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4년 8월 26일 월요일[(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4년 8월 26일 월요일[(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귀를 기울이소서. 제게 응답하소서. 당신 종을 구해 주소서. 당신은 저의 하느님, 당신을 신뢰하나이다. 당신께 온종일 부르짖사오니,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본기도
저희가 하느님의 가르침을 사랑하고 그 약속을 갈망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이 세상에서도
참기쁨이 있는 곳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 사도 바오로의 테살로니카 2서 시작입니다.1,1-5.11ㄴ-12
1 바오로와 실바누스와 티모테오가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테살로니카 사람들의 교회에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 때문에
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나고
저마다 서로에게 베푸는 여러분 모두의 사랑이 더욱더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4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 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5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여러분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1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12 그리하여 우리 하느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에 따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가운데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모든 민족들에게 주님의 기적을 전하여라.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나날이 선포하여라, 주님의 구원을. 전하여라, 겨레들에게 그분의 영광을, 모든 민족들에게 그분의 기적을. ◎
○ 주님은 위대하시고 드높이 찬양받으실 분, 모든 신들 위에 경외로우신 분이시네. 민족들의 신들은 모두 헛것이어도, 주님은 하늘을 지으셨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 알렐루야.
복음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3,13-2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13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14)·15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개종자 한 사람을 얻으려고
바다와 뭍을 돌아다니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너희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16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성전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성전의 금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너희는 말한다.
17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 너희는 또 ‘제단을 두고 한 맹세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19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 사실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고,
21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성전과 그 안에 사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2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이는
하느님의 옥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그리스도께서 바치신 단 한 번의 제사로 저희를 자녀로 삼으셨으니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주님의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선물을 내려 주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주님, 땅은 당신이 내신 열매로 가득하옵니다. 당신은 땅에서 양식을 거두게 하시고, 인간의 마음 흥겹게 하는 술을 주시나이다.
<또는>
요한 6,54 참조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리리라.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저희가 주님의 자비로 치유를 받고 힘을 얻어
모든 일에서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지킬과 하이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선과 악이 공존합니다. 누가 이길까요? 먹이를 많이 주는 쪽이 이깁니다. 33년 사제 생활 중에 난처한 일도 있었고 보람된 일도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들과 단합대회를 갔었습니다. 젊은 혈기와 적당한 취기에 타 대학 학생들과 시비가 있었습니다. 우리 교사의 실수가 명백했고, 사과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사들은 저의 결정에 대해 서운하게 생각했습니다. 어찌 되었든 교사들을 보듬어야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아쉽습니다. 늦은 시간 사제관에 도착하니 빗장이 잠겼습니다. 벨을 누르니 본당신부님이 열어 주시면서 지금 몇 시냐고 물었습니다. 시간을 묻지만 왜 늦게 다니는가에 대한 질책이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말했지만, 문 앞에 세워놓고 말씀하시니 서운했습니다. 주교님께서 저를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저의 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저는 주교님의 이야기를 듣고 생활 습관을 바꾸었습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주교님께 감사드립니다.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기분 좋았던 일도 많았습니다. 소공동체 연수가 필리핀에서 있었는데 추천받아서 다녀왔습니다. 처음으로 해외로 나갔습니다. 부족한 저를 추천해 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필리핀에서 복음나누기 7단계, 아모스 프로그램을 배웠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2000년대 복음화를 위한 초석이 되었습니다. 당시 필리핀에 교포 사목으로 가 있던 친척 신부님이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이 인연이 되어서 지금도 미국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큰 싸움으로 벌어질 일이 있었는데 당시 본당신부로 있던 저를 생각해서 참았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도축장은 칼을 사용하는 곳이니, 늘 조심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형제님은 제 말을 귀담아들었고, 큰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고 고마워했습니다. 한 형제님은 ‘신사부일체(神師父一體)’라고 후배에게 말하였습니다. 후배가 무슨 뜻인가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신부님과 스승과 부모임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이 없던 후배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돌아보면 부족한 저를 과분하게 믿어주고, 사랑해 주었던 교우들이 많았습니다. 30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고집불통인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외면한 권위로 사목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말씀으로 시대의 징표를 드러내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선포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지나친 음주와 가무로 본인은 물론, 공동체에도 어려움을 초래하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기도와 묵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하는데 게임과 놀이로 세상의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사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사제에게 필요한 사람을 먼저 만나려는 사제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죽비’가 되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사제들이 있습니다. 33년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교우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이 그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겪으면서도 보여준 인내와 믿음 때문에, 하느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자랑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로운 심판의 징표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평생 가난한 이들을 돌보았던 요셉의원의 고 선우경식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이태석 신부님의 삶과 영성을 알리고 있는 구수환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어김없이 성당 마당의 눈을 쓸던 바오로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홀로 계신 어르신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드린 루시아 자매님도 생각납니다. 교포사목의 시작도 그랬습니다. 교우들이 몇 시간씩 운전하고 와서 공소예절을 했습니다. 기쁨이 넘쳤고, 사제를 모시려고 했습니다. 땀 흘려 벽돌을 날랐고, 물건을 팔았고, 눈물로 성전을 세웠습니다. 사제를 모시고, 첫 미사를 드리던 날은 모두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민 교회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교우들이 신앙의 씨를 뿌렸고, 사제가 함께 하면서 5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을 수 있고, 예수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악에게 먹이를 주고, 악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또다시 주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고, 선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복음: 마태 23,13-22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범함!
늦게야 철이 들어가는지, 요즘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을 조금씩 보고 있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범함을,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의 고귀한 가치를,
아주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깨닫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 깨달음은 작지만 또 다른 삶의 변화를 불러옵니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낯선 이웃들도 환대하고 작은 친절을 베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작은 친절이 결코 작은 것이 아니더군요.
우리의 작은 사랑의 몸짓, 작은 복음적 언어들이 스쳐 지나가는 낯선 이웃들에게는 커다란 감동을 선사합니다.
어떤 면에서 삶을 통한 복음선포요, 행동을 통한 증거라 할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환대한다는 것, 참으로 고된 일이지만, 동시에 얼마나 복음적인 일인지 모릅니다.
참된 환대는 형식적이거나 상투적인 환영, 말이나 플래카드를 통한 환영을 넘어섭니다.
우리가 추구해야할 보다 궁극적인 환대는 보다 보편적인 환대입니다.
그가 누구이든 따져보지 않고, 존재 자체로 존중하고 축복하고 귀한 손님으로 응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아주 강하게 질타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과 형식주의입니다.
성전이 회개 없는 위안의 장소로 전락할 때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 성전을 허무십니다.
예수님께 질타받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성전보다 성전에 장식되어 있는 보물에
더 큰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보다 그 제사에 봉헌된 예물을 더 중시했습니다.
성전의 거룩함과 고귀함은 사라지고 배금주의와 형식주의가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언젠가 100퍼센트 허물어질 성전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불멸의 성전을 건립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웃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고, 그를 또 다른 살아있는 성전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환대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작은 성전을 건립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그로 인해 그의 내면에 예수 그리스도를 탄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요즘 성당 하나 건립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무엇보다도 부지 마련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건축 기금 마련은 또 얼마나 큰 희생이 따르는지 모릅니다.
성당 하나 짓느라 사제들뿐만 아니라 교우들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 데로 피폐해집니다.
이런 시절 우리가 눈여겨볼 참신한 시도들이 있습니다.
한 개신교 교회는 성전이 없답니다.
마련된 건축 기금으로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는 대신 불멸의 성전을 지었습니다.
건축 기금은 전액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럼 예배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습니다.
성막을 모시고 40년 세월 광야를 횡단하던 공동체 말입니다.
주일 예배는 주말이 되면 텅텅 비어있는 학교 강당이나 구민회관 같은 장소를 임대해서 드린답니다.
이제 인구 감소에, 쉬는 교우 급증으로 성당이 텅텅 비어갑니다.
더 이상 대대적인 규모의 성전 건립은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요즘 대세는 작음입니다.
작은 도서관, 작은 영화관, 작은 학교, 작은 성당!
굳이 성전을 건립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모되는 초대형 성전을 포기하고
아담하고 편안한 작은 성전들을 건립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신 낯선 이웃들에게 더 많은 친절을 베풀고 극진히 환대할 때, 거리로, 변방으로 나가는 교회가 될 때,
아직 우리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 강론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무엇이 더 중요하냐?”>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활 초기에 '산상설교'를 통하여 여덟 가지의 '행복 선언'(마태 5,3-12)을 들은 바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후기에 이르러, 일곱 가지의 '불행 선언'(마태 23,13-36)을 들려줍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세 번째까지를 들었습니다.
첫 번째 불행 선언은 그들의 그릇된 가르침, 곧 그들의 잘못된 신앙이 사람들이 구원으로 가는 것을 막고 있음에 대한 경고입니다.
두 번째 불행 선언에서는 그들의 그릇된 인도, 곧 그들의 행실이 사람들을 지옥으로 빠뜨리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사실 이미 신자 된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이 아니라 그것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이들, 곧 성직자들의 잘못된 행실임을 일깨워줍니다.
세 번째 불행 선언에서는 자신의 신앙과 경건함을 과시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심지어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해 맹세를 남발하고 있는 눈먼 인도자들을 경고하십니다.
결국 이 모두는 그들이 가치관의 혼란에 빠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고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를 잃어버린 까닭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금이냐, 아니면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물이냐, 아니면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마태 23,17-18)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19)
곧 일을 잘 하는 것이냐, 사랑으로 일하는 것이냐?
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내 자신이냐, 주님이신 하느님이냐?
하느님이 계신 곳이냐, 어디에나 계시는 하느님이냐?
그러니 먼저 앞세워야 할 일을 선택할 수 있는 맑고 명료한 분별과 그를 따를 수 있는 결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구하라.”
(마태 6,33)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먼저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원하는 바를 행하십시오.
충고하더라도 사랑으로 충고하고, 침묵하더라도 사랑으로 침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우리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8.25.연중 제21주일
여호23,1-2ㄱ.15-17.18ㄴㄷ 에페5,21-32 요한6,60ㄴ-69
선택하십시오,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의 여정”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니,
내 입에 늘 찬양이 있으리라.”(시편34,2)
옛 어른의 말씀도 선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매일 내리는 사소한 선택들이 모두 나를 만드는 나의 역사가 된다.”<다산>
하루하루 날마다 사랑하는 주님을 선택해온 제 수도생활의 역사에 감사합니다.
하루의 시작에 강론 쓰기 선택은 언제나 우선입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인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다산>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을 다스리는 기본은 삼가고 삼가는 자세에 있다.”<다산, 흠흠신서>
참으로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선택하여 사는 이들은 신중에 신중을 다하는, 삼가고 삼가는 자세로 살 것입니다.
“삶도 내가 바라는 것이고 의도 내가 바라는 것이지만 이 둘을 함께 취할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택한다.”<맹자>
이기적 내가 아니고 의로운 주님을 선택하겠다는 결의의 발로입니다.
다음 예수님의 복음 말씀을 연상하게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삶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말그대로 선택의 여정입니다.
좋은 선택이 삶의 행복을 보장합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라는 고백도 선택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주님을 선택하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이 이를 입증합니다.
오늘 말씀의 중심 주제가 되는 시편 화답송 후렴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너희는 맛보고 깨달아라.”(시편34,9ㄱ)
언젠가 갑자가 좋은 선택은 없습니다.
평상시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갈 때 좋은 선택에 행복한 삶입니다.
역시 선택-훈련-습관화가 행복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선택하여 훈련하여 생활화하는 일이 행복의 요체라는 것입니다.
타고난 것들에 좌절하고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악마의 유혹이요 이런 상태에 머무는 것이 지옥입니다.
그러니 천국이냐 지옥이냐 이 또한 선택입니다.
보십시오,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가정도 부모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외모도 성격도 체질도 소질도 재능등 온갖 유전들 모두가 타고난 것들입니다.
이들에 좌절하고 절망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타고난 것들은 내 책임이 아닙니다.
주님도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타고난 것들에 매이면 비관적 운명주의자가 됩니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하루하루 날마다 좋은 선택을 하는 낙관적 섭리주의자로 사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선택할 좋은 것들도 무궁무진합니다.
감사를, 찬미를, 사랑을, 희망을, 평화를, 기쁨을, 일치를, 겸손을, 경청을, 순종을, 관상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선택하며 온갖 좋은 것들이 절로 따라옵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하는 일이 습관화, 생활화할 때
저절로 행복이요 좋은 분별의 지혜도 지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선택한, 선택의 달인이자 선택의 대가가 제1독서의 여호수아요,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요, 복음의 베드로 사도입니다.
결코 이런 주님의 선택은 우연이 아닙니다.
평소 체화(體化)된 주님과 일치된 신망애(信望愛), 진선미(眞善美) 삶의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자
열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여호수아서는 스켐 집회에서의 여호수아의 장쾌한 긴 연설로 이루어졌고
특히 다음 부분에서 여호수아는 온 백성에게 선택을 촉구합니다.
“만일 주님을 섬기는 것이 너희 눈에 거슬리면, 너희 조상들이 강 건너편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너희가 살고 있는 이 땅 아모리족의 신들이든, 누구를 섬길 것인지 오늘 선택하여라.
나와 내 집안은 주님을 섬기겠다.”
지도자의 이런 좋은 선택도 백성들은 보고 배웁니다. 여기 ‘오늘’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가리킵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선택하여 행복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기분 좋은 응답이 너무 통쾌하여 전문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여호수아 지도자와 백성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하나로 일치된 모습이 참 보기 좋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우리와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이 큰 표징들을 일으키신 분이 바로 주 우리 하느님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래서 역사를 잊은 민족은 희망이, 미래가 없다 하는 것입니다.
비단 나라나 민족뿐 아니라 모든 개인에게도 진리입니다.
새삼 기억과 감사와 희망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며 감사에서 샘솟는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기억과 감사가 없으면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니 역사를 기억하고 렉시오디비나하며 성찰할 때 올바른 선택, 참 좋은 주님의 선택입니다.
판단이나 선택이 힘들 때, 성소에 혼란이 올 때, 내 삶의 역사를 렉시오 디비나 하면서
하느님 섭리의 발자취를 확인해 보면 저절로 생명과 행복의 주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라든 공동체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정체성을 새롭고 견고히 하는데 그 나름대로의 역사공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의 선택 또한 그의 평소 주님을 향한 신망애 삶의 반영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거북하다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데
이 또한 좋은 주님의 선택에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영이요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일치된 영과 생명의 사람이 되어 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다 떠나고 열두 제자만 남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하고 물으시며
예수님은 이들의 선택을 촉구합니다.
역시 주님께 정통한 시몬 베드로가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를 대변해 정답을 말합니다.
역시 선택의 달인이자 대가인 시몬 베드로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 결론 말씀입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 역시 삶의 지혜가 빛납니다.
이 또한 주님을 선택하여 주님과 깊은 사랑의 일치를 살아 온 바오로의 지혜의 산물임을 깨닫습니다.
결코 부부관계를 일방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상호순종과 상호존경, 상호사랑의 순리대로 풀어갑니다.
대전제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즉 상호순종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도 이렇게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
‘몸의 신학’의 원조인 바오로의 사상이 참 심오합니다.
결코 남녀차별이 아닌 상호순종, 상호사랑을 말합니다.
어제 30대 초반의 사윗감을 만난 자매의 감격에 벅찬 고백을 잊지 못합니다.
“아 정말 요즘 만나기 힘든 젊은이입니다.
함께 식사하는데 얼마나 딸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정성을 다하는지 온몸에 표현됨을 느꼈습니다.
더 이상 볼 것이 없었습니다.
어제 자기에게 온 ‘따님을 정말 아끼고 잘 돌보겠습니다’ 카톡메시지에도 감동했습니다.
‘아끼고’ 참 오랜만에 들어본 반갑고 고마운 말마디였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역경속에서 남매를 한결같이 참 반듯하게 기도와 믿음, 사랑으로 키워낸 지혜로운 자매입니다.
이미 결혼한 아들 부부도 서로를 끔찍이 소중이 여기고 아낀다했습니다.
자매님이 평생 일편단심 주님을 사랑하고 믿고 선택하여 살아온 결과의 축복 선물입니다.
좋으신 주님이 계시기에 살만한 세상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주님을 사랑하고 선택하여 삶의 중심에 모실 때, 언제나 좋은 선택과 축복이 뒤따를 것이며,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내 영혼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는 듣고 기뻐하여라.”(시편34,3). 아멘.
8/26(월) [(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내 안에 있는 선과 악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악에게 먹이를 주고, 악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또다시 주님께 엄한 질책을 받을 것입니다. 선에게 먹이를 주고, 선과 함께 지낸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께 사랑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이제 인구 감소에, 쉬는 교우 급증으로 성당이 텅텅 비어갑니다.
더 이상 대대적인 규모의 성전 건립은 지양되어야 마땅합니다.
요즘 대세는 작음입니다.
작은 도서관, 작은 영화관, 작은 학교, 작은 성당!
굳이 성전을 건립하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소모되는 초대형 성전을 포기하고
아담하고 편안한 작은 성전들을 건립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대신 낯선 이웃들에게 더 많은 친절을 베풀고 극진히 환대할 때, 거리로, 변방으로 나가는 교회가 될 때,
아직 우리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즉 상호순종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편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친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남편도 이렇게 자기 아내를 제 몸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무도 자기 몸을 미워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하시는 것처럼 오히려 자기 몸을 가꾸고 보살핍니다.
우리는 그분 몸의 지체입니다.”(이수철 신 부)
8/26(월) [(녹) 연중 제21주간 월요일], 66일차 기도
복음 <불행하여라, 너희 눈먼 인도자들아!>
<오늘의 말·샘 기도>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무엇이 더 중요하냐?”
(마태 23,17)
주님!
저는 참으로 어리석고, 눈 먼 자입니다.
함께 계시는 당신을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으니, 진정 눈 먼 자입니다.
저의 무지를 받아들이기보다 저의 주장을 앞세우니, 진정 어리석은 자입니다.
하오니, 주님!
진리가 제 자신을 이끌게 하되, 마치 저 자신을 진리인 양 앞세우지 말게 하소서!
참으로 나의 삶이 사랑 외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시고,
진정 나에게 능력이 필요하다면 사랑을 아는 능력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8월26일(월) 15시30분...수산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