누릴 가망이 없소. 우리 형제들은 잠시 고통을 겪고 나서 하느님의 계약 덕분에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소. 그러나 당신은 주님의 심판을 받아 그 교만에 마땅한 벌을 짊어질 것이오.” 일곱 형제와 어머니는 부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위령기도 감사송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 복된 부활의 희망을 주셨기에, 저희는 죽어야 할 운명을 슬퍼하면서도, 다가오는 영생의 약속으로 위로를 받나이다. 주님,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나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모든 천사와 함께, 저희도 땅에서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신앙인들에게 죽음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사람들은 깊은 위로를 받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지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에 대해서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사마리아 여인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섰습니다.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일어섰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입니다. 부활은 죽음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1,25-27

 

작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참 재미있는 우리 말이 있습니다. 철부지입니다.

철부지의 어원은 절부지(節不知)입니다.

절은 계절을 뜻하니, 절부지는 계절(season)을 잘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일년 농사를 성공하려면 절기를 잘 파악해야 하는데, 그게 안되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철부지는 사리를 분별할 만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아이를 의미합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들은 개념이 없다는 것, 분위기 파악을 잘 못한다는 것,

아직 세상 물정 모른다는 것, 뭐가 뭔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순종적입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행동합니다.

 

아직 작고 힘이 없다 보니 철저하게도 의존적입니다.

늘 부모에게 물어보고, 부모가 가자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부모 입장에서보면 사랑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고 철이 들어가면서, 이것저것 어설프나마 배워가면서 슬슬 자기주장이 생기고,

고집도 늘어갑니다. 때로 뺀질거리며 말도 잘 듣지 않습니다.

부모가 한마디 하면 전에는 절대 그러지 않았는데, 이젠 꼬박꼬박 말대답입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미워 죽을 지경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을 느끼고자 한다면, 그분의 지속적인 축복을 원한다면,

인간을 한 그분의 한없는 측은지심의 손길을 느끼고자 한다면,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작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철부지가 되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닌 천진난만한 성품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대들고 튕기는 것이 아니라 고분고분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오늘의 말씀(7/17일) : 연중 제 15 주간 수요일

* 제1독서 : 이사 10, 5-7, 13-16

* 복음 : 마태 11, 25-27

 

* 오늘의 강론 :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복음>은 짧지만, 참으로 깊고 아름답습니다.

<앞 장면>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 찬양의 기도요,

<뒤 장면>은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늘과 땅의 주님이신 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기도를 시작하십니다. 곧 아버지께서 우주의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소유권을 가지신 분임을 고백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드리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 11,25)

 

이 고백은 하느님의 뜻은 지혜나 슬기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드러내주셔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주신다고 해서 모두가 알게 되는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을 받아들일 때라야 알게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와 어른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나는 모른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저것 묻습니다. 그리고 ‘모른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는 안다.”라는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아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우주의 주권자이기에 당신께서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자유롭게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감추시고”와 “드러내시고” 라는 표현을 통해서, 영적 진리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배려에 의해서만 알 수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주권적인 배려에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찬양을 나타내는 감격스런 고백을 뜻합니다. 곧 아버지의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를 말합니다. 곧 ‘슬기롭다는 자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에게는 드러내시는’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대한, 완전히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 감사의 이유를 이렇게 고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마태 11,26)

 

오늘 우리도 이렇게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활동하시고 일하셨음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하는 일입니다. 당신의 일하심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비록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아버지를 확신하고 지지하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 입니다.’(1코린 5,18)라고 말씀하신 사도 바오로처럼 말입니다. ‘하늘나라의 장막에 머무는 길은 우리 안에 일하시는 주님을 찬미하라’(수도규칙 머리말 30)고 제시하신 성 베네딕도의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16.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이사7,1-9 마태11,20-24

 

                                                      경청, 회개, 그리고 믿음의 여정

                                                               “무신불립(無信不立)”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마라.”(시편95;7.8)

 

오늘 복음 환호송 시편입니다. 경청에 따른 회개요 믿음의 성장입니다.

어제 교황님이 방문하신 수녀님들에게 강조한 두 핵심요소가 “아름다움과 단순성”입니다. 

 

“오늘날 세상안 구체적 환경속에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발산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

그리고 피상적인 것을 떨쳐버리고,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선택하라. 단순성이다.

날마다 복음 안에서 빛나는 하느님 사랑의 단순성에 의해 형성되도록 하라.” 

 

단순할 때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도 있듯이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정화하고 치유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교황님은 성소를 위한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기도하라, 기도하라! 그리고 양성(formation)에, 좋은 양성에 집중하라!”

 

기도가 답입니다. 두려움에 대한, 회개에 대한, 믿음에 대한 답도 기도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해야 회개에 믿음이요 두려움도 약화됩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회개요 믿음입니다.

참 좋은 믿음의 사람들은 하느님을 닮아 아름답고 단순합니다.

다산의 말씀도 믿음의 어른들에게, 특히 믿음의 상담가에게 어울리는 모습입니다. 

“어른은 독촉하듯 뒤에서 밀지 않고, 응원하듯 앞에서 끄는 존재다.”<다산>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봤던 분이 생각납니다.

나름대로 60-70평생 험하고 어려운 삶을 살아왔고 지금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생각하면 절로 연민의 마음 가득해지기 마련입니다.

많은 분들이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살아갑니다.

 

“신부님, 한 번 안아주세요!”

 

어제 면담고백성사를 마치며 청했던 60대 후반 자매의 ‘외롭고 힘든’ 마음을 환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어내며 삶들을 떠받쳐온 주님의 살아 있는 거룩한 성체같은 몸들을 보면

저절로 감사(感謝), 감동(感動), 경탄(敬歎)하게 되고 외경심(畏敬心)도 지니게 됩니다. 

 

주님의 성체를 대하듯 존중과 배려의 사랑으로 보살펴야할 거룩한 성체와 같은 몸들임을 깨닫습니다. 

수없이 생미사나 연미사를 봉헌하다보면 참 다양한 사연에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인간 사회 현실인지 실감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말씀이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의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고 용기를 줍니다.

아람 연합군이 에프라임에 진주하였다는 소식에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 듯 임금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떨렸다 합니다.

 

예나 이제나 두려움 앞에서는 똑같이 불안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의 전달을 받아 아하즈 임금을 격려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힘이 됩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르친과 아람, 그리고 르말야의 아들이, 격분을 터뜨린다 하여도, 이 둘은 타고 남아, 연기만 나는

장작 끄트머리에 지나지 않으니,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는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올 것입니다.

무려 365회 나온다니 예나 이제나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1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멈춰,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불안해 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아파하는 이들에게 치유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

오늘 이사야서 마지막 말씀은 평생 마음 깊이 새기고 지나야 할 말씀입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Unless your faith is firm, you shall not be firm!)

 

‘믿다’ ‘서있다’ 동사는 같은 동사 히브리어 ‘아만(aman)’의 두형태로 ‘견고하다’ ‘확고하다’는 뜻이고

‘아멘’도 같은 어근에서 나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무신불립(無信不立)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서지 못합니다.

사상누각(沙上樓閣) 모래 위의 집처럼 허약하여 곧 무너집니다.

반석같은 믿음 위에 인생집을 짓는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믿음의 삶은 필수이며, 이런 믿음으로,

믿음을 위해 날마다 쓰는 제 강론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불행 선언의 대상이 된 세 도시의 문제점이 확연히 드러납니다.

바로 이 세도시의 사람들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주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경청하지 않았고 주님의 기적에 회개로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의 반복되는 불행한 현실의 모습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다.

너, 가파르나움아,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회개를 위한 충격요법적 표현입니다.

무신불립의 세 도시들입니다.

이들이 믿음이 있었더라면 주님의 기적에 응답하여 마음을 열어 경청하고 회개하였을 것이며

믿음도 더불어 견고해졌을 것입니다.

 

경청과 회개와 믿음은 함께 갑니다.

언젠가의 갑작스런 경청도, 회개도, 믿음도 없습니다.

말그대로 평생 경청의 여정에, 회개의 여정에, 믿음의 여정에 충실하는 길뿐입니다.

새삼 경청의 선택, 훈련, 습관을,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믿음의 선택, 훈련, 습관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믿음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유비무환의 진리입니다.

그리하여 경청과 회개 와 믿음의 반석같은 삶을 위해 평생 날마다 끊임없이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를 바치며 믿음을 비축해가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경청과 회개, 믿음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이사7,9ㄴ). 아멘.


7/17(수)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부활은 죽음이후의 삶이 아닙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지금 이곳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면, 십자가를 포기한다면 부활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조명연 신부)

 

2.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역설의 신비를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있어 보이기 위한 세상 사람들의 투자는 만만치 않은 것입니다.

부실함과 결핍과 약점을 애써 감추려고 기를 쓰니 에너지 소모도 만만치 않습니다.

매일의 삶이 늘 부담스럽고 피곤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없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목과 어깨에 잔뜩 들어간 힘을 빼는 사람들입니다. 마치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두려워하지 마라’는 말마디는 성서에 가장 많이 나올 것입니다.

무려 365회 나온다니 예나 이제나 두려움 속에 포위되어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1년 365일

날마다 ‘두려워하지 마라’ 격려하십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늘 거기 그 자리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환대하는 예수성심상 바위판에 새겨진

주님의 말씀도 수도원을 찾는 이들을 격려합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잠시 멈춰, ‘슬퍼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불안해 하는 이들에게 평화를,

아파하는 이들에게 치유를’ 청하는 기도를 바치곤 합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위로와 평화와 치유를 찾아 수도원에 옵니다.(이수철 신부)

 

7/17(수)  [(녹)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제26일차 기도

 

복음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아버지의 선하신 뜻”(마태 11,26)

 

그렇습니다. 주님!

오늘도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그 드러내신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을 뵈오며

그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그 모든 것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자라게 하시고

그 안에서 신비를 살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매달려 있으니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17일(수) 8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