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21일 주일[(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21. 09:08

[매묵]2024년 7월 21일 주일[(녹) 연중 제16주일(농민 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한국 교회는 주교회의 1995년 추계 정기 총회의 결정에 따라, 해마다 7월 셋째 주일을 농민 주일로 지내고 있다. 이날 교회는 농민들의 노력과 수고를 기억하며 도시와 농촌이 한마음으로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맞갖게 살도록 이끈다. 각 교구에서는 농민 주일에 여러 가지 행사를 마련하여 농업과 농민의 소중함과 창조 질서 보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있다.

오늘은 연중 제16주일이며 농민 주일입니다. 교회는 주일마다 함께 모여 주님의 파스카를 경축합니다. 말씀과 생명의 빵 안에 계시는 성자를 알아 뵙고, 그분을 참된 예언자요 목자로 모시어, 영원한 기쁨의 샘에 이르게 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시다.

입당송

시편 54(53),6.8
보라, 하느님은 나를 도우시는 분, 주님은 내 생명을 떠받치는 분이시다. 저는 기꺼이 당신께 제물을 바치리이다. 주님, 좋으신 당신 이름 찬송하리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의 은총을 인자로이 더해 주시어
믿음과 희망과 사랑으로
언제나 깨어 주님의 계명을 충실히 지키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나는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세워 주리라.>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3,1-6
1 불행하여라, 내 목장의 양 떼를 파멸시키고 흩어 버린 목자들! 주님의 말씀이다.
2 ─ 그러므로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을 두고 말씀하신다. ─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 버리고 몰아냈으며 그들을 보살피지 않았다.
이제 내가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3 그런 다음 나는 내가 그들을 쫓아 보냈던 모든 나라에서 살아남은 양들을
다시 모아들여 그들이 살던 땅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은 출산을 많이 하여 번성할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목자들을 그들에게 세워 주리니,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잃어버리는 양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다.
5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6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23(22),1-3ㄱ.3ㄴㄷ-4.5.6(◎ 1)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네. ◎
○ 당신 이름 위하여, 나를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네.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당신 함께 계시오니, 두려울 것 없나이다. 당신의 막대와 지팡이, 저에게 위안이 되나이다. ◎
○ 원수들 보는 앞에서, 제게 상을 차려 주시고, 머리에 향유를 발라 주시니, 제 술잔 넘치도록 가득하옵니다. ◎
○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 ◎

제2독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신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2,13-18
형제 여러분,
13 이제, 한때 멀리 있던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하느님과 가까워졌습니다.
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15 또 그 모든 계명과 조문과 함께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시고,
16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시키시어,
그 적개심을 당신 안에서 없애셨습니다.
17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오시어,
멀리 있던 여러분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시고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셨습니다.
18 그래서 그분을 통하여 우리 양쪽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요한 10,2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0-34
그때에 30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31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32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33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3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임금이신 주님, 주님의 평화를 선포하는 교회를 도와주시어, 분열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언제나 주님을 찾고 그 안에 머물러 기도하며, 새로운 힘을 얻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분단의 세월 동안 많은 고통을 겪어 온 저희 겨레를 보살펴 주시어, 마음의 상처를 씻어 주시고, 평화로이 대화하며 화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3. 농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창조주이신 주님,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농민들을 보살펴 주시어, 기후 변화의 위기 속에서도 희망의 씨앗을 보여 주시고, 농민 주일을 지내는 교회가 농업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데 앞장서게 하소서.

4. 가정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생명이신 주님, 그리스도인 가정들을 이끌어 주시어, 우리 농산물을 가까이하고, 사회와 자연의 환경과 생태를 돌보며 생명 수호에 앞장서는 생명의 지킴이가 되게 하소서.

예물기도

하느님, 구약의 제사들을 하나의 제사로 완성하셨으니
하느님의 종들이 정성껏 바치는 이 예물을 받으시고
아벨의 제물처럼 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시어
존엄하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사가
인류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4 <구원의 역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탄생하시어 인류를 새롭게 하시고, 수난하시어 저희 죄를 씻어 주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오르시어 천국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 거룩하시도다! …….

영성체송

시편 111(110),4-5
당신 기적들 기억하게 하시니,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다. 당신 경외하는 이들에게 양식을 주신다.
<또는>
묵시 3,20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목소리를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으리라.

영성체 후 묵상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멀리 있던 이들에게도 가까이 있던 이들에게도 평화를 선포하신 예수님의 권고대로, 좀 쉬고 다시 열정적으로 기쁜 소식을 전합시다.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이 거룩한 신비의 은총으로 저희를 가득 채워 주셨으니
자비로이 도와주시어
저희가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살아가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

 

2002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역사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그렇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입니다. 어느덧 22년이 지났습니다. 한국은 폴란드와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역사상 처음으로 16강에 올랐습니다. 기세를 몰아 한국은 이탈리아를 연장까지 가는 혈투 끝에 2:1로 이기고 8강으로 올랐습니다. 감독인, 히딩크는 ‘I am still hungry!’라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한국은 스페인과 승부차기 끝에 4강으로 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용광로와 같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붉은 악마가 되었고, 붉은 셔츠를 입었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이 힘차게 외쳤던 구호와 박수가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와 짝짝 짜자작으로 이어지는 박수였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구호입니다.

 

어린 시절 저의 기억에 깊이 새겨졌던 구호가 있습니다. ‘국민소득 1,000,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입니다. 한강의 기적을 이룬 대한민국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세웠습니다. 모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일했습니다. 학교 담벼락에도, 동네의 담벼락에도 국민소득 1,000불과 수출 100억 불이라는 구호가 신동우 화백의 그림과 함께 그려졌습니다. 당시 정부는 1980년대에 그 목표를 이루겠다고 했는데 빨리빨리의 대한민국은 4년 앞당긴 1977년에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2023년 대한민국의 국민소득은 33,475달러입니다. 수출은 1,118억 달러입니다. 소득은 33배가 넘게 증가했고, 수출은 11배가 넘게 증가했습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구호가 있습니다. ‘잘살아 보세,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입니다. 구호는 목표가 되었고, 목표는 우리에게 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한국교회에도 구호가 있었습니다. 1984년 한국교회는 창립 200주년을 맞이했습니다. 한국교회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주례로 103위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는 200주년 준비의 하나로 사목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03위 시성식을 기점으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습니다. 10년마다 신자 수가 100만 명씩 증가했습니다. 1980년대에 100만 명이던 신자는 2020년에는 500만 명을 넘었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가 늘어났습니다. 본당은 넘쳐나는 신자로 분가해야 했습니다. 서울과 광주에만 있던 신학교도 늘어나는 신학생을 다 받지 못해서 늘어났습니다. 수원, 인천, 대전, 부산, 대구에 새롭게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한국교회가 창립 200주년을 준비하면서 내세운 구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 빛을이라는 구호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의 도움 없이 하느님을 받아들였던 특별한 교회였습니다. 많은 박해와 시련이 있었지만 이 땅에 하느님 사랑의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하느님 사랑의 빛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

 

1989년에 한국교회는 44 성체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103위 시성식은 우리만의 행사였다면 성체대회는 가톨릭교회의 공적인 행사입니다. 변방에 있던 한국교회는 성체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당당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신학생이었던 저는 에서 온 순례단의 안내를 맡았습니다. 브라질의 주교님이고, 세계적인 해방 신학자인 돔 헬더 까마라 주교님의 강의를 직접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성자(聖者)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내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조직을 만들자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릅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주는 것도 좋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그물을 주는 것은 더 좋은 것입니다. 44차 세계 성체대회의 구호는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였습니다. 그리스도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착한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영적으로 충만한 신앙은 공감에서 시작됩니다. 공감은 연민이 되고, 연민은 조건 없는 나눔이 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16주일

복음: 마르 6,30-34

 

위기는 기회입니다!

 

이백명 삼백명은 아니지만, 육칠십명 아이들을 위해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여름 신앙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프로그램 진행하랴, 물놀이 따라다니랴, 동선 체크하랴, 정신이 없습니다.

 

저는 주방 근무라 새벽 6시에 홀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특별한 체험입니다.

아무 탈 없이 신앙학교가 잘 진행되었으면, 하는 지향으로 초스피드로, 그러나 정성껏 미사를 봉헌합니다.

 

미사 끝나자마자 주방으로 달려가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침 끝나면 점심 준비, 점심 끝나면 시장, 그리고 저녁...단 한 순간도

자리에 편히 앉아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강철 체력을 주신 주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는 요즘입니다.

 

정말이지 다들 몸은 피곤하지만 신명나는 하루 하루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단이 펼쳐나갔던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신명나게 전개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매료시켰습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예수님과 제자들은 잠시 쉴 틈도 없었으며,

음식 먹을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피로는 누적되었고, 수면부족으로 인해 건강까지 염려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걱정되었던 예수님께서 이렇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 31)

 

밀물처럼 밀려드는 고객들, 양떼들로 인해 힘겨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사기중천, 의기양양했던 예수님과

제자 공동체의 모습, 그런 모습과는 너무 비교되는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참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져가는 청소년과 청년들, 급격한 고령화 현상, 동력을 상실한 공동체의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봐야 하는 안타까움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초기 교회 공동체가 그토록 군중들을 매료시킨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해봐야겠습니다.

우리도 그들의 운영 노하우를 배워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우리 교회로 끌어들일 수 있는 매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요즘 교회의 위기라고 합니다만,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조금 더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있는 이들, 교회로부터 매력과 흥미를 잃어버린 이들이 눈을 번쩍 뜨고 되돌아올 수 있도록,

더 많은 행복거리들 찾아봐야겠습니다.

 

우리 교회는 세파에 시달려 지치고 힘겨워하는 양들에게 기쁨과 희망, 열정과 첫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에너지 충전소가 되도록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강론

 

연중 제16주일(농민주일)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코 복음사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 중 하나는

'예수님, 그분은 누구신가?'라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물음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말씀전례는 바로 이 물음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줍니다.

곧 예수님은 양떼를 돌보는 '진정한 목자'임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참된 목자'의 상이 곧 메시아의 표상임을 말해줍니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당시의 제도권 지도자들(왕들, 사제들)이 하느님의 양떼인 백성들을 보살피지 않고 오히려 죽이고 흩어버리고 헤매게 하였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양떼들을 보살필 ‘진정한 목자’를 세워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그 목자가 다윗의 후손에서 날 것임을 선포하십니다.

그분은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실 '우리의 정의'(예레 23,6)이신 주님으로 '참된 목자'인 ‘메시아’로 예고됩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참된 목자'”는 단지 양떼를 흩어지지 않게 하고 헤매지 않게 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흩어진 양떼를 인도하고, 헤매는 양떼를 보호하는 분, 양떼를 하나 되게 하고,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곧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 2,14)로 제시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으로 유다인과 이민족을 하나로 만드시고, 이 둘을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 안에서 두 인간을 하나의 새 인간으로 창조하시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에페 2,14-15)

이토록 예수님께서 우리 사이의 갈라진 장벽을 허물고, 우리를 새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양쪽을 한 몸 안에서 하느님과 화해'(에페 2,14-16)시키시고 평화를 이루신 '착한 목자'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일이 오늘 우리가 ‘평화’를 이루기 위해 할 일입니다. 

서로를 가르는 장벽인 ‘적개심을 허무는 일’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세 가지로 그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지친 제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요, 둘째는 몰려든 군중들을 '측은히 여기는 모습'이요,

셋째는 양들을 '가르치는 스승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은 파견 받은 사도들이 돌아와 보고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마르 6,31)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군중이 몰려왔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친 제자들에게 ‘가서 좀 쉬어라’고 배려하십니다. 

'쉬어라'는 이 말씀에서 시편 작가가 들려주는 진동을 듣습니다. 
“너희는 멈추고(곧 쉬고) 내가 주 하느님임을 알아라.”

(시편 46,11)

또한 두 번씩이나 반복되는 '외딴 곳으로 가서'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는 <호세아서>에서 울려오는 진동을 듣습니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외딴 곳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 너는 나를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 내가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호세 2,16-22 참조) 

그렇습니다. 

'외딴 곳'에서 벌어질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되고, ‘주님’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에 지친 제자들은 쉬게 하시면서도, 외딴 곳까지 먼저 달려온 군중을 보시고(마르 6,32 참조)는 마치 목자 없는 양들처럼 가엾은 마음이 드셨습니다. (마르 6,34)

그래서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 길 잃은 양들을 먼저 돌보는 '목자'로서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그것은 애틋한 사랑의 발로로 타인의 상황에 마음 아파함이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연기 나는 심지를 그냥 둘 수 없는, 차마 못 견디는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안달이 나고 몸살이 나서 사랑을 건네주지 않고는 차마 못 배기는 까닭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랑에 안달이 난 바로 그분’을 만납니다. 

그토록 '가엾은 마음이 드신' 그분께서는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기 시작하셨습니다. (마르 6,3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진정으로 굶주리고 목마른 것이 진리임을 아셨습니다.

그들을 채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을 주는 ‘진리’ 외엔 결코 그 어떤 것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양들을 '진리'로 인도하는 분이 바로 '참된 목자'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목자가 되려면 먼저 ‘진리’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참된 양식’을 받아먹는 ‘양’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진정 우리가 그분의 ‘양’이라면, 우리를 ‘측은히’ 여기시는 그분에게서 우리는 진리를 얻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녀야 할 것은 양들을 측은히 여기는 애틋한 마음이요,

참된 진리를 가르치기 이전에 먼저 참된 진리가 되여야 할 일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양식을 얻는 양이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강론

 

2024.7.20.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미카2,1-5 마태12,14-21

 

                                              예수님처럼, 어머니처럼, 새처럼

                                   “한결같이, 항구히 하느님 사랑의 품이 되어 삽시다”

 

“주여, 당신 은총이 어이 이리 귀하신지. 

 인간의 자손들이 당신 날개 그늘로 숨어드나이다.”(시편36,8)

 

오늘 7월20일은 엘리야 수사의 영명축일이고 어제 저녁식사때는 조촐한 축하식도 가졌습니다.

오늘 새벽 성무일도시 ‘2열왕2,1-15’까지 말씀도 참 절묘하게 어울립니다.

 

엘리야가 승천하고 엘리사가 그 뒤를 잇는 장면이 릴레이 경주시 멋진 바튼 텃치 같아 기분이 좋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복입니다.

엘리야가 참 살으니, 주님께서는 참 좋으신 후계자 엘리사를 마련해 주심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서두 부터가 위기 의식을 느끼게 합니다.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신후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였고 이런 낌새를 알아챈 주님은 그곳에서 물러가십니다.

그러자 암탉을 따르는 병아리들처럼 군중은 예수님을 따랐고 예수님은 이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절대 침묵을 명령하십니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12,1-4)의 주님의 종의 첫째 노래를 인용하시며

예수님에게서 ‘주님의 종’으로서의 신원을 발견하십니다.

여기서 묘사되는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섬세하고 고요한 모습이, 자비롭고 지혜로운 주님의 종의 모습이

흡사 하느님의 품, 예수님의 품 같고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어 생각난 일화가 있어 나눕니다. 

 

수도형제로부터 제주도에 사는 어느 작가의 단편소설 서문 추천의 글을 부탁받았습니다.

6월26일부터 7월15일 완성되기까지 정말 20여일간 달걀을 병아리로 부화시키고자 품고 있는 암탉처럼

자나깨나 마음에 품고 지내며 묵상했습니다.

이런 사정을 어느 자매와 나눈 내용입니다.

 

“신부님, 잘은 모르지만 작가님도 너무 감사하실 것 같아요.

마음의 깊은 내면의 감정을 울리는 서문이세요.”

 

“온힘을 다해 썼네요! 20여일 동안 마음에 품고, 마치 병아리들을 부화하기위해 달걀을 품고 있는 암탉처럼!

매일 그렇게 탄생되는 강론이랍니다! 재미있지요! 이렇게 어머니 모성애母性愛를 체험합니다!”

 

“아, 맞아요. 신부님!! 샛강 조그마한 연못에서 오리가 알을 품고 부화시키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던 모습을 여러번 여러해 봤습니다.

그러나 끝내 부화시키지 못하드라구요.

남편 오리가 알을 품고 있는 오리를 어찌나 보호하던지요.

먹을 것을 줘도 꼭 같이 데리고 나와 먹는 모습에 감동했어요.

미물도 저러할진대 사람 못된 인간은 왜 그리 생겨먹은건지 혀를 찰 때가 너무 많습니다.”

 

“자매님, 유심히 관찰하셨네요. 감동적인 일화! 강론에 인용하고 싶습니다.”

 

마침내 오늘 강론에 인용하게 되었습니다.

어미품을 찾아 날아 오는 새들처럼 하느님의 집 수도원의 품을 찾아 끊임없이 날아오듯 걸어오는

형제자매들입니다.

 

마침 김훈 작가의 새에 대한 묵상글도 생각났습니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사람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하늘을 나는 모든 새는 그 어미가 체온으로 품어서 태어나는 생명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다!”

 

감동적인 고백이요 자신의 무정無情, 무지無知했음을 반성케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날마다 마음 깊이 꼭 품었다 쓰는 강론이어야 되겠다 다짐을 새로 합니다.

사실 이렇게 마음 깊이 품었다 부화하듯 쓰는 매일 강론이었고, 홈페이지에 올리면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 날라 가니 흡사 강론이 살아 있는 ‘은총의 새’, '희망의 새', '사랑의 새', ‘축복의 새’ 같다는

은혜로운 깨달음에 감사했습니다.

 

더욱 이렇게 강론도 쓰고 자비하신 예수님처럼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으로 살아야 하겠다는 자각도

새로이 했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루살렘을 두고 한탄하는 예수님 모습입니다.

 

“예루살렘아. 예수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은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루카13,34)

 

바로 암탉으로 상징되는 하느님의 종 예수님은 하느님의 품, 어머니의 품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로 오늘 주님의 종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강인한 인내에 온유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어머니 품같은 예수님에게서

참 목자상을, 참 영성적 삶을 배웁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음과 같은 주님의 종이 우리의 복된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이사12,1-4)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제1독서의 미카 예언서에서 질타의 대상인 무자비하고 불의한 부자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자비하신 주님의 품을 떠날 때 구제불능의 괴물도 악마도

폐인도 될 수 있음을 봅니다.

이런 부자 악인들에 대한 심판의 선고이자 회개의 촉구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불의를 꾀하고, 잠자리에서 악을 꾸미는 자들!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긴다.

탐이 나면 밭도 빼앗고, 집도 차지해 버린다.

그들은 주인과 그 집안을, 임자와 그 재산을 유린한다.”

 

하느님의 품을 떠나 무지의 탐욕에 눈이 멀 때, 사람이 얼마나 악해 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광야 인생 여정중인 우리 모두가 자애로운 주님의 종,

주님의 품이 되어 살게 합니다.

 

“둥지 위를 맴도는 새들처럼

 만군의 주님이 너희를 지켜주시리라.

 지키고 건져주며

 감싸고 구원해 주리라.”(이사31,5). 아멘.


7/21(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 되새김 구절

 

1.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바로 공감과 연민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은 공감과 연민이 희생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공감과 연민이 함께 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더는 슬픔과 울부짖음이 없는 세상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재물과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한없는 연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영적으로 충만한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조재형 신부)

 

2. ‘위기는 기회’라는 말도 있습니다.

위기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다시 한번 일어서라고, 다시 한번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라고,

그래서 철저하게도 쇄신되고 거듭나라고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18-21;이사12,1-4)(이수철 신부)

 

7/21(일)  [(녹) 연중 제16주일 (농민 주일) ], 제30일차 기도

 

복음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오늘의 말·샘 기도>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주님!

저를 외딴 곳, 당신의 거처로 데려 가소서.

당신 안에 쉬게 하소서.

그 쉼 안에서 사랑에 젖게 하소서.

당신 사랑을 알게 하소서.

그 사랑 안에서 당신을 낭군이라 부르게 하소서.

오, 주님!

당신만이 진정한 쉼이오니, 당신 사랑의 속삭임 안에 쉬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7월21일(일) 9시...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