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2월 23일 주일[(녹) 연중 제7주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2월 23일 주일[(녹) 연중 제7주일]/신부님 강론 4개
오늘 전례
입당송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대영광송>
본기도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천주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제1독서
▥ 사무엘기 상권의 말씀입니다.26,2.7-9.12-13.22-23
그 무렵 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거느리고
지프 광야에 있는 다윗을 찾아 그곳으로 내려갔다.
7 다윗은 아비사이를 데리고 밤을 타서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때 사울은 진지 안에서 머리맡 땅바닥에 창을 꽂아 놓고 잠들어 있었다.
아브네르와 그의 군사들도 사울을 둘러싸고 잠들어 있었다.
8 아비사이가 다윗에게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오늘 원수를 장군님 손에 넘기셨으니,
이 창으로 그를 단번에 땅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습니다.”
9 그러나 다윗이 아비사이를 타일렀다. “그분을 해쳐서는 안 된다.
누가 감히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고도 벌받지 않을 수 있겠느냐?”
12 다윗은 사울의 머리맡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다.
주님께서 그들 위에 깊은 잠을 쏟으시어 그들이 모두 잠들었기 때문에,
다윗을 본 사람도 알아채거나 잠을 깬 사람도 없었다.
13 다윗은 맞은쪽으로 건너가 상대와 거리를 멀리 두고
산꼭대기에 서서, 22 응답하였다.
“여기 임금님의 창이 있습니다. 젊은이 하나가 건너와 가져가게 하십시오.
23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
○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
○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
○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아버지가 자식을 가여워하듯, 주님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 가여워하시네. ◎
제2독서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15,45-49
형제 여러분, 45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인간 아담이 생명체가 되었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46 그러나 먼저 있었던 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이었습니다.
영적인 것은 그다음입니다.
47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48 흙으로 된 그 사람이 그러하면 흙으로 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에 속한 그분께서 그러하시면 하늘에 속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9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알렐루야.
복음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신경>
보편 지향 기도
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자비하신 주님, 세상과 어울려 살아가는 주님의 교회를 살펴 주시어, 주님의 온유와 자비를 전하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참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2.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통치자이신 주님, 정치인들에게 식별의 은총을 주시어, 살기 좋은 나라와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힘쓰며 가난하고 힘없는 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하소서.
3. 소외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의 샘이신 주님, 갖가지 편견으로 소외받는 이들을 도와주시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 주시고, 저희 모두 열린 마음과 사랑으로 그들을 끌어안게 하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된 행복을 주시는 주님, 저희 지역 사회의 모든 이에게 강복하시어, 서로 배려하고 다 함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며 정답게 살아갈 수 있게 하소서.
예물기도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죄 많은 인류를 가엾이 여기시어
동정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시어
저희를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와 대천사와 좌품 주품 천사와
하늘의 모든 군대와 함께
저희도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며 끝없이 노래하나이다.
영성체송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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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일
‘토핑 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자에 소비자가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올려놓는데 그렇게 올려놓는 재료를 ‘토핑’이라고 합니다. 상품에는 ‘포디즘(Fordism)’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포드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조립형 라인으로 생산했습니다. 조립형 라인으로 자동차의 생산이 증가했고, 소비자는 더 싼 값에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산 방식은 전 산업에 확대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맞춤형보다는 기성품에 만족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비자는 선택한 제품에 자기만의 ‘토핑’을 더하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아이스크림을 찾아내고, 옷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옷을 입으려 합니다. 이는 신발, 스마트 폰, 가방, 가구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AI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바르는 파운데이션에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부 색조와 어울리는 파운데이션을 AI가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전에는 색조가 3개였는데, 파운데이션의 색조가 30,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있는 물건의 기능도 잘 모르는 저와 같은 세대는 ‘토핑’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저도 토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5년입니다. 저는 당시 토론토에서 지냈습니다. 거리의 핫도그 가게에서 핫도그를 먹으면서 다양한 토핑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토핑을 골라서 핫도그에 넣어 먹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토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샤부샤부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5가지 정도의 국물이 있어서 입 맛에 맞는 국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찍어 먹을 양념장도 여러 가지 양념을 배합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묵, 조개, 계, 라면, 떡, 채소를 골고루 선택해서 국물에 넣어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기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취향에 따라서 고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토핑은 획일적인 삶에 다양성을 제공하며 활력을 줍니다. 토핑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토핑이 케이크의 크림처럼 돋보이려면 기본적으로 케이크의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빵이 맛이 없다면, 기본이 충실하지 않다면 토핑이 많아도 소비자는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토핑’이 있습니다. 여러 신심 단체가 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 헌화회, 제대회, 독서단, 해설단, 반주단, 복사단이 있습니다. 구역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학교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미사 후에 친교가 있습니다. 사목회를 중심으로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 사순 피정, 부활절, 세례식, 견진성사,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 유소년그룹 피정, 본당의 날, 성령 찬양의 밤, 걷기 대회, 자선 음악회, 대림 피정, 성탄절,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재정이 허락하면 더 많은 토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시니어 아카데미도 만들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미 교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토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은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집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체를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감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은 ‘토핑’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것들을 추구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 학력, 건강, 직장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토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밤을 새우고, 노력합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끌어 내리려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하늘의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것이 나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토핑으로 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일: 다해
복음: 루카 6,27-38: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향해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와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위대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영예로운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7주일: 다해
<자비>
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찾아 헤매는 사울 왕을 원수 갚을 기회가 생겼음에도 살려줍니다.
모든 결정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흙에서 나서 썩어 흙으로 돌아갈 첫 인간과 하늘에서 나서 하늘로 돌아갈 새로운 생명을 구별하여 그들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1코린 15,49)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주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심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곧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내어줄 수가 있으며, 또한 받은 그 자비를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백성을 가리켜 “자비의 그릇”(로마 9,23)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마태 5,7)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2015년에 제2차 바티간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모토를 “아버지처럼 자비로워라”(misericordes sicut Pater)로 정하시고, 칙서인 <자비의 얼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1항)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시며, 또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본질이며 활동이심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6항)
또한, 교종께서도 이 칙서에서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요,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으로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커다란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소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좀도 적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로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자비를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마칩니다.
"저는 당신의 살아있는 모상이 되기 위해 온전히 당신의 자비로 변하고 싶습니다.
주님,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인 무한하신 자비가 제 마음과 영혼을 통해 제 이웃들에게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눈이 자비롭게 바라보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겉모습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이웃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제 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의 어려움을 듣게 하시고,이웃의 고통과 한탄에 제 귀가 무뎌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험담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손이 자비로워져서 선행을 많이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들에게 좋은 일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제가 떠맡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 두 발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지치거나 피로해 하지 않고 항상 달려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의 진정한 휴식은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해 주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제 마음의 문을 닫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제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도 신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 자신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심 안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주님, 당신이 자비가 제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당신은 전능하시니 저를 당신으로 변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2.토요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1베드5,1-4 마태16,13-19
지도자의 의무와 권위
“리더십의 모범; 예수님과 베드로”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네.”(시편23,1-3ㄱ)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베드로 사도좌는 영원히 빛나는 보편적이자
가시적 교회 일치 중심의 상징이자 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시고 교회를 이끄는 특별한 권위와 권한을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로마시대 2월22일 오늘은 가족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며 죽은 이를 추모하는 가족행사를 거행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로 이 관습을 받아들여 4세기부터 베드로 사도 무덤을 참배하고 추모했으며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여기서 기원됩니다.
사도좌는 전 세계 그리스도교에 대한 법률적, 사목적 최고 권위를 지닌 교황의 직위를 뜻합니다.
이 용어는 7세기 이후부터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의 사도직이 계승되는 로마교회의 권위,
교황을 뜻하게 됩니다.
이런 권위는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그리스도로부터 사도들 가운데 첫째인 베드로 사도에게 수여됐으며,
그 후계자인 교황에게 계승된다는 면에서 사도좌의 본질적 특징은 사도적 계승과 수위권으로 요약됩니다.
그러니 교황은 로마교회의 주교일뿐 아니라 사도들의 후계자인 모든 주교들의 머리이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이 세상 보편교회의 목자가 됩니다.
보편교회에 대한 최고의 권위뿐만 아니라 각 개별교회에 대해서도 직권의 수위권을 지니며
자신의 임무 수행을 통해 모든 목자들과 친교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의 리더십입니다.
현재의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위와 리더십은 얼마나 탁월하고 모범적인지요!
아니 역대의 교황들이 대다수 성인들처럼 생각됩니다.
교황뿐만 아니라 작고 크고 작은 공동체에 상관없이 공동체 지도자의 권위와 리더십은
참으로 공동체 형성에 결정적입니다. 작금의 탄핵사태를 겪고 있는 우리나라의 혼란한 현실만 봐도
통감하는 사실입니다.
한 사람 지도자의 리더십에 따라 공동체의 흥망성쇠가 좌우됩니다.
조선시대 500년 최고의 지도자로 꼽히는 성군이라 칭하는 세종과 정조의 역사적 사례만 봐도,
그리고 가까이는 고 김대중 토마스 모어 대통령을 봐도 지도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정말 하느님의 선물인 좋은 지도자는 공동체의 복입니다.
오늘 우리 가톨릭교회는 성 베드로를 그대로 닮은 참 훌륭한 지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새삼 베드로 사도의 권위 역시 하느님의 은총으로 역대 교황들을 통해 계승되고 있음을 봅니다.
좋은 리더십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보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리더십의 모범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리더십을 그대로 보고 배웠을 베드로입니다.
베드로 사도뿐 아니라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은 물론 모두가 평생 보고 배워야 할 예수님의 섬김의 삶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물음을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은 누구인가? 평생 물어야 할 것이고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그 삶을 고스란히 보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좋은 참고가 됩니다.
“공부란 세월과 함께 쌓이는 주름과 같으니, 배웠다면 몸에 새겨 일상에 드러내야 한다.”<다산>
“시 삼백편을 외워더라도,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일을 잘 해내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배웠다고 하더라도 무슨 소용이 있는가?”<논어>
언행일치로 표현되어야 하는 지도자의 공부임을 깨닫습니다.
맡은 바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언행일치의 삶에서 저절로 권위있는 삶이요 리더십의 발휘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대답이 수제자답습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정체를 직시하고 있었던 베드로였음을 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정답의 신원고백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격찬과 더불어
베드로에게 권위와 권한을 선물하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전적 신뢰의 축복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줄줄이 이어지는 축복과 이에 따라 주어지는 의무와 책임이 엄중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베드로라는 참나의 신원을 발견한 시몬 바르요나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믿음의 반석이 되기를 바라는 이들 모두가 또 하나의 베드로입니다.
이런 사도 베드로를 필두로 믿음의 반석 같은 이들을 통해 영원한 현재진행형으로 지어지는 교회입니다.
사상누각의 공동체가 아니라 반석같은 믿음위에 지어지는 교회공동체요 각자 몸담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공동체 삶의 절정에 있는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하지만,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이라 믿어도 참 유익하겠습니다.
교회공동체는 물론이요 믿는 모든이들의 크고 작은 공동체 책임자는 물론 공동체의 성원들도 필히 배워
실행해야할 참목자의 영성입니다.
1.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2.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3.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4.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마지막 권고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위에서의 지배가 아닌 섬김으로서 양떼의 중심이,
모범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위에서 지배하는 수직적 피라미드 모델의 교만한 수직적 리더십이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섬김의 모범이 됨으로 겸손한 수평적 중심의 리더십을 발휘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비단 교회 공동체뿐 아니라 지상에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물론 공동체 형제자매들
모두가 경청해야 할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지도자의 삶의 모범을, 겸손하고 충실한 섬김의 삶을 고스란히 보고 배우는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어지는 으뜸 목자 예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주님 주시는 최고의 선물이, 우리에게 영원한 위로와 희망이 되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착한목자 섬김의 영성을 살게 하시며
주님 친히 앞당겨 보이지 않는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씌워 주십니다.
“제 한평생 모든 날에,
은총과 자애만이 따르리니,
저는 오래오래, 주님 집에 사오리다.”(시편23,6). 아멘.
2/23(일) 연중 제7주일, 되새김 구절
1.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것이 나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토핑으로 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조재형 신부)
2.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예수님의 정체를 직시하고 있었던 베드로였음을 봅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자신에 대한 정답의 신원고백에 감동하신 예수님의 격찬과 더불어
베드로에게 권위와 권한을 선물하십니다.
베드로에 대한 전적 신뢰의 축복입니다.(이수철 신부)
2/23(일) 연중 제7주일, 오늘의 기도
복음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3일(일) 7시20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