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묵상

[매묵]2025년 4월 12일 토요일[(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마르티나 2025. 4. 12. 07:03

[매묵]2025년 4월 12일 토요일[(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시편 22(21),20.7 참조
주님,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저를 도우소서. 저는 인간도 아닌 구더기, 사람들의 우셋거리, 백성의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본기도

하느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난 모든 이가
뽑힌 겨레, 임금의 사제단이 되게 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서 명하신 것을 바라고 이루어
영원한 생명으로 부름받은 백성이
같은 마음으로 믿고 서로 사랑을 실천하여 하나 되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
▥ 에제키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37,21ㄴ-28
21 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나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나가 사는 민족들 사이에서 그들을 데려오고,
그들을 사방에서 모아다가, 그들의 땅으로 데려가겠다.
22 그들을 그 땅에서, 이스라엘의 산악 지방에서 한 민족으로 만들고,
한 임금이 그들 모두의 임금이 되게 하겠다.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23 그리고 그들이 다시는 자기들의 우상들과 혐오스러운 것들과 온갖 죄악으로
자신을 부정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배신에서 내가 그들을 구원하여 정결하게 해 주고 나면,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24 나의 종 다윗이 그들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그들 모두를 위한 유일한 목자가 될 것이다.
그들은 내 법규들을 따르고 내 규정들을 준수하여 지키면서,
25 내가 나의 종 야곱에게 준 땅,
너희 조상들이 살던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들만이 아니라 자자손손이 영원히 그곳에서 살며,
나의 종 다윗이 영원히 그들의 제후가 될 것이다.
26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복을 내리고 그들을 불어나게 하며,
나의 성전을 영원히 그들 가운데에 두겠다.
27 이렇게 나의 거처가 그들 사이에 있으면서,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
28 나의 성전이 그들 한가운데에 영원히 있게 되면,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는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예레 31,10.11-12ㄱㄴ.13(◎ 10ㄹ 참조)
◎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주님은 우리를 지켜 주시리라.
○ 민족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먼 바닷가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하여라. “이스라엘을 흩으신 분이 그들을 다시 모으시고, 목자가 양 떼를 돌보듯 지켜 주시리라.” ◎
○ 정녕 주님은 야곱을 구하셨네. 강한 자의 손에서 구원하셨네.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산에 올라와, 주님의 선물을 받고 웃으리라. ◎
○ 그때에는 처녀가 춤추며 기뻐하고, 젊은이도 노인도 함께 즐기리라.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그들의 근심을 거두고 즐거움을 주리라. ◎

복음 환호송

에제 18,31 참조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주님이 말씀하신다. 너희가 지은 모든 죄악을 떨쳐 버리고 새 마음과 새 영을 갖추어라.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45-56
그때에 45 마리아에게 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유다인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46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알렸다.
47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48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49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50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51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52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53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54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유다인들 가운데로 드러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그곳을 떠나 광야에 가까운 고장의 에프라임이라는 고을에 가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머무르셨다.
55 유다인들의 파스카 축제가 가까워지자,
많은 사람이 자신을 정결하게 하려고
파스카 축제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56 그들은 예수님을 찾다가 성전 안에 모여 서서 서로 말하였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축제를 지내러 오지 않겠소?”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주님,
저희가 속죄와 단식으로 마련한 예물을 받아 주시어
주님의 은총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소서.
우리 주 …….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인류의 구원을 이루신 성자의 수난으로
온 세상이 주님의 위대하심을 찬미하게 되었으니
십자가의 무궁한 힘으로
성자의 권능과 세상 심판이 드러났나이다.
그러므로 주님, 모든 천사와 성인과 함께
저희도 주님을 찬양하며 환호하나이다.

영성체송

요한 11,52 참조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그리스도 죽음에 넘겨지셨네.

영성체 후 묵상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주님, 엄위하신 주님 앞에 엎드려 비오니
저희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살과 피로 기르시어
그 신성에 참여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주님,
기도하는 교회에 자비를 베푸시고
주님께 마음을 두는 이들을 인자로이 돌보시어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구원하신 이들이
다시 죄에 빠져 불행을 겪지 않도록 지켜 주소서.
우리 주 …….
사진설명: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연중 제5주간 토요일

 

인생은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인생이 종착역이라면 고통 중에 있는 사람, 억울한 사람, 아픈 사람, 가난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을 겁니다. 인생이 종착역이라면 불의하게 죽은 사람, 억울하게 죽은 사람, 피지 못하고 죽은 사람, 사랑도 못 해 보고 죽은 사람에게는 가슴 아픈 일이 될 겁니다. 우리 인생의 종착역은 하느님의 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종착역을 향해서 떠났던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가족을 사랑했고, 대학 교수로 정년 퇴임한 형제님은 아내가 믿는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안타깝게도 형제님은 이제 편안히 노후를 보내려고 했는데 그만 이 찾아왔습니다. 병세가 심해지면서 저는 형제님을 방문했고, 천주교 교리를 말씀드린 후에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형제님은 믿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형제님께 레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형제님은 생일에 맞추어서 레오라고 정했다고 합니다. 형제님은 이 세상 소풍 끝나가는 날, 저를 찾았습니다. 저는 병자성사를 드렸고, 성체를 모셔드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모신 성체가 형제님을 하느님의 품인 종착역으로 잘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두려운 것 중 하나가 무엇일까요? 아마도 끝, 종착역, 마지막이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시 바라보려고 합니다. 기차 여행을 떠올려 봅니다. 긴 여정을 가는 동안 우리는 많은 간이역을 지나갑니다. 어떤 역에서는 내릴 준비를 하고, 어떤 역에서는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때로는 실패하고, 다시 일어나고, 새로운 길을 가고, 인생의 모든 과정이 하나의 간이역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삶의 고난 속에서 "여기가 끝인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보면,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작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많은 사람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 이제 끝이구나. 모든 것이 끝났다." 하지만 그 십자가가 종착역이었습니까? 아니죠. 오히려 십자가는 새로운 생명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두려워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 십자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었구나!" 우리는 종종 인생에서 시련을 겪을 때, "이제 끝이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이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야." 우리 삶에도 십자가가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로 고통받을 때, 관계에서 상처받고 외로울 때, 꿈이 좌절되고, 길이 막힐 때, 이럴 때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요?"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부활로 이어졌듯이, 우리의 십자가도 새로운 출발의 간이역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으시고 끝까지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인생의 어려운 순간들을 지나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의 간이역을 지날 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요? 첫째, 머무름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차가 간이역에 잠시 멈추듯, 우리도 삶에서 멈추어야 할 순간이 있습니다. 바쁘게 달려가기만 하면 하느님의 뜻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하면서 "주님, 제가 어디로 가야 할까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둘째, 새로운 길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간이역에서 우리는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은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새로운 사명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셋째, 십자가를 희망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고통이었지만, 동시에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힘든 순간이 있을 때, 그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사랑과 희망의 시작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은 종착역이 아닙니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에서 여러 간이역을 지나고 있습니다. 어떤 역에서는 기쁘고, 어떤 역에서는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십자가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믿으며 살아갑시다. 우리가 지나가는 삶의 모든 간이역에서,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우리를 새로운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맙시다.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든,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께서 준비하신 또 다른 시작점이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놀라운 겸손의 덕이요 자기 낮춤!


수석 사제들과 대사제, 바리사이...이들은 예수님 시대 당시 사회를 주름잡던 최고위층 인물들이었습니다.
비록 로마 식민 통치하에서 제한된 권력을 지녔지만, 그래도 당시 실세요, 권력의 핵심부에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 대사제 카야파가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의회를 소집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국회 본회의가 소집된 것입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오직 한 사람 예수님 때문이었습니다.


백성들 앞에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은 유다 고위층 인사들에게 눈엣가시같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에게로 향해야 할 백성들의 시선과 관심, 박수갈채가 하루아침에 예수님에게 집중되니,
분노가 치밀고 열불이 가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래 예언자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예언자도 보여주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과 표징들을 밥 먹듯이 일으키니,
수많은 유다인들이 그를 따라다니고, 제자단에 가입하고, 그를 구세주로 고백하니,
미치고 환장하고 펄쩍 뛸 일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유다 최고위층 인사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소집한 것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던 그해의 대사제 카야파는 고민 끝에 한마디 하는 데,
묘하게도 그의 말이 예수님의 운명을 정확하게 예견하는 말이었습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을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카야파는 자기 생각으로 위 발언을 한 것이 아니라, 엉겁결에 그해의 대사제로서 정확하게 예언한 것입니다.
대사제 카야파의 이 발언에 동조한 그들은 그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이 지어 만드신 피조물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다는 것,
참으로 납득하기 힘든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반역이요 천부당만부당한 비극입니다.


이 모든 자초지종을 다 지켜보셨고,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아버지의 크신 계획과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견뎌내시고 참아내십니다.
억울한 누명과 참혹한 죽음조차 기꺼이 수용하시고 이겨내십니다.
놀라운 겸손의 덕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 홀로 돌아가심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양승국 스테파노신부님


/ 출처 : 살레시오회 내리 피정센타 이야기


3. 이영근 신부 강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에제키엘 37,21ㄴ-28    요한 11,45-56

 

<‘온 백성을 위한 대속’>

 

지금 우리는 사순시기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는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사건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이 결정적인 사건이 어떻게 해서 벌어지게 되는지 그 단초를 제공해줍니다.

곧 유다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죽이기로 결정한 사건을 전해줍니다. 

이 일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가시던 중, 채 도달하기도 전에 벌어진 사건입니다. 

 

곧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엠마오에서 라자로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의 표징’, 곧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표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표징이었습니다. 

 

이를 본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어떤 이들이 이를 예루살렘에 있는 유다 지도자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 지도자들이 민심이 동요된 것을 두려워하여 최고 의회(산헤드린)를 열고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은 메시아가 와서 다윗 왕조를 회복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재건하리라고 여겼고, 이러한 사실은 로마제국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당시의 기득권을 갖고 있던 종교도자들에게도 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결정 과정이 참으로 묘합니다.

바로 그 결정 과정을 통해서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해의 대사제였던 가야파의 입을 통해 밝혀줍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이는 예수님의 죽음이 ‘온 백성을 위한 대속’임을 밝혀줍니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요한 11,52)임을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이는 '가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것'(요한 11,51)이었습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묘하게도 기회주의자인 가야파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주십니다.

그리하여 유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백성들을 예수님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다리며 파스카를 준비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이 사순시기의 막바지에서 예수님의 파스카를 기다립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준비해야 할까요? 

 

주님!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시며, 제가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제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제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시며,

제가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강론

 

2025.4.11.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무지에 대한 답은 예수님뿐이다”

 

“그지없이 사랑하나이다.

 하느님 내 힘이시여.”(시편18,2)

 

새벽 뉴스를 보니 옛 안동교구장이셨던 두봉주교님이 뇌경색으로 쓰러지신후 어제 4월10일 오후 7시47분

종부성사를 받으신후 “감사하다”란 임종어를 남기고 선종하셨다는 소식입니다.

참으로 무수한 전설적 일화를 남기며 기쁘고 자유롭게 성인처럼 사셨던 주교님이셨습니다.

 

자타가 인정하는 명품종교가 천주교입니다.

천주교의 유구한 전통과 미사전례, 그리고 성인들이 명품종교를 이루는 조건입니다.

그러니 천주교를 깊이 잘 믿으면 말그대로 명품신자, 명품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어제 선종하신 두봉 주교님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명품주교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로운(ever old, ever new)’, 늘 살아 있는 명품종교가 천주교입니다.

특히 미사전례 시작시, 끝기도 시작하면서 바치는 고백기도는 ‘무지의 해소’에 얼마나 기막힌 처방인지요!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고백하오니,

 생각과 말과 행위로 죄를 많이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나이다.”

 

곧 이어지는 가슴을 세 번 치며 바치는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제 탓이요” 말마디는,

우리 무지의 벽을 깨버리고 온유와 겸손에 이르게 하는 참으로 기막힌 말마디입니다.

자기를 아는 겸손이 지혜인데 바로 이런 진정한 참회가 무지의 벽을 허물고 자기를 아는 참 겸손과 지혜에

이르게 합니다. 

 

무지로 인해 극단의 광신, 맹신에 빠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 지요! 정말 광신과 맹신의 무지에는

백약이 무효요 답이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래서 기계는 고쳐쓸 수 있어도 사람은 고쳐쓸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순시기 성무일도 중 하루를 여는 초대송은 평생 화두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닫힌 마음, 무지로 굳어진 마음을 활짝 열라는 것이요, 열린 마음, 열린 정신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 마음의 병중의 병이 무지의 병입니다. 무지의 죄, 무지의 악, 무지의 병입니다.

정말 무지한 이들은 알려줘도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무지에 눈이 가려 살아가는 지요!

이래서 가장 쉬운 것이 남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입니다. 

 

바로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복음의 예수님의 고립무원, 사면초가의 상황이 흡사합니다.

흡사 무지의 악인들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무지에 악에 휩싸인 예레미야 예언자의 외침입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빔이 지나간다!”

 

예레미야가 자주 마고르 미싸빔, 곧 ‘사방에서 공포가!’를 외쳤기에 그에게 이 표현을 별명으로

붙여주었을 것입니다. 거대한 악의 세력에 포위된 예레미야는 좌초되거나 좌절됨이 없이

하느님을 고백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  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둟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고백기도에 이어 즉각적으로 터져 나오는 예레미야의 주님께 대한 찬양고백 노래기도입니다.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자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그러니 우리 수도자들이 평생 하루하루, 날마다, 끊임없이, 한결같이, 바치는 찬양과 감사의 성무일도가

무지의 벽을 허무는데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습니다.

악마들이 질색하는 것이 하느님 찬양과 감사의 노래기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적대적인 일부 유다인들은 아마도 지도층 인사들이자

일부 과격한 광신도들이었을 것입니다.

무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몰라보고 하느님을 모독한다 돌을 던지려 합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의 간곡하고 절박한 호소이지만 무지한 이들에게는 우이독경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나를 믿지 않아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 대한 두 부류의 반응입니다. 무지에 눈먼이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유식한 무지한 유다 지식층 사람들이요 무식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역설적 현실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함께 하지 않음은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문득 세기의 현자,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웠던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에 대한 그레고리와 교황의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유식한 분이시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었고, 지혜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

 

유식과 무식이, 지혜와 무지가 역설적 일치를 이뤘던 베네딕도 성인은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롭기가

예수님을 많이도 닮은 분이었습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무지의 어둠을 몰아 내시어 주님의 참 겸손과 지혜의 빛에 이르게 하십니다.

 

“주님은 내 등불을 밝혀 주시고,

 당신은 내 어둠을 비추시나이다.”(시편18,29). 아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출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4/12(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되새김 구절

 

1.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우리 인생의 여정에서, 주님께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십니다. 끝이라고 생각하는 그곳에서,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조재형 신부)

 

2. 이 모든 자초지종을 다 지켜보셨고, 다 알고 계셨던 예수님이시지만, 아버지의 크신 계획과 뜻에 순명하는
마음으로, 묵묵히 견뎌내시고 참아내십니다.
억울한 누명과 참혹한 죽음조차 기꺼이 수용하시고 이겨내십니다.
놀라운 겸손의 덕이요 자기 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유는 당신 홀로 돌아가심을 통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양승국 신부)

 

3.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제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제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시며,

제가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4. 예수님께 대한 두 부류의 반응입니다. 무지에 눈먼이들과 달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유식한 무지한 유다 지식층 사람들이요 무식한 지혜로운 사람들의 역설적 현실입니다.

지식과 지혜가 함께 하지 않음은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문득 세기의 현자, 참으로 겸손하고 지혜로웠던 하느님의 사람,

성 베네딕도에 대한 그레고리와 교황의 평가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유식한 분이시면서도 무식한 사람이 되었고, 지혜로운 분이시면서도 무지한 사람이 되기 위해

은둔하셨다.”(이수철 신부)

 

4/12(토)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요한 11,50)

 

주님!

겉치레 속에 교묘히 가리고 있는, 제 불신의 껍질을 벗겨 내소서.

신앙의 겉꾸밈 뒤에 감추고 있는, 제 허영과 자애심을 끊어내소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기고 있는, 제 위선을 몰아내소서.

빛을 비추시어,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어리석음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당신의 생명이 자라고 당신의 영이 흐르게 하시며,

제가 오늘 타인을 위하여 죽고 타인을 대신해서 죽을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12일(토) 7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