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7월 28일 주일[(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7. 28. 05:52

[매묵]2024년 7월 28일 주일[(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2021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감염병의 세계적 유행으로 고독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노인들을 위로하고, 신앙의 전수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 노인의 역할과 중요성을 되새기며 그들의 소명을 격려하고자 ‘세계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제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보편 교회와 함께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월 26일)과 가까운 7월 넷째 주일을 ‘조부모와 노인의 날’로 지낸다(주교회의 2021년 추계 정기 총회).

오늘은 연중 제17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파스카 축제일인 이 주일에 우리를 부르시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을 먹이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세상의 빵을 먹으며, 육신과 영혼의 온갖 배고픔을 채우고 이웃과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집시다.

입당송

시편 68(67),6-7.36 참조
하느님은 거룩한 거처에 계시네. 하느님은 한마음으로 모인 이들에게 집을 마련해 주시고, 백성에게 권능과 힘을 주시네.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의 희망이신 하느님,
하느님이 아니시면 굳셈도 거룩함도 있을 수 없고
하느님만이 저희를 지켜 주시니
풍성한 자비로 저희를 보살피시고 이끄시어
저희가 지금 현세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며
영원한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먹고도 남을 것이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4,42-44
그 무렵 42 어떤 사람이 바알 살리사에서 왔다.
그는 맏물로 만든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을 자루에 담아,
하느님의 사람에게 가져왔다.
엘리사는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하고 일렀다.
43 그러나 그의 시종은
“이것을 어떻게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엘리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 군중이 먹도록 나누어 주어라.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44 그리하여 그것을 사람들에게 내놓으니,
과연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먹고도 남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45(144),10-11.15-16.17-18(◎ 16 참조)
◎ 주님, 당신 손을 펼치시어 저희를 은혜로 채워 주소서.
○ 주님, 모든 조물이 당신을 찬송하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이 당신을 찬미하나이다. 당신 나라의 영광을 노래하고, 당신의 권능을 이야기하나이다. ◎
○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 ◎
○ 주님은 가시는 길마다 의로우시고 하시는 일마다 진실하시네. 주님은 당신을 부르는 모든 이에게, 진실하게 부르는 모든 이에게 가까이 계시네. ◎

제2독서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입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4,1-6
형제 여러분, 1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2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3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4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때에 하나의 희망을 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5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6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루카 7,16
◎ 알렐루야.
○ 우리 가운데에 큰 예언자가 나타나셨네. 하느님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셨네.
◎ 알렐루야.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1-15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수 곧 티베리아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2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라갔다.
그분께서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3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앉으셨다.
4 마침 유다인들의 축제인 파스카가 가까운 때였다.
5 예수님께서는 눈을 드시어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에게,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하고 물으셨다.
6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하시려는 일을 이미 잘 알고 계셨다.
7 필립보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 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8 그때에 제자들 가운데 하나인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9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10 그러자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자리 잡게 하여라.” 하고 이르셨다.
그곳에는 풀이 많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자리를 잡았는데, 장정만도 그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11 예수님께서는 빵을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물고기도 그렇게 하시어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주셨다.
12 그들이 배불리 먹은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버려지는 것이 없도록 남은 조각을 모아라.” 하고 말씀하셨다.
13 그래서 그들이 모았더니,
사람들이 보리 빵 다섯 개를 먹고 남긴 조각으로 열두 광주리가 가득 찼다.
14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자비하신 주님, 주님의 교회를 굽어살피시어, 주님을 찾고 주님을 바라는 모든 이와 함께 말씀을 듣고 빵을 나누며, 세상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전하게 하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통치자이신 주님, 이 땅의 정치인들을 굽어살피시어, 국가의 기본법을 언제나 깊이 새기며,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을 할 때 바르게 판단하고 정의롭게 실천하도록 이끌어 주소서.

3. 노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인자하신 주님, 조부모와 노인의 날을 맞아 기도드리오니, 그들을 굽어살피시어, 내면의 기쁨과 힘을 잃지 않고 세상 속에서 당당히 생활하여 나가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일치의 주님, 저희 지역 사회의 모든 이를 주님의 사랑으로 이끌어 주시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본모습을 간직하며 이웃들과 함께 화목하게 살아가게 하소서.

예물기도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예물을 바치오니
이 거룩한 제사를 받아들이시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의 힘으로
저희가 이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아
마침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4 <구원의 역사>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에 탄생하시어 인류를 새롭게 하시고, 수난하시어 저희 죄를 씻어 주시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마련하시고, 아버지 계신 곳에 오르시어 천국 문을 열어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무리와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시편 103(102),2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또는>
마태 5,7-8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으리라.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보리라.

영성체 후 묵상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늘 안드레아처럼 묻습니다. 아이가 가지고 있던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바라는 대로 주시어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표징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합니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저희가 성체를 받아 모시며 언제나 성자의 수난을 기념하오니
성자께서 극진한 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이 선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믿음과 미신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믿음은 성당이나, 사찰에 다니는 것이고, 미신은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것일까요? 믿음은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하느님 때문에 모욕을 받아들이고, 하느님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하느님 때문에 변했기 때문입니다. 미신은 나의 욕심 때문에 하느님을 변화 시키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을 자판기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판기에 돈을 넣고, 원하는 메뉴를 선택합니다. 커피, 콜라, 물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자판기가 돈을 먹고, 아무것도 내어 놓지 않으면 우리는 짜증을 냅니다. 자판기를 흔들기도 하고, 자판기를 발로 차기도 합니다. 하느님께 기도했는데, 하느님을 위해서 봉사했는데 힘든 일이 생기면, 뜻하지 않는 불행이 다가오면 우리는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물질의 축복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끄는 것은 무병장수가 아닙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변하고, 하느님 때문에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갈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표징이 생깁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걸까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믿는 걸까요? 그분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신 것, 그분이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신 것, 그분이 중풍병자를 걷게 하신 것, 그분이 풍랑을 잠재우고, 물위를 걸으신 것을 믿는 걸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믿음의 대상이 보여주신 표징입니다. 정말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마태오 복음 16 16절의 말씀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면, 천국의 열쇠를 받았던 베드로도 믿음이 아닌 미신에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참된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빵을 많게 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돕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믿음은 아닙니다. 사회복지와 믿음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가난한 이를 돕는 것은 믿음의 열매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사회복지는 공동선의 실현이지 믿음의 대상은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핵심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고백한 사도신경입니다. 우리는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 믿음의 대상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표징은 없습니다. 오늘 사도신경을 같이 외워 보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계심을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죄의 사함과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아멘 나의 믿음이 무엇 때문에라는 조건이 있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믿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흔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믿음입니다.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가 모두 주님 안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넘치도록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7주일

 

2열왕기 4,42-44

에페소 4,1-6

요한 6,1-15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엘리야 예언자의 제자이자 후계자인 엘리사 예언자는 기적의 예언자로 유명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만 14번인데, 기록되지 않은 기적들도 숱하게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가 행한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행한 기적들과 자주 겹칩니다.

요르단 강물 위를 걸어서 건넌 기적, 죽은 여인의 아들을 살린 기적, 나병환자를 치유한 기적,

그리고 오늘 첫 번째 독서에서 소개된 바와 같이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 한 자루로 백 명이나 되는 사람을

배불리 먹인 기적 등입니다.

 

기적하면 빼놓은 수 없는 인물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 낙마하고 눈이 멀게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삶이 180도 바뀌게 되는데, 이는 기적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회개한 그에게 엄청난 능력을 선물하십니다. 그의 살갗에 닿았던 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들이 터치만 해도

질병이 사라지고 악령들이 물러갔습니다.

삼층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추락사한 청년 에우티코스를 소생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더 큰 기적을 행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기적입니다.

그는 옥에 갇힌 상태에서도 힘차게 주님 사랑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내일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서도 기쁘고 환한 얼굴로 초대교회 신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다시 또 있을까 싶습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에페소서 4장 1~3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그분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직전 안드레아 사도는 무척이나 회의적이었고 지극히 인간적이었습니다.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요한복음 6장 9절)

 

안드레아 사도는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 그분이 지니신 권능에 대한 신앙이나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님을 예언자 중에 한 분이나 탁월한 랍비 중에 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 공동체 전체, 세상 만물의 주인이 예수님이란 진리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기적은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 기적으로 충분하고 흘러넘칩니다.

이제 기적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생각해도 무방합니다.

더 이상 죽었던 사람이 되 살아나고 죽어가던 사람이 순식간에 정상화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은 또 다른 누군가가 행할 기적이 아니라, 오늘날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들이자 사도들인

우리 각자가 행할 기적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오늘 교회는 어르신들과 조부모님들을 각별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간 소홀했던 연로하신 부모님들의 영육의 건강을 위해 열심히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노인에 대한 배려나 존경이 눈에 띄게 약화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결코 시대를 한탄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럴수록 더 큰 그릇, 더 큰 거목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거나 기댈 생각 아예 접고, 더 당당하고 더 힘차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노년의 삶도 멋지고 찬란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과 마음으로 세상과 이웃들 앞에 보여줘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3. 이영근 신부 복음 묵상

 

연중 제17주일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빵”에 대한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빵의 ‘모자람’과 ‘충만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예언자 엘리사가 보리빵 스무 개로 백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2 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하나인 참된 빵이신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여기서는 특별히 ‘모자람’과 ‘충만함’의 대조를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의 차이가 극렬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당신께 오는 것을 보시고, 필립보를 시험해보려고 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곧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를 제자들에게 깨우치시고자 하십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요한 6,5)

이는 필요한 것이 '빵'이며, 그 '빵'을 사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곧 모자람을 채울 수 있는 분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어디 계시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이십니다.

 

그것은 '빵'이신 당신 자신을 옆에 두고서 묻는 질문입니다.

사실은 당신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시고자 물으시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일입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누구에게서 빵을 구하고 있는가?"

그런데 필립보는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요한 6,7)

그는 예수님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돈으로 계산할 뿐, 빵을 사야 할 곳을 찾지도 알지도 못합니다. 

‘빵’을 주고자 하는 마음 자체가 없는 듯이 보입니다.

 

안드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음을 이미 보았지만, 그도 ‘양’을 계산하면서 ‘모자람’을 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소용이 없는 하찮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를 보았습니다.

가져서 부유하고 힘 있고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부자 어른이 아닌, 오히려 보호와 보살핌을 받아야 하고 주는 것을 받아먹어야 하는, 무능력하고 나약한 가난한 ‘아이’가 그것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자라거나 소용없는 것이 아니라, ‘일곱 개’의 ‘충만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는 ‘모자람’이었지만, 예수님께는 ‘충만함’이었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가난하면서도 지니고 있는, 무능하면서도 전능한,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처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구원자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혹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는지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주십니다. 

그들은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그야말로 모두가 먹고도 남는 '충만함'입니다.

남은 ‘열두 광주리’는 ‘열두 지파’, ‘열두 제자’에서 보듯이 하느님 백성 모두를 나타내는 숫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가 먹기에 충분한 빵이 이미 있습니다. 

사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자비를 베푸는 기적 이야기인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서 내어주는 '표징'으로 제시됩니다.

곧 공관복음에서는 빵과 물고기를 제자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시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를 '직접 군중에게 나누어 주시면서'(요한 6,11) 당신 자신을 '빵을 주시는 분'으로 계시하십니다.

곧 당신 자신이 '생명의 빵'임을 표징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요한 6,14)이심은 알아보지만, 여전히 '생명의 빵'으로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으로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정치적이고 민족적인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을 피하여, 외로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십니다. (요한 6,15)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빵'으로 건네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그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당신 생명의 충만함을, 당신 사랑의 충만함을 이미 입었습니다.

이제는 우리 자신을 빵으로 내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7.27.연중 제16주간 토요일                                                               예레7,1-11 마태13,24-40

 

 

                                                             “밀이냐 가라지냐?”

                                                        평화 공존의 사랑과 지혜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시편84;5)

 

오늘도 계속되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오늘은 가라지의 비유로 복음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에 비길 수 있다.”

예수님은 역시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하늘 나라를 살 수 있는 지혜를 가르쳐주십니다.

죽어서 시작되는 하늘 나라의 삶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살아야 할 하늘 나라입니다.

 

가라지의 신비는 악의 신비입니다.

복음은 이어 “사람들이 자는 동안에 그의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라며

간략히 악의 정체인 가라지의 유래를 설명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악의 신비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매사 사건이나 병들 역시 우리가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는 너무 많습니다.

삶의 신비, 죽음의 신비, 병의 신비, 사건의 신비라 뭉뚱거려 지칭할 만 합니다.

그러니 신비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원인을 찾다 보면 더욱 심연의 늪에 빠질 뿐 벗어나기가 힘듭니다.

 

원인을 해명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지혜롭게 대응하는 것이 처방입니다.

가라지의 비유에서 가라지를 뿌린 원수에 대해 아무리 말해도 밝혀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원수가 뿌린 가라지를 거두어 낼까 묻는 종들에 대한 주인의 답은 그대로 예수님의 심중을 대변합니다.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뽑을 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바로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공존의 사랑과 지혜입니다. 삶의 현실에서 밀과 가라지를 분별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처리하기도 난망합니다.

“공존의 사랑과 지혜, 밀이냐 가라지냐?”, 바로 오늘 강론 제목이기도 합니다.

 

누가, 무엇이, 밀이고 가라지입니까?

사람의 판단은 얼마나 불확실한지요?

과연 고정관념, 선입견,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볼 수 있겠는지요?

가라지인줄로 알고 뽑았는데 밀이면 어떻게 합니까?

 

내눈에 가라지이지 타인의 눈엔, 하느님의 눈엔 밀일 수 있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고정불변의 실재가 아니라 인간 삶의 현실에서 바뀔수도 있습니다.

밀같은 존재가 가라지로 타락할 수도 있고 가라지같은 존재도 개관천선의 은총으로 밀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발본색원, 과연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을런지요?

인류의 혁명과 전쟁사가 불가능함을 입증합니다.

도저히 악순환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악의 괴물과 싸우다 보면 나도 괴물이 됩니다.

악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묘연할뿐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목격하는 악의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인터넷이나 신문을 들여다 보면 온통 가라지밭 같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는데 진리의 승리를 말하지만 악의 세력이 만만치 않습니다.

역사는 조금씩 진보한다 하지만, 현재 갈수록 악화되는 지구의 현실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문명의 야만시대라는 역설의 현실입니다.

 

과연 인간에게 희망을 걸 수 있겠는가, 정말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가 묻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인간에 대해 회의하실까 생각도 듭니다.

 

우리 자신만 봐도 악의 존재가 만만치 않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축소판같은 마음밭입니다.

말 그대로 밀과 가라지가, 선한 경향과 악한 경향이 혼재하는 마음밭입니다.

 

순수한 천사도 순수한 악마도 없는 이 둘이 함께하는 인간존재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악의 실체도 모호할 뿐 아니라. 실제 뽑을 수는 없습니다.

칼리 지브란의 예언자중에서 '선과 악에 대하여'라는 글이 깊은 통찰을 줍니다.

 

“내 그대 안의 선에 대하여 말할 순 있으나

 악에 대해선 말할 수 없구나 

 악이란 무엇인가

 다만 선이 스스로의 굶주림과 갈증으로 괴로워하는 것 외에?

 실로 선이 굶주릴 때면 캄캄한 동굴 속에서도 먹이를 찾고

 목마를 때면 죽은 강물이라도 마시는 법”

 

어찌보면 선의 결핍이 악일 수 있고, 치유받아야할 선이 악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악의 신비를 궁구하기 보다는 부단히 선을, 사랑을 체험하고 쌓아가는 것이

악에 대한 답임을 깨닫습니다.

 

악으로 상징되는 가라지를 뽑는다고 해결될까요?

뽑을 수록 숱하게 생겨나는 가라지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뽑아도 계속 돋아나는 가라지 같은 잡초들, 제초제를 뿌리면 밀도 땅도 죽습니다.

 

가라지들 없는 순수한 밀같은 선의 현실이 가능할까요.

아예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악의 가라지들 속에 단련되는 선의 밀들입니다.

제거가 아닌 함께 공존의 균형과 조화가 답입니다. 

 

이는 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양방의 처방이 아닌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한방의 경우를 닮았습니다.

선과 악의, 밀과 가라지 세력의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라지 악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우리의 영적수행입니다.

농사를 짓는 밭의 이치만 봐도 이해가 됩니다.

채소밭을 그대로 놔두면 잡초밭이 됩니다.

그러나 채소들을 잘 가꿔 왕성해지면 잡초들도 점차 약화되어 힘을 못씁니다. 

 

그러니 밀의 선한 세력을 강화하고 가라지 악한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부단한 수행이 필수입니다.

순수한 선의 밀만의 세상이라면 영적전쟁도, 영적성장도 있을 수 없습니다.

삶은 무기력과 무의욕으로 스스로 무너질 것입니다.

문제는 가라지 세력의 제거가 아닌 적절한 상태에서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실제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보십시오.

누가 밀이고 가라지인줄 판단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밀로 보이다가 가라지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재한 선의 모습이 드러날 때는 밀인데 내재한 악이 드러날 때는 가라지입니다.

 

그러니 평화공존이 답입니다.

최종의 판단은, 심판은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으로 대변되는 주인의 말씀이 답입니다.

 

“수확 때에 내가 일꾼들에게, 먼져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

 

하느님은 끝까지 밀에로의 가능성을 믿으며 기다리십니다.

그러니 일체의 판단은 유보한채 하느님을 닮아 공존의 사랑과 지혜로, 지극한 관용, 인내, 연민,

이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의 하늘 나라 비전을 사는 길이자 가라지 악의 세력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겠습니다.

 

이에 대해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선의 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속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이땅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우리 길과 행실을 바로 잡아 가는 것이 가라지 악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하늘 나라를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옛 어른 <관자>의 말씀도 좋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일을 잘 모르면 옛날을 비춰보고, 

 미래를 알지 못하면 과거를 살펴보라.”

 

현실적 삶의 지혜를 위한 필수 공부가 역사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끊임없이 실천하는 수행들이, 전례기도은총이, 무엇보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가라지 악의 세력을 견제하며 공존의 사랑과 지혜, 균형과 조화의 하늘 나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행복하옵니다,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그들은 더욱 힘차게 나아가리이다.”(시편84;6,8ㄱ)아멘,

톱카프 궁전


7/28(일 [(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 되새김 구절

 

1. 기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먼저입니다. 표징이 먼저가 아닙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먼저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그 점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수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조재형 신부)

 

2. 죽었다 깨어나도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회복 불가능한 중병에 걸려 하루하루 삶과 죽음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면서도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 내게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억울한 현실을 살아가면서도

초 긍정 마인드로 살아가는 기적, 바로 오늘 우리가 행할 기적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이영근 신부)

 

4.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가 좋은 도움을 줍니다.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선의 밀로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속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으면, 너희는 이땅에 영원히 살게 하겠다.”

 

부단한 회심의 여정을 통해 우리 길과 행실을 바로 잡아 가는 것이 가라지 악의 현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이요

하늘 나라를 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이수철 신부)

 

7/28(일 [(녹) 연중 제17주일(조부모와 노인의 날)]제37일차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는 자리를 잡은 이들에게 원하는 대로 나누어 주셨다.>

 

<오늘의 말·샘 기도>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요한 6,9)

 

주님!

보잘 것 없는 것이라고 하찮게 여긴 저를 용서하소서.

비록 작은 것이라도 무가치하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그러하듯,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게 하소서.

모든 것에 감사하며, 더없이 존귀한 임께 감사하며,

늘 함께 하는 당신의 사랑과 동행에 감사합니다.

아멘.

 

- 2024년 7월28일(일) 5시40분...수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