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묵]2025년 4월 14일 월요일[(자) 성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매묵]2025년 4월 14일 월요일[(자) 성주간 월요일]/신부님 강론 4개
입당송
주님, 저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저와 싸우는 자와 싸워 주소서. 둥근 방패 긴 방패 잡으시고 일어나 저를 도와주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여.
본기도
저희가 나약하여 힘겨워하는 모습을 굽어보시고
외아드님의 수난으로 다시 생기를 얻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
제1독서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42,1-7
1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
2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3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4 그는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마침내 세상에 공정을 세우리니
섬들도 그의 가르침을 고대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펼치신 분
땅과 거기에서 자라는 온갖 것들을 펴신 분
그곳에 사는 백성에게 목숨을, 그 위를 걸어 다니는 사람들에게 숨을 넣어 주신 분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6 “주님인 내가 의로움으로 너를 부르고 네 손을 붙잡아 주었다.
내가 너를 빚어 만들어 백성을 위한 계약이 되고
민족들의 빛이 되게 하였으니
7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화답송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시다.
○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
○ 악인들이 달려들어 이 몸 삼키려 해도,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 ◎
○ 나를 거슬러 군대가 진을 쳐도, 내 마음 두렵지 않으리라. 나를 거슬러 전쟁이 일어나도, 그래도 나는 안심하리라. ◎
○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
복음 환호송
○ 저희 임금님, 경배하나이다. 당신만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나이다.
(◎ 그리스도님,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복음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2,1-11
1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2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3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4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5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7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8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9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10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11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예물기도
저희가 바치는 이 거룩한 제사를 자비로이 굽어보시어
저희를 의롭게 하시려고 마련하신 이 제사로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우리 주 …….
감사송
거룩하신 아버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저희 도리요 구원의 길이옵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영광스러운 부활의 날이 가까이 왔나이다.
옛 원수의 교만을 꺾어 승리한 구원의 성사를
새롭게 거행하는 축제가 다가왔나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님 앞에서 천사들의 군대가 영원히 기뻐하며
주님의 위엄을 흠숭하오니
저희도 환호하며 그들과 소리를 모아 주님을 찬미하나이다.
영성체송
곤경의 날에 당신 얼굴 제게서 감추지 마소서. 당신 귀를 제게 기울이소서. 제가 부르짖을 때, 어서 대답하소서.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거룩한 신비에 참여한 주님의 백성을 지켜 주시어
자비로이 베푸신 영원한 구원을 길이 간직하게 하소서.
우리 주 …….
백성을 위한 기도
비천한 이들을 언제나 지켜 주시고
주님의 자비를 믿는 이들을 보호하시어
육신의 재계를 지키며
더욱더 깨끗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게 하소서.
우리 주 …….
오늘의 묵상
1.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강론
성주간 월요일
오늘, 우리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질문 하나를 함께 나눠보려 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진실이냐, 질서냐?” 여러분, 진실은 언제나 좋은 걸까요? 네, 좋은 것이죠. 그런데 진실이 드러날 때 항상 평화롭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큰 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그동안 유지해 오던 질서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진실보다는 질서가 중요하다.” “조용히 넘어가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그렇게 살아도 될까요? 역사를 보면 이 질문이 얼마나 무겁고 깊은지 알 수 있습니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했습니다. 그의 죄는 단 하나, 진실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시대의 질서를 흔드는 말을 했기 때문에, 아테네는 그를 죽였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율법과 전통, 종교적 권위가 유지하고 있던 질서 앞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진리를 말씀하셨지만, 그 진리가 당시의 종교적 질서를 흔들었습니다. 당시 지도자였던 가야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그리고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사람을 가만두면 로마가 오히려 우리를 무너뜨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진실은 질서를 흔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실을 숨기려 합니다. 현대의 역사에서도 이런 일은 반복되었습니다. 20세기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독재 아래에서, 독일의 교회와 시민들은 대부분 침묵했습니다. 그런데 그 침묵 속에서 일어난 건 무엇이었습니까? 강제 수용소, 유대인 학살,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와중에 한 신학자가 진실을 말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결국 그는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질서를 넘어서 진실을 따랐던 사람,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재판을 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악은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라난다.” 그녀는 이걸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가 질서라는 이름 아래, 아무 생각 없이 침묵하고 따를 때, 그 속에서 악이 자라고 있다는 것입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기억합니다. 그 진실은 오랜 시간 숨겨졌고 왜곡되었습니다. 그 당시 권력은 말했습니다. “질서를 위해서 진실은 묻어두자.”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진실이 드러났고, 우리는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질서’를 위한 삶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실’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진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때로는 그 진리가 우리 삶의 안정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 진리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실을 외면한 질서는 언젠가 무너지고 맙니다. 그러나 진실 위에 세워진 질서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우리 각자에게 물어보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삶 속에서 진실을 따라 살고 있는가? 혹은 눈감고 진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때로는 나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가족에게, 공동체 안에서, 불편한 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가?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침묵’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말하는 진실입니다. 그 진실은 아프지만, 그 진실이 우리를 살리고, 그 진실이 하느님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이제 우리 모두, 진실 앞에 서서,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은 아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실이 우리를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진실로 새 질서를 세우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2.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25년 다해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기름을 준비한다는 뜻은?
오늘 복음에서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께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발라
드립니다. 2~3천만 원 상당의 상당히 고가인 향유입니다.
이것을 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요한은 이렇게 주석을 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 아끼는 사람이 이웃을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요? 형제를 사랑하려면 부모를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형제 사랑은 반란이나 저항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먼저 봉헌하는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예수님은 베타니아의 마리아가 하는 행위가 당신 장례에 대한 준비라고 하십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운명은 자살이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골고타에서 견딜 수 있었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됩니다. 이는 마리아가 예수님 살아생전에 미리 그분의 죽음을 내다보고
기름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그 누군가의 죽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12세기 중반 영국에서, 헨리 2세와 토머스 베킷은 둘도 없는 친구였습니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며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이들은 마치 형제와 같았습니다.
헨리 2세가 영국의 왕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신뢰하던 친구 베킷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습니다. 그는 베킷이 자신을 위해 교회를 통제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베킷은 주교가 된 후 변했습니다. 왕의 친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종으로서 교회를
보호하는 임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왕은 이에 분노했습니다.
"누가 저 말썽쟁이 사제를 내 앞에서 없애주지 않겠느냐?"
헨리 2세가 이 말을 화난 상태로 내뱉자, 충성스러운 기사 네 명이 그것을 왕의 명령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170년 12월 29일, 이 기사들은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찾아가 베킷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유럽을 충격에 빠뜨렸고,
교회는 베킷을 순교자로 인정하여 성인으로 추대했습니다.
문제는 그 후였습니다. 베킷의 죽음을 사실상 묵인한 헨리 2세는 마음의 평화를 잃고
양심의 고통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영국과 교회, 그리고 온 유럽의 비난 속에서 결국 헨리 2세는
참회의 표시로 맨발로 걸으며 베킷의 무덤이 있는 캔터베리 대성당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 안으로 들어설 때조차 마음의 평화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가 묵인한 베킷의 죽음이 그를 교회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보이지 않는 장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대성당 밖에서 무릎을 꿇고, 수도사들을 시켜 매질과 회초리를 맞으며
통곡하며 회개해야 했습니다.
그러자 교회와 영국 시민들도 그를 다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장례를 위해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 죽음을 긍정한다는 뜻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긍정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분께 영광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는 그분이 부활하심을 견뎌낼 수 없는 양심의 가책으로 남았습니다.
베드로도 생각해봅시다. 베드로는 어땠나요?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실 때
다 외면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돌아왔고 유다는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기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래도 예수님 살아생전에 그분을 위해 분명히
기름을 준비하였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분과 함께 죽겠다고 다짐하였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긍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성당에서 십자가가 사라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위해 왜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 시대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이것을 기억합시다.
내가 누군가의 죽음을 묵인했는데, 그 누군가를 높여주는 세상에서는 함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전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아닌 유다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경하는 찬미의 기름을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출처 : 순전한 가톨릭 (Mere Catholicism)

3. 이영근 신부님
2025년 다해 성주간 월요일
요한 12,1-11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의 라자로와 마리아와 마르타 집에서 벌어졌던 잔치 중에 있었던 일을 전해줍니다.
마리아는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습니다.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메시아의 도유나 집주인의 환대를 나타내지만, 발에 기름을 붓는 것은 장례를 준비하기 위한 행위를 드러내줍니다.
그리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아드리고 향유를 발라드린 것은 그의 헌신적 사랑과 존경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침내 온 집안에는 그 향기가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이스카리옷 유다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지 않는가?”
(요한 12,5)
그 향유의 금액을 삼백 데나리온에 해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다고 하니, 이는 일 년 치 임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작은 돈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요한 12,7-8)
유다는 향유를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 여겼지만,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곧 떠나시게 될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그보다 더 비싼 향유가 있었더라도 그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랑은 본래 비효율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경제적 효율성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랑은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주며, 죽기까지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는 신앙인이라 해서 크게 다르지 않는 듯합니다.
참으로 정신 똑바로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우리 삶의 잣대는 무엇인가?
사부 성 베네딕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보다 아무 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지니”
(규칙서 4,21)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을 섬기는 것에 앞세울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리기에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의 생각을 품고, 하느님의 말씀으로 행동해야 할 일입니다.
따라서 어떤 처신을 할 때에는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하고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 12,3)
주님!
옥합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도록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2025.4.1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루카19,28-40 이사50,4-7 필리2,6-11 마르14,1-15,47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가?
“참사람의 모범”
오늘은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는 10일 대선 캐치프레이즈로 “진짜 대한민국”을 내 걸었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말씀을 토대로 “진짜 예수님은 누구인가?”를 밝혀
영원한 참 사람의 모범으로 삼고자 합니다.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진짜 예수님을 닮는 일이야 말로 믿는 이들 누구나의 필생의 과제입니다.
잠시 나누는 옛 현자의 지혜입니다.
“재물 앞에서 구차하면 비굴한 삶을 산다.
고난을 두려워하면 실패조차 하지 못한다.”<다산>
“재물 앞에서 구차하게 구하지 말고, 고난 앞에서 구차하게 피하지 마라.”<예기>
재물 앞에서 참으로 초연했고 오늘 수난기에서 보다시피 고난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겪어내신 참사람 예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평생 닮아야 할 분, 진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오늘 주님 수난 성지 주일 말씀 배치대로 자연스럽게 밝히려 합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임금”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시 환히 드러난 예수님의 진면목인 참 임금입니다.
겸손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인간 품위의 전형 참 임금 예수님입니다.
우리 역시 참 왕답게 존엄한 품위의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배웁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임금님은 복되시어라.’
하늘에 평화, 지극히 높은 곳에 영광!”
평화와 영광의 예수님이심을 고백하는 제자들을 꾸짖으라는 바리사이들이
경박한 조언에 예수님의 즉각적 반격이 참 통쾌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이 잠자코 있으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
참 임금이신 예수님을 소리 높여, 마음을 다해 고백하라는 말씀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들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은 우선 하느님의 제자직에 충실한 분이었습니다.
이사야서 주님의 종은 고백은 그대로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열어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
잘 귀기울여 듣기 위한 침묵입니다. 주님 말씀을 잘 듣는 경청 역시 주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비움의 사람”이었습니다.
일상에서 겪는 크고 작은 어려움을 모두 비움의 계기, 겸손의 계기,
순종의 계기로 삼는 것이 예수님을 닮아 덕으로 나가는 첩경의 지름길입니다.
필리피서 찬가의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니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셨습니다.
넷째, 예수님의 “사랑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를 그대로 보여 주신 예수님입니다.
바로 수난기를 시작하면서 참 좋은 영원한 선물인 성찬례를 남겨 주셨습니다.
공동체 건설에 영원한 평화와 일치를 위한 사랑의 선물로 성체성사 미사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이는 너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평생 주님의 성체를 모심으로 주님의 힘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즉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주님과 하나되어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다섯째, 예수님은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군림하거나 권세를 부리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셨습니다.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 식탁에 앉은 이냐, 아니면 시중들며 섬기는 이냐?
식탁에 앉은 이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
가장 낮은 섬김의 중심 자리에 바로 예수님께서 섬기는 사람으로 계십니다.
참 영성의 영원한 표지가 “섬김”이요, “섬김의 여정”을 살아갈 때 그대로 예수님을 닮습니다.
여섯째, 예수님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왕다운 삶의 품위의 기반은 하느님과 사랑과 생명의 소통인 기도입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항구히, 절실히, 바치는 기도여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삶은 기도로 요약됩니다. 기도에서 들음도 사랑도 비움도 섬김도 나옵니다.
예수님의 감동적인 기도 사례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고백합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
진짜 참사람 의인 예수님이심을 고백한 백인대장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거울에 “있는 그대로” 반사되어 드러나는 모습들 같습니다.
“호산나!” 환호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폭도로 돌변합니다.
무수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군상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예수님을 닮아 왕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처럼
한결같이, 끝까지,
영원한 청춘으로, 영원한 현역으로,
들음의 사람, 섬김의 사람, 사랑의 사람, 비움의 사람, 기도의 사람으로
참으로 왕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아버지의 자녀답게,
살아가기 위해 분투의 노력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부족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아멘

4/14(월) [(자) 성주간 월요일], 되새김 구절
1. 디트리히 본회퍼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진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질서를 지키기 위해 눈을 감는 순간,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결국 그는 히틀러 암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질서를 넘어서 진실을 따랐던 사람,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또 다른 한 사람,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전범 재판을 보며 이런 말을 남깁니다. “악은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생각 없이 명령에 복종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라난다.” 그녀는 이걸 ‘악의 평범함(Banality of Evil)’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모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의 진실로 새 질서를 세우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조재형 신부)
2.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렸던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 전혀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마리아가 아닌 유다의 운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죽음을
공경하는 찬미의 기름을 준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전삼용 신부)
3. 우리 시대에는 사랑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가 으뜸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사랑과 생명의 가치를 넘어서 버린 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와 재물이 일종의 신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 12,3)
주님!
옥합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도록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이영근 신부)
4. 오늘 예수님의 수난 현장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 거울에 “있는 그대로” 반사되어 드러나는 모습들 같습니다.
“호산나!” 환호하던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폭도로 돌변합니다.
무수한 긍정적 또는 부정적 군상들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할 것입니다.
과연 나는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예수님을 닮아 왕다운 품위의 사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이수철 신부)
4/14(월) [(자) 성주간 월요일], 오늘의 기도
복음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오늘의 말 · 샘 기도>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렸다.'
(요한 12,3)
주님!
옥합을 깨뜨리듯 제 자신을 부수고, 부서질수록 사랑의 향기 짙어가게 하소서.
향유를 쏟아 붓듯, 내 발에 쏟아지는 사랑을 보게 하소서.
제 영혼에 새겨진, 사랑의 숨 가쁜 소리를 듣게 하소서.
온 집안에 가득한, 감미로운 사랑의 향기에 내내도록 취하게 하소서.
온통 당신의 숨결이 배인, 이 집안을 사랑하게 하소서.
그 사랑의 향기 뿜어대는 당신 마음 닮아가게 하소서.
아멘.
- 2025년 4월14일(월) 6시 -