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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15 글/시]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98) 기묘한 이야기/참 풍경 같은 좋은 사람

마르티나 2025. 1. 15. 08:12

2025년 1월15일(수) 오늘의 글/시

 

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98) 기묘한 이야기

엄마처럼 승윤이를 돌본 분례
부자 황영감에게 시집가는데…

승윤은 다섯살이 되도록 엄마 젖을 빨았다. 젖이야 나오겠느냐만 엄마 젖꼭지를 만지작거리다 입에 물고 한참 빨아야 잠에 들었다. 승윤이네 부모, 고 서방과 막실댁이 혼례를 올린 지 3년 만에 낳은 삼대독자 승윤이 젖을 빨지 않으면 어미도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막실댁이 하혈을 하고 시름시름 앓자 고 서방은 농사일도 접은 채 부인 곁을 지켰다. 밤이면 열이 펄펄 올라 고 서방이 수건을 찬물에 적셔 부인 머리 위에 얹어뒀을 때도 승윤은 엄마 곁에 찰싹 달라붙어 축 늘어진 젖꼭지를 물고서야 잠들었다. 엄마가 숨이 끊어지는 밤에도 다섯살 승윤은 엄마 젖을 꼭 잡고 잠들어 있었다.

장례를 치르고 나서 밤마다 제 어미를 찾는 승윤의 울음소리는 고 서방뿐만 아니라 이웃들 애간장도 태웠다. 마음씨 곱고 인물 좋은 뒷집 처녀 분례가 찾아와 승윤을 안고 제집으로 가서 잠을 재웠다. 저고리 고름을 풀어 엄마를 찾는 승윤에게 젖을 물리자 한참 빨다가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고 서방은 뒷집으로 가 분례에게 인사를 하고 아직 잠이 덜 깬 승윤을 안고 왔다.

낮이면 아버지를 따라다니다가 저녁 수저만 놓으면 뒷집으로 가던 승윤은 이제 아침이 밝아도 제집으로 가지 않고 온종일 분례 치마를 잡고 졸졸 따라다녔다. 고 서방은 없는 살림에도 쌀 한자루를 뒷집에 보내 안 받겠다는 걸 억지로 독에 부었다. 승윤이는 분례가 나물 캐러 산에 가도 따라가고 장날 장에도 함께 갔다. 장에서 만난 동네 사람들은 엽전 한줌을 분례 손에 쥐여주기도 하고 깨엿이랑 꿀떡을 사주기도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승윤이 열두살이 됐을 때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분례가 시집을 간다는 것이다. 승윤은 제 어머니가 죽었을 때만큼이나 눈앞이 깜깜했다. 찢어지게 가난한 분례 아버지가 분례를 부자 영감에게 논 세마지기를 받고 팔아넘긴 것이다. 술에 취해 들어온 분례 아버지는 마당에 퍼질러 앉아 부인과 함께 땅을 치고 울었다. 분례가 눈물을 닦고 마당으로 나가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고 어미의 눈물을 닦아줬다. 오히려 제 한몸 바쳐 식구들을 살린다고 생각하니 무덤덤해졌다.

30리나 떨어진 저잣거리에서 금은방을 하는 황 영감이 사인교를 보냈다. 분례가 가마를 타기 전에 앞집으로 가서 승윤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분례를 태운 가마가 앞서가고 분례 부모가 고개를 떨군 채 뒤따랐다. 까치고개를 넘고 내를 건너 저잣거리에 닿아 고래대궐 같은 서른여섯칸 황 영감댁에 다다랐다. 안마당에서 찬물 한그릇 떠놓고 하객도 없이 조촐한 혼례식을 치르고 분례는 안방으로 들어갔다. 분례 부모는 황 영감을 따라 요릿집에 가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황 영감이 붙잡아서 사랑방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집으로 돌아갈 땐 분례 어미는 제 딸이 어제 타고 왔던 사인교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사이 분례네 앞집이 발칵 뒤집혔다. 이틀째 승윤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며칠 후 분례가 장터에 나왔다가 깜짝 놀랐다. 승윤이 엿장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례는 승윤이 등줄기를 때리며 “야 이놈아. 네 아버지가 너를 찾느라 얼마나 애를 태우는지 알기나 하냐” 하고 야단을 쳤다. 그 말에 우는 승윤을 데리고 집으로 갔다.

분례가 황 영감에게 차분히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황 영감이 고개를 끄덕이며 승윤이 머리를 쓰다듬고 즉시 엿판과 엿을 엿 공장에 돌려줬다. 황 영감은 그날 밤 승윤이를 행랑방에 재웠다.

고 서방이 찾아왔을 때 승윤은 금은방에서 세공 기술을 배우겠다며 한사코 집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떼를 썼다. 황 영감은 웃으며 “분례도 승윤이가 옆에 있으니 든든해하네” 하며 승윤이 편을 들자 고 서방이 마음 놓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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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섯살 황 영감은 착한 사람이다. 자식이 없어 장가를 두번이나 갔지만 허사, 분례가 세번째다. 이제 갓 스물다섯살이 된 분례를 딸처럼 귀여워했다. 황 영감은 한평생 금과 은으로 반지·팔찌·목걸이를 만들어 팔았다. 후계자를 키우려고 몇번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사촌 조카도 둘째 부인 처남도 세공 기술은 염불이요, 도둑질이 잿밥이었다. 승윤은 달랐다. 똑똑하고 정직했다. 장부도 한닢 어긋남 없이 완벽하게 정리해서 황 영감의 결재를 받았다. 지난해 초가을 헛구역질을 하던 분례가 올봄에 아들을 낳았다. 황 영감이 환하게 웃었다. 금은 세공은 승윤에게 맡기고 황 영감은 늦게 본 아들만 안고 살았다. 저잣거리 이웃 사람들이 수군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승윤은 어릴 적 엄마가 죽고 뒷집 처녀 분례의 젖꼭지를 물고 자던 때를 잊은 적이 없었고 분례도 마찬가지였다. 열다섯살 승윤이가 아기를 안으면 따뜻했다.

 

 

 

 

참 풍경 같은 좋은 사람 

 

우리는 참 좋은 풍경 같은 사람이다.

한 처음처럼 나에게, 너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기쁨이 되는

아름다운 배경이 되는 사람이다.

 

어떤 날은 빗방울 내리는 풍경으로

회색빛 도시의 창을 두드리며

닦아주는 사람이 되고

 

또 어떤 날은 눈부신 햇살로 다가가

환한 얼굴의 미소를 안아주는 

풍경으로 남는 사람이다.

 

우리는 참 좋은 사랑을 닮은 사람이다.

오고 가는 길 위에서 나를 만난 듯 너를 만나고

한 처음 사랑처럼 기쁨이 되는 사람

 

어떤 날은 목마른 한낮의 갈증을 채우는

시원한 냉수 한 잔 같은 사람이 되고

 

또 어떤 날은 뽀송뽀송한 겨울눈의 질투를

따스하게 감싸주는 

벙어리 장갑 같은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 속해 있지 않으나

세상 속에 사는 참 좋은 풍경으로

바람을 달래는 배경이 되는 사람이다.

 

길 위의 길에서

길 아래의 길에서

언제나 나를 만나듯 사랑을 만나고

수많은 사랑들이 아름다울 수 있도록 

기도를 드리는 우리는

참 좋은 풍경같은 사람이다.

 

- 좋은 글 중에서

 

디펜바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