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2월 26일 수요일[(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5. 2. 26. 06:26

[매묵]2025년 2월 26일 수요일[(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13(12),6 참조
주님,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본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새기고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4,11-19
11 지혜는 자신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12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13 지혜를 붙드는 이는 영광을 상속받으리니
가는 곳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리라.
14 지혜를 받드는 이들은 거룩하신 분을 섬기고
주님께서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을 사랑하신다.
15 지혜에 순종하는 이는 민족들을 다스리고
지혜에 귀 기울이는 이는 안전하게 살리라.
16 그가 지혜를 신뢰하면 지혜를 상속받고 그의 후손들도 지혜를 얻으리라.
17 지혜는 처음에 그와 더불어 가시밭길을 걷고
그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몰고 오리라.
지혜는 그를 신뢰할 때까지 자신의 규율로 그를 단련시키고
자신의 바른 규범으로 그를 시험하리라.
18 그러고 나서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19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시편 119(118),165.168.171.172.174.175(◎ 165ㄱ 참조)
◎ 주님,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가 넘치나이다.
○ 당신 가르침을 사랑하는 이에게 평화 넘치고, 그들 앞에는 무엇 하나 거칠 것이 없나이다. ◎
○ 제가 가는 모든 길 당신 앞에 있기에, 당신의 규정과 법을 저는 지키나이다. ◎
○ 저에게 당신 법령을 가르치셨기에, 제 입술이 찬양을 쏟아 내나이다. ◎
○ 당신 계명이 모두 의롭기에, 제 혀가 당신 말씀을 노래하나이다. ◎
○ 주님, 당신 구원을 애타게 그리나이다. 당신 가르침이 저의 즐거움이옵니다. ◎
○ 이 목숨 살려 당신을 찬양하게 하소서. 당신 법규로 저를 도와주소서. ◎

복음 환호송

요한 14,6 참조
◎ 알렐루야.
○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알렐루야.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이 신비로운 제사를 정성껏 거행하며 간절히 청하오니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는 이 제물이
저희 구원에 도움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

영성체송

시편 9,2-3
주님의 기적들을 낱낱이 전하오리다. 지극히 높으신 분, 저는 당신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당신 이름 찬미하나이다.
<또는>
요한 11,27 참조
주님, 저는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나이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전능하신 하느님,
이 거룩한 제사에서 구원의 보증을 받았으니
저희가 실제로 그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우리는 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혼자 하는 말은 독백이고, 상대가 있는 말은 대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하고 나면 기분이 좋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화를 통해서 뭔가 문제를 해결하고, 배운 것 같은데, 다음에 또 만나고 싶지 않고, 기분이 나쁠 때가 있습니다. 우연히 대화에서 조심해야 할 6가지 태도를 들었습니다.  6가지를 자주 사용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어렵다고 합니다. 첫째는 판단입니다.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선입견을 품고 판단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때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태어날 리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은 들어보지도 않고, 예수님을 잘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도 피부색으로, 외모로, 직업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하곤 합니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다.’라고 말한다면 상대방과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둘째는 비난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저자는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율법 학자들의 비난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왔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저도 비난의 유혹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신부님들과 차를 나누어 타고 강화도로 연수 갈 때였습니다. 1호차에 탄 신부님들이 2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휴게소에서 2호차를 타게 되었는데 거기서도 1호차에 있는 신부님들의 허물을 이야기했습니다. 나중에 화장실 가기도 겁났습니다. 제가 없을 때 저의 허물을 이야기할 것 같았습니다. 누군가의 허물을 자주 입에 올린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비교입니다. 자녀에게 네 형을 보아라. 얼마나 잘 하니. 내 친구를 보아라. 힘든 가운데서도 공부를 얼마나 잘 하니.’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이는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한 형제, 자매입니다.

 

넷째는 강요입니다. 자녀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고, 부모님이 원하는 걸 요구하면 자녀에게 큰 상처를 주기 마련입니다. ‘우리 집안은 모두 법대를 갔으니, 너도 법대를 가야 한다.’라고 말하면 아이의 재능을 가로막게 됩니다. 부모의 강요 때문에 법을 공부하지만, 사법시험에 실패하면 부모도 크게 실망하게 됩니다. 강요는 당장은 효과가 있겠지만 창의력이 사라지면 경쟁력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섯째는 충고입니다. 자녀들에게나, 부하직원에게 나 때는이라는 말을 자주 한다면 대화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아직 미혼인 자녀에게 일찍 결혼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도 큰 부담이 됩니다. 저는 주민등록증이 나온 사람에게는 웬만하면 충고하지 않는 편입니다. 성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가 운전할 때도 충고는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부부싸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충고를 잘못하면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너나 잘하세요.’

 

여섯 번째는 합리와입니다.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고, 강요하고, 충고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렇게 말했겠니.’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화는 상대방과 소통하는 거라고 합니다. 2000년 전에 빌라도는 손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며 합리화하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대사제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2025년의 대한민국에서도 합리화를 하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비상계엄은 국회의원들이 의회 독재를 해서 경고 차원에서 했다고 합니다. 비상계엄은 국민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 했기에 계몽령이었다고 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합니다.

 

지혜는 자기의 아들들을 키워 주고 자신을 찾는 이들을 보살펴 준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을 사랑하고 이른 새벽부터 지혜를 찾는 이들은 기쁨에 넘치리라. 지혜는 곧 돌아와 그를 즐겁게 하고 자신의 비밀을 보여 주리라. 그가 탈선하면 지혜는 그를 버리고 그를 파멸의 손아귀에 넘기리라.”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복음마르 9,38-40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요즘 계속 봉독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3. 이영근 신부님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진정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입니다>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 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

(마르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

(마르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2.25.연중 제7주간 화요일                                                                     집회2,1-11 마르9,30-37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

 

전쟁터같은 세상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며 갈망하지만 참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전쟁입니다.

인류사는 전쟁사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싶습니다.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면 정말 영원히 없어져야 할 전쟁입니다.

읽고 있는 두권의 책, <십자군 전쟁에서 배우는 평화를 위한 지혜, 철학자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과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눈에 띈 ‘전쟁’이란 말마디에서 떠오른 생각입니다. 

 

이미 예전부터 수도생활은 영적전쟁이요 수도자는 주님의 전사란 말이 정의처럼 쓰였고

저 또한 무수히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전사, 사랑의 전사, 평화의 전사로서 영적전쟁을 수행하는 주님의 전사라고 말입니다.

 

이와 더불어 강조하고 싶은 것이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처럼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것이요,

이런 이가 역설적으로 가장 큰 사람이라하십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참 좋은 도움이 됩니다.

 

“살아온 세월을 맹신하면 축적한 내공이 편견이 된다. 일가견을 이룬 사람은 아이의 마음을 찾아야 한다.”<다산>

“어른이란 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은 사람이다.”<맹자>

 

일가를 이룬 대가의 품격은 아이다움입니다. 마냥 순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순수하고 유연하고 자유로움으로, 또 사랑의 지혜로 표현되는 아이같은 대가의 품격입니다.

전쟁터같은 세상에서 이런 품격의 어른이라면 평화의 사도로 손색이 없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런 어른은 그대로 예수님께 해당된다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 들이는 것이다.”’

 

어린이를 사랑하여 껴안으시는 예수님의 순수한 동심이 빛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결코 마냥 아이같은 순진함은 아니며 사랑의 지혜로 빛나는 순수함입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환대함이 예수님 당신을 환대하는 것이자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란

놀라운 진리가 계시됩니다.

 

여기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순진함이 아니라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약하고 무력한 가난한 이들이요,

믿을 것이라곤 오직 하느님뿐! 하느님께 의탁하여 살아가는 가난한 믿음의 사람들이 바로 아나뵘입니다.

이는 앞서의 말씀에 대한 답이 됩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바로 어린이가 상징하는바 그의 형제자매들중 가장 작은 이들, 즉 약하고 가난하며,

상처받기 쉽고 소리없는 이들이요, 이들을 따뜻한 환대로 맞이하는 자들이 진정 가장 위대한 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아나뵘의 영성’을,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사는 진짜 신자들이요,

이의 영원한 모범이 바로 우리 한가운데에 계시는 파스카의 예수님입니다.

 

바로 이런 결론에 이르는 발단이 된 것이 예수님의 2차 수난과 부활을 예고한 후 논쟁입니다.

철부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에도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

동상이몽 오합지졸의 제자공동체가 예수님께는 참 환멸스러웠을 것이며 내적 외로움과 고독도

참 컸을 것입니다. 

 

뒤늦게 잘못됐음을 깨달은 제자들은 예수님의 물음에 묵묵부답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깨우치려 예수님께서는 종과 섬김의 영성을, 어린이를 받아들임의 깊은 의미를 가르치십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았는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새로운 충격적 참신한 가르침이자

깨우침이 됐으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예수님처럼, ‘종과 섬김의 영성’을 또 동심의 어린이성을 회복하여 어린이를 맞아들이듯

힘없고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는 ‘환대의 영성’을 살 수 있을런지요.

오늘 집회서가 답을 줍니다.

역시 섬김의 영성을, 환대의 영성을 선택하여 훈련하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바로 영적전쟁 같은 삶의 시련 중에도 주님을 경외하며 다음 집회서의 가르침을 실천 훈련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생략하기 아까워 오늘 제1독서 집회서 전문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인용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 주는 금과옥조의 가르침입니다.

말그대로 영성훈련의 필수요목들입니다.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의 자비를 기다려라.

 빗나가지 마라, 넘어질까 두렵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그분을 믿어라. 너희 상급을 결코 잃지 않으리라.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아, 좋은 것들과 영원한 즐거움과 자비를 바라라.

 그분의 보상은 기쁨을 곁들인 영원한 선물이다.

 지난 세대를 살펴보아라. 

 누가 주님을 믿고서 부끄러운 일을 당한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을 경외하면서 지내다가 버림받은 적이 있느냐?

 누가 그분께 부르짖는데 소홀히 하신 적이 있느냐?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주신다.”

 

값싼 은총도, 값싼 영성도, 값싼 제자직도, 값싼 평화도 없습니다.

이런 부단한 영성훈련과 함께 가는 종과 섬김의 영성, 환대의 영성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주님께 대한 경외심을 회복해야 합니다.

부단히 주님께 대한 믿음, 희망, 사랑을 훈련해야 합니다.

끝까지 주님을 버팀목 삼아 참고 견디며 버텨내야 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분투의 노력을 다하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됩니다. 아멘.


 

2/26(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되새김 구절

 

1. 여섯 번째는 합리와입니다. 1판단하고, 2비난하고, 3비교하고, 4강요하고, 5충고하면서 미안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이렇게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잘하지! 그랬어. 네가 잘했으면 내가 이렇게 말했겠니.’ 대화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합니다. 대화는 상대방과 소통하는 거라고 합니다.(조재형 신부)

 

2.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얘야, 주님을 섬기러 나아갈 때, 너 자신을 시련에 대비하여라.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네가 마지막에 번창하리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이수철 신부)

 

2/26(수)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 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2월26일(수) 5시5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