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24일 월요일[(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5. 2. 24. 05:19

[매묵]2025년 2월 24일 월요일[(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3(12),6 참조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다.>
▥ 집회서의 시작입니다.1,1-10
1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2 누가 바다의 모래와 빗방울과 영원의 날들을 셀 수 있으랴?
3 누가 하늘의 높이와 땅의 넓이를, 심연과 지혜를 헤아릴 수 있으랴?
4 지혜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창조되었고
명철한 지각도 영원으로부터 창조되었다.
5 지혜의 근원은 하늘에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이며 지혜의 길은 영원한 계명이다.
6 지혜의 뿌리가 누구에게 계시되었으며 지혜의 놀라운 업적을 누가 알았느냐?
7 지혜의 슬기가 누구에게 나타났으며 지혜의 풍부한 경험을 누가 이해하였느냐?
8 지극히 경외해야 할 지혜로운 이 한 분 계시니 당신의 옥좌에 앉으신 분이시다.
9 주님께서는 지혜를 만드시고 알아보며 헤아리실 뿐 아니라
그것을 당신의 모든 일에,
10 모든 피조물에게 후한 마음으로 쏟아부으셨으며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선물로 주셨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93(92),1ㄱㄴ.1ㄷ-2.5(◎ 1ㄱ)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 주님은 임금님, 위엄을 입으셨네. 주님이 차려입고 권능의 띠를 두르셨네. ◎
○ 누리는 정녕 굳게 세워져 흔들리지 않네. 예로부터 주님 어좌는 굳게 세워지고, 영원으로부터 주님은 계시네. ◎
○ 당신 법은 실로 참되며,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서리나이다. 주님, 길이길이 그러하리이다. ◎

복음 환호송

2티모 1,10 참조
◎ 알렐루야.
○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 알렐루야.

복음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14-29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산에서 내려와
14 다른 제자들에게 가서 보니,
그 제자들이 군중에게 둘러싸여 율법 학자들과 논쟁하고 있었다.
15 마침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보고는 몹시 놀라며 달려와 인사하였다.
1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저들과 무슨 논쟁을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7 군중 가운데 한 사람이 대답하였다.
“스승님, 벙어리 영이 들린 제 아들을 스승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18 어디에서건 그 영이 아이를 사로잡기만 하면 거꾸러뜨립니다.
그러면 아이는 거품을 흘리고 이를 갈며 몸이 뻣뻣해집니다.
그래서 스승님의 제자들에게 저 영을 쫓아내 달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쫓아내지 못하였습니다.”
19 그러자 예수님께서,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내가 언제까지 너희 곁에 있어야 하느냐?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 주어야 한다는 말이냐?
아이를 내게 데려오너라.” 하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20 그래서 사람들이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그 영은 예수님을 보자 곧바로 아이를 뒤흔들어 댔다.
아이는 땅에 쓰러져 거품을 흘리며 뒹굴었다.
21 예수님께서 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렇게 된 지 얼마나 되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대답하였다. “어릴 적부터입니다.
22 저 영이 자주 아이를 죽이려고 불 속으로도, 물속으로도 내던졌습니다.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23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실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이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하고 말씀하시자,
24 아이 아버지가 곧바로,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25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떼를 지어 달려드는 것을 보시고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셨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26 그러자 그 영이 소리를 지르며 아이를 마구 뒤흔들어 놓고 나가니,
아이는 죽은 것처럼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아이가 죽었구나.” 하였다.
27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아이가 일어났다.
28 그 뒤에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에 제자들이 그분께 따로,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9,2-3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좋은 글은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오늘은 제가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정채봉 선생님은 인생에 있어서 사람들 만남의 종류를 5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생선과 같은 만남, 꽃송이와 같은 만남, 건전지와 같은 만남, 지우개와 같은 만남,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 있답니다. 가장 잘못된 만남은 생선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오니까 말입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피어있을 때는 환호하다가 시들면 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비참한 만남은 건전지와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고 힘이 다 닳았을 때는 던져버리니까 말입니다.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금방의 만남이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이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만남은 손수건과 같은 만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주니까 말입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까?

 

강석준 신부님은 사랑의 종류를 3가지로 들고 있습니다. 진흙과 같은 사랑, 물과 같은 사랑, 공기와 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겁니다. 진흙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지만 이내 굳어 버려서 나의 에 맞추려고 한다고 합니다. 서로가 좋아서 사랑했지만, 이런 사랑을 추구하면 답답해지고, 한쪽이 숨이 막히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가부장적인 배우자는 이런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은 나의 뜻대로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과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 이내 굳지는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의 몸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물속에 오래 있으면 손과 발이 부풀어 오르듯이, 결국은 상대방을 변화시키려는 사랑입니다. 공기와 같은 사랑은 상대방을 포용하면서도 상대방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에게 활력을 준다고 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금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하는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사랑은 영광스러운 지혜이며 그분께서는 당신을 보여 주실 이들에게 지혜를 베푸시어 당신을 알아보게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지혜는 무엇일까요?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의 능력일까요? 과거의 일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추론의 능력일까요? 아직 풀지 못했던 수학의 문제를 풀어내는 지능의 능력일까요? 솔로몬처럼 옳고 그른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지혜의 능력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지혜를 말씀하십니다. 믿음과 기도가 참된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써,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관하여 지시를 받고 경건한 마음으로 방주를 마련하여 자기 집안을 구하였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세상을 단죄하고, 믿음에 따라 받는 의로움을 상속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늘 믿음을 강조하셨습니다. 믿음은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지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아무도 다른 이에게 악을 악으로 갚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서로에게 좋고 또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늘 추구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기도입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해지기를 청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아는 것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믿으신 것입니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복음마르 9,14-29

 

남은 인생 여정, 좀 더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출신 대학교 이름만 들어도 뒤돌아보게 되는 명문대 출신에다가, 그 어렵다는 통과 의례를 거쳐,

권력의 최상층 부까지 치고 올라간 사람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은

인생무상을 실감케 합니다.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들, 그렇게 많이 배운 사람들이 어찌 그리 어리석은 판단과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체 그 원인이 무엇일까?

거듭 고민을 해봅니다.

 

한 인생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적인 양성뿐만 아니라 인간적, 영적, 상식적인 교육도

골고루 받았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지적인 측면에만 투자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혜가 결여된 지식의 위험성을 오늘 우리는 목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저희 살레시오회에서는 사목자를 양성할 때 4가지 측면의 고른 양성을 강조합니다.

한 살레시오 회원이 인간적, 영적, 지적, 사목적 역량을 골고루 갖추어 균형있는 수도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무엇보다도 성숙한 식별과 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로움을 갖추기를 강조합니다.

 

오늘 우리가 첫째 독서로 봉독한 집회서에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어리석음의 반의어는 지혜로움입니다.

학식을 갖춰 다방면에 걸쳐 유식한 것, 식별력이나 판단력이 출중한 사람도 지혜롭다고 하지만,

진정한 지혜는 좀 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갑니다.

 

인생에 있어서 보다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무엇이 영원불변한 것이고,

무엇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인지를 잘 파악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월요일

 

<기도의 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벙어리 영이 든 아이를 치유하시는 장면입니다.

 

사실 이 장면은 제자들이 망신당하는 장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제자들이 스승을 망신시키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벙어리 영을 쫓아내지 못함으로써 스승을 욕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스승을 망신시키는 일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아, 믿음이 없는 세대야! 
~ 내가 언제까지 너희를 참아주어야 한단 말이냐?”

(마르 9,19)

이는 우리가 ‘참 믿음’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시고 참아주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로 머물 수 있음은 그분께서 참아주고 기다려주시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계시고, 우리를 믿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의 그 믿음과 그 희망에 의탁하여, 벙어리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간청해야 할 일입니다.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마르 9,22)

여기서 “하실 수 있으면”이라는 표현은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에, 자신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뜻’에 의탁해서 도움을 청하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이의 아버지에게 믿음을 북돋우십니다. 

곧 ‘믿음’을 주십니다. 

 

“믿는 이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

(마르 9,23)

 

그러자 아이의 아버지는 이렇게 간청합니다.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마르 9,24).

그는 ‘믿음’과 동시에 ‘믿음 없음’을 고백하면서 겸손으로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가 믿고는 있지만 ‘진정한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겸손하게 믿음을 청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믿지 않는 것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기에, ‘기도할 때 우리는 이미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기도를 통하여 믿음이 옵니다.’

‘믿음’(응답)은 ‘들음’(계시)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하시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자신의 신념을 믿고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영을 꾸짖으며 말씀하십니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

(마르 9,25)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누구의 힘을 빌린 것이 아니라, 당신 말씀의 권능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말씀의 권능’을 깨우쳐주심과 동시에, 말씀의 권능을 지니신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저희는 그 영을 쫓아내지 못하였습니까?”(마르 9,28) 하고 묻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친 것은 믿음에서 나오는 ‘기도의 힘’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이 없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곧 믿음으로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다른 이들에게도 망신당하고 스승이신 예수님을 욕보이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아이의 아버지처럼,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에 의탁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3.연중 제7주일

                                                                       1사무26,2.7=9.12-13.22-23 1코린15,45-49 루카6,27-38

 

                                               자비하신 하느님 닮기

                              “언제나, 사랑으로 스스로 존엄을 지킵시다”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시편103,8ㄱ;103,1)

 

가톨릭평화신문, 가톨릭신문등 교회의 양대신문 1면 기사가 동일했습니다.

“이성효 주교가 마산교구에 선물한 세가지 보물”이란 제하에 다음과 같은 강론 내용이었습니다.

 

“이곳에 오면서 마산교구 발전을 위한 세가지 보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것은 감사의 보화, 겸손의 보화,

기도의 보화다.

이 보화는 제것이 아닌 교구의 것으로, 사제와 수도자, 평신도 모두 어려움이 있을 때 꺼내 볼 수 있다.

이 보화는 퍼내면 퍼낼수록 더 샘솟는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격려의 은총을 주시기를 성모님께 전구하자.”

 

멋지고 아름다운 강론의 요지였습니다.

사랑의 감사, 사랑의 겸손, 사랑의 기도이니 결국은 사랑의 보물을 가지고 왔다는 말씀입니다.

참 신기하고 은혜로운 것이 퍼내면 퍼낼수록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라는 것이요,

이런면에서는 누구나 부자입니다. 또 양대신문 한면을 차지하고 있는 박승찬 엘리야 교수의 기사였습니다.

 

“종교의 본래 역할, 가톨릭 정신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신학용어로는 케노시스 즉 자기비움이죠,

교회가 자기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순간 가치를 잃어요.

육화, 자기를 비워 우리에게 다가와 주신 하느님,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처럼

교회는 스스로 비우고 녹아들어 사는 역할을 해야 해요.-

 

또 하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인격개념입니다.

“인격은 교환불가능하다. 아무리 돈많은 부자도 타인의 인격을 살 수 없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케노시스는 바로 자발적 자기비움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케노시스입니다. 살아 있는 사랑의 보화가 바로 인격체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비로소 인격체를 지닌 사람이니, 사랑-삶-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로 드러남을 봅니다.

 

얼마전 써놓고 자주 되뇌는, 정주의 사랑을 노래한 “당신은” 이란 좌우명 고백시가 생각납니다.

한 번 인용했지만 하느님 사랑이 되고 싶은 소망에 다시 나눕니다.

 

“산이

 산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은 산이예요

 

 강이

 강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맑게 흐르는 강이예요

 

 바다가

 바다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깊고 넓은 바다예요

 

 하늘이

 하늘에 가다니요

 그냥 있으세요

 당신은

 늘 높고 푸른 하늘이예요”<2025.2.12.>

 

하느님 사랑이, 자비가 되고 싶은 욕망의 청정욕(淸淨慾)은 언제나 좋습니다.

하느님 자비가, 사랑이 됩시다. 최고의 행복입니다. 사랑이 답이요 사랑이 길입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평생공부가 사랑공부입니다.

인생은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사랑의 학교요 아무리 공부해도 사랑에는 영원한 초보자일뿐이요

이런 자각이 겸손한 마음으로 사랑의 전사가 되어 분투의 노력을 다하게 합니다.

 

사랑은 정의롭고 당당합니다. 스스로 존엄을 지킵니다.

비겁하거나 비열하거나 비루하거나 야비하지 않습니다.

바로 제1독서의 다윗이 그 빛나는 사랑의 모범이요 감동이고 참 좋은 교훈이 됩니다.

유혹에 빠져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포기함으로 자신의 존엄을 지켰으니

그대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모범입니다.

다윗과 사울이 주고 받은 대화가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려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제가 오늘 임금님의 목숨을 귀중하게 보아 드렸으니, 주님께서도 제 목숨을 귀중하게 보아 주시어

온갖 재앙에서 건져 주시길 바랍니다.”

“내 아들 다윗아, 복을 받아라. 너는 하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해 낼 것이다.”

 

다윗의 인품이 참 훌륭합니다.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는 사랑이, 복을 빌어주는 사울의 사랑이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바로 이런 고귀한 보화같은 사랑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바,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합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예수님의 모습을 지닐 때 비로소

참사람임을 깨닫습니다.

 

“첫 인간은 땅에서 나와 흙으로 된 사람입니다. 둘째 인간은 하늘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예수님의 사랑을, 자비를 닮을수록 우리도 하늘에 속한 예수님 그분처럼 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계신 예수님이요 그대로 예수님 사랑의 체험담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대로 예수님 자신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바로 이런 사랑공부에 항구하는 것입니다.

결코 값싼 사랑은 없습니다.

살아 있는 그날까지 부단한 사랑의 선택, 사랑의 훈련, 사랑의 습관을 요구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사랑 강론이 참 기막히게 좋습니다.

어느 하나 생략할 수 없는 시공을 초월한 명강론입니다.

이런 사랑 실천이 서로의 존엄성을 지켜줍니다. 상호존중과 배려의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서로 존엄한 품위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무지와 허무의 악에 대한 처방도 이런 사랑뿐입니다.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됩니다.

자기 존엄성이 파괴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손실이 막대합니다.

이런 사랑이야 말로 보복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 버립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남을 심판하지 않을 때, 악마도 더 이상 유혹하지 못하고 포기하고 떠납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악마들에게 최고의 방어이자 공격은 이런 밑빠진 독에 물붓듯 하는

일방적 무사한 사랑, 아가페적 사랑뿐입니다.

결코 유유상종(類類相從)의 이해관계의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이 악(惡)을 무장해제시켜 무력화(無力化)시키고 서로의 존엄을 지켜주며

참으로 서로 부요하고 자유롭고 행복하게 합니다.

아무리 퍼내 주어도 결코 마르지 않는 하느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샘솟는 사랑이요,

바로 이 사랑이 영적승리로 이끄는 천하무적(天下無敵), 인자무적(仁者無敵)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명강론 다음 절정 부분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 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부여하신 평생과제요 이런 사랑의 영원한 롤모델이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기대수준은 이렇듯 높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망애(信望愛) 수준 못지 않게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신망애 수준도 높습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우리도 “하느님 나의 자랑이듯이, 나 역시 하느님의 자랑이어라” 고백했으면 좋겠습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사랑 은총이 우리 모두 하닮의 여정,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시편103,2). 아멘,


2/24(월) [(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몸도 마음도 온전하게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주님과 온전히 함께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때 하느님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믿으신 것입니다.”(조재형 신부)

 

2.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 하느님께 삶의 최 우선권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이라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재물을 하느님 위에 올려놓는 것보다 더 큰 실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여유 있는 재물을 주인이신 주님께로 돌려드리는 사람, 가난한 이웃들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게 창조된 ‘인격체’는 무엇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 케노시스는 바로 자발적 자기비움의 사랑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 해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주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이수철 신부)

 

2/24(월) [(녹) 연중 제7주간 월요일], 오늘의 복음 

 

복음 <주님, 저는 믿습니다. 믿음이 없는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

(마르 9,29)

주님!

제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기보다 당신 뜻에 합당하게 하소서.

제 기도가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에 달려 있게 하소서.

당신이 제게 응답하기보다 제가 당신 뜻에 응답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으로 기도하오니 당신 안에서 자유로워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4일(월) 5시2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