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4년 9월 13일 금요일[(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4. 9. 13. 10:11

[매묵]2024년 9월 13일 금요일[(백)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349년 무렵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튀르키예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수덕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을 하며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386년 사제품을 받고, 주로 안티오키아에서 사목하며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397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의 생활을 올바르게 개혁하는 데 힘써 좋은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황궁에서 증오를 품고 시기하는 자들에게 밀려나 한두 차례 유배 생활을 하였다. 고통에 짓눌린 채, 407년 9월 14일 (튀르키예) 폰투스의 코마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가톨릭 교리를 해설하고 그리스도인 생활의 실천을 독려하는 많은 설교와 저술들로 말미암아, ‘크리소스토모’(금구, 金口: 황금의 입)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다.

입당송

다니 12,3 참조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무궁히 빛나리라.

본기도

믿는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에게 뛰어난 설교의 은사를 주시고
박해를 꿋꿋이 견디어 내게 하셨으니
그의 가르침을 따르고 굽히지 않는 인내심을 본받아
저희의 믿음도 굳세어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나는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9,16-19.22ㄴ-27
형제 여러분, 16 내가 복음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나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나는 참으로 불행할 것입니다.
17 내가 내 자유의사로 이 일을 한다면 나는 삯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는 수 없이 한다면 나에게 직무가 맡겨진 것입니다.
18 그렇다면 내가 받는 삯은 무엇입니까?
내가 복음을 선포하면서 그것에 따른 나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복음을 거저 전하는 것입니다.
19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22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23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24 경기장에서 달리기하는 이들이 모두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상을 받을 수 있도록 달리십시오.
25 모든 경기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합니다.
그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6 그러므로 나는 목표가 없는 것처럼 달리지 않습니다.
허공을 치는 것처럼 권투를 하지 않습니다.
27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84(83),3.4.5-6.12(◎ 2)
◎ 만군의 주님, 당신 계신 곳 사랑하나이다!
○ 주님의 뜨락을 그리워하며, 이 영혼 여위어 가나이다. 살아 계신 하느님을 향하여, 이 몸과 이 마음 환성을 올리나이다. ◎
○ 당신 제단 곁에 참새도 집을 짓고, 제비도 둥지를 틀어 거기에 새끼를 치나이다. 만군의 주님, 저의 임금님, 저의 하느님! ◎
○ 행복하옵니다, 당신 집에 사는 이들! 그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찬양하리이다. 행복하옵니다, 마음속으로 순례의 길 떠날 때, 당신께 힘을 얻는 사람들! ◎
○ 주 하느님은 태양이요 방패이시니, 주님은 은총과 영광을 주시나이다.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복을 아끼지 않으시나이다. ◎

복음 환호송

요한 17,17 참조
◎ 알렐루야.
○ 주님, 당신 말씀은 진리이시니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소서.
◎ 알렐루야.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39-42
그때에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제자들에게 39 이르셨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둘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않겠느냐?
40 제자는 스승보다 높지 않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배우고 나면 스승처럼 될 것이다.
41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형제에게 ‘아우야! 가만,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에페 4,1-7.11-13)와 복음(마르 4,1-10.13-20 또는 4,1-9)을 봉독할 수 있다.>

예물기도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를 기리며 드리는
이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고
저희도 그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라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제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1코린 1,23-24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라.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힘이시며 하느님의 지혜이시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된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를 기리며 성체를 받아 모셨으니
하느님 사랑 안에서 저희가 신앙을 용감히 고백하며
진리를 충실히 증언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안에 빛이 있으면 밖이 빛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안의 빛이 꺼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러니 안을 소중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때문에 공동체가 분열되고, 갈등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들 중에 ‘시기, 질투, 분노, 원망, 탐욕, 나태, 식탐’과 같은 것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소금은 등잔을 밝히는 기름과 같습니다. 먼저 소금이 되지 않으면 빛이 되기 어렵습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내고, 소금이 음식의 부패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소금이 녹아 형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빛은 참된 빛이 될 수 없습니다.

 

사제 집무실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습니다. 지금 집무실은 부주임 신부님과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 화장실, 샤워실, 싱크대가 있습니다. 10명 이상이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지만, 조금 넓고 큰 편입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집무실을 옮기면 20명 이상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될 것이라고 합니다. 부주임 신부님과 작은 방으로 옮겼습니다. 옮기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청년들과 모임을 가지면 자리를 비켜 주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저를 찾아오는 교우가 있으면 부주임 신부님도 불편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이번에 자리를 옮기면서 3가지 좋은 점이 생겼습니다. 교우들은 편하게 모일 수 있는 다목적 모임방이 생겨서 좋습니다. 사제들은 아늑한 집무실이 생겨서 좋습니다. 방을 옮기면서 불필요한 것들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마음을 바꾸면 행동도 바꿀 수 있습니다. ‘자존심, 권위, 귀찮음’과 같은 것들이 마음에 있으면 합리적이고, 합당한 선택이 어렵습니다.

 

집무실을 옮기면서 예전에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한 달에 한번 구청에서 근무하는 교우들을 위한 미사엘 갔습니다. 구청장이 새로 바뀌면서 구청장의 집무실에서 차를 마셨습니다. 전임 구청장은 집무실이 무척 컸습니다. 구청의 현안과 미래를 보여주는 공간이 있었고, 널찍한 회의실이 있었고, 구청장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집무실이 있었습니다. 신임 구청장은 집무실을 확 줄였습니다. 거의 사용하지 않던 ‘전시 공간, 회의실’을 개방하여 직원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전에는 두 개의 방을 지나야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뀌면서 문 하나만 지나면 구청장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구청장은 구민들의 의견을 경청하였고, 직원들과 원활하게 소통하였습니다. 구청에는 시설관리 공단이 있었습니다. 구청에서 관리하는 공원, 운동장, 체육시설이 있었습니다. 본당의 날을 맞이해서 교우들이 체육대회를 하고, 야외미사를 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청에서 운영하는 운동장을 사용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구청에서는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었고, 본당의 날 행사를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늘 환한 웃음으로 구민들을 만났던 구청장이 생각납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실 때 빵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해서 흘릴 나의 피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너의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어라, 다음에 다른 사람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전에 우리 조상들은 높은 관직에 있을수록 더욱 몸가짐을 조심했다고 합니다. 가족들 또한 아버지의 관직에 누가 되지 않도록 몸가짐을 바르게 했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에 머물러서는 하느님께로 나가기 어렵습니다. 먼저 나 자신의 몸가짐을 바르게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현명한 이들은 창공의 광채처럼 빛나고, 많은 사람을 정의로 이끈 이들은 별처럼 영원 무궁히 빛나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복음루카 6,39-42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이천 년 교회 역사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 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을 기억합니다.

시리아 안티오키아 출신인 그는 원래 은수자의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깊은 산으로 광야로 들어가서 6년간의 금욕과 수덕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 기간 동안 요한은 얼마나 깊이 성경을 묵상했던지 신구약 전체 내용을 통째로 외울 정도였답니다.

광야에서 깊은 내공을 닦고 성덕의 정상으로 올라간 그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세상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다시 도시로 돌아옵니다.

 

요한의 출중함을 눈여겨 본 안티오키아 주교는 그에게 사제품을 수여하고 주교좌 대성당 주임 설교가로

임명합니다.

그 시점을 계기로 요한은 물 만난 고기처럼 사목자이자 명강론가로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냅니다.

그의 설교는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시원하고 달콤했으며 강렬하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요한의 강론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사람들은 혹시 사도 바오로가 다시 태어나신 것은 아닐까

의구심을 지닐 정도였습니다.

 

그의 강론을 듣는 청중들은 큰 감동을 받아 울고 흐느꼈으며 그 자리에서 회개를 하였습니다.

강의가 너무 은혜로워 기쁨에 찬 나머지 박수를 치며 환호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됩니다.

오늘 내 강론은 어떠한가?

말씀이 살아 있는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지?

말씀을 통해 교우들이 다시금 힘차게 세상을 살아갈 힘과 위로를 주고 있는지?

 

오히려 반대로 내 강론이 청중들을 분심으로 몰고가며, 분노와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요한의 말년은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왕의 초대로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영입되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 수난과 십자가 길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요한의 강직한 성격상 대도시 신자들의 나태함과 문란함을 간과하지 못했습니다.

사도 시대의 열렬한 신앙과 소박한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단이 성행했고,

악습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엄격한 수도생활이 몸에 밴 요한은 탄식을 거듭하며 악폐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교관을 건립하는 대신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지었습니다.

훈계할 일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요한의 꼬장꼬장한 모습은 즉시 악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동료 주교, 사제들조차도 요한을 향해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며 반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과격함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황제와 황후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주교좌 자리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리로 유배되었다가, 또 저리로 유배되고, 마침내 흑해 해안가 폰투스 코마나에 도착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주교좌 성당에서 쫓겨날 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사랑으로 보는 일>

 

예수님께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루카 6,37)는 말씀에 이어서,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루카 6,41)

그런데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무엇일까?

사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심판한다는 것은 그것을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관점, 태도, 사고방식의 틀(패러다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형제의 눈에서 ‘티’를 바라보게 하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곧 ‘보여주는 대로’, ‘들려주는 대로’를 받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선입관이나 편견 없이, 곧 사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말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는 것은 복음정신이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있는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랑으로(호의로)’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그를 ‘위하여’(ùπερ), 그가 잘 되기를 바라고 구원되기를 위하여 ‘호의와 자애’(헤세드)로 받아들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비추어주는 빛’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빛이 어둠을 몰아냅니다.

 

그러니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호의로)으로 보는 일’, 곧 ‘빛으로 보는 일’이 ‘들보’를 몰아냅니다.

곧 ‘용서하는 일’, ‘사랑하는 일’이 우리 눈의 ‘들보’를 빼내고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루가 6,37)

결국 심판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것을 넘어, 그것을 '호의로 보는 것, 곧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임을 밝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부어주신 은총이요 빛입니다.

결국 ‘들보’를 몰아내는 이는 내가 아니라 빛이요 사랑이신 주님이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4.9.12.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8,1ㄷ-7.11-13 루카6,27-38

 

                                                       “사랑은 아무나 하나?”

                                                         사랑의 평생공부

 

“주님,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시편139,1-2)

 

교황님의 동향으로 시작하는 요즘 강론이 신납니다.

피곤하거나 지친 기색이 전혀 없는 88세 노령의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불가사의 신비입니다.

“위대한 마음의 사람(a man of great heart)”이라 격찬을 받은 교황님에게 저는 “사랑의 거인(巨人;Giant)”이란

칭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동남아시아와 오세아니아주 4개국, 제45차 사목여정에 오른 교황님은 어제 9월11일 마지막 방문국인

싱가포르에 도착하여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홈페이지 소개된 동티모르에서의 기사 내용도 반가웠습니다.

 

“꿈은 현실화되었다(dream come true)!”

“자유는 타인들을 존경할 선택을 의미한다.”

“나는 동티모르 사람들의 얼굴에서 발견한 웃음들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젊은이들은 ‘생명, 희망 그리고 미래’를 생각나게 한다.”

“교황님의 동티모르 방문은 ‘믿음의 축제’였다.”

 

말그대로 “사랑의 거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사랑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문득 떠오른 제목이었습니다.

저절로 사랑이 아니라 사랑도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2000년도 MBC의 인기드라마 제목이었고 노래도 있습니다.

이때 드라마의 인기 커플 배우는 결혼에 골인하여 현재까지 잘 살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인생 “사랑의 학교”에서 평생 배우고 공부해야 하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입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라 사람입니다.

평생 사랑 공부는 평생 하느님 공부입니다.

사랑을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갈 때 참나의 실현이요 모두에게 주어진 평생과제는

오늘 복음의 다음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하느님 아버지의 우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이처럼 높습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원수 사랑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끼리끼리 나누는 유유상종의 사랑은 누구나 합니다.

 

진짜 사랑은 인간 누구나에게 한결같은 존중과 배려, 연민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단숨에 읽혀지는 설명이 필요없는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사랑의 복음 말씀입니다.

아버지의 속마음이 그대로 예수님을 통해 표현되는 느낌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솟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은 비겁한 무저항이 아니라 사랑의 적극적 저항입니다.

악순환을 끊어버림으로 악을 무력화하는 길은 이런 하느님 다운 적극적 사랑뿐이겠습니다.

우리의 원수나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 학대하는 자들은 상처받은 사랑, 결핍된 사랑의

불행한 이들일 수도 있고 또 우리가 도저히 알 수 없는 나름대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의 명령대로 사랑할 뿐이며 주님은 이런 힘을 주십니다. 

 

새삼 결코 값싼 사랑은 없음을 깨닫습니다.

말그대로 주님 “사랑의 전사”가 되어 온힘을 다해 용감히 실천할 사랑이요,

이렇게 불가능하다 싶은 사랑을 실천할 때 우리가 받을 상이 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이신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계속 구체적 사랑의 실천을 명령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몰라서 심판이요 단죄지, 우리가 정말 얼마나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는지, 또 우리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면 알수록 심판과 단죄는 멈출것이요 끊임없는 사랑의 용서와 나눔이 뒤를 이을 것입니다.

새삼 이런 사랑의 실천에 앞서, 온마음, 온정신, 온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기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이래야 주님은 우리에게 샘솟은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의 열정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말씀이 더욱 사랑의 하느님을 찾고 사랑하도록 우리를 고무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는 한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사랑밖엔 길이, 사랑밖엔 답이 없습니다. 사랑해서 사람입니다.

사랑과 아름다움은 함께 갑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사랑은 사람의 본질이며 존재이유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도 사랑뿐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이유인 하느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를 온힘으로 온마음으로 온정신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 삶의 모두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에게 샘솟는 사랑, 지칠줄 모르는 사랑을 선물하실 것이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 저의 길이 굽었는지 살펴보시고,

 영원의 길로 저를 이끄소서.”(시편139,24). 아멘.

 


9/13(금)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매이지 않은 자유인이지만, 되도록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썩어 없어질 화관을 얻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는 화관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사목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였습니다. (조재형 신부)

 

2. 엄격한 수도생활이 몸에 밴 요한은 탄식을 거듭하며 악폐를 개혁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주교관을 건립하는 대신 병원과 순례자 숙소를 지었습니다.

훈계할 일이 있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강하게 훈계를 했습니다.

 

요한의 꼬장꼬장한 모습은 즉시 악습에 젖어 사는 사람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동료 주교, 사제들조차도 요한을 향해 해도 해도 너무 지나치다며 반감을 가졌습니다.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과격함을 지적했습니다.

 

결국 황제와 황후의 심기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는 주교좌 자리에서 추방되고 맙니다.

이리로 유배되었다가, 또 저리로 유배되고, 마침내 흑해 해안가 폰투스 코마나에 도착한 그는

물설고 낯선 땅에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요한이 체포되어 주교좌 성당에서 쫓겨날 때 남긴 말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했고, 달려야 할 길을 다 달렸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샘 기도>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 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솟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이수철 신부)

 

9/13(금) [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84일차 기도

 

복음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할 수야 없지 않으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루카 6,42)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2024년 9월13일(금) 10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