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4월 11일 금요일[(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11일 금요일[(자) 사순 제5주간 금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제가 짓눌리나이다. 원수와 박해자들 손에서 구원하소서. 주님, 제가 당신을 불렀으니,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본기도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나약한 탓에 저지른 죄의 사슬에서 저희를 인자로이 풀어 주소서.
성부와 성령과 …….
<또는>
하느님,이 사순 시기에 교회가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본받아그리스도의 수난을 경건히 되새기게 하시니동정녀의 전구를 들으시어저희가 외아드님이 가신 길을 충실히 따라마침내 구원의 은총을 가득히 받게 하소서.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곤경 중에 주님을 불렀더니 내 목소리 들으셨네.
○ 저의 힘이신 주님,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주님은 저의 반석, 저의 산성, 저의 구원자시옵니다. ◎
○ 주님은 저의 하느님, 이 몸 숨는 저의 바위, 저의 방패, 제 구원의 뿔, 저의 성채시옵니다. 찬양하올 주님 불렀을 때, 저는 원수에게서 구원되었나이다. ◎
○ 죽음의 오랏줄이 나를 두르고, 멸망의 급류가 나를 삼키며, 저승의 오랏줄이 나를 휘감고, 죽음의 올가미가 나를 덮쳤네. ◎
○ 곤경 중에 나 주님 부르고, 하느님께 도움 청하였더니, 당신 성전에서 내 목소리 들으셨네. 부르짖는 내 소리 그분 귀에 다다랐네. ◎
복음 환호송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언제나 경건한 마음으로 제대에 나아가
이 영원한 제사에 참여하여 구원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우리가 죄에 죽고 의로움에 살게 하셨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네.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성체를 받아 모신 저희를 보호하시어
온갖 해로운 것에서 언제나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하느님의 이 종들을 은혜로이 지켜 주시어
모든 악에서 풀려나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신학교에서 신학을 배웠습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을 신학적으로 배우는 것이 교의 신학입니다. 교의 신학 중에 ‘구원론’이 있습니다. 구원론의 핵심은 현세에서의 축복과 은총도 있겠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구원론은 개인의 구원도 있겠지만, 공동체의 구원도 이야기합니다. 연못 속의 물고기는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연못 자체가 썩어간다면 물고기는 연못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구원의 대상은 영적인 것도 있고, 생태계에 관한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삶을 따른다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의 구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자연을 보호하고,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에서 벗어나 천국 가는 것"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단순히 내세에서 천국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고,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보살피느냐도 구원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영적 구원은 '죄에서 해방되는 길'입니다. 먼저, 우리가 잘 아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있습니다. 주인공 라스콜니코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강한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고, 돈 많은 노파를 살해합니다. 하지만 그 뒤로 그의 마음은 지옥이 되어 버립니다. 죄책감과 두려움 속에서 헤매다가 결국 그는 ‘소냐’라는 신앙 깊은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소냐는 성경을 읽어주며 이렇게 말합니다. "무릎을 꿇고, 회개하세요. 그러면 새로운 삶이 시작될 거예요." 라스콜니코프는 결국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감옥에서 긴 세월을 보내며 변화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느님께 등을 돌릴 때,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하지만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면 새로운 구원의 길이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시기 위함입니다. 라스콜니코프가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았듯이, 우리도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구원은 인간만을 위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온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다." (로마서 8:22)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는 많은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기후변화, 환경 파괴,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많은 생명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태적 구원의 문제를 다룬 문학 작품이 하나 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소로는 깊은 숲속에서 혼자 살며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실천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비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자연과 하나 되는 삶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 이 말이 우리 신앙과 어떻게 연결될까요? 우리는 때때로 필요 이상의 것을 소비하며, 편리함을 위해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황님께서 강조하신 것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청지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보살피고 가꾸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또 하나의 문학 작품을 떠올려 봅니다. 바로 『반지의 제왕』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주인공 프로도는 사우론의 절대 반지를 없애기 위해 위험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는 수많은 유혹과 고난을 겪으며 반지를 파괴하려 하지만, 결국 그를 지탱해 준 것은 친구들의 희생과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창조 세계를 보살필 때, 우리는 영적 구원과 생태적 구원을 함께 이루어 가는 길에 서게 됩니다. 우리도 라스콜니코프처럼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소로처럼 검소한 삶을 실천하고, 생태계를 보호하는 작은 실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하나, 음식 한 조각도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프로도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위한 희생을 실천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과의 조화, 이웃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곧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가 함께 가야 합니다.
영적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회개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함께 구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꾸고,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 나무에 달리시어, 우리가 죄에 죽고 의로움에 살게 하셨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병이 나았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하느님으로 자처하면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인가?
발레 ‘백조의 호수’는 주인공인 오딜리아(주로 오디트라는 이름으로 알려짐)라는 공주가
마법에 의해 백조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마법에 의해 백조의 모습으로 변하고,
낮에는 백조로, 밤에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적인 제약을 받습니다.
오딜리아는 아름답고 착한 성격을 가진 공주지만, 사악한 마법사 로트바르트에 의해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는 오딜리아와 그녀의 백조 친구들이 계속해서 백조의 모습으로 살도록 강요합니다.
하지만 오딜리아는 저주를 풀고 인간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녀는 마법을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진정한 사랑, 즉 프린스 시겔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시겔 왕자는 오딜리아를 사랑하고,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녀를 구하려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 사랑하지만, 로트바르트는 시겔 왕자가 오딜리아 대신 오딜리아의 마법에 걸린
형상인 자기 딸인 오디트를 사랑하게 만듭니다.
왕자는 그녀를 오딜리아라고 착각하여 모든 사람 앞에서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렇게 저주는 영원히 풀릴 수 없게 됩니다.
결국, 왕자는 자신이 마법사에게 속았음을 깨닫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오딜리아는 이렇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면 자신은 죽겠다고 말합니다.
왕자도 그러면 함께 죽자고 합니다. 그렇게 둘이 물에 빠져 죽습니다.
그 사랑으로 마법사는 힘을 잃고 죽게 됩니다.
그런데 둘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 하늘로 올라가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오딜리아는 마법에 걸려 자기 본성을 부정하고 낮추며 삽니다.
그러나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버리지 않았고, 그래서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시도했습니다. 사랑은 목숨을 내어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둘은 인간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음을 깨닫고 자신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오딜리아가 인간이 되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백조의 호수’는 복음 내용을 그대로 비유로 옮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구원도 오로지 우리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이뤄집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이 되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인간을 하느님이 되게 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이 먼저
하느님이 될 수 있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당신이 하느님 자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들의 이유는 이것입니다.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예수님은 사람이 하느님으로 자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바로 “신”이 된다는 뜻입니다.
유다인들이 하도 자신들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유다인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짜 하느님의 자녀는 하느님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성이 아니라 위격(Persona)입니다. 본성은 하나인데 바로 “신성”입니다.
하느님은 이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십니다. 위격으로는 셋이지만,
한 신성으로 하나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본성은 어떻게 나올까요? 본성은 자신이 그 본성임을 믿을 때 나옵니다.
인간은 인간이라고 믿을 때, 부모처럼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을 때 인간의 본성이 나옵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인간의 본성은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이
된다는 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하느님이 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 돌을 던지려던 유다인들과 같습니다. 그것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기도를 바치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돌을 맞더라도 하느님이 된다고 말해야 합니다.
무엇이 하느님께 죄를 짓는 것일까요?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신을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호랑이 새끼가 어미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자기 부모에게 “엄마, 나 개지?”라고 한다면 그것이 불효요 죄입니다.
우리는 진짜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미운 오리 새끼’의 고통도 자신이 백조임을 깨달을 때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본성은 양식을 통해 오는데, 양식은 부모의 살과 피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그냥 모기 본성에 머무릅니다.
자기 생존을 위해 아무 피나 빨아먹는 존재입니다.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그 부모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모기가 사람의 살과 피를 먹어봐야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그저 그렇게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도 될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가 신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왜 거부할까요? 죄에 머물고 싶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라는 원죄의 성향에 그대로 머물며
계속 돈을 좋아하고 쾌락을 좋아하고 교만하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하면 무엇이 행복인지 알게 됩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게 행복입니다. 그러려면 새로운 정체성이 필요한데,
그 정체성이 성체성사로 오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진짜 죄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에만 머물려 하지 말고 본성을 하느님께 참여시켜야 합니다.
세상에 하느님의 살과 피를 쓸모없게 만드는 것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한번 우리도 하느님이 된다고 생각해보고, 물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청해봅시다.
하느님으로 자처하지 않으면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느님으로 믿게 하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물 속으로 뛰어든 분이십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요한 10,31-42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전 봉헌 축제 때 솔로몬 주랑에서 벌어진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뒷부분입니다.
앞부분에서는 당신이 '메시아'이심을 증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며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리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8)
이는 ‘아버지의 일’과 ‘예수님의 일’이 같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일은 사랑을 완성해 가는 일, 곧 생명을 북돋우고 창조를 완성해 가는 일이요, 구원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믿게 되면, 곧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 일을 믿게 되면,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계심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앎과 깨달음의 능력이요 사랑의 힘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시고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는 능력입니다.’(요한 10,38 참조)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0,38)라는 말은 그냥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서, 아는 바를 받아들여 체험하여 알게 될 것(야다, יָדַע)이라는 말씀입니다.
곧 사랑의 앎입니다.
이는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재를 통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렇게 그분 안에 내재할 때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사랑이신 말씀을 받아 사랑을 완성해 가고, 생명이신 말씀을 받아 생명을 완성해 가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느님이 됩니다(신화, θεοσισ).
이는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요, 마귀의 말을 받아들이는 이는 마귀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구를 따르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누구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으니, 들은 말씀을 믿고 받아들여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 그분 말씀을 따름 안에서 그분을 만나야 할 일입니다.
그러면 진정 그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5.4.10.사순 제5주간 목요일
창세17,3-9 요한8,51-59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
“늘 새로운 시작”
잠시 옛 현자 <다산>의 재물 사용법을 나눕니다. 이런 초연한 무욕의 부자는 무난히 천국에 입장할 것입니다.
‘많은 현자들이 이렇게 통찰했다. “가장 오래 간직된 부는 어려운 누군가를 위해 내놓는 기부였다.”’
“재산을 숨겨두는 방법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부유한 신자들이 깊이 경청해야할 조언같습니다. 오늘 창세기 제1독서 생략된 부분의 느낌이 강렬하여 나눕니다.
‘아브람이 나이가 아흔아홉 살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나는 전능한 하느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살아가며 흠없는 이가 되어라.
나는 나와 너 사이에 계약을 세우고,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겠다.”
나이 아흔아홉 살의 아브람은 말그대로 ‘은퇴가 없는 영원한 현역이구나,
늘 새롭게 시작하는 삶이었구나!’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이 영원한 현역이 되어
늘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얼마전 써놓고 만족해 했던,
강론에도 인용했던 ‘꽃피는 청춘으로’ 라는 짧은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봄되면
늘
꽃피는
청춘으로
살고 싶어라
봄되면” <2025.4.5.>
봄뿐 아니라 온 인생을 늘 꽃피는 청춘으로 살았던 영원한 현역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늘 주님앞에서 흠없이 살았음이 분명합니다.
이어 아브라함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아브라함의 겸손과 경청, 순종의 기도 자세가 참 인상적이요 아브람의 인품을
그대로 반영합니다.
“나를 보아라. 너와 맺는 내 계약은 이것이다. 너는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너는 더 이상 아브람이라 불리지 않을 것이다. 이제 너의 이름은 아브라함이다.”
아마도 주님과 맺은 계약에 대해 늘 책임감을 지니고 하느님앞에서 늘 흠없는 삶을 살았을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의 영원한 모범입니다. 한결같이 믿음의 여정에 충실했던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믿음을 연상케 하는 오늘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놀랍게도 자신을 아브라함 전부터 계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지키는 이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이다...
나를 영광스럽게 하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나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날을 보리라고 즐거워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기뻐하였다.”
아드님 예수님이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이
영원한 삶의 첩경임을 깨닫습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며
비아냥 대는 유다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before Abrahm came to be, I AM).’”
영어로 하면 예수님의 신적 존재가 잘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I AM)이며,
바로 탈출기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이 ‘나는 있다’(I AM)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이런 하느님은 그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선물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의 확인이 ‘영원한 현역’으로 늘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일일일생, 내 인생 여정을 하루로, 또 일년사계, 내 인생 여정을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로 압축하면
어느 시점에 와 있겠는가?”
이런 확인을 통해 하루하루 날마다 거품이나 환상,
허영없이 본질적 깊이의 투명한 예닮의 여정 선물 인생을 살 수 있겠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아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4/11(금)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되새김 구절
1. .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삶을 벗어나, 서로 사랑하고, 나누고, 창조 세계를 보살필 때, 우리는 영적 구원과 생태적 구원을 함께 이루어 가는 길에 서게 됩니다. 우리도 라스콜니코프처럼 자신의 죄를 성찰하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미사 안에서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소로처럼 검소한 삶을 실천하고, 생태계를 보호하는 작은 실천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물건 하나, 음식 한 조각도 하느님의 창조 질서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합니다. 프로도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이웃과 세상을 위한 희생을 실천해야 합니다. 구원은 '하느님과의 조화, 이웃과의 조화, 자연과의 조화'입니다. 구원은 단순히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곧 구원의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는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그리고 피조물과의 관계가 함께 가야 합니다.(조재형 신부)
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인간이 하느님도 될 수 있다고 믿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가 신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전삼용 신부)
3. 예수님께서 증언하신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요한 10,36)라는 말씀을 비추어줍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나는 있다’(I AM)이며,
바로 탈출기에서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이 ‘나는 있다’(I AM)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나는 너희와 함께 있다(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다(I AM for you)”,
바로 이런 하느님은 그대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 예수님입니다.
바로 우리가 믿어야 할 주님의 말씀이요, 이런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 선물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의 확인이 ‘영원한 현역’으로 늘 오늘 지금 여기서 새로운 시작의 삶을 살게 합니다.
(이수철 신부)
4/11(금)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요한 10,34)
주님!
당신의 말씀을 받은 이가 되게 하소서.
받아들인 바를 따라 살며, 당신 안에 들게 하소서.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나고, 당신 사랑이 실현되게 하소서.
말씀을 받았으니, 말씀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11일(금) 5시50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